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87)
을 위한 세계는 없다-287화(287/817)
〈 287화 〉 삼인행三人行 (2)
* * *
***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 주방위군의 헬기가 섬을 둘러싸던 시점.
브라우닝은 휴대폰으로 시카고의 와인 가게를 검색하고 있었다.
슈테른의 샤토 디켐인가 뭔가 하는 와인을 알아보던 그는 한 병에 850달러라고 적힌 가격을 보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뭔 놈의 포도 주스 가격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브라우닝은 문뜩, 위스키를 나무 냄새나는 비싼 소독약이라 부르던 부관을 떠올렸다.
입가에 길게 걸리는 쓴웃음을 따라 새삼 생각해보니, 술 취향부터 사상까지 뭐 하나 비슷한 게 없던 친구였다.
그래도 군인정신 하나만큼은 잘 맞는 녀석이었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
[지금부터는 저희 주방위군이 관리하겠습니다.]그때, 기계음 섞인 불쾌한 목소리가 브라우닝의 상념을 끊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헬기에서 뛰어내린 주방위군들이 그에게 경례를 올리는 게 보였다.
“…마음대로 하게.”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경례를 받아준 브라우닝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주방위군이라고 나타난 놈들이 하나같이 달걀 껍데기 같은 헬멧을 뒤집어쓰고 있는 까닭이었다.
주방위군 상징 그려진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시카고 컵스 로고가 그려진 것도 아닌 단순한 달걀 헬멧.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잔당 수색을 하겠습니다.]“수고하게나.”
빌딩으로 향하는 주방위군을 보며 브라우닝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찝찝함을 느꼈으나,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일리노이 주지사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 아니, 고작 디자인이 이상한 헬멧을 썼다고 주방위군을 의심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는 다시 와인 가격을 살피며 부관과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후회 섞인 고민이 이어지길 잠시.
…?
브라우닝은 휴대폰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섬의 공기가 변한 탓이었다. 정확히는, 둔간 중공업 빌딩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브라우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걸 시작으로, 섬에 있는 모든 초인들의 시선이 빌딩으로 향했다.
드워프들에게 열심히 얼굴을 팔던 성검과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누워있는 성물지기, 그리고 차원문 주변에 모여있는 초인들까지.
“뒤틀린 마나… 또?”
브라우닝이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두두두두두!
빌딩에서 총성이 터져 나왔다. 주방위군이 총알을 난사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브라우닝은 제발 여기서 일이 끝나길 바랐다. 하지만 총소리가 작아질수록, 뒤틀린 마나는 격렬해지기만 했다.
마치, 주방위군을 잡아먹고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처럼.
“엿 같은 교단 새끼들, 끝이 없군.”
브라우닝이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성질을 내기 무섭게, 빌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건물 외벽과 유리창들이 우르르 박살 나며 검은 무언가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것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뒤틀린 마나를 풀풀 풍기며 꿈틀거리는 생물이 세상에 두 종류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디저트는 괴수냐…”
생긴 것으로 보아 따로 입은 없는 것 같고, 닿는 생명체를 족족 집어삼키는 슬라임 타입의 괴수인 듯싶었다. 빌딩에 들어간 주방위군은… 아마 손쓸 시간도 없이 잡아 먹혔으리라.
순식간에 판단을 끝낸 브라우닝은 도망치는 드워프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성검! 일이다! 비지니스는 그만하고 전투 준비해!”
고개를 돌려보니, 프레아 칸은 오른손에는 성검, 왼손에는 이미 휴대폰을 들고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아마 자국 총리에게 추가 업무를 해도 되냐고 묻고 있는 거겠지.
괴수를 앞에 두고 뭔 짓거리인가 싶었지만, 형식상의 절차라는 건 중요한 법이었다. 특히 성검처럼 강력한 개인이라면 더욱더.
물론, 브라우닝은 보고 따윈 하지 않았다. 그딴 건 펜타곤의 잘난 예언자님과 대행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아공간에서 기관총을 꺼냈다. 그가 가장 선호하는, 성녀의 대물 저격총 탄환보다도 더 큰 구경의 마탄을 분당 700발이 넘는 속도로 갈겨대는 특제 기관포.
