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06)
을 위한 세계는 없다-306화(306/817)
***
학생 기숙사와 멀리 떨어진 아카데미 북부의 한 카페.
수업 시간인 탓에 손님이 거의 없는 카페 구석에서, 금발의 소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메뉴판을 노려보던 소녀, 쇠미리가 대뜸 말했다.
“이 아포카토라는 건 대체 뭐 하는 음식일까요? 커피? 아이스크림?”
곧바로 맞은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둘 다야.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뿌린 디저트거든.”
쇠미리는 청소복을 입은 남자, 환상으로 정체를 숨긴 여명과 메뉴판을 번갈아 봤다.
“그럼 이 셰케라토라는 건요?”
“에스프레소에 얼음과 시럽을 넣고 칵테일처럼 흔들어 만든 음료야. 거품이 많은 냉커피라고 보면 돼.”
“오… 그러면 코레토는?”
“에스프레소에 술 탄 거.”
“…커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건 다 어떻게 알아요?”
“다큐멘터리에서 봤어.”
그런가- 고개를 주억거린 쇠미리는 다시 메뉴판을 바라보다가, 종업원을 불러 여명에게 물어본 커피를 종류별로 다 주문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네티는 이게 다 뭔가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일행이 도착한 걸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 피눈물의 환상은 어떻게 꿰뚫어 봤는지… 중요한 질문이 얼마나 많은데 커피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언니와 형부가 묻지 않는 걸 그녀가 나서서 물을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조용히 눈치만 봤다.
이윽고 커피가 나오고, 네티가 은근슬쩍 코레토를 홀짝거릴 때쯤.
쇠미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쇠똥구리 씨.”
“….”
“제가 기억하는 청소부는, 여전히 인천을 떠날 때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나요?”
여명은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게 첫 번째 질문이야?”
“예,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꼭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왜?”
“떠나실 때랑 지금이랑 많이 달라지셨잖아요. 가진 힘도, 의지도, 그리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네티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사이, 쇠미리가 두 자매를 보며 덧붙였다.
“인연도.”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커피를 마시는 세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
“그래요? 그러면 왜 성녀랑… 이거 했어요?”
쇠미리가 양손을 들어 어떤 제스처를 취했다. 손가락으로 만든 구멍에 다른 손가락을 넣었다 빼는 손짓. 막내가 종종 보여주던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손짓이었다.
다음 순간, 네티가 푸흡, 커피를 뿜었다. 여명은 대수롭지 않게 옷에 튄 커피를 닦으며 대답했다.
“욕심이 생겼으니까.”
“…욕심이요?”
“목표 이후의 삶을 가지고 싶은 욕심.”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차원문 너머에서 만난 어떤 엘프가 조언해주더라고. 복수는… 수단이라고, 억울함을 풀고 행복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
쇠미리는 살짝 입을 벌렸다. 여명에게 그런 말을 해준 엘프가 누군지 뻔했으니까.
“멋진 말이지만…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한 마리도 못 잡을지도 몰라요.”
“두 마리를 다 잡을 수도 있겠지.”
망설임 없는 대답. 쇠미리는 반박하지 않고 아포카토 속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깨작거리다가, 뭔가 깨달은 듯 손을 멈췄다.
“…그게 시카고에서 얻은 당신의 진의인가요?”
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쉽네요, 어떤 꼰대들 덕분에 못 봤어요.”
“…?”
거기까지 말한 쇠미리는 아포카토를 네티에게 내밀었다. 네티는 거절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그렇게 녹아내린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커피 위로 기다란 선을 그릴 때쯤, 쇠미리는 카페 바깥을 보며 말했다.
“제 질문도 끝났으니, 이제… 아카데미를 떠나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드릴게요.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시죠?”
“나와 세티의 대역이 있다는 것까진 알고 있어.”
네티가 드레이테리얼로 넘어올 때 해줬던 말.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여명이 그 말을 끝내기 무섭게, 카페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인영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학생복을 입은 한 쌍의 남녀.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본 네티가 화들짝 놀랐다.
