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02)
을 위한 세계는 없다-302화(302/817)
***
햇빛이 성녀의 기다란 속눈썹을 간질거리는 시간.
태양을 피해 고개를 돌리던 성녀는 결국 잠에서 깨어났다.
아주 오랜만에 안대 없이 햇빛을 마주한 까닭일까? 눈을 뜰 수 없었다.
빛 아래에서 눈을 뜰 수 없다니, 참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안대를 찾아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걸리는 건 단단하면서도 탱탱한 무언가뿐이었다.
이게 뭐지. 실리콘인가?
잠시 손에 걸린 물건을 콕콕 찌르던 그녀가 작게 실눈을 뜨려는 그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깼어?”
“….”
성녀는 화들짝 눈을 떴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기가 만지작거리던 게 여명의 가슴이라는 사실을, 베고 있던 베개가 사실 그의 팔이었다는 사실을 연달아 깨달았다.
“어…?”
“괜찮아? 아직도 피곤해?”
성녀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여명이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마치 한 번도 키스해보지 않은 연인들처럼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어젯밤에 있던 일들이 폭풍처럼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목마르지?”
그녀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여명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침대 옆으로 손을 뻗어, 탁자에 놓인 작은 생수통을 가지고 왔다.
그가 내민 물을 마시고 나서야, 성녀는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노곤한 몸이, 배 아래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이 모든 것들이 현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와, 와아…”
성녀의 입술 사이로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쁨, 즐거움, 혹은 그보다 더한 감정이 뒤섞인 소리.
그러자 그녀의 이마를 매만지고 있던 여명이 피식 웃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작게 속삭였다.
“더 잘까? 아니면 밥 먹으러 갈래?”
“아, 아니, 어, 그게, 음, 어…”
성녀의 머리는 여전히 삐걱거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슬그머니 이불을 들어 올리고, 내부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태어난 상태 그대로 노출된 두 사람의 몸이었다. 뒤늦게 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부끄러운 깨달음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는…
“어? 이… 이거 왜 이렇게 깨끗해?”
“응?”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휘어지는 여명의 눈썹, 성녀는 당혹감을 느끼며 이불 사이를 가리켰다.
“그, 그거 없잖아. 그거.”
“…그거?”
“그… 그…! 피! 핏자국! 핏자국 어딨어?”
설마 안 나온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지금도 아파서 다리가 안 움직이는데?
여명이 말했다.
“…당연히 치웠지.”
“치웠다고? 어디에?! 세탁실?! 아니면 설마, 버렸어?!”
성녀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격한 반응과 달리, 여명은 여유작작했다. 그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인벤토리.”
“…아?”
“피 말고도 그, 여러 가지가 묻었잖아? 휴지도 없고… 그래서 새 이불로 갈았지.”
“….”
“지금이라도 꺼내서 보여줘?”
성녀는 차마 보여달라고 하지 못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이마를 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그녀는 이불을 끌어 올려 새빨개진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여명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핏자국은 왜 찾은 거야?”
“아니, 그, 그게 전통이라서…”
지금은 구닥다리로 평가되는 차원문 너머의 옛 전통. 하지만 종교인인 그녀는 그 전통을 구닥다리로 넘길 수 없었…
“그 전통, 바로 어제까지 유니콘의 뿔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도 적용되는 거야?”
“….”
대답할 말이 없어진 성녀는 더 강하게 이불을 뒤집어썼다. 여명은 웃으며 이불 위에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 너머로 들리는 옷 입는 소리.
그가 옷을 거의 다 차려입을 때쯤, 제정신을 찾은 성녀가 이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여명.”
“응?”
“…좋았어?”
셔츠 단추를 잠그던 여명은 손을 멈추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지, 내가 이상한 질문 했나? 성녀가 눈을 굴리는 사이, 여명이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그러는 성녀님은요? 좋으셨나요?”
설마 질문에 질문으로 답할 줄 몰랐던 성녀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나는 좋았… 아니, 엄청 좋았어.”
“그럼 저는 그거에 백 배쯤 좋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성녀는 여명의 장난스러운 미소 아래 숨겨진 진심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랄까, 몸에 쌓여있던 긴장감이 날아가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몇 시야?”
“아침과 점심 사이.”
“….”
그래서 밥 먹으러 가자고 했던 거구나. 성녀는 텅 빈 위장을 느끼며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발가락에 힘을 준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 굳어버렸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하, 하반신이 아파. 모, 못 움직이겠어.”
