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03)
을 위한 세계는 없다-303화(303/817)
***
바다와 비견될 정도로 드넓은 오대호, 수평선이 펼쳐진 호수 위로 수많은 배가 오가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대형 화물선부터 낚시에 여념 없는 통통배, 그리고 관광객들을 가득 태운 여객선까지.
제멋대로 출렁이는 파도를 따라 흘러가는 배들은 천차만별이었지만, 모든 배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배는 따로 있었다.
쫙 빠진 몸체, 화려한 장식, 멋들어진 돛… 일반인은 평생 일해도 살 수 없는 수십 미터짜리 메가 요트.
졸부의 그것처럼 번쩍이는 배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굳이 문제를 지적하자면, 요트를 산 돈이 국민의 세금이란 사실 정도일까.
‘…염병.’
CIA 특별 요원, 스칼렛 오하라는 화려한 요트 안에서 푹 한숨을 쉬었다.
답답한 마음에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임무 중이었다. 요트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녀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 요트의 꼭대기, 빌어먹을 정도로 화려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옥상 방의 문을 열자마자 스칼렛은 팍 눈살을 찌푸렸다. 달짝지근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으므로.
스칼렛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지금은 임무 중입니다.”
그러자 수평선이 보이는 썬 배드에 누워 있던 남자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는 구릿빛 피부에 기다란 코, 그리고 마약쟁이처럼 탁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
누가 봐도 히스패닉 혈통인 걸 알 수 있는 그는 반쯤 비어있는 크리스탈 술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임무 지역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잔소리야?”
“…잔소리?”
“그러지 말고, 그쪽도 와서 한잔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여유가 있을 때는 즐겨야 하는 법이라고.”
주정뱅이의 조언이라. 스칼렛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심한 말을 참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입을 다물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조금 더 순화된 표현으로 한마디를 쏘아주었다.
“3번 대행자. 임무 중 과도한 일탈 행위는 징계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
“지금이라도 그 멍청한 휴가 놀이를 그만두고, 앞으로의 임무 계획에 집중… 3번 대행자?”
“….”
“3번 대행자!”
그녀가 버럭 소리 지르자,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대행자가 반응을 보였다. 물론, 진지하게 그녀의 반응을 돌아본 건 아니었다.
“스칼렛, 저것 좀 봐.”
그는 어딘가 나사 빠진 미소를 지으며 수평선을 가리켰다.
스칼렛은 말 돌리지 말라고 쏘아주려다가, 슬쩍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훑었다.
머나먼 수평선 너머로, 기다란 화물선 한 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저게 뭔데?
“저 배 좀 보라고, 둔간 중공업이 만든 고속 화물선… 실물은 처음 보는데. 멋지지 않아?”
스칼렛은 즉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세계에 몇 대 없는 고속 화물선의 멋을 알아볼 정도로 감수성이 좋지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감수성은 감수성이었고 임무는 임무였다. 스칼렛은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
“3번 대행자, 제발…”
“오, 선상 바비큐 파티 중이군. 부러운데.”
“….”
이 시발 새끼가 진짜. 스칼렛이 어금니를 깨물건 말건, 대행자는 계속 지껄였다.
“아니, 단순한 파티가 아닌가? 고기를 구워서 술과 함께 수염 쓴 남자에게 바친다… 포세이돈에게 제물을 바치는 적도제의 변형인가.”
포세이돈이란 이름이 나온 순간, 스칼렛은 흠칫 몸을 굳혔다. 곧 그녀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대행자를 노려봤다.
어떻게 그 이름을 그렇게 쉽게 꺼낼 수 있느냐는 눈빛.
“…적도제라는 건 없어요. 저건 오케아노스 기념식입니다.”
“아하, 그랬나?”
3번 대행자는 그런 그녀의 눈빛을 가볍게 흘리며 히죽 웃었다. 그는 고속 선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계속 술잔을 홀짝였다.
스칼렛은 그의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대행자, 제발 진지하게 업무에 임해주세요. 이번 임무는 엄청나게 중요한 임무라고요. 아시잖아요?”
귀쟁이 대장을 감시하던 널 불러올 정도로 중요한 임무라고! 스칼렛은 애써 뒷말을 삼켰다.
