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298)
을 위한 세계는 없다-298화(298/817)
***
둔간 중공업의 마크가 새겨진 스포츠카 한 대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스포츠카는 주지사를 성토하는 시위대와 옹호하는 시위대가 서로를 노려보는 시카고 시청을 지나, 붉은 별이 파괴한 도로를 복구하는 공사장 거쳐, 일리노이의 55번 고속도로를 밟았다.
도로교통법을 능욕하는 속도로.
덜컹! 과속방지턱도 없는 곳에서 엉덩이가 떠오르는 가운데, 다룰마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됐지.
시작은 둔 가문의 가주를 보러 가자는 그의 섣부른 제안이었다. 광기에 빠진 가주에게 여명을 끌고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고 함부로 지껄인 말.
하지만 여명은 친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럼 지금 당장 가죠’
그건 합리적인 대답이었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밀수선 출발 시간을 생각해보면, 오늘 말고는 시간이 없었으니까.
문제는, 세티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곧바로 성녀님도 따라가겠다고 소리쳤고, 일행은 순식간에 넷으로 불어났다.
다룰마는 그제야 이래도 되는 건가 고민했었다. 하지만 행동력 좋은 여명과 두 소녀는 순식간에 그의 운전대를 빼앗았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성녀님에게 운전대를 줘버린 것.
가주의 거처가 시카고에서 족히 100마일, 그러니까 대충 160 km 는 떨어진 곳에 있다는 GPS의 설명을 본 여명은 성녀님에게 운전대를 줘버렸다.
성녀님은 그것을 과속 허가로 받아들이셨고…
-부아아앙!
자신의 애마가 내뱉는 굉음을 들으며 다룰마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안전벨트를 쥔 그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바깥을 보니, 신의 축복으로 강화된 스포츠카는 거의 날아가는 속도로 고속도로를 주파하고 있었다.
누가 이 모습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면 그는 어마어마한 벌금은 물론이고 법정에 출두해야 하겠지.
그러나 지금 당장 다룰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살고 싶다는 간절함 뿐이었다.
다섯 신이시여, 저를 지켜주소… 아니, 성녀님을 선택하신 게 다섯 신이셨던가?
뭐,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속으로 애타게 다섯 신을 부르짖기를 한참.
끼이익-! 스포츠카의 브레이크가 비명을 질렀다. 안전벨트가 아니었다면 창문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을 만큼 격렬한 급정거였다.
다룰마는 자신의 위장이 텅 비어있음을, 그리고 드디어 차가 멈춘 사실에 감사했다.
“다 왔어요! 세 시간 거리를 한 시간 만에 주파 성공! 신기록이야!”
차에서 내린 성녀님은 홀가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미소짓는 그녀의 입꼬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팡이를 짚고 내린 다룰마는 신앙심이고 뭐고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불경한 생각을 떠올렸다…
***
“여기가 맞습니까? GPS를 따라오긴 했는데…”
다룰마의 불경한 생각과 상관없이, 그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린 여명이 물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의 의문은 타당했다. 차가 멈춘 도로 주변에는 온통 보리밭밖에 없었으니까.
“여기는… 크흠, 여기 맞네. 겉으로는 평범한 보리 농장처럼 보이는 곳이지.”
다룰마는 잠시 보리밭을 바라보다가, 밭 사이에 뚫린 길로 일행을 이끌었다.
길의 끝에는 작은 농장이 하나 있었는데, 천장이 낮고 기둥이 두꺼운 건축 양식을 보아 드워프용 건물인 듯싶었다.
실제로 농장 건물 앞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드워프가 둘이나 있기도 했고.
“저 농장 지하 깊숙한 곳에 벙커로 이어지는… 어?”
두 드워프를 본 다룰마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왜 그러세요?”
여명이 두 명의 드워프와 다룰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다룰마는 수염을 벌벌 떨며 대답했다.
“가, 가주님이…”
그때, 맥주를 마시던 드워프 중 한 명이 이쪽을 발견했다.