“어… 미안?”
“….”
여명의 사과를 받은 성녀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그가 뒤늦게 덧붙였다.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밥 가지고 올게.”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명.
성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한방 되돌려줄 말이 없나 고민하다가, 불현듯 뭔가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 몸에 치유의 축복을 걸면, ‘그것’도 재생될까?”
“….”
오케이, 성공. 성녀는 당혹한 여명의 표정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성녀님, 제발.”
여명이 얼굴을 쓸며 말하자마자, 성녀는 고개를 쭉 내밀었다.
“농담인데?”
“….”
“진담인 줄 알았어? 어? 우리 여명, 알고 보니 엄청 변태였네?”
여명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성녀가 키득거리는 사이, 그도 웃으며 선실의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아침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성녀의 눈치 없는 한마디가 훈훈한 분위기를 꽁꽁 얼려버렸다.
“다음에는 세티 껴서 셋이서 하자.”
“…?”
왈칵 눈살을 찌푸린 여명이 고개를 돌렸다. 성녀는 내가 뭐 잘못 말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 반응은 뭐야?”
“….”
여명은 성녀를 지적할 수많은 성 윤리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어진 한 마디가 그의 모든 대답을 틀어막고 말았다.
“싫어?”
“당연히 싫…”
…지는 않지. 여명은 말끝을 흐리다가, 슬그머니 선실 바깥으로 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티가 허락하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이 짐승- 성녀의 마지막 한 마디가 선박 복도를 울렸으나,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
시카고에서 호주로 향하는 고속 화물선의 식당 칸.
한때, 위대한 불사의 왕의 새끼손가락이자 당당한 카탁포이어 가문의 네크로맨서였던 소녀가 몸을 떨고 있었다.
딜라 카탁포이어. 그녀는 사고 친 강아지처럼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힐끗거렸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 앞에 앉은 소녀와 마주 보지 않기 위해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조용히 그녀가 가지고 온 책을 읽고 있는 홍세티.
환상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여전히 무시무시한 푸른 눈동자를 빛내던 그녀는, 딜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핑계 대봐.”
그녀가 말한 핑계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시카고 한복판에서 싸움이 벌어질 때까지 책을 회수해오지 못한 핑계.
딜라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 그게… 워, 워낙 보안이 철저해서… 채, 책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시간을 나, 낭비했습니다.”
“그래?”
팔락, 책이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딜라는 더욱더 고개를 숙였다.
“실망인걸.”
“….”
“일주일 넘는 시간 동안 돌아오지 못한 핑계가… 그게 다야?”
딜라는 그래도 시카고의 네크로맨서 창고를 다 털었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억만금을 가지고 온다고 해도, 그분의 말씀을 제 시간에 전하지 못했다는 죄를 덮기에는 모자랐으니까.
하지만 딜라는 끝끝내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눈앞의 소녀는 그분의 첫 번째 사도였고, 내키면 언제든 그녀를 ‘폐기’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에게 어둠 속의 그분을 만나고 무려 일주일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결국, 딜라가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
딜라가 푹 고개를 숙이자, 세티는 아무 말 없이 책을 내려놨다.
탁, 탁. 그녀의 손가락이 식탁을 두들기는 소리. 딜라는 자신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푸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려나? 아니면 엔진에 처넣으려나?
어째서일까, 이 순간 딜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못 이룬 꿈도 아니요, 배신한 네크로맨서 동료들도 아닌, 어제 먹었던 샌드위치였다.
부디, 죽기 전에 그 샌드위치나 한 번 더 먹어봤으면…
그때, 선실에 울린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끊었다.
“뭐 하고 있어?”
천여명, 창고에서 봤던 무시무시한 존재가 이 땅에 풀어놓은 간택자의 목소리.
그가 딜라의 옆자리, 그러니까 세티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탁자를 두들기던 세티의 손가락 소리가 멈추고, 딜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여명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밥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어.”
“왜?”
“선원들이 오늘 점심에 바비큐 파티를 할 거래서.”
“…바비큐 파티?”
“바다에 나갈 때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한테 제물을 바치던 풍습을 재연한다던데?”
오케아노스? 여명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거, 그리스 풍습 아냐? 여긴 미국이고.”
“선장이 그리스인이래.”
세티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명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식사는 됐고, 간식이나 만들어야겠네. 너도 먹을 거지?”