“어?!”
뒤늦게 그들을 본 여명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반응을 보여줬다.
이제 막 가게로 들어온 두 사람은, 여명과 세티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왔어요? 늦었네요.”
쇠미리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변장한 두 사람은 쇠미리의 옆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수업 중이었습니다.”
“아, 맞다. 그랬지.”
“…다음 수업이 제미니 선생 수업이라 다행이지, 이렇게 계속 수업 빠지면 정말로 유급당할 겁니다. 진짜 천여명이 돌아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가짜 여명은 후우- 한숨을 쉬더니, 팔짱을 끼고 진짜 여명 일행을 바라봤다. 얼굴 위로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가짜가 말했다.
“아무튼, 이 사람들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이 사람들이 누구길래요?”
“누군지 맞춰봐요.”
쇠미리는 빙긋 웃으며 진짜 여명을 바라봤다. 가짜 여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사이어티에서 새로 잠입시킨 스파이?”
“땡.”
“교장이 보낸 사람들입니까?”
“땡.”
연달아 오답을 내놓은 가짜 여명은 또다시 푹 한숨을 쉬었다.
“…동지, 장난이 심하십니다.”
“하하, 미안, 미안.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
쇠미리는 그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네티가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을 짓는 것과 다르게, 진짜 여명은 조금 심드렁하게 피눈물의 환상을 해제했다.
“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자마자, 쇠미리 옆에 앉은 두 사람이 경악했다.
“어, 어떻게? 차원문 너머에 있는 거 아니었…?”
말끝을 흐리던 가짜 여명은 곧 세티와 네티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씨익 웃는 쇠미리를 바라봤다.
“악질이십니다.”
“그래도 돌아와서 기쁘죠?”
“….”
가짜 여명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여명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온 걸 환영한다. 우리의 은인.”
***
일행은 곧바로 카페를 벗어나 가까운 숙소로 이동했다.
아카데미 직원용 아파트.
잠금장치가 세 개나 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짜 여명과 세티는 즉시 환상을 풀고 정체를 드러냈다.
우선, 가짜 여명의 정체는 쇠미리의 호위인 리메였다.
“하아, 드디어.”
여자의 몸으로 남자 대역을 오래 맡은 탓일까, 그녀는 은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가짜 세티는…
“하, 하하… 오랜만이구나?”
에이바. 시크릿 소사이어티의 스파이이자, 아카데미 청소부인 바로 그 아줌마였다.
그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교복을 입고 있는 게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그사이 여명 일행 또한 환상을 풀고, 각자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쇠미리가 언제 준비한 건지 모를 교복을 가져올 때쯤, 네티가 물었다.
“저기, 미리 언니? 제 대역은요?”
“응? 없어.”
“….”
없다고? 불길함을 느낀 네티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쇠미리가 덧붙였다.
“원래 시리랑 막내가 돌아가면서 변신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귀찮다고 해서….”
“…해서?”
“그냥 결석 처리했지.”
“….”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자매들이랑 다르게 심심하면 수업 결석하는 양아치 이미지를 만들어 놨으니까. 교사들이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야.”
“예??”
뭘 걱정하지 말란 거야?! 네티가 황당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저, 저 학기 초에는 수업 엄청 열심히 들었는데요? 완전 모범생이었는데요?”
“응, 그래서 막내가 이미지 바꾸는데 힘들었다더라.”
“….”
네티는 가증스러운 막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을 부르르 떨었다. 쇠미리가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짓는 사이, 여명이 짝-! 손뼉을 쳐서 시선을 모았다.
“대외적인 이미지는 잘 알겠어. 그 외에 알아야 할 건?”
쇠미리는 세 사람에게 교복을 나눠주며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외부 초빙교사 때문에 생긴 내부 알력 같은 정치적인 문제? 아니면 최근 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수련법? 그것도 아니면… 전윤성과 바오닉 레락에 관한 것?”
“…바오닉이 문제를 일으켰어?”
