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0)
을 위한 세계는 없다-30화(30/817)
〈 30화 〉 NPC를 위한 우연
* * *
…굳이 철을 금으로 만들 이유가 있소? 금보단 철이 적을 더 잘 죽이지 않소?
『소련드워프 전쟁 개시 11일 전, 스탈린이 아홉 봉우리에 보낸 편지 中』
***
갑작스레 시리가 끼어들긴 했지만, 그녀는 세티가 세운 계획을 반대하거나, 수정하지 않았다.
여명을 시험할 때 내뱉은 말이 거짓말인 것처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티의 계획에 찬동했다.
“까놓고 말해서, 언니 계획의 핵심은 오빠가 얼마나 많은 명성을 얻느냐에 달렸어.”
명성.
한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여명을 만나러 오게 할 정도로, 커다란 명성을 얻는 것.
문제는 방법이었다.
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제대로 된 배경 하나 없는 밑바닥 인생이 그런 명성을 얻을 수 있는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명에게 세티가 내놓은 답은 간단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곳에서, 여명씨의 재능을 조금씩 드러내기만 해도 명성은 자연히 따라올 거에요.”
“관심이 쏠리는 곳?”
“아카데미, 차원문, 분쟁지역… 그곳이 어디건, 초인이 모이는 장소가 곧 관심이 쏠리는 곳이죠.”
차원문이 열린 뒤, 지구인들은 언제나 초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구의 초인은 시작부터가 체제 선전의 도구였으니까.
인민의 영웅, 미국이 신께 사랑받는 증거, 실존하는 슈퍼맨, 진보의 상징…
소련이 몰락하고 냉전 또한 끝났지만, 초인은 여전히 그때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받고, 대우받았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대중이 초인을 향해 보내는 관심은 결국 연예인에게 향하는 관심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세티의 설명을 듣자마자, 여명은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출판, 언론, 방송…
소위 대중매체라 불리는 것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내보내고 있었으니까.
서점에는 초인을 주제로 한 온갖 소설과 만화들이 가득하고, TV에선 초인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연일 시청률을 갈아치운다.
경제 신문들은 국제 유가를 뒤흔드는 초인 용병들의 이합집산을 비판하고, 학계에선 고전 철학이 초인 무술에 미치는 영향을 논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문화 현상에 불과했다.
진짜 중요한 정보들, 예를 들어 무술의 진의나 마법 주문 같은 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당장 수많은 초인 다큐멘터리와 만화를 찾아본 여명조차, 제대로 된 무술이 뭔지 모르지 않았나.
“…맥락은 이해했어. 그럼 이제 내가 뭘 하면 되지?”
여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티가 다섯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입학 지원서 한 장, 합격 통지서 한 장, 그리고 현상금 수배서 세 장.
“선택은 여명씨가 해주세요.”
서류를 하나하나 확인해보니, 서류마다 적혀있는 이름과 날짜가 전부 달랐다.
‘인천을 떠난 바로 그날부터 준비한 건가?’
세티의 행동력에 혀를 내두른 뒤, 여명은 가장 먼저 합격 통지서부터 확인했다.
합격 통지서는 PMC… 흔히 용병단이라 불리는 민간군사기업에서 온 것이었다.
만주와 개성 차원문을 오고 가며 괴수처리와 경호업무를 주로 하는 선죽 용병단.
여명이 청소부 시절부터 이름이나마 들어 본 중견 용병단이었다.
‘불과 며칠 만에 합격 통지서를 받을 정도로 간단한 곳이 아닐 텐데….’
잠시 합격 통지서를 살피던 여명은, 솔직하게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예? 뭘요?”
“용병단의 합격 통지서. 이렇게 간단하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을 텐데.”
세티가 대답하려는 순간, 옆에 서 있던 시리가 끼어들었다.
“언니가 돈 좀 썼어.”
“…시리.”
“사실대로 말하자면, 용병단에는 돈 많이 안 들어갔을걸? 어차피 매일 사람 뒤져나가는 용병단에서 신입 하나 통과시키는 데 뭐 얼마나 들겠어?”
“….”
“근데 말이야, 아카데미 입학 지원서는 다르다? 아마 억 소리 나게 깨졌을 거야.”
시리는 입학 지원서를 가리키며 웃었다. 여명은 조심스레 입학 지원서의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서류의 맨 아래, ‘1학년 2학기 중 편입’이라고 쓰인 부분이 눈에 걸린 탓이었다.
