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07)
을 위한 세계는 없다-307화(307/817)
***
밤의 어둠 속에서, 세티는 스타킹을 끌어 올리고, 신발을 신었다. 오랜만에 신는 학생용 신발은 입학식 때의 그것처럼 낯설었다.
탁, 탁.
신발에 발을 맞춘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밤의 어둠과 마주했다. 어두컴컴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숨결처럼 그녀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동자가 어둠에 충분히 익숙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세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이 닿는 곳은 학생들이 있는 기숙사가 있는 섬이 아닌, 외부인들과 교직원들이 있는 북쪽 섬의 해변이었다.
그랬다. 그녀는 여명과 달리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매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었으므로.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밤의 해변에 쪼그려 앉아 있던 창백한 회색 머리의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일찍 오셨네요.”
딜라 카탁포이어.
세티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몸을 훑었다.
새하얀 셔츠에 검은 조끼를 입고 있는 걸 보니 그새 바텐더, 혹은 그와 비슷한 직업을 얻은 듯싶었다.
아카데미 항구 검문소를 통과하자마자 따로 잠입 명령을 내렸으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아카데미 내부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
세티가 말했다.
“이런 쪽에서는 생각보다 유능했네.”
“그… LA 시절에 숨어다니던 경험 덕분에…”
“아니면 아카데미가 무능했거나.”
“….”
“…뭐, 어느 쪽이건 자리를 잡았다는 게 중요하지. 정확히 어디에 자리 잡은 거야? 호텔? 외부인 술집?”
딜라는 볼을 긁으며 답했다.
“저기, 그… 게임샵에…”
“…게임샵?”
“건물 하나에 당구장, 가라오케, 오락실이 다 들어 있는 곳인데… 고학년 학생들이 자주 들락거린다고 해서… 잠입하는 김에 접선도 쉽고, 정보도 모을 만한 곳에 잠입하려고…”
딜라는 세티의 반응을 살피며 계속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이렇게나 유능한 부하라는 걸 최대한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세티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잘했어.”
“…가, 감사합니다.”
“과정 중에 흑마법처럼 꼬리가 밟힐 일은 하지 않았지?”
“예, 물론이죠. 돈이랑, 그, 가짜 신분증만으로 취업… 아니, 잠입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딜라는 입술을 핥았다.
말빨과 연기력으로 게임샵 사장을 휘어잡고 취업에 성공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쓸모 있는 부하라는 걸 증명할 기회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다음 순간,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 손가락이 세티의 등허리를 훑었으니까.
“?!”
세티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쭈뼛 세우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무기를 휘두르지 않은 건, 척주기립근 사이에 멈춘 손가락의 감촉이 너무나 익숙한 까닭이었다.
역시나,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와 마주했다.
“…왜 여기 있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인데.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헤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남학생용 교복을 입은 여명이 대답했다. 세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그를 바라봤다.
넘실거리는 파도 소리, 짧은 눈싸움.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쪽은 여명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여자 기숙사에 가봤더니 없길래, 찾아다녔지.”
“뭐? 이 시간에 여자 기숙사에는 왜 갔어?”
“청소하느라 잠은 안 오고, 네가 자매들이랑 잘 만났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뭐 그런 거지.”
“….”
“아, 네티가 회초리 들고 막내 쫓아다니더라. 자기 덩치 절반밖에 안 되는 애한테 참.”
세티는 ‘막내는 혼나도 싸다’ 라는 말을 애써 삼키고 여명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됐고, 얼굴 봤으니 이제 돌아가.”
“왜? 보여주기 싫은 광경이라서?”
“….”
알면서 왜 물어? 세티는 한 번 더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명이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숨기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같이 하기로 했잖아. 그게 더러운 일이든 깨끗한 일이든… 뭐든 간에.”
“….”
세티는 아무 말도 없이 여명을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결국은 그도 알아야 할 일이었다.
그녀는 붙잡힌 손에 힘을 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란 뜻이었다.
그렇게 여명의 미소와 딜라의 제발 딴 데 가서 했으면 이란 생각이 교차하길 잠시.
저벅, 저벅.