“오, 다룰마! 역시 네가 가장 먼저 올 줄 알았다!”
수염 가득 맥주 거품을 달고 있던 드워프는 손을 흔들며 일행을 반겼다.
다룰마는 당황과 기쁨이 섞인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여명에게 말했다.
“가주님과 그분의 집사님일세. 가서 인사드리지.”
여명 일행은 다룰마와 함께 성큼성큼 농장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자, 일행은 두 드워프가 생각보다 훨씬 늙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드워프 모두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했고, 비비 꼬인 수염이 키보다도 더 길었다. 눈가 주름을 따라 세월이 엉겨 붙은 꼬장꼬장한 노인네들.
“아니, 두 분 모두 어쩌다 바깥에 계신 겁니까?”
다룰마가 두 노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그의 대답을 받은 건 처음 손을 흔들었던 바로 그 드워프, 집사였다.
“본사에 큰일이 생겼다고 해서 뉴스도 좀 듣고, 오랜만에 바람도 쐴 겸 나왔다만… 그래서 이분들은?”
여명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다룰마의 친구인…”
그는 이름을 밝힐까 고민하다가, 그냥 밝히기로 했다. 둔 가문의 가주는 그에게 산의 눈물을 준 장본인이었으니까.
“…천여명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여명이 이름을 밝힌 직후, 두 드워프의 시선이 변했다.
집사는 깜짝 놀란 듯 미소를 지었고, 가주는… 일행 전부를 훑었다.
가주의 눈동자는 빨랐다. 여명 정도의 초인이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건 상인의 눈이자, 사업가의 시선이었다. 다룰마의 말처럼 미친 자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도로 정교한 시선.
여명과 가주의 시선이 얽히는 사이, 집사라 불린 드워프가 허허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뒤에 계신 분이 성녀님이시겠군.”
“아, 안녕하세요?”
성녀가 슬쩍 고개를 숙이자, 집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저 같은 늙은이에게 고개를 숙이시다뇨! 성녀님께서 이번에 저희 가문을 위해 해주신 일이 얼마인데, 고개는 제가 숙여야지요! 아, 다섯 신을 찬미하라!”
늙은 드워프가 성호를 그렸다.
뒤이어 세티도 다룰마의 친구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집사는 다룰마의 친구라면 누구라도 환영한다며 의자와 맥주잔을 대령했다.
“아, 저는 괜찮아요. 운전해야 해서.”
술잔을 거절하는 성녀를 보며 다룰마가 신앙심을 잃어가는 사이, 가주가 대뜸 입을 열었다.
“천여명, 자네는 변경백의 사생아인가?”
“….”
여명에게는 익숙한 말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특유의 황금색 눈동자를 환상으로 가리고 있지 않은가?
맥주잔을 채우던 다룰마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 초면에 그게 무슨…”
“너한테 묻지 않았다.”
“….”
“대답해다오. 천여명, 자네는 꿀의 혈통을 타고났나?”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군. 그러면 황금은 확실한가?”
세티를 비롯해 탁자에 앉은 일행들은 짧은 비유가 섞인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여명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금의 혈통… 즉, 용사의 혈통.
대답을 들은 가주는 말 없이 맥주잔을 들었다. 맥주를 홀짝이는 소리를 따라 침묵이 고였다.
그 침묵을 무례함으로 해석한 다룰마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가주가 탁!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침묵을 깼다.
“맨얼굴을 보여주겠나?”
“….”
브라우닝도 꿰뚫어 보지 못한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봤다? 여명이 슬쩍 마나를 끌어 올려봤지만, 가주에게선 어떠한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인이 아닌데 어떻게?’
여명의 평소 사진을 봤다면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지만, 가주는 벙커에서 외부와 단절한 된 채로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와 비슷한 의문을 떠올리고 있는 건지, 다룰마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뭐지?
의문은 길지 않았다. 가주가 의외로 손쉽게 답을 내놓았으므로.
“이 세상에서 나보다 빨갱이 무술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걸세. 난 자네가 주가시빌리를 익혔다는 것도 생생히 느낄 수 있어…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맨얼굴을 보여주게.”