“뭐 만들 거야?”
“음, 글쎄… 어제 식자재 창고 보니까 밀가루가 많던데, 팬케이크라도…”
그때, 딜라가 고개를 휙 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새, 샌드위치요!”
“….”
여명과 세티과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고 나서야, 그녀는 눈치 없이 대화에 끼어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죽기 전에 샌드위치 한 번 먹어보려다가, 진짜로 죽게 생겼네.
짧은 침묵.
딜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화 주제를 돌리기 위해 눈을 굴렸다. 때마침, 헐렁한 여명의 셔츠 사이로 붉은 자국들이 보였다.
그녀는 여명의 목덜미에 있는 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배, 배에 모, 모기가 참 많죠? 제, 제가 모기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주문을 아는데, 가르쳐 드릴까요?”
“…모기?”
여명은 무슨 소리냐는 듯 셔츠를 벌려 딜라가 가리킨 곳을 확인했다. 그렇게 벌어진 셔츠 아래 드러난 건… 모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빨 자국이었다.
“…요즘 모기는 치열이 참 이쁘네?”
곧바로 이어진 세티의 말. 딜라는 문자 그대로 엿 됐음을 느끼고 바로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세티는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리 없는 분노인가? 딜라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그때.
세티가 갑자기 여명의 멱살을 붙잡고 콱 끌어당겼다.
짧고, 굵은 입맞춤.
세티는 바로 여명을 풀어주지 않았다. 여명이 미소 짓는 사이, 그녀는 여명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목덜미에 새겨진 이빨 자국보다도 선명한 자국.
여명은 귀의 이빨 자국을 재생하지 않았고, 세티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의 멱살을 놨다.
“오, 오우야…”
딜라가 감탄하건 말건, 세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여명, 이왕 온 김에 샌드위치는 조금 나중에 만들고, 우선 이 책부터 봐줄래?”
그녀가 여명에게 내민 건 딜라가 가지고 온 책, 불사의 왕이 남긴 인명… 아니, 신명록이었다.
여명은 갑자기 웬 책이냐고 묻는 대신, 책을 펼쳤다.
촤라라락- 수백 쪽에 달하는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울리길 잠시.
책을 덮은 여명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딜라와 세티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게 뭔데?”
세티는 턱을 괴며 대답했다.
“네크로맨서들에게 회수한, 추락한 신의 기록이 적힌 책.”
“….”
“너…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책이야.”
그제야 책의 정체를 깨달은 여명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이거… 무슨 글자로 쓰인 거야?”
“몰라.”
세티는 이번에는 휴대폰을 내밀었다. 반짝이는 휴대폰 화면 위에는 고대 상형문자부터, 차원문 너머의 마법 문자까지 온갖 문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어디에도, 책에 적힌 문자는 없었다.
“이 글자들 외에도 더 찾아봤는데, 이 세상에 이거랑 비슷한 글자는 어디에도 없어.”
“….”
여명은 자연스레 딜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번에도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저, 저도 잘 몰라요. 제가 회수했을 때는 부, 분명 평범하게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적혀 있었어요…”
“책을 회수한 뒤에, 글자가 변했다고?”
“예, 옙! 바로 그 말입니다.”
뭐 그런 개떡 같은 일이 있어?- 여명은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애초에 이 땅에 추락한 별부터가 그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으니까.
“뭔가 마법적인 것 같은데… 우리끼리 이러지 말고, 전문가를 찾아야겠네.”
“마법과 언어학에 능통한 전문가…”
다행히 그런 전문가의 이름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둘 다 하나만 잘하기도 어려운 학문인 만큼, 두 분야에서 모두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니까.
그리고 다행히, 그 전문가는 그들이 향하는 곳에 있었다.
“아카데미 마법 학부장, 가단.”
여명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세티가 푹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했네.”
그러게 말이야. 여명은 고개를 끄덕인 뒤, 책 사이사이에 그려진 삐뚤삐뚤한 그림을 훑었다.
하지만 딱히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은 없었다. 하긴, 글자부터 알아볼 수 없는데, 그림을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그렇게 잠시 책을 훑던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샌드위치 만들어올게.”
샌드위치란 말에 딜라가 함박웃음을 짓고 세티가 그런 딜라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여명이 펼쳤던 페이지가 조용히 펄럭였다.
사람의 머리 대신 검은 개와 매의 머리를 가진 두 신이 나란히 그려진 페이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