“2학기라면… 반년 뒤로군.”
“죄송해요. 어떤 수를 써도 그보다 빠른 입학은 안 되더라구요…”
세티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시리가 옆에서 덧붙였다.
“입학식이 코 앞인데, 이제 와서 1학기 입학 신청자를 어떻게 받겠어? 여기가 뭐 일반 고등학교도 아니고. 저번 달 테러 때문에 보안도 잔뜩 늘었는데.”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해 못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드라마 속 아카데미와 달리, 진짜 초인 아카데미는 준 군사기지 대우를 받는 곳이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나마 입학 지원서를 만들어온 세티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 성검의 추천장을 받을 걸 그랬나?’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교육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해 아카데미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추천장을 받아 입학한 뒤 살인을 저지른다면, 추천장을 내어준 성검과 호주 정부가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의 복수심을 이해해줄까? 그럴 리 없었다. 명예를 되찾겠답시고 칼 들고 쫓아오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굳이 적을 늘리지 않아도, 그에겐 이미 죽여야 할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여명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탁자를 두들기다가, 탁자 위에 남아있는 현상금 수배서 세 장을 집어 들었다.
현상금 수배서에는 초인, 혹은 반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범죄자들의 사진이 찍혀있었다.
마법으로 사람을 죽여댄 살인마, 사람을 괴수에게 먹인 미치광이, 그리고 탈옥한 네크로맨서.
수배서 아래에는 최근 발견된 위치와 주로 사용하는 마법 같은 깨알 같은 정보가 적혀있었는데, 글씨체를 보아하니 아마 세티가 직접 적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여명이 수배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자마자, 지켜보고 있던 세티가 입을 열었다.
“어떤 걸 선택하실래요?”
그 말을 시작으로, 그녀는 각 선택지의 장점과 계획을 쭉 설명하기 시작했다.
용병단에 들어가면 실전 경험이 어떻고, 현상범을 잡으러 갈 때는 반드시 인터넷 방송인을 대동해야 한다던가…
그렇게 길게 이어진 세티의 설명이 끝날 때쯤, 여명은 고개를 돌려 시리에게 물었다.
“시리, 아카데미 입학식이 정확히 언제지?”
“언니가 오면서 말 안 해줬어? 3일 뒤야. 원래라면 이주 전에 열렸어야겠지만, 저번 달에 일어난 테러 때문에 미뤄졌거든.”
“…3일이라.”
“학생들은 입학식도 못 하고 대부분 기숙사에서 대기 중이야. 덕분에 나도, 언니도 이렇게 한국 정부의 감시를 받지 않고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거고.”
“그렇다면…”
여명은 세티를 보며 그녀와 13번 부두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을 ‘로드 하우 아카데미의 특례 입학 예정자’라고 소개했었다.
“오늘이나 내일 떠나야겠군.”
세티는 부정하지 않았다.
“…예, 맞아요. 저희 자매는 이제 곧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해요. 그, 그래도 완전히 이별하는 건 아니라구요?”
“….”
“제 연락처 아시잖아요? 아카데미에 있어도 계속 연락 주고받을 거고, 주말마다 외출할 수 있으니까…”
여명과 시리는 동시에 눈을 지그시 뜨고 횡설수설하는 세티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빛을 마주한 세티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언니, 로드 하우 아카데미는 호주에 있어. 주말마다 외출해서 뭘 어쩌려고? 토요일에 비행기 타고 와서, 하룻밤 자고 일요일에 비행기 타고 돌아가게? 주말부부도 그렇게는 못 만나겠다.”
“….”
“그냥 솔직하게 말해. 우리는 정부한테 모가지 잡힌 신세라 오빠랑 같이 다니거나 싸워줄 수도 없고, 기껏해야 인맥이나 돈 같은 간접적인 도움만 줄 수 있다고.”
“…시리, 닥쳐.”
세티는 그제야 미간을 좁히고 시리를 노려봤다. 시리는 겁을 먹긴커녕 과장된 몸짓으로 탁자에서 일어나 후다닥 여명의 뒤로 숨었다.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어차피 오빠도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일 거 아냐.”
“…이렇게 빨리 헤어질 줄은 몰랐다만.”
“아, 그래? 그건 미리 말 안 한 언니 탓이지.”
결국, 참지 못한 세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리를 쫓기 시작했다.
여명은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세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세티, 이 서류들, 내 마음대로 선택해도 된다고 했지?”
