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01)
을 위한 세계는 없다-301화(301/817)
***
배가 출발하며 덜컹, 선실이 흔들렸다.
성녀는 선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두꺼운 안대 위로, 멀어지는 시카고가 보였다.
점점 더 작아지는 차원문과 도심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게 실감 됐다.
물론, 아카데미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극적으로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소가 어디건 그녀는 여전히 성녀였고, 그녀의 곁에는 여전히 여명과 세티가 있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성녀는 창문을 닫고 선실 침대에 바짝 기댔다. 덜컹거리는 선실의 창문을 닫자, 역설적이게도 고요함이 찾아왔다.
홀로 신전에서 생활하던 시절에는 뼈가 시리도록 느끼던 고요함.
오랜만에 고요함과 마주한 그녀는 전대 성녀님을 떠올렸다.
전대 성녀님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스승을 대신해서.
하지만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가르침이 아닌 전대 성녀님이 지나가듯 남긴 말이었다.
‘무언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하지 말라. 완벽해지기 위해서 사랑하지 말고, 진리를 찾기 위해 사랑하지 말며,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랑하지 말라.’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고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 순간 그 말이 떠오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주지사에게 받아낸 전대 성녀님의 유물 때문일지도.
성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작은 황금 반지 하나가 그녀와 마주했다.
장식도 뭣도 없는, 단순한 원형 반지.
주지사가 성물이라고 알고 있던 이 반지는 성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성한 마나가 조금 느껴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건 전대 성녀님의 개인적인 물건이었다. 그분의 마나가 물건에 응축되어 있을 정도로 개인적인 물건.
잠시 반지를 내려다보던 성녀는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껴봤다. 하지만 어느 손가락에 껴도 헐렁하기만 했다. 여명처럼 손이 큰 남자를 위한 반지였던 걸까?
그렇다면 혹시…
그때, 선실 바깥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식사하세요!’라는 네티의 외침이 들려왔다. 성녀는 재빨리 반지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바깥으로 나갔다.
화물선 특유의 투박한 복도를 따라가 보니, 작은 식당에 일행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어떤 책을 유심히 보고 있는 세티, 벌써 홀짝이고 있는 네티, 언제 합류한 건지 모를 회색 머리의 네크로맨서 년, 그리고… 샌드위치가 가득 쌓인 쟁반을 옮기는 여명.
“왔어? 배고프지?”
여명은 평소처럼 살갑게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성녀는 그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네티가 말했던 와인 때문인가? 아니면 네티가 준 속옷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처녀여, 제발 적당히 하시게.]주머니에서 함부로 중얼거리는 유니콘 때문일지도. 아니, 분명 이놈 때문이다.
성녀는 여명에게 샌드위치를 하나 받아든 뒤, 곧바로 네티 옆에 앉았다. 그리고 우라간의 손잡이를 꺼내 그대로 네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성녀님? 왜 그러세요? ”
성녀가 스윽, 유니콘의 뿔을 내밀자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던 네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처녀여?!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이상함을 느낀 유니콘이 뭐라고 지껄이건 간에, 네티는 히죽 웃으며 막대기를 챙겼다.
[안 돼! 처녀여!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껙!]유니콘이 단말마와 함께 빛을 내뿜었지만, 네티가 한발 앞서 주머니에 막대기를 쑤셔 넣었다.
샌드위치를 자르던 여명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두 소녀를 바라보는 가운데, 네티가 성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안 된다 싶으면, 그냥 콱 저지르세요.”
***
태양이 뱀의 배 속 같은 어둠으로 돌아가고, 별과 함께 밤이 무르익는 시간.
선실 창문 바깥으로 달에 젖은 수평선이 깜빡거리는 가운데, 성녀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네티가 준 속옷 때문이었다.
고급스러운 레이스와 자수로 장식된, 흔히 베이비 돌 이라 불리는 드레스 가운.
