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85)
을 위한 세계는 없다-285화(285/817)
〈 285화 〉 꿈의 끝, 현실의 일. (8)
* * *
***
“시작은 귀쟁이 검법이냐?”
파순이 혓바닥을 놀리는 것과 동시에, 여명의 검이 나무뿌리처럼 구불구불한 궤도를 그렸다.
마나가 거의 담기지 않았음에도, 검은 빠르게 녀석의 머리를 노렸다.
그러나 파순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검에 맞춰 손을 뻗었다. 맨손으로 검을 막으려고? 아니, 주먹이 아닌 활짝 펼친 두 손바닥이 검의 궤도와 정확히 맞물렸다.
그렇게 손바닥과 검이 만나기 직전, 녀석은 손바닥을 검과 수평으로 세우며 아주 살짝 마나를 뿜어냈다.
그대로손바닥 위에서 미끄러지는 검.
찰나의 순간 속에서, 여명은 검을 휘두르던 힘에 끌려 균형을 잃었다.
파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밀어낸 자세 그대로 오른발에 힘을 주고, 몸을 회전시켜 왼발을 휘둘렀다.
간단한 뒤돌아 차기. 하지만 그 속도는 여명이 검을 회수하는 속도를 한참이나 앞서 있었다.
여명이 목은 물론이고 허리까지 뒤로 젖혔으나,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게 고작일 정도.
그마저도 완전히 피하진 못해서, 발끝이 스친 턱 끄트머리가 후끈거렸다.
뒤늦게 검을 회수한 여명은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파순은 이미 뒤로 훌쩍 물러난 뒤였다.
탁 검의 거리 바깥에 내려선 파순은 다시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보는 것, 움직이는 것, 생각하는 것… 넌 마나에 너무 많이 의지해.”
“….”
“뭐, 물론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긴 하지. 넘치는 마나에, 보는 것만으로도 무술을 이해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너처럼 했을 거야. 근데… 앞으로는 그러면 안 돼.”
훈수를 두는 노인네 같은 말투. 파순은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건 말건 계속 지껄였다.
“봐, 마나를 쓰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마자 약점이 드러나잖아?”
“…고작 그런 소리 하자고 이렇게 마나가 막힌 공간을 만들어낸 거냐?”
“고작이라니. 이게 다 얼마짜리인지 알아? 그렇게 말하면 방에 뿌려 놓은 독이랑 마법진이 서운해한다?”
“….”
파순은 사장실 내부에 감각을 뒤트는 구더기 공주의 독, 혹은 그것과 비슷한 종류의 독과 마법진을 준비해놨다는 걸 순순히 시인했다.
‘진짜로 날 죽이기 위해 준비한 함정…’
여명은 잠시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문뜩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파순의 발차기에는 마나가 실려있지 않았다.
“설마… 너도 중독된 거냐?”
“응? 당연하지.”
“….”
뭐 이런 멍청한 새끼가 다 있냐는 듯 바라보자, 파순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아니, 세계수 결정을 처먹고 주가시빌리를 익힌 너랑 같이 마나를 사용하면서 싸우면 필패잖아. 차라리 둘 다 마나 없이 싸우는 게 낫지.”
“왜, 기교만으로 싸우면 이길 것 같아서?”
“에이, 내가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가르침을 주려면 이편이 낫거든.”
여명은 그냥 폭탄을 꺼내 사장실을 통째로 날려버릴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이 길어지기 전에, 파순이 금고를 뒤져 짧은 검을 꺼내 들었다.
여명이 들고 있는 산의 눈물만큼은 아니었지만, 드워프 금고에 들어있던 만큼 꽤 고품질의 검.
곧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찰칵, 하는 소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검법으로 하자고.”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허리를 쭉 펴고, 왼발은 뒤로, 검을 쥔 오른손은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플레이어게 훔친 검법.
“구궁검인가? 별걸 다 익히고 있네.”
파순은 그렇게 말하며 한걸음, 가볍게 내밀었다. 콰직 바닥에 굴러다니는 콘크리트 조각을 밟는 소리와 동시에, 녀석의 몸이 가속했다.
마주 보는 눈동자, 끊어지는 호흡, 번쩍이는 검.
여명의 어깨가 흐릿해졌다. 달려드는 것은 파순이 먼저였으나, 긴 팔을 이용해 선공을 잡은 건 여명 쪽이었다.
직후, 두 사람 사이에서 금속과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나가 없어서 공기를 뒤흔들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살벌한 소리.
채재재쟁! 언뜻 악기 소리에 가까운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파순이 지껄였다.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하고, 떨어지는 나뭇잎은 바람을 보지 못한다.”