3번 대행자는 슬그머니 그녀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래, 나도 알아, 안다고. 근데… 로드 하우 아카데미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다고? 내가 능력을 써도 족히 열흘은 걸릴 거리야. 즉, 못해도 열흘의 여유가 있다는 말이지.”
“…비행기가 아니라 배를 타자고 한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대행자는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키득거렸다. 스칼렛이 술잔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사이, 그가 주제를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참… 아쉽게 됐어. 아카데미는 내가 아니라 전 아저씨가 가고 싶었을 텐데 말이지.”
“…2번 대행자님 이야기는 하지 마시죠.”
“전 아저씨, 기사단 단장에게 당한 것도 아니라며? 존나 강한 능력의 문제가 이거라니까? 정작 중요할 때 방심을…”
“…닥쳐요.”
“솔직히 말이야, 스칼렛, 네 책임도 있는 거 알지? 꿀의 혈통이 도시에 있는 걸 알면서도 보고가 늦어서…”
“닥쳐, 베르나르도.”
“드디어 이름을 불러주는군! 역시 화나면 말할 줄 알았어!”
“….”
“우리 마누라도 그렇거든.”
3번 대행자, 베르나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하하, 장난이야. 업무 시작부터 얼굴 붉히지 말라고. 릴렉스, 릴렉… 어이쿠!”
스칼렛은 결국 술잔을 집어 던졌다. 베르나르도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만으로 술잔을 피한 뒤, 껄껄 웃어 재꼈다.
여명 일행이 아카데미에 도착하기까지 16일하고도 반나절이 남은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
항해는 순조로웠다.
여명 일행을 태운 화물선은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오대호를 관통해, 세인트로렌스 수로를 타고 대서양으로 나왔다.
-드디어 미국을 벗어나네요.
멀어지는 아메리카 대륙을 보며 네티가 섭섭함을 표하기도 했지만, 여명은 아카데미로 가려면 다시 한번 미국 지역을 거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로드 하우 아카데미는 대서양이 아닌 태평양에 있잖아.
즉, 일행은 자연스레 대서양-태평양을 관통하는 ‘마크 트웨인 운하’… 그 지역 사람들의 말로는 ‘파나마 운하’라 불리는 곳을 한 번 더 지나야 했다.
성녀와 네티는 교과서에서만 보던 운하를 실물로 볼 수 있다며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운하를 건너는 데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나 걸린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녀들의 지루함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아카데미까지 이어지는 태평양 항로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평범한 배였다면 낚시라도 하며 시간을 때웠을 테지만, 고속으로 움직이는 배에서 낚시는 사치였다.
전파 때문에 인터넷이나 TV도 종종 끊기고, 낚시도 못 하고,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수평선뿐인 항해.
선원들은 이것이야말로 항해의 참맛이라고 주장했다. 적막한 바다와 마주하는 바다 사나이의 멋이라나?
덕분에 성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장거리 항해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뭐, 아무튼.
지루한 항해가 이어질수록, 성녀가 여명을 귀찮게 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밥 먹다가도 대뜸 여명의 허벅지를 꼬집거나, 세티에게 말했냐고 넌지시 물어보거나, 아예 남들 다 보는 곳에서 여명의 귀를 깨물기도 했다.
그건 마치 처음 야한 걸 본 중학생 같은 태도였다. 지금이야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넘어갈 수 있다지만, 아카데미에서는 하면 안 되는 일.
결국, 참다못한 코르부스가 한마디 했다.
-성녀님, 선실 벽은 방음이 거의 되지 않습니다.
성녀는 그제야 구조상의 이유로 선실의 방음 기능이 쓰레기 같다는 사실을, 그리고 옆방에 각각 세티와 네티가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충격과 부끄러움이 얼마나 컸는지, 그녀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성녀님, 언니한테 소리 안 내는 비법이 뭐냐고 같이 물어볼까요?
성녀의 침묵을 딱하게 여긴 네티가 정신 나간 조언을 해주고, 그걸 실행에 옮긴 대가로 두 사람 모두 세티에게 혼나는 나날을 보내길 잠시.