상체를 다 가린다는 점에서 그렇게 야한 속옷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문제는 기껏 가린 천이 투명하다 못해 속이 다 비친다는 점이었다.
기껏해야 비키니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성녀는 속옷을 꺼내 보자마자 놀라움을 넘어 경악을 느꼈다.
아니 뭐 이런 남사스러운 옷이 다 있어? 이게 옷이야? 음식 포장지도 이것보다는 많이 가리겠다!
속옷을 슬쩍 들어 달빛에 비춰본 성녀는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입을 게 못 됐다. 아니, 가지고 있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하면…
-똑똑.
그 순간, 누군가 선실의 문을 두들겼다. 속옷에 정신이 팔려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도 듣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성녀는 화들짝 놀라 속옷을 침대 이불 아래 쑤셔 넣었다.
“누, 누구세요?”
-나야.
어딘가 딱딱한 여명의 목소리. 성녀는 숨을 죽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 진짜?
“이, 이 시간에 왜?”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들어가도 괜찮을까?
“어… 어… 자, 잠깐만!”
오, 다섯 신이시여. 성녀는 가장 먼저 냄새부터 맡았다. 다행히 일찍 몸을 씻은 덕분에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연이어 머리카락, 옷매무새, 그리고 이불까지 대충 정리하고 나서야 여명에게 대답했다.
“이제 괜찮아, 들어와도 돼!”
곧바로, 여명이 선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손에 와인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아닌가? 아니, 이제 항해 첫날이니 당연한 건가?
안절부절못하는 성녀와 달리, 선실 안으로 들어온 여명은 조금 진지했다. 그는 성녀가 급히 펼친 이불 위에 앉으며 말했다.
“성녀.”
“으, 응?”
성녀는 침을 삼켰다. 뭐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기대 감, 불안 반으로 그녀가 집중하는 가운데, 여명의 입에서 그녀의 기대를 싹 날려버리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오늘, 성물지기님이 찾아오셨어.”
“…?”
아, 이건 진짜 예상 못 한 말이었다. 성녀는 안대 아래 가려진 눈을 깜빡였다.
“총대주교가, 너에게 성도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더라.”
“귀환명령…?”
성녀는 깐깐한 총대주교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노인네가 미쳤나?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에는 안 건드린다며?
그사이, 여명이 성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돌아갈 생각 있어?”
“….”
“만에 하나, 네가 성도로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배를 돌려서 성도까지 배웅해줄게.”
“…내 대답이 뭔지는 알지?”
성녀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여명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알면서 왜 물어봤어.”
“사람 마음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모르기는, 뭘 몰라? 성녀는 여명의 옆구리를 푹푹 찌르며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는 됐네요! 그보다는 우리 아ㅃ… 아니, 성물지기가 뭐랬어? 혹시 싸운 건 아니지?”
여명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작은 성물을 꺼냈다. 태양의 백색 신 울쓰바티의 상징이 새겨진 성물. 성녀도 익히 아는 성물이었다.
“단죄의 빛… 이걸 준 거야?”
“응. 가짜 성기사 노릇할 때 도움이 될 거라더라.”
“….”
이럴 때 아빠 노릇을 하다니…? 왜? 오토바이에 치인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성녀가 새삼스레 불꽃 효녀다운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여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 벌써 가게?”
“가야지. 밤도 늦었는데.”
“어… 그, 그렇네. 밤도 늦었는데.”
성녀는 그 이상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하긴,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어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눌렀다.
뭐 어때, 오늘은 날이 아닌가보지.
그렇게 간신히 마음을 진정 시키고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
스르륵- 이불이 걷히며 그 사이로 반투명한 속옷이 흘러내렸다. 나풀나풀,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펄럭거린 속옷은 그대로 여명과 성녀 사이에 착지했다.
“….”
“….”
성녀도, 여명도 마치 벼락 맞은 사람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무겁고, 나풀나풀거리는 침묵.
얼굴이 시뻘게진 성녀가 침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여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이쁜 속옷이네.”