쇠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아카데미의 기연을 먹어치우려고 하더라구요.”
기연… 여명은 오랜만에 바오닉의 노트를 떠올렸다. ‘작가’의 입장에서 아카데미의 비밀과 미래 이벤트를 적어놓은 노트.
아는 게 죄라고, 그새를 못 참았나.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이걸로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았죠.”
쇠미리는 품에서 작은 약상자를 꺼냈다. 딸기향이 첨가된 어린이용 감기약.
여명이 구더기 공주의 독약인 척, 녀석에게 먹였던 바로 그 약이었다.
“….”
어쩌다 보니 진짜 구더기 공주와 만나고, 그녀가 만든 진짜 독약이 인벤토리에 있는 상황에서 저 약을 보니, 본인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쇠미리가 감기약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벌을 줄까 했는데… 딱히 제 부하도 아닌 사람에게 제가 벌을 주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내버려 뒀어요. 지금은 그냥저냥 있더라고요.”
“…그렇게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닌데.”
“예, 실제로 뭔가를 또 꾸미고 있긴 하던데…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소사이어티는 이미 교장과 결탁했고, 따로 도움을 청할 곳은 본인 가문밖에 없을 테니까.”
레락 가문. 차원문 너머에서 유명한 친 지구파 가문으로 알려진 가문이었지.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기약과 교복을 챙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창문 바깥으로 슬그머니 해가 지고 있었다. 아마 몇 시간 뒷면 기숙사 문이 닫힐 시간.
여명은 간결하게 말했다.
“그러면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우선 정치적인 부분만 말해줘. 나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할게.”
“오늘 바로 기숙사로 복귀하게요?”
“응.”
여명은 세티를 보며 말했다. 그녀와 자매들이 하루라도 빨리 재회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눈빛이었고, 그 눈빛을 읽은 세티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음, 그러면 따로 정리해둔 USB가 있으니까. 옷 갈아입고 기숙사로 가서 보세요. 궁금한 게 있으면 내일 학교에서 물어 봐주시고요.”
“고마워. 정말로.”
“별말씀을. 저도 원하는 게 있으… 응?”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세계수의 결정을 꺼냈다.
드레이테리얼에서 챙겨온, 거대한 결정.
그 크기를 본 쇠미리는 물론이고, 리메와 에이바 아줌마조차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너희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는 대가로, 너에게 주라고 한 물건이야.”
“….”
“조금 떼서 쓰긴 했는데… 괜찮지?”
“예, 물론 괘, 괜찮은데요… 저기… 리메, 잠깐!”
리메가 화난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쇠미리가 그녀를 막았다.
뭐지? 여명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쇠미리가 덧붙였다.
“저, 여명…? 엘프에게 세계수의 결정을 돌려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죠?”
“…따로 의미가 있는 건가?”
그러자 쇠미리는 안도의 한숨인지, 아니면 실망의 한숨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모르시는구나… 역시 그렇겠죠….”
“…뭔데?”
“별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냥 엘프의 관습일 뿐이니까.”
“…?”
여명이 그 관습이 뭐냐고 물으려는데, 쇠미리가 재빨리 결정을 챙기고 그의 등을 두들겼다.
“자, 자, 됐으니까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기숙사 통금에 늦을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중요한 일이라면 나중에 알려주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세티에게 손짓했다. 이제 막 교복을 챙긴 그녀는 자연스럽게 여명과 같은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걸 본 리메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같이 들어갑니까?”
“네?”
“두 사람이 같이 옷을… 아니, 아닙니다.”
여명과 세티 둘 다 그게 어쨌냐는 표정을 짓자, 리메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아.”
그제야 이상한 걸 깨달은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었다. 여태껏 조용히있던 세티가 처음으로 여명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카데미에서는 조금만 참아.”
“….”
여명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세티가 먼저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여명이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은 직후.
쇠미리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세티에게 물었다.
“바깥에서는 안 참았어요?”
