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90)
을 위한 세계는 없다-290화(290/817)
〈 290화 〉 삼인행三人行 (4)
* * *
***
여명은 별의 바다 위에서 눈을 떴다.
딱히 어울리는 비유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좋은 비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별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두고 뭐라고 말하겠는가?
육체를 벗어난 정신의 강? 차원이란 이름의 장막 너머에 자리한 곳?
이름이야 어쨌건, 그는 바다에 몸을 맡겼다. 몸과 정신 모두 너무나 피곤했다. 생각해보니, 시카고에 온 이후 한시도 쉬지 못했다.
KGB, 드워프, 구더기 공주, 아야톨라, 괴수왕…
대통령 행사 때문에 청소부 길드 전체가 밤새워 인천을 청소했을 때보다도 더 피곤할 정도였다.
결국, 피곤을 견디지 못한 여명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목뒤를 간질거렸지만,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웠다.
일단 자자, 그게 뭐든 간에, 자고 나서 생각하자…
감긴 눈 너머로 어둠이 흘러들었다. 여명은 별들의 빛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
…잠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이 꿈속으로 떨어지기 직전,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번쩍 비췄다.
눈치 없는 당직 청소부가 얼굴에 전등을 비춘 때처럼, 잠을 확 쫓아내는 빛.
여명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떴다. 대체 어떤 버릇없는 놈이 사람을 이런 식으로 깨우는 건지, 얼굴이나 볼 생각이었다.
[깨어나라. 더 잠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손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들자, 새의 머리를 한 거대한 존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여명이 익히 봤던 존재였다.
LA 차원문 속에서 그의 머리에 정체불명의 상징을 남겼던 존재.
두 번째 만남이라서 그런 걸까? 여명은 그에게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마치 청소부 형들을 마주하는 것 같은 친근함.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
질문하려던 여명은 뒤늦게 입이 열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그는 바로 양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어봤다. 코는 물론이고 눈도 한쪽 없었다. 얼굴의 절반이 녹아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팔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른팔은 손가락 세 개만 남아있었고, 왼팔은 아예 팔꿈치 아래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다 뭐야? 왜 재생되지 않은 거지? 여명의 머리로 의문이 떠오른 직후, 새 머리가 대답했다.
[너는 너무 막 썼다.]‘…막 썼다?’
[드레이테리얼부터 불사왕의 심상, 그리고 아야톨라의 꿈… 싸우는 내내 몸을 아낀 적 있느냐? 매번 뼈가 으깨지고, 살이 뭉개지며, 내장이 남아나질 않게 싸우지 않았더냐?]‘….’
[가진 육체나 힘과 상관없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몸을 써대면 누구라도 망가질 수밖에 없지. 그나마 붉은 무술 덕분에 이 정도지, 그것조차 없었다면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을 것이다.]여명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빠른 시일 내로, 몸이 버티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그대로 사망하겠지. 만에 하나 운이 좋다면…]‘좋다면…?’
[지금 네 꼴이 될 것이다.]얼굴이 뭉개지고, 잘린 팔이 덜렁거리는 꼴. 여명은 두 개만 남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그 모습을 본 새 머리가 눈을 부라렸다.
[맹랑한 것. 두렵지도 않느냐?]‘당연히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게 제가 힘을 휘두른 대가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만의 진의를 세우기 전이라면 몸을 떨었겠으나, 지금의 여명은 생각보다 의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모든 걸 가지겠다는 진의의 이면에는 그에 따른 대가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있었으므로.
잠시 후, 새 머리의 거인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의연하구나. 너무 의연해.]‘뭐, 깨어나서 방법을 찾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방법을 찾지 못하면?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너는 오직 복수를 향해 맹렬히 달릴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그렇게 말한 새 머리는 여명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몸체는 웬만한 대형 선박보다도 컸다.
당장 코앞에 있는 부리부리한 눈동자부터가 여명의 몸보다 클 정도.
[떠오르는 해는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 법이라지만, 너는 인간이다. 열심히 사는 것과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 다른 것이니! 자신에게 관심 좀 가지거라!]그 거대한 몸집과 달리, 그의 눈빛과 말투는 동네 꼬맹이를 훈계하는 어르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노력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새 머리는 부리를 딱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대체 이걸 어찌해야 할꼬…]‘….’
여명은 뭐라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해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길어지려는 찰나, 새 머리가 갑자기 손을 뻗어 여명을 별의 바다에서 건져냈다.
촤아악 거대한 손가락 사이로 별 사이의 어둠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여명은 새삼 하반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감각이 안 느껴지더라니.
뭐, 아무튼.
[…후우, 결국 그 가여운 아이들이 아닌, 너를 선택하게 되는구나. 내 고향과 아무 상관도 없는, 저 너머의 아이를.]‘….’
[너의 탓은 아니다. 그녀가 내게 너를 보여준 순간부터, 결국 이리될 줄 알았으니.]‘…?’
그녀는 아마 미그니움을 뜻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가여운 아이들은… 누구지? 여명의 고개가 기울어지기 무섭게, 새 머리가 반대쪽 손을 들었다.
원근감이 망가질 정도로 거대한 손에는 작은 정육면체 주사위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주사위를 굴리는 것은 나의 의지다. 그러니 너는 내가 너를 위해 주사위를 굴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주사위? 무슨 주사위 말입니까?’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의 여섯 눈. 세상 만물이 운명이라 부르는 놀이판 위에서 유일하게 놀이가 아닌 것.]새 머리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주사위를 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주사위는 마치 혜성처럼 기다란 꼬리를 만들어내며 밤하늘 너머로 날아가더니, 별의 바다 위에 풍덩 빠져버렸다.
‘….’
아니, 거기에 주사위를 던지시면 어떻게 합니까? 결과는 어떻게 보려고요?