여명은 순순히 피눈물의 환상을 해제했다. 호위 성기사의 얼굴 대신 선이 굵은 여명의 얼굴이 드러나고, 잔에 담긴 맥주보다도 영롱한 황금색 눈동자가 가주와 마주했다.
“…진하군. 변경백만큼이나 진해. 그의 핏줄이 아니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그렇습니까?”
“그래… 옥새가 자네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군. 우리보다 자네가 훨씬… 더 자격이 있으니.”
“….”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일행들은 조용히 안주만 집어 먹었다. 가주는 햄을 우적우적 씹는 집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서 내 반지를 가져오게.”
반지가 뭔지 모르겠지만, 집사는 가주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여명을 힐끗 바라보더니, 자리를 털고 농장 너머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집사의 등을 보던 다룰마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 지금 상태가 좀…”
“난 제정신이다.”
“….”
한마디로 다룰마의 입을 막아버린 가주는 여명 일행을 천천히 훑었다.
그의 눈에 담긴 위엄과 분위기가 어찌나 무거운지, 눈치 없는 성녀조차 조심스레 안주를 집어 먹을 정도였다.
물론, 여명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드워프 왕의 영혼과 직접 마주했던 그가 보기에, 가주의 위엄은 억지로 세운 칼날처럼 위태로워 보일 뿐이었다. 마치, 만주에서 마주했던 용의 그것처럼.
여명은 조금 뜸을 들였다가,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저, 가주님.”
“말하게.”
“절 보고 싶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단순히 제 혈통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까?”
“….”
꽤 당돌한 질문이었던 걸까? 다룰마가 눈을 힐끗거리는 가운데, 가주가 대답했다.
“아니, 난 자네를 스탈린을 죽이기 위한 무기로 쓸 생각이었네.”
“…?”
황당한 대답이었으나, 그 목소리는 진실했다. 세티가 눈을 찌푸리는 사이, 여명이 말했다.
“그러면 생각이 달라지신 겁니까?”
“그렇지, 자네를 딱 보자마자 알겠더군. 자네는 내가 이용하지 않아도, 알아서 스탈린을 죽일 거야.”
“….”
이건 또 참신한 개소리였다. 여명은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지구에서나, 아샤에서나, 태양은 둘일 수 없는 법이지. 마찬가지로, 서기장은 한 명뿐일세.”
“…예?”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죽였듯, 자네는 스탈린을 죽이게 될 걸세. 낫과 망치는 인민 모두의 것이나, 붉은 별은 오직 서기장에게만 허락되니까. 그러니 내가 왜 자네를 이용하겠나?”
그제야, 여명은 조금 당황했다. 가주가 스탈린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서? 아니, 그는 여명이 서기장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다룰마는 여전히 가주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건지, 연신 여명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명은 가주가 미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잠시 심호흡한 뒤,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가주에게 말했다.
“그러면 제게 뭘 주실 겁니까?”
‘자네까지 이럴 건가?’ 다룰마가 여명에게 속삭이건 말건, 가주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여명은 뭘 원하냐, 무엇을 주면 되냐 같은 협상을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가주의 말은, 그의 상상을 벗어나 있었다.
“다 주지.”
“…?”
그때, 농장 너머로 사라졌던 집사가 끼익- 창고 문을 열며 나왔다. 갔던 방향과 정반대 방향.
지하에 내려갔던 건가? 여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집사가 여명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뭐, 뭐야?”
지켜보던 성녀가 놀라서 의자를 뒤로 빼건 말건, 집사는 품에서 작은 반지를 꺼내 여명에게 내밀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무언가로 반짝이는 반지는 아름다웠지만, 무언가 대단한 마나나 마법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도구도 뭣도 아닌, 반지.
하지만 반지를 보며 눈을 부릅뜬 다룰마를 보니 평범한 반지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했다. 여명은 반지를 받지 않고 물었다.
“이건 또 뭡니까?”