물론 그 위력의 대가로 탄창을 두어 번 비울 때마다 총을 통째로 버려야 했으나, 미군에게 기관포 몇 개 정도는 별문제도 되지 않았다.
어쨌든, 브라우닝은 일반 병사는 땅에 거치하고도 반동을 견디는 게 고작인 총을 번쩍 들어 올린 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
…당기려 했다.
하지만 총구가 불을 뿜기 직전에, 어느새 다가온 프레아 칸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브라우닝, 잠깐만.”
또 뭔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빌딩 상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격은 잠깐 미뤄둬. 성녀님께서 아직… 빌딩에서 나오지 않으셨어.”
“…성녀?”
브라우닝은 그제야 빌딩에 들어간 여명과 성녀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괴수에게 잡아먹힌 건가? 그는 가장 먼저 최악의 가능성부터 떠올렸으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성녀와 함께 빌딩으로 들어간 여명이 저런 괴수에게 잡아먹혔을 리 없으니까.
“…성녀는 무사할 걸세.”
“…그걸 어떻게 장담하냐?”
“군인의 감.”
“군인의… 뭐?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내가 들어가서 수색해볼 테니까, 너는 그냥 지원 사격만…”
프레아 칸의 말이 길어지려는 찰나, 브라우닝은 그냥 방아쇠를 당겼다.
***
“제자여,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는 거 아니오?”
창문 바깥을 힐끔거리던 코르부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성물을 들고 성녀와 뭔가 작당질을 벌이던 여명은 가볍게 대답했다.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저러다가 차원문이라도 넘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오?”
“프레아 칸과 브라우닝이 잘해주실 겁니다.”
여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물 아래에서 텅텅텅텅 기관포 소리가 들렸다.
고작 기관포로 빌딩에서 흘러내리는 거대 슬라임을 어쩌나 싶었지만, 곧바로 반응이 왔다.
!!!
입이 없는 슬라임이 내뱉는 비명, 혹은 뒤틀린 마나의 파동.
어지간히도 고통스러운지, 슬라임을 따라 건물 천장이 흔들거리며 가루가 떨어졌다.
생각보다 약한 괴수인가? 코르부스는 살짝 희망을 품고 창문 난간에 섰다.
하지만 곧이어 벌어진 광경은 그녀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콰그그극 콰직!
기관포에 벌집이 되는 와중에도, 슬라임은 빌딩을 통째로 뜯어냈다.
그렇게 외벽과 기둥, 철근과 유리를 가리지 않고 빌딩을 박살 낸 녀석은 그대로 뜯어낸 잔해를 몸 안으로 빨아들였다.
마치 건물을 통째로 잡아먹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콘크리트와 철근은 소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슬라임 내부에서 일정한 모습으로 정렬했다.
마치, 뼈를 만드는 것처럼.
문제는 그 뼈의 높이가 족히 20m는 넘는다는 사실이었다.
기관포의 불꽃이 성냥불보다도 작게 보일 정도로 몸집을 키운 녀석은 곧바로 꿀렁거리고, 뭉치고, 뒤틀리며 어떤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도마뱀을 닮은 머리를 시작으로 거대한 몸통, 굵은 팔과 다리, 유선형의 꼬리, 그리고 거대한 날개까지.
“…용?”
그래, 슬라임과 건물 잔해로 만들어진 그것은 용과 닮아 있었다. 그것도 매우 익숙한 용을.
“카할 마그두…? 잠깐, 제자여, 저거 설마…”
코르부스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여명을 바라보자마자,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외형은 먹은 마나를 따라가나 봅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오시오?”
여명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빌딩을 뜯어먹은 슬라임 드래곤… 아니, 괴수왕이 입을 쩌억 벌렸다.
빌딩의 콘크리트가 이빨 대신 떠다니는 거대한 입안이 꿀렁거리고, 녀석은 그대로
꺄아아아아악 !
비명과 함께 슬라임 덩어리를 뿜어냈다. 용의 브레스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일정 범위를 검은 액체로 뒤덮는 광경은 꽤 무시무시해 보였다.