이 상황에 적절한 말은 아니었다. 성녀는 기도할 때보다도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귓불은 시뻘겋다 못해 곧 터질 것처럼 화끈거리고 있었다.
“….”
“그… 나는 이만 나갈게. 내일 보자?”
여명이 전략적 후퇴를 선택한 순간. 성녀가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물론, 힘 한번 주면 떨쳐낼 수 있는 완력이었으나 여명은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우뚝 발을 멈췄다.
“너, 너…”
“….”
“지, 진짜 그냥 갈 거야?”
힘껏 쥐어 짜낸 목소리. 여명은 조심스레 뒤돌았다. 성녀는 그와 얼굴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파고드는 달뜬 숨소리와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 소리.
여명은 잠시 그 소리를 마주하다가, 손을 뻗어 자신을 붙잡은 성녀의 손목을 잡았다.
“괜찮아?”
성녀는 무엇이, 어떻게 괜찮은지 되묻지 않았다. 그저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을 뿐.
여명은 손목을 쥔 채로 천천히 돌아 그녀에게 다가왔다. 성녀는 새삼스레 그의 몸이 크다고 느꼈다.
그의 손, 그의 가슴, 그의 어깨, 그의…
“성녀님.”
열기 어린 목소리.
“더는 참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 순간, 성녀는 와인을 마시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상황에 술까지 들어갔다면,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다 못해 터져버렸을 테니까.
“나, 나는 괘, 괜찮아…”
대답이 돌아오기 무섭게, 여명이 허리를 굽혔다. 성녀의 귀에 그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얼굴.
그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 성녀는 피부로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손목을 잡은 그의 손바닥을 통해 서로의 고동 소리를 나눴다.
달뜬 숨소리 아래, 두 가지 다른 색의 머리카락이 엮인다.
“사랑해.”
그의 손이 성녀의 등허리를 붙잡은 순간, 그녀는 어떤 불길이 자신의 몸을 훑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 다시는 이 감각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확신했다.
여명은 천천히, 그 입술만큼이나 천천히 그녀를 밀어붙였다. 성녀는 침대를 향해 뒷걸음질 쳤고, 불과 몇 걸음 만에 두 사람은 침대 위에 쓰러졌다.
다리와 다리가 겹지고, 두 사람의 상체가 수평을 그렸다.
맞닿은 하반신과 달리, 여명은 한 팔로 몸을 지탱한 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금이라면 멈출 수 있어.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여명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쪽, 중학생의 그것만큼이나 투박하지만, 진솔한 입맞춤.
성녀는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키스를 이어갔다. 그건 그 어떤 말이나, 맹세보다도 강렬한 허락의 증표였다.
그녀의 입술이 떨어진 직후, 여명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멱살을 잡은 성녀의 손목을 역으로 붙잡고, 그 위로 얼굴을 겹쳤다.
성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
진의를 세운 순간부터, 여명은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했다.
충동과 애정,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성물지기가 아니었고, 성녀는 모리네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두 사람은 충동에 휩쓸리면서도 풋풋함을 잃지 못했다.
“어, 어쩌지?”
조금 전 격렬한 입맞춤이 거짓말인 것처럼, 두 사람은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봤다.
사실, 입맞춤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옷을 벗기려 했다.
하지만 성녀님은 남자의 손을 따라 옷을 벗는 것도, 그리고 남자의 옷을 벗기는 것도 서툴렀다.
몇 번인가 셔츠 단추를 꼼지락거리던 그녀는 결국, 울상을 지으며 여명을 올려다봤다. 그와 살을 맞대고 있다는 흥분과 분위기를 망쳤다는 패닉이 뒤섞인 표정.
여명은 그 표정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성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성녀는 꺄악-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상관하지 않고 성녀를 침대 정 가운데에 눕혔다. 주름진 이불 사이에 누운 그녀는 봉인 속에서 떠올리던 천사님의 목소리처럼 아름다웠다.
“괜찮아, 나한테 맡겨.”