“아홉산의 모든 가주들의 맹세로 담금질 된 재상의 반지.”
“….”
“드워프 왕에게 바친 우리의 충성의 증표이자, 살아남은 모든 드워프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그때, 여명이 가주의 말을 끊었다.
“…받지 않겠습니다.”
“…?”
“이런 거 말고, 차라리 돈으로 주십쇼.”
반지를 내민 집사를 비롯한 모든 드워프가 놀란 눈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정작 세티와 성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여명은 집사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제가 드워프도 아닌데, 이런 게 왜 필요하겠습니까?”
“…둔 가문의 모든 재산과 모든 드워프들의 존중을 살 수 있는 반지일세.”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슬쩍 다룰마를 바라봤다.
“둔 가문의 재산은 지금도 제가 원하는 만큼 쓸 수 있습니다. 제가 도와준 게 얼마인데, 다룰마도 그만한 양심은 있겠죠.”
다룰마는 맥주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명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드워프들의 존중도 필요 없습니다. 진짜 존중은 그런 반지가 아니라, 제 행동의 결과로 받는 겁니다.”
여명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던 걸까, 무릎 꿇고 있던 집사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가주를 보며 말했다.
“형님, 그렇다는군요.”
“….”
가주는 웃지 않았다. 그는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여명을 바라봤다. 마치, 여명의 진심을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그리고 잠시 후, 가주는 여명에게서 눈을 떼고 성녀와 세티로 시선을 돌렸다.
가주는 의외로 성녀가 아니라 세티를 더 오래 바라봤다. 뭔가를 고민하던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란 수염이 바닥을 쓰는 소리가 울리길 잠시. 가주의 주름진 손이 세티의 손 위에 겹쳤다.
“둔 가문의 가주, 스겔마 둔의 이름으로 천 가문의 안주인에게 맹세하겠네. 지금, 이 순간부터, 나의 광맥이 자네의 광맥이고, 자네의 핏줄이 나의 핏줄일세.”
그건 드워프가 다른 가문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자 맹세였다. 하지만 갑자기… 그것도 여명도 아니고 세티에게?
다룰마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운데, 집사가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말했다.
“성녀님이 첫 번째가 아니었습니까?”
그제야,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여명과 성녀가 반응했다. 성녀의 귀가 빨갛게 물들고, 여명이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성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가주가 성녀의 손을 잡고 말을 끊었다.
“성녀님, 총대주교와 사제단은 성녀님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전대 성녀님이 그러했듯이.”
“…예?”
“다섯 신께 맹세하니, 저와 저의 가문은 성녀님의 녹색 화관이 되겠습니다.”
“….”
녹색 화관, 그건 사랑과 생명의 신 이사귀녹을 상징하는 비유였다. 여명과의 결혼을 지지해주겠다는 말.
성녀는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냐고 대답하려다가, 슬그머니 어깨에 올라오는 여명의 손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침묵을 따라 다룰마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집사가 훈훈한 미소를 짓던 그때.
세티가 단숨에 맥주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으음?”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리는 가주와 달리, 다룰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기, 세, 세티 양? 지금 분위기 좋은데, 잠시 뒤에…”
“아니, 다룰마, 가주님의 창고에 쓸만한 게 많다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
“복구 금액이 부족하니 물건으로 때우겠다면서요?”
아니, 그때는 가주님이 이렇게 멀쩡하실 줄 몰랐지…
정신줄을 놓은 가주님의 창고에서 물건을 슬쩍하려고 했던 다룰마가 입을 다무는 사이, 세티가 가주와 집사를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다룰마 때문에 여명이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그냥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
“그러니까, 다룰마? 창고까지 안내해주실래요?”
집사가 살기 어린 눈으로 다룰마를 노려보는 가운데,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 부러지는 처자로군. 암, 안주인은 그래야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 거, 다룰마는 신경 쓰지 말고 따라오게. 내가 직접 안내해주지.”
가주는 수염을 말아 올리며 농장 안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집사에게 귓불이 잡힌 다룰마가 으아악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