무술서의 한 구절일까? 아니면 어떤 무술의 진의일까. 호흡이 거칠어지는 와중에도 녀석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하지만 물고기는 물의 깊음을 알고, 나뭇잎은 자신의 추락을 아는 법.”
파순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내려쳤다. 잠수하는 물고기처럼 유려하면서도, 떨어지는 낙엽처럼 혼란스럽게.
!
마나가 없어도 검을 쥔 손잡이가 떨릴 정도로 묵직한 일격.
“스스로 그 속에 있다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음이라.”
그제야, 여명은 그게 어떤 특정 무술의 가르침이 아닌, 무술 전반을 꿰뚫는 이치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깨달았다고 해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모를 때보다 조금 더 정확하게 파순의 검을 볼 수 있을 뿐.
챙 !
여명은 정확하게 떨어지는 검을 막아냈다. 검을 쥔 손아귀가 부르르 떨리는 가운데, 파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구름은 눈의 새하얌은 알아도 그 깊이와 차가움은 알지 못한다. 어째서인가?”
미소를 따라 파순의 검이 횡을 그린다. 막아내는 여명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튀고, 땀방울은 휘두르는 검에 잘려 두 동강 난다.
일순간 정지하는 호흡, 근육을 채우는 젖산, 무겁게 파순을 쫓는 검.
“눈의 본질은 오직 눈과 같은 땅을 밟는 자만이 알 수 있음이니, 이것이”
챙! 횡으로 휘어지는 여명의 검과 파순의 검이 수평을 이뤘다.
번쩍이는 검광이 지나간 자리로, 여명의 검은 금발 머리카락 몇 가닥을, 파순의 상의를 베고 지나갔다.
“수직과 수평.”
여명의 대답, 파순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정답.”
“….”
“정확히는 열 십(?)자의 이치라고 하는데… 뭐, 뜻만 통하면 됐지. 안 그래?”
여명은 대답 대신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파순은 그제야 볼이 베였다는 걸 눈치채고는 볼을 문질렀다.
그녀가 손바닥을 확인해보니, 드문드문 피가 묻어 있었다. 얕게나마 여명의 검이 얼굴을 벴다는 증거.
“깨닫는 것과 동시에 검에 이치를 담았다… 역시, 안 하는 게 아니라 몰라서 못 하는 거였구나?”
“….”
여명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혼자 알아서 나불거리며 깨달음을 준다는데, 괜히 떠들어서 망칠 필요는 없었으므로.
파순은 그런 침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금고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자,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네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
파순은 손가락 두 개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첫째, 마나로 부족함을 때운다. 둘째, 무술의 이치를 익히지 않고 훔친 기술로만 싸운다.”
“….”
“뭐, 여태까지는 별문제 없었겠지. 막대한 마나에, 훔친 무술만 펼쳐도 앵간한 녀석들은 상대도 되지 않았을 테니… 근데, 앞으로는 그러면 안 돼. 자신만의 진의를 세운 순간부터, 그런 꼼수는 독이나 다름없거든.”
“…독?”
“진의를 오염시키는 독.”
거기까지 말한 파순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여명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걸 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진의가 뭔지 모르겠지만, 진의를 세운 순간부터 너는 너만의 길을 개척하는 개척자이며, 그 길을 걷는 순례자고, 길을 남기는 대종사다. 그런 사람이 지름길로 가는 꼼수를 쓰면 어떻게 되겠냐?”
“…길이 망가지겠지.”
“그래, 내 말이 그거야.”
쉬운 비유는 아니었지만, 가슴에 뭔가 꽂히는 게 있었다.
여명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갈림길을 선택하는 대신, 길의 중간을 걷겠다던 코르부스의 말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어쩌면, 그게 코르부스만의 진의는 아니었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아카데미에서부터 그에게 자신의 진의를 베푼 것이다.
단지, 여명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어쩌면 코르부스는 여명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 걸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명이 갈림길의 인도자가 아닌, 구도자인 이유가 바로 그것…
그때, 파순이 쿵쿵 금고를 두들겨 여명의 생각을 끊었다.
“야, 임마, 지금 무아지경에 빠질 때냐?”
“….”
여명은 고개를 들고 똑바로 파순을 바라봤다. 사악한 소녀의 눈을 본 그는 새삼스레 질문을 떠올렸다. 이 마인은 왜 자신에게 이런 가르침을 나눠준 것일까.
“파순.”
“오냐.”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냐? 내가 마왕이 되면 너에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이런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걸까, 파순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썹을 씰룩거리다가 다시 자세를 다잡으며 말했다.
“기왕이면 재밌는 놈이 마왕이 되는 게 좋으니까.”
“….”