성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숨결이 성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훑고, 곧이어 입술이 그 자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경험을 아로새겼다.
이어지는 부드러운 손길. 여명은 천천히 성녀의 옷 사이로 손을 넣었다.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은 애정을 듬뿍 담아, 마치 공예품을 만지는 것처럼 그녀의 피부를 훑었다.
성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움, 황홀함, 그 외에 입으로 올릴 수 없는 모든 감정들.
그녀는 어째서 사람들이 이것을 구름 위에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구름이었고, 여명은 산들바람처럼 옷을 벗겨냈다.
스르륵, 벗겨지는 상의 사이로 선실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훑는다. 그의 숨소리가 닿는다. 곧이어 입술이, 끈적한 타액이 그 자리를 채운다.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꼽으로, 배꼽 아래…
허벅지 사이에서 그의 입술이 느껴진 순간, 흠칫- 그녀의 배 아래에서 무언가가 찌릿하고 올라왔다. 성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틀고 다리를 오므렸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벌인 일에 놀라 고개를 들려는데, 여명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녀가 빨개진 얼굴을 돌리는 사이, 그의 입술이 내려갔던 방향을 그대로 다시 타고 올라왔다.
그렇게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한 순간, 성녀는 자신의 몸에 남은 게 새하얀 천 쪼가리 두 장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은밀한 말들이 많았건만, 성녀는 부끄러움 때문에 아무것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온 건, 심술 난 어린아이 같은 말뿐.
“왜… 왜 이렇게 잘해?”
여명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답했다. 그는 성녀의 몸에 반쯤 몸을 기댄 채, 그녀의 몸을 천천히 매만졌다.
왼손이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뒷덜미를 쓸고 내려와, 가슴으로.
오른손은 등허리의 깊숙한 부분을 쓸고 내려가, 달덩이 같은 엉덩이로.
성녀는 이번에도 반항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이제 막 태어난 새처럼 몸을 파닥일 뿐이었다.
그의 손을 따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가슴. 그녀는 자신의 가슴이 이렇게나 부드럽고 민감한 분위인 걸 처음 알았다.
둔부 사이로 흘러드는 손바닥. 성녀는 여명의 손이 왜 이렇게 축축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가 손가락으로 작은 부위를 건드리자마자, 축축한 건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그녀는 자신의 몸이 낯설었다. 단단하게 사격 자세를 잡던 허리는 이미 흐물흐물해졌고, 발가락과 손가락은 쉴 새 없이 꼼질댔다.
이 순간, 문자 그대로 그녀의 육체는 그의 것이었다. 그의 손에 조각되는 눈 뭉치요, 그의 손가락으로 연주되는 악기였다.
아, 여명, 여명.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파르르 떨며 여명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웠다. 땀이 식어가는 피부가, 여명의 손에 닿지 않은 몸의 모든 부분이.
뜨거웠다. 여명의 피부와 맞닿는 모든 부분이, 모르는 액체가 흐르는 허벅지가.
그녀는 흐느꼈다. 차가움과 뜨거움, 흥분과 부끄러움, 쾌락과 애정, 그리고 넘쳐나는 마음 때문에.
스, 하, 스, 하. 평생 겪어보지 못한 감각의 파도에 성녀는 심호흡했다. 여명도 손을 멈추고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여명을 올려다봤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애틋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성녀는 괜히 심술이 나서 그의 가슴을 깨물었다.
“앗.”
여명이 움찔거리자마자, 성녀는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원래는 위에 올라타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막 절정의 파도에서 벗어난 몸은 그만한 힘을 내지 못했다.
“이제 내 차례야.”
말은 그렇게 했으나, 성녀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공부 좀 해둘걸. 성녀님의 몸매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던 나이 든 여사제들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여명의 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조심조심 단추를 끌렀다. 사락, 사락- 벌어지는 그의 셔츠는 그녀의 땀으로 젖어있었다.