뒤늦게 엘프는 귀가 좋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세티가 입을 다물자마자, 네티가 대신 대답했다.
“에이, 자제했죠. 다 같이 몰려다녀서 그런 거 할 틈이 없기도 했고… 아니, 몰려다닌 거 치고는 자제 안 한…? 켁! 언니, 잠깐만! 악! 농담! 농담이야!”
에이바와 리메가 바뀐 세티의 분위기를 보며 당황하는 가운데, 쇠미리만이 작게 미소 지었다.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것처럼.
***
“바오닉? 가문에서 온 편지다.”
사감이 건네준 편지를 받자마자, 바오닉은 후다닥 기숙사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녀석들이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마주 인사할 정신이 없었다.
쾅! 순식간에 기숙사 방으로 들어간 그는 문을 잠그고 침대 위 이불을 덮었다.
곧이어, 조명 대신 휴대폰을 켠 그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뜯었다. 사각, 사각- 편지지가 뜯어지는 소리를 따라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제발, 제발.
그가 편지에서 꺼낸 건, 어떤 약물을 분석한 보고서였다. 가문의 망나니인 그를 아끼는 레락 가문의 집사가 보름 만에 보낸 보고서.
바오닉 레락, 혹은 그에게 빙의된 작가는 손을 벌벌 떨며 보고서에 휴대폰 불빛을 비춰봤다.
보고서에는 아세트아미노펜, 말레인산클로르페니라민, 엘카르보시스테인 등 알아보지 못할 약 성분들이 적혀 있었다.
잠시 약물 목록을 읽던 바오닉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마지막으로 맨 아래 [총평] 이라고 적힌 부분을 읽었다.
“타액에 의해 녹았으나, 이 약물이 시중에 유통되는 감기약이 분명하다…….”
글을 읽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떨림은 팔뚝에서 어깨로, 그리고 온몸으로 전이됐다.
이 씨발, 개 씨발!!!!
이불 속에서 몸을 떨던 그는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혹시나 해서 약을 절반 잘라 성분 분석을 의뢰한 것인데, 혹시나가 역시나였을 줄이야?
작가는 배신감에, 그리고 자신의 멍청함에 치를 떨었다. 그 빌어먹을 귀쟁이 년과 천여명에게 속아서 날린 시간이, 겁먹었던 자신의 시간이 아까워 미칠 거 같았다.
“으아아아아아!”
미리디스 쌍년, 귀를 잘라서 고엽제에 던져버릴 년! 그리고 천여명 이 개새…
몸을 비틀며 마음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던 그는 문뜩, 천여명을 떠올리고 숨을 멈췄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쇠미리가 준 약은 가짜였다지만, 천여명이 준 약은?
혹시 녀석이 준 약은 진짜고, 귀쟁이가 준 약만 가짜였다면?
“….”
순간, 소름이 그의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삼 일 남짓이었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두려움은 의심으로, 의심은 또 다른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천여명 그 녀석이 구더기 공주의 물약을 가지고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물론, 프롤로그 시작 전부터 용을 쓰러트리고, 그 용을 고스란히 풀어준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였지만.
“이런 씨발.”
어쩌지? 당장 귀쟁이에게 가서 진짜 천여명 어딨냐고 따져야 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시카고로 날아가서, 구더기 공주에게 해독제를 사? 구더기 공주와 어떻게 만나려고? 가문의 이름을 팔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면 그년의 음습한 과거를 팔아? 웃기네, 살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럼 어떻게 하지? 호주의 만박불통을 찾아갈까? 그 미친 칭챙총이 만나 줄 리가 없잖아! 그럼 이대로 죽어? 씨발, 죽기 싫어. 어떻게 얻은 삶인데, 죽고 싶지 않아. 침착해, 떨지 말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어떻게?
-끼익.
그의 고민이 터질듯 부풀어 오른 바로 그때, 기숙사 방의 문이 열렸다.
기껏 잠가놓은 방문을 열었다는 건, 사감 혹은… 천여명인 척 연기하는 귀쟁이가 왔다는 뜻.