별빛으로 이루어진 물살을 바라보던 여명이 목 끝까지 올라온 황당함을 삼키길 잠시.
주사위를 집어삼킨 별의 바다가 파도치며 기하학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별과 별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별의 선들은 마치 별자리 같기도 했고, 언뜻 숫자 ‘5’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새 머리는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최상의 결과는 아니지만, 최악은 피했구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그렇습니까? 저는 무슨 상황인지 영 못 따라가겠는데.’
[너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아직까지는.]‘….’
[그러니 볼 수 없는 것을 보려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꾸나.]새 머리는 그렇게 말하며 여명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야톨라의 꿈속에서 봤던 빌딩보다도 더욱 큰 손가락.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새 머리의 존재가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은 까닭이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함을 마주한 여명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 짓기를 잠시.
어느새 거리를 좁힌 손가락을 향해, 여명의 몸에서 다섯 줄기의 색이 솟아 올랐다.
파도치는 무언가, 붉은 아지랑이, 맑고 투명한 빛, 뒤틀린 용의 생각…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 진의까지.
새 머리는 그 다섯 색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말했다.
[파양결, 주가시빌리, 세계수, 용의 심장, 그리고 욕망으로 물든 진의… 하나하나가 세계를 피로 물들이기에 충분한 힘이로다.]***
[어떻게 이렇게 독한 힘만 익혔단 말인가? 만약주인공이 있었다면,네가 그의 가장 큰 대적이었을 것이다.]뭐가 그리 불만인지, 눈을 가늘게 뜬 새 머리는 한참 동안 다섯 줄기의 색을 만지고, 꼬고, 흔들고, 뒤섞었다.
아마 다섯 힘을 하나로 뭉치려는 것 같았는데, 정작 다섯 개의 힘은 잘 섞이지 않았다.
파양결과 여명의 진의는 무엇과도 잘 섞였지만, 나머지 네 개는 서로 만나자마자 반발하며 서로를 밀어냈다.
그렇게 얼마나 다섯 줄기를 가지고 놀았을까? 다섯 줄기는 끝끝내 뭉치지 않았다. 마치, 중요한 부품이 부족한 블록 장난감처럼.
[주사위를 굴리고도 안 된단 말인가?]새 머리의 존재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멈추더니, 딱 소리나게 부리를 다물었다. 코르부스도 그렇고, 아마 조류들이 답답할 때의 제스처인 것 같았다.
아무튼, 손을 내려놓은 그는 한참을 조용히 고민했다.
그리고 몸의 감각이 없는 여명이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 뻔할 때쯤, 그가 뭔가를 떠올린 듯 다시 부리를 열었다.
[다섯으로는 뭉칠 수 없어도, 여섯이라면 뭉칠 수 있으리라.]‘예?’
[그것이 네 몸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네 몸속의 마나들, 그것을 전부 합쳐 진의 아래 지배하거라. 환골탈태, 각성, 탈각, 신성의 길… 무어라 불러도 상관없다. 부족한 건 깨달음이 아닌 여섯 번째 힘이니.]여명이 갑작스레 쏟아지는 정보를 머릿속에 담는 사이,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그의 몸을 마주했다.
[다행히, 너에게는 아직 하나가 더 있다.]용의 심장이나 주가시빌리에 비견되는 힘이 하나 더? 설마 마왕의 심장인가?
그런 여명의 생각과 달리, 새 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찌꺼기에 의지할 필요 없다. 너의 신명이야 말로 진정한 힘이니.]‘…신, 명?’
[듣거라, 너의 이름은…]그 순간, 쩌저적! 소리와 함께 새 머리의 얼굴에 금이 갔다.
갑자기 무슨 공격이라도 받은 건가? 여명이 눈을 크게 뜨는 사이, 그는 몸을 흔들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끄으으…!]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머리에서 뒤편에서 번쩍이던 빛이 조금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저 고통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짐작한 여명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상 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제가 알아서 찾겠습니다.’
그러자 새 머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 내 이름도 모르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아니, 그건…’
[핑계 댈 필요 없다. 네가 무슨 이유로 찾지 못한 것인지는 나 또한 잘 알고 있으니… 시간은 선한 일을 하느라 늦은 자를 탓하지 않는다.]새 머리는 손을 내려 여명을 다시 별의 바다에 내려놨다. 두둥실, 별빛의 파도에 휘말린 여명은 그를 올려다봤다.
갈라진 그의 머리에서는 피인지 빛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새 머리는 피를 막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 여명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알량한 힌트뿐이니… 너는 귀를 열고 들어라.]‘…새겨듣겠습니다.’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새 머리는 갈라지는 머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너의 스승이 가고자 한 곳으로 돌아가 힘을 키우라. 주인 없는 보물을 줍는 건 죄악이 아니고, 네 원수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복수에 고민하지 말라. 복수심으로 타오른다고 해도 그 열기에 몸을 녹일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법이니, 긍정도, 부정도 오롯이 그대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여운 우리의 아이들, 희생양들의 이름을 되찾아라. 그리하면 자연스레 너의 이름도 따라올 것이다.]희생양? 세티 자매를 떠올린 여명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여명이 입을 열려 했으나, 새 머리는 질문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미 반쯤 머리가 갈라진 그는 별의 바다를 힘껏 밀며 말했다.
[이제, 가거라.]별이 멀어져 갔다. 여명은 별의 파도에 밀려 그에게서 떠나갔다.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 멀어진 거리 때문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작별 인사는 새 머리만이 할 수 있었다.
[부디, 네 이름에 걸맞게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기를 빌겠다.]그렇게 별이 아득해지고, 선명해지는 감각이 이어지던 바로 다음 순간.
여명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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