“마왕이 태어나는 건 필연이다. 그게 운명이 정한 시나리오니까. 하지만 현재 마왕 후보 중 대부분은 재미없거나, 너무 늙었거나, 그냥 병신들뿐이지. 그나마 마그두가 좀 재밌었는데, 놈은 네가 홀라당 먹어치웠고…”
히죽거리는 파순.
“아,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그게 뭐냐면…”
그 순간, 파순은 벼락처럼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여명은 기다렸다는 듯 칼을 마주 휘둘렀다.
한데, 조금 전과 달리 파순의 검에 실린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검의 속도 자체는 느릿했으나, 그 속에 담긴 힘은 마치 태풍이 날아오는 것처럼 묵직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무술의 이치가 담긴 검.
여명은 마나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저런 기교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동시에, 빠르게 생각을 가속했다.
어떻게 상대하고, 어떻게 파훼할 것인가? 마나도, 훔칠 기술도 없는 이 순간에 꼼수는 없었다.
오직 하나, 모든 걸 가지겠다는 그의 진의만이 마음속에 우뚝 솟아올랐다.
곧이어 진의가 생각을, 생각은 육체를, 육체는 검을 움직인다.
까앙!
검과 검이 충돌한다.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건 여명이었고, 곧 그는 손에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 그는 일부러 검을 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손바닥을 펼쳐, 파순의 검과 수평을 이뤘다.
열 십자의 이치.
하지만 그는 파순처럼 검을 흘려내지 않았다. 이치란 개개인 모두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법이었으니까.
그는 오히려 강하게 검을 후려치는 동시에, 파순의 몸에 어깨를 들이밀었다.
몸통 박치기, 혹은 고법(??)이라 불리는 수법.
마나 없이 체급으로 밀어붙이기에 더없이 적절한 기술이었고, 파순은 그대로 여명의 몸에 치여 균형을 잃었다.
그렇게 쓰러지는 짧은 순간 속에서, 파순은 감탄했다.
벌써 이치를 응용하는 것도 모자라, 검사가 검을 놓는데 망설임이 없다니.
‘역시 운명이 뒤틀리는 이유가 있다니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파순의 몸이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혔다.
***
“왜 안 나오지?”
성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씹었다. 안대에 가려져 있음에도, 여명이 들어간 문을 노려보는 눈빛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에 비해 세티는 평안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망치를 늘어트린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왜 그렇게 조급해? 위험하면 신호 보낸다고 했잖아.”
“호, 혹시, 신호를 보내지 못할 정도로 밀리고 있는 건 아닐까?”
“….”
그럴싸한 말이었으나, 세티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랜 경험에 비춰볼 때, 성녀의 그럴싸한 말에 휘말리면 그 끝이 좋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이어진 성녀의 말은 그런 세티의 생각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녀석이 여명의 몸에 이상한 짓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뭐?”
“그 녀석, 저번에 만났을 때는 분명히 남자였단 말이야! 근데 지금은 여자의 몸으로 온 걸 보면… 분명 뭔가… 그… 음탕한 짓거리를…”
“….”
LA에서 촉수에 반응한 것도 그렇고, 성녀의 머릿속에는 마구니가 들어도 단단히 들은 게 틀림없었다. 세티는 애써 그녀의 말을 무시했…
그런데,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여명이 입고 있던 옷부터가 그렇지 않았나. 꿈에서 막 깨어난 여명의 옷은 너덜너덜했고, 근육질의 상체가 반쯤 드러난 상태 였…
“…들어가자.”
“응?”
“신호가 들렸어.”
성녀가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라고 말하기도 전에, 세티가 망치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쾅! 후려쳤다.
철문이 으그러지며 날아가고, 그 사이로 달큰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잠깐, 이거 독이야.”
구더기 공주에게 당했던 기억 덕분에, 성녀는 화들짝 놀라며 독 보호 축복을 외웠다. 두 소녀의 몸이 녹색의 장막이 생겨나기 무섭게, 세티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성녀 또한 그녀를 따라 사장실로 향했다. 다행히 사장실의 문은 멀지 않았고, 세티는 달리던 속도 그대로 망치를 휘둘러 문을 박살 냈다.
우지끈 고급 원목으로 만든 나무 문이 박살 나며 드러난 사장실의 내부에서는…
“여명! 괜찮…?”
여명과 금발의 소녀가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서로 얼굴에 멍이 든 채 코피를 흘리는 모습이 몹시 야만스러웠으나, 문제는 두 사람의 자세였다.
여명이 바닥에 깔리고, 파순이 그의 몸에 올라타 주먹을 내려치고 있는, 흔히 마운트 자세라 불리는 모습.
“….”