여명은 성녀를 막지 않고 조용히 지켜봤다. 이윽고 그녀의 손길이 셔츠를 다 풀고, 바지로 향하는 순간.
성녀는 바지 위로 우뚝 솟은 무언가를 보고 흠칫, 손을 멈췄다.
“….”
그녀는 잠시 고개를 들어 여명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바지를 풀었다. 꿈틀거리는 그것 때문에 몇 번이고 손이 미끄러졌으나, 결국 바지 지퍼를 내리고 벗기는 것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속옷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기쁨인지 당황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저기…”
“응.”
“이거… 나, 나 때문에 커진 거지?”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녀는 무언가 다짐한 듯 그의 속옷 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힘껏 속옷을 벗기려 했으나, 벗겨내지는 못했다. 속옷이 그의 물건에 턱턱 걸린 까닭이었다.
이미 그의 희롱에 몸이 쫙 빠진 성녀는 그 이상 힘을 주지 못하고 여명을 바라봤다.
“이, 이거 어, 어쩌지…? 조, 조금 줄일 수 있어?”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웃으며 성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올렸다.
“우리, 성녀님, 이쪽은 하나도 모르시네요.”
장난스러운 목소리. 성녀는 우물쭈물 애꿎은 이불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전부 제가 하겠습니다.”
“이… 변태.”
“변태를 사랑한 대가를 치르는 날이군요.”
서로 속옷 차림으로 하기에는 너무나 직설적인 말, 그렇기에 더욱 진실된 말.
성녀가 꿀꺽, 침을 삼키는 사이, 여명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달깍- 후크가 풀리며 커다란 언덕을 가리고 있던 두 개의 천이 사라졌다.
곧이어, 여명의 상체가 성녀의 배를 꾹 눌렀다. 성녀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속옷이 자신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는 걸 느끼고만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만에 알몸이 된 성녀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수줍게 모이는 어깨는 아름다웠고, 조심스레 가슴과 치모를 가린 손은 사랑스러웠다.
“그, 그렇게 보면 부, 부끄러워.”
여명이 그녀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성녀가 중얼거렸다.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그녀의 몸을 쓸며 말했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았네.”
마지막 하나? 성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여명의 손은 이미 그녀의 안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아, 안대는 안되는데…”
오늘 처음으로 보인 성녀의 거부 반응. 여명은 안대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왜?”
“어, 엄마랑 전대 성녀님이… 그, 내 눈은 보여주지 말라고 해, 했거든. 내 눈매가 엄청… 이상해서… 그게…”
성녀가 무어라 설명하는 사이, 여명이 그녀의 안대를 벗겨버렸다. 다른 부위를 가리고 있던 성녀는 얼굴을 가리지도 못한 채 고개만 저었다.
대체 뭐가 그리 두려운지, 눈을 꼭 감은 모습.
여명은 그녀의 속눈썹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상하다고? 예쁘기만 한대?”
“…저, 정말?”
그녀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평소라면 모를까, 이미 서로 알몸을 내보인 사이 아닌가.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여명은 왜 전대 성녀님과 모리네가 그녀에게 안대를 차게 한 건지 깨달았다.
그녀의 눈과 마주하기 무섭게, 어떤 파장이 흘러나와 그의 내면을 후려쳤다.
그의 경지가 조금만 낮았다면, 바로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정도로 진한 마나의 파장.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경지를 이룬 여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성녀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파장을 받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손을 뻗어, 조심스레 성녀의 볼을 쓸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매의 그것처럼 진한 노란 빛이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니, 마치 햇빛을 머금은 노란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는 검었다. 검은 수의처럼 은은하게 빛을 삼키는 그 눈동자는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었다.
그래, 두 개 모두 그녀의 눈동자였다. 흔히 오드아이라 불리는 양쪽 색이 다른 눈동자.
“여, 역시 이상해?”
여명이 뚫어져라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성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식지 않는 열기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불안이 그 열기를 집어삼키기 전에, 여명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니, 너무 예뻐.”