바오닉은 이불 속에서 숨을 죽였다. 귀를 기울여보니, 저벅저벅 방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뭐가 불만인지 방 곳곳을 둘러보다가, 그의 침대 앞에서 멈췄다.
“바오닉… 아니, 작가.”
작가는 슬그머니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왜.”
“가문에 편지를 보냈다던데. 뭘 한 거냐?”
“…그게 왜 궁금한데? 나는 가족한테 편지도 보내면 안 되냐?”
“네 가족 아니잖아.”
빙의자라는 걸 꼬집는 말. 바오닉은 속에서 무언가 솟아오르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내가 뭘 하건, 그쪽이 무슨 상관이야? 너는 연기나 잘해! 오늘도 보니가 멋대로 땡땡이쳤더만! 응? 여학생이랑 남학생이 같이 땡땡이치면, 어떤 소문이 날지 모르냐!?”
“알지.”
“아, 알고 계시다? 나한테 그딴 약을 먹인 것도, 전부 알아서 그랬냐?!”
바오닉은 이불을 확 걷어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작은 전기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제압하는 데 특화된 생체 전류 주문.
덩치 큰 괴수라도 한 방에 제압할 수 있는, 그의 히든카드 같은 마법이었는데…
전류 주문이 담긴 손은 상대에게 닿지 못했다. 그가 손을 휘두르기도 전에, 천여명이 그의 손목을 붙잡아 버린 탓이었다.
손목을 붙잡는 게 보이지도 않았다. 일반적인 초인의 수준을 벗어난, 어마어마한 속도.
귀쟁이 호위가 이렇게나 강했었나? 기껏해야 중반부터는 이름만 나오는 조연이었을 텐데?
손목을 붙잡힌 채 굳어버린 바오닉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운데, 여명이 웃으며 말했다.
“전기 마법… 드디어 완전한 마법사가 됐구나?”
“….”
많은 게 담긴 말이었다. 무엇보다, 연기하던 엘프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기도 했다.
“너, 너…”
작가가 침을 꿀꺽 삼키건 말건, 천여명은 남은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빈손이었다.
이게 뭐야? 조조가 순욱에게 보낸 빈 찬합 같은 건가? 바오닉이 겁먹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여명은 가볍게 손을 쥐었다.
직후, 그의 손 위에 놓인 것은… 잘 포장된 분홍색 가루였다.
익숙한 가루였으나, 문제는 포장지였다. 구더기 공주 특유의 분홍색 상징이 새겨진 포장지라니.
저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짜였다.
“늦기 전에 먹어.”
여명이 손을 풀어주며 그리 말했다. 딱히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작가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그는 ‘늦기 전’이란 표현에서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귀쟁이 년이 준 감기약과 달리, 여명이 준 약은 진짜였던 것이다!
바오닉은 손목이 욱씬거리는 것도 잊은 채 후다닥약 봉투를 뜯어 삼켰다. 진짜라서 그런가? 감기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딸기향이 났다.
“그러다 체하겠다. 물 좀 줄까?”
“으, 읍, 응…”
물과 함께 약이 몸으로 넘어갔다. 작가는 그제야 살았다는 걸 실감했다. 살았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그는 살았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여명이 걸레와 빗자루를 들고 그의 앞에 섰으니까.
“뭐 했길래 이렇게 더럽게 살았냐?”
“….”
‘네가 이 방에서 안 자는 걸 숨기기 위해 사감이 청소도 못 하게 해서 그렇다-‘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녀석은 실종되기 전부터 사감보다 더 청소를 잘한 인간이었으니까. 모르고 보면 경력 두 자릿수의 청소부처럼 보일 정도였다…
뭐, 어쨌거나, 여명은 그에게 빗자루를 내밀며 준엄하게 말했다.
“그간 사정이나 들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우선, 청소부터 하자.”
“….”
“창틀에 먼지 남아있으면 오늘 못 잘 줄 알아.”
뒤늦게나마, 바오닉은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