갑작스러운 난입에 당황했는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주먹질을 멈추고 세티를 바라봤다.
세티는 이 상황이 종합 격투기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걸 이해했다. 남녀가 살을 부대끼고 있긴 했지만, 누가 봐도 싸우는 모습이었으니까.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 순간을 오해하겠는가?
물론, 성녀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 쌍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탕!
뒤늦게 달려온 성녀의 리볼버가 불을 뿜고, 마나가 막힌 파순은 속수무책으로 총알에 맞았다.
머리가 아닌 팔뚝을 노린 건 성녀의 마지막 자비였으리라.
“악!”
파순은 여명의 몸 위에서 내려와 바닥을 굴렀다. 녀석은 성녀가 계속 총구를 겨누고 있는 꼴을 보며 빼액 소리쳤다.
“야! 빨리 저년 좀 막아!”
여명은 바닥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왜? 내가 이기면 성녀의 과녁으로 쓴다고 했잖아.”
“시발, 나 아직 안 졌거든?!”
꽁트를 찍던 파순이 다음 총알을 맞지 않은 건, 세티가 아슬아슬하게 성녀를 막아선 덕분이었다.
성녀가 뒤늦게 오해를 깨닫고 ‘그래도 기왕 쏜 거 확실하게 죽이자’고 중얼거리는 사이, 세티가 말했다.
“이게 다 뭐야? 왜 신호도 안 보내고 혼자 이렇게 싸웠어?”
여명은 코피를 닦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싸우게 됐네.”
“….”
세티는 한마디 하려다가, 여명의 입가에 걸린 쓴웃음을 보고 말을 삼켰다. 그리고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허리춤에서 포션을 꺼내 부었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가운데, 묘한 딸기향이 여명의 피부를 타고 흘렀다.
“성녀가 정실 아니었구나? 하긴,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저 몸뚱아리로 아직도 처녀… 악!”
그 꼴을 보고 이죽거리던 파순이 성녀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건 말건, 여명은 세티와 성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저기, 세티? 걱정 끼쳐서 미안, 나도 모르게 흥이 나서…”
“…몰래 클럽 갔다가 걸린 남친처럼 말하지 마.”
“….”
이건 또 무슨 비유지? 클럽은커녕 또래와 함께 춤춰본 적도 없는 여명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성녀와 세티는 각자 싸움의 마무리를 시작했다. 세티는 사장실의 창문을 깨 독을 빼냈고, 성녀는 여명에게 해독 축복을 걸었다.
“야, 나는?”
파순이 총에 맞은 상처를 부여잡고 물었으나, 성녀의 대답은 냉정했다.
“대가리에 총 맞고 싶어?”
그렇게 뒷정리가 끝나고,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파순의 상처에 남은 포션을 부어줬다.
마나를 되찾아 슬금슬금 재생력을 끌어올리던 파순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계집질이나 하고 말이야… 자고로 여자라는 건 젊을 때만 좋지, 나이 들면 괜히 수련에 방해만 된다고…”
성녀가 발끈하며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여명이 먼저 파순의 뒤통수를 때렸다.
“개소리하지 말고, 아까 하던 말이나 계속해.”
“…씁, 무슨 말?”
“나한테 이런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 했잖아.”
“아… 그거.”
파순은 입을 벌리고 무어라 말하려다가, 뭔가 다른 걸 떠올렸는지 세티를 보며 물었다.
“이놈이 여기에 들어오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세티는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30분 정도.”
“그래? 그럼 보면서 설명해도 되겠네.”
보면서 설명해? 여명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가운데, 파순은 깨진 창문 너머, 시카고 방향을 바라봤다.
여명 또한 녀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저편에서 날아오는 무언가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두두두두 익숙한 프로펠러 소리를 뿜어내며 날아오는 그것은… 열 대가 넘는 전투 헬기였다. 그것도 로켓을 가득 장전한 진짜배기 전투 헬기.
“이 심장을 노리는 놈이 우리 고용주인데… 문자 그대로 맛탱이가 간 놈이거든.”
“고용주를 엿 먹이고 싶어서 나한테 심장을 주겠다고?”
“어, 그 녀석이 심장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보고 싶었어.”
파순의 고용주. 잠시 그 단어에 담긴 뜻을 해석하던 여명은, 이곳을 향해 날아오는 헬기에 타고 있는 녀석들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주 방위군의 상징이 새겨진 전투 헬기 위에는, 달걀 껍데기처럼 매끈한 투구를 쓴 괴인들이 타고 있었다.
“저거 설마…?”
뒤늦게 달걀 껍데기를 확인한 세티와 성녀가 입을 벌리자, 파순이 히죽 웃었다.
“심장, 니가 가져야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