그는 성녀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며 덧붙였다.
“평생 나만 보고 싶을 정도로.”
그의 상체에 눌린 커다란 가슴이 부드럽게 그의 피부를 감싸고, 그 너머로 성녀의 기쁨이 타고 올라왔다.
***
성녀는 밀려드는 감각의 파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여명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사랑스러움, 맞닿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뜨거움, 그리고 천천히 속옷을 벗는 그의 손길.
태어난 순간 그대로, 두 사람은 몸을 겹쳤다.
드디어.
성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평생 기억될, 한 사람에게 정조를 주는 순간.
달빛조차 그녀의 다짐을 본 듯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고, 창밖의 물소리조차 흐릿해졌다.
하지만 여명의 남근이 피부에 닿는 순간, 그녀의 다짐은 살짝 삐끗했다.
속옷 너머로 볼 때는 느낄 수 없던 뜨거움과 묵직함. 성녀는 차마 아래를 보지 못하고 물었다.
“…워, 원래 그렇게 커?”
성녀는 몰랐지만, 그건 남성을 자극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조금 더 단단해지는 그것을 느끼고 아래를 봤다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저, 저기… 작게 했다가 안에서 크게 하면 안 될까?”
“….”
“아, 안 되나?”
“성녀.”
여명의 목소리에 더 이상 장난기는 없었다. 그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얽히는 설육, 선명해지는 육체, 흐릿해지는 정신.
“사랑해.”
성녀는 그 단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여명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몸의 힘을 풀었다.
여명의 손이 조심스레 그녀의 허벅지를 눌렀다. 성녀는 그의 손을 따라 다리를 벌렸다.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흐읏…”
들어왔다. 몸의 감각이 소리쳤다. 솜털들이 곤두서고, 그의 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 그의 물건을 본 성녀는 몸에 들어온 남근이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다리로 여명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 더 편하도록, 조금 더 나를 사랑하도록.
여명은 성녀의 눈에 키스했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허리가 움직임을 따라 부드러운 혀가 그녀의 얼굴을 위로했다.
“아, 으…”
고통과 환희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여명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성녀의 달뜬 숨이 점점 더 격해졌다.
“사랑해.”
“나, 나도… 나도 사랑해.”
두 사람의 속삭임이 교차하는 순간, 서로의 몸이 맞닿았다.
새하얀 순결이 붉은 눈물을 흘렸다.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공간, 다른 세상에서 태어난 두 개가 하나가 되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 흑…”
격해지는 호흡. 여명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가 통증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허리를 뒤로 뺐다.
유리 공예품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행동.
이미 정신이 반쯤 흐려진 성녀였지만, 그녀는 그게 여명의 쾌락과 아무 상관도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직 그녀를 배려하기 위한 행동.
침대에 누운 순간부터, 그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아빠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아니면 세티에게?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순간은 오롯이 그녀와 그의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성녀는, 그의 귀를 살짝 깨물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줘… 전부.”
“….”
다음 순간, 여명의 기세가 바뀌었다. 그의 몸짓은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딱 하나가 달라져 있었다.
그는 강하게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된 것처럼.
성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란다는 듯 그에게 더욱 몸을 맡겼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수렁인지도 모른채.
곧바로, 그녀는 대가를 치렀다.
“아…!”
여명의 무게가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그는 손이 가녀린 손과 허리를 붙잡은 채, 그녀의 몸을 파헤쳤다.
주무르고, 꼬집고, 빨고, 깨물고, 찌르고, 휘젓고… 그 외에 사람의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으로.
“여, 여명, 자, 잠깐만…!”
성녀는 쏟아지는 감각에 겁을 먹고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아, 앗… 하윽!”
발가락 열 개가 동시에 곤두서는 감각. 아주 잠깐 제정신을 차린 성녀는, 뒤늦게 세티가 첫날에 걷지도 못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기억은 땀과 거친 호흡 아래로 사라졌다.
여명이 떠오르기까지는 한참이나 남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