정작 슬라임을 뒤집어쓴 브라우닝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비주얼은 합격이네. 웬만한 CG보다 살벌해 보인다.”
힐끔, 바깥을 확인한 세티가 그렇게 말하자, 코르부스가 딱! 부리를 다물었다.
“세티! 그대마저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도심에서 저 브레스… 아니, 구토를 쏘게 내버려 두면,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오!”
때마침, 옷에 성물을 주렁주렁 단 성녀가 말했다.
“에이, 코르부스도 참. 콘크리트를 잔뜩 먹은 슬라임이 어떻게 호수를 건너서 도심으로 가요?”
“….”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미 엎질러진 물에 화내 봤자 정신 건강만 나빠지니까.”
여유롭다 못해 이미 체념한 목소리. 코르부스는 어이가 없는 듯 웃는 파순을 비롯해 일행들을 싹 훑어본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자가 성녀님을 닮아가는 것이오, 아니면 성녀님이 제자를 닮아가는 것이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죠.”
“….”
코르부스가 버럭 화를 내지 않은 건,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사장실이 흔들거리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쿠구궁!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가루 때문에 머리가 하얗게 된 코르부스는 성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러다가 추락하겠소. 싸우건 말건 일단 내려가야 하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제자여! 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지금 아래 브라우닝과 프레아 칸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우는지 알고 있…”
그때, 창가에서 걸걸한 여성의 목소리가 코르부스의 말을 끊었다.
“나? 나 안 싸우고 있는데.”
“….”
코르부스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성검을 쥔 채 하늘에 떠 있는 프레아 칸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오랜만이야, 비포장 길의 구도자.”
“…오랜만이오. 짝 눈깔.”
짧지만 감정 실린 인사.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코르부스는 프레아 칸이 부담스러운 듯 날개를 접고 부리를 다물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프레아 칸은 여명을… 정확히는 성녀의 호위랍시고 피눈물의 환상을 뒤집어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너도 오랜만이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혜성검은 잘 쓰고 있냐?”
“…잘 쓰고 있습니다.”
여명의 환상을 꿰뚫어 본 게 틀림없는 말.
프레아 칸도, 여명도 들켰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뭐, 중요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여기서 안 내려오고 뭐 하고 있냐? 뭘 꾸미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프레아 칸의 마나는 조금 살벌하게 움직였다. 마치, 여명이 저 괴수를 풀어놨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처럼.
여명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려? 왜, 언론 용 헬기라도 기다리냐?”
프레아 칸은 성녀의 몸에 걸린 성물을 보고 뭔가를 예상했는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근데, 말이다. 전투 헬기가 이렇게 떴는데 언론 헬기가 뜨겠냐?”
상식적인 지적이었다.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미시간 호가 보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헬기보다 늦긴 했지만, 오긴 왔네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일행의 눈에 보이는 건… 섬 주변으로 몰려드는 배였다.
관광객용 작은 셔틀쉽부터, 거대한 여객선까지.
거의 수십 대가 넘는 배가 브라우닝과 괴수가 잘 보이는 방향을 향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배 위에는 커다란 카메라를 든 언론인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꼬락서니를 보니 웃돈까지 줘가며 배를 탄 게 틀림없어 보였다.
“…미국인들이란.”
프레아 칸은 다가오는 배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경찰선을 보고 씁쓸하게 웃은 뒤, 여명을 향해 말했다.
“이거, 나도 껴도 되냐?”
“안 된다고 하면 안 끼실 겁니까?”
“아니.”
여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양손으로 성녀를 안아 들었다.
얼굴이 빨개진 성녀의 몸에 걸린 성물들이 짤랑거리며 소리를 내고, 코르부스가 한숨 쉬며 지팡이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세티가 파순의 모가지에 줄을 콱 조이는 걸 본 여명은, 그대로 창가에 발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성검을 향해 말했다.
“주인공 자리만 뺏지 마세요.”
“야, 내가 그 정도 눈치는 있…”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이 선수를 쳤다. 그는 성녀를 안은 자세 그대로 창문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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