“예? 예, 물론이죠. 뭘 선택하셔도 돼요.”
막 시리의 멱살을 잡던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여명은 보란 듯 다섯 장의 서류를 전부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시리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세티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전부 다 하시게요?”
“굳이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있나? 반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이야. 용병단에서 실전도 치르고, 현상범들도 전부 잡은 다음에…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돼.”
그제야 여명의 뜻을 알아차린 시리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흐, 맞네, 맞아. 뭘 하나만 골라? 다 할 수 있으면 다하면 되지.”
세티는 잠시 시리와 여명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여명씨의 의지라면, 전 도울 뿐이에요.”
***
“어르신.”
바다를 보고 있던 장만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때는 쇠똥구리, 그리고 지금은 천여명이 된 아이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야기는 어떻게, 잘 끝난 게냐?”
“예, 처음 계획대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럼 이 도시를 떠나겠구나. 언제 갈 생각이더냐?”
“바로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어르신께…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겁니다.”
“그래? 하긴,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지.”
장만은 여명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이 아이가 어디에서 누구와 싸울지,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모든 노인이 그러하듯, 젊은이 앞길에 작은 도움 정도는 줄 수 있으리라.
그는 골목길 사이에서 미리 준비해놨던 캐리어를 꺼냈다. 벽에 기대어져 있던 캐리어는 장만의 몸통보다도 거대했다.
“어르신, 이건…?”
“열어 보거라.”
여명은 두말없이 캐리어를 열었다.
달깍. 잠금장치를 풀고 캐리어의 내용물을 확인한 여명은, 놀란 눈으로 장만을 바라봤다.
“네가 벙커에 있는 동안 세티라는 아가씨에게 물어보니, 저번에 샀던 무기를 전부 썼다고 하더구나.”
캐리어 안에는 쇠똥구리가 암시장에서 샀던 것과 똑같은 무기가 들어있었다.
래밍턴 MH750와 탄약들, 그리고 빼곡하게 들어찬 수류탄까지.
“남자가 길을 떠나는데, 빈손이어서 쓰나.”
“어르신…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다. 내가 멋대로 준 것이니, 너도 멋대로 받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장만은 손사래를 친 뒤, 캐리어 뒤편에서 다른 물건을 하나 더 꺼냈다.
천에 둘둘 쌓여 있는 기다란 물건.
그것은 여명이 암시장에서 산 뒤, 술집 카운터 아래 처박아 놨던 제국 기사의 검이었다.
“저번에 이 검은 챙겨가지 않았더구나. 치워버릴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챙겨 놨다.”
“….”
“굳이 쓰지도 않을 검을 산 이유는 묻지 않으마.”
여명은 조심스레 검을 건네받았다.
동료들과 작업반장님을 살해한 플레이어의 검과 똑같은 검, 그것을 내려다보는 여명의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런 여명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장만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명아.”
“예, 어르신.”
“내가 마지막으로 조언 몇 개해도 되겠느냐?”
“…경청하겠습니다.”
장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이 가득한 우중충한 하늘이었다.
“이 도시를 떠나면, 절대로 사람을 믿지 마라. 상대가 누구건 간에, 무조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해. 그리하면 인간관계에서 얻는 것이 없겠지만, 잃는 것도 없을 게다.”
“….”
“또…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반드시 죽이거라. 적은 빨리 죽일수록 좋고, 오해는 죽인 뒤에 푸는 게 더 빠르다.”
거기까지 말한 장만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내뱉은 건 건전하거나 지혜로운 노인의 말이 아니었다. 더럽고 추잡한, 암시장 밀수꾼의 말이었지.
두 사람이 조금만 더 정상적인 관계였다면, 절대 해주지 않았을 조언.
“…작업반장은 네게 이런 조언을 해준 적 없겠지. 쓰레기를 치우며 살아도 쓰레기와 가장 거리가 먼 양반이었으니.”
장만은 머리를 쓱 쓸어넘긴 뒤, 다시 시선을 내려 여명을 바라봤다.
“모든 일이 끝나면, 같이 그 양반 성묘나 같이 가자꾸나.”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둘의 대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작별은 짧을수록 좋다는 걸 아는 탓이었다.
여명은 캐리어와 검을 들고 일어나, 장만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등을 돌려 골목을 떠났다.
하늘의 구름이 흘러가듯이, 밀수꾼과 청소부는 그렇게 헤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