[누가 제발 이 악몽에서 나를 깨워주게! 주인이여! 대체 어디로 간 건가?! 제발 구해주시게!]네티의 음담패설에 경악한 유니콘이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고, 세티의 훈계로 성녀가 첫 사춘기를 훌륭히 이겨낼 때쯤.
그러니까, 로드 하우까지 아카데미 도착까지 하루 시점에서 여명이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
일행들의 선실 중 그나마 가장 넓은 성녀의 방.
코르부스가 감지 마법과 방음 마법을 쫙 깔아놓은 가운데, 여명 일행이 각자 자리를 잡고 방에 둘러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아니, 부리를 연 건 코르부스였다.
“저 네크로맨서는… 괜찮은 것이오?”
딜라 카탁포이어를 여기에 끼워도 되냐는 말. 여명과 세티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얘는 우리 개새끼거든요.”
“…제자와 세티 양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본인도 믿겠소.”
그렇게 딜라에 대한 정리가 끝나고, 일행들의 시선이 여명에게로 모였다.
여명은 바로 입을 열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우선, 설명하는 동안 화내거나 끊지 말아줘. 알았지?”
그런 경고와 함께 시작된 이야기는, 꿈속에서 진의를 얻은 부분부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일행들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여명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꿈속에서 완성한 진의, 아야톨라, 새로운 무술, 혜성검…
그가 몇 번이고 죽을 뻔했다는 부분에서 성녀가 대화에 끼어들려고 했지만, 세티가 그녀를 막았다.
하지만 새의 머리를 한 거인과 별의 세계에서 만난 이야기로 넘어가자, 세티가 가장 먼저 말을 끊었다.
“…몸이 붕괴한다고? 그때는 그런 말 안 했잖아!”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으니까.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았어.”
여명이 애써 가볍게 대답했으나, 세티의 반응은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위험을 지닌 채 여명이 주지사와 싸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짧은 침묵.
성녀가 무어라 위로하지 못하고 여명에게 입술을 벙긋거리는 사이, 세티가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절대로.”
눈가와 목소리에 물기를 머금은 세티의 경고… 아니, 부탁. 여명은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응, 다시는 안 그럴게.”
세티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는 계속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는 평소 습관과 달리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네티와 코르부스가 모르는 드워프 가주, 추락한 별에 관한 이야기까지, 전부.
그렇게 설명이 끝나고, 모두가 여명의 설명이 불러온 충격 속에서 고민하길 한참.
가장 먼저 생각을 정리한 코르부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자여, 이제와서 이걸 다 말해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단순히 우리가 가장 믿을만한 사람들이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구려.”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감 때문입니다.”
감? 뜬금없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여명의 입으로 모였다. 여명은 세티, 성녀, 네티, 코르부스… 일행의 눈동자를 하나하나 다 마주쳤다.
다음 순간, 코르부스가 부리를 딱- 다물며 말했다.
“불길한 예감이오?”
“…예.”
“그렇다면 이 설명은 경고였겠구려. 무슨 일이 생겨도 놀라지 말라는 경고.”
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코르부스는 빙그레 웃었다.
“제자여, 왜 그리 걱정이 많소?”
“…코르부스.”
“이 자리에서,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다시 평화로운 나날이 열릴 거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제자가 언제 사건 사고가 끊인 날이 있었소? 당장 아카데미에서 드레이테리얼로 날아간 게 반년도 지나지 않았소만.”
장난스러운 스승의 말투에, 여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래도 걱정 때문에 숨기고 있던 일을 알려준 것은 다행이오.”
딜라를 제외한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여명의 진의를 자세하게 들은 네티는 조금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자의 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우선, 아카데미에 돌아가자마자 그 이름 없는 무술을 완성하기 위한 수련부터 하는 게 어떻소?”
“….”
“착실하게 쌓은 실력이야말로 모든 걱정을 이겨내는 만병통치약이니, 내 전력을 다해 제자를 돕겠소.”
어째서일까, 여명은 코르부스의 말에서 크나큰 위로를 느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코르부스.”
“이럴 때는 스승이라 부르시오.”
“예, 스승님.”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끝나고, 일행들이 긴장을 풀고 제각각 다른 이야기들을 꺼내는 순간.
바다 건너 머나먼 시베리아에서, 한 예언자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