북쪽 시내의 야경을 뒤로한 채, 해변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딜라는 흠칫, 몸을 굳혔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돼지머리 인간이라니.
“저건…”
세티가 딜라의 말을 끊었다.
“놀라지 마. 너보다 먼저 나한테 잡힌 선배니까.”
“….”
딜라가 입을 다무는 것과 동시에, 달빛 사이로 다가오는 녀석들의 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돼지머리의 남성과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중년 여성 하나.
돼지머리를 본 순간, 딜라는 저게 한국이 만든 양치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다운 눈초리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중년 여성을 본 순간… 그녀는 말을 잃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순수한 두려움 때문에.
저, 중년 여성은 딜라와 같은 처지였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딜라와 달리 저 여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인형이요, 박제된 사냥감이자, 산 채로 잡아 먹힌 껍데기였으니까.
‘으으…’
딜라는 떨리는 어깨를 다잡았다. 웃기는 생각이었지만, 몸만 빼앗겨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저 중년 여자처럼 영혼까지 먹혔다면…?
네크로맨서인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다. 공포의 신이 있다면 박수를 칠 정도로 진한 공포.
하지만 그녀의 공포는 오롯이 그녀만의 것이었다.
세티와 여명은 딜라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다가온 양치기를 마주했다.
“10, 11, 16.”
희생양 자매를 괴롭히던 양치기이자, 그녀의 큰 언니를 잡아간 장본인, 그리고 미그니움의 힘을 따라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양치기의 일렬 번호.
세티의 입에서 그 번호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중년의 양치기는 무릎을 꿇었다.
마치, 주인 앞에서 부복하는 개처럼.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네?”
“예…”
“내가 없는 동안 한국 정부가 벌인 일들, 전부 보고해.”
양치기는 명령에 복종했다. 푹 고개를 숙인 그녀는 딱딱한 어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대역 덕분에 두 분의 부재가 알려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결석과 지나친 열애설로 인한 SNS와 황색 언론들의 소문이…”
“그건 넘기고, 다음.”
“…예.”
더욱 깊게 고개를 숙인 양치기는 자잘한 정치적 이야기들과 정부가 그녀에게 명령한 것들을 주욱 나열했다.
세티와 여명 커플의 성적, 전윤성에 대한 동태보고, 언론 루트, 그 외에 자잘한 일들.
그 설명을 듣는 내내, 여명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개중에는 희생양 자매의 처녀성 확인이나 세티의 임신 여부처럼 엿 같은 명령들도 섞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들은 그 이후였다.
“초인 올림피아 이전에, 국회의원 중 몇몇이 아카데미에 방문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겉으로는 아카데미의 한국 학생들을 응원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카데미 내부의 경계 마법진의 주파수를 알아내기 위한 방문입니다.”
“국회의원…”
뭔가 꺼림칙한 일이라도 있는 건지, 세티는 마법진 주파수보다 국회의원이란 단어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혹시 그 국회의원 명단에… 홍용완도 있어?”
“예. 홍용완 요원은 사절단 대표입니다.”
세티는 짧게 입술을 깨물었다. 여명은 같은 홍 씨인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그건 단 둘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나눌 이야기였다. 지금은 양치기의 보고를 듣는 게 먼저였다.
“아카데미에, 새로운 버전 양치기들이 파견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버전?”
세티가 되묻자마자, 뒤에 있던 돼지머리 양치기가 앞으로 나섰다.
여명이 물었다.
“이게 그 신형이야?”
“예, 파견된 녀석 중 독자적으로 제게 지휘권이 위임된 녀석입니다.”
두 사람이 양치기를 훑었으나, 기존의 양치기와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외형과 속에 지닌 마나 모두 익히 알고 있는 돼지머리 양치기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보여드려라.”
중년 양치기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돼지머리가 뚜둑, 뚜둑 소리와 함께 압축되기 시작했다. 살과 뼈가 뒤섞이는 역겨운 광경.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돼지머리가 있던 자리에 멀쩡한 사람 머리가 달리는 건 물론이고, 몸에서 풍기는 뒤틀린 마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모르고 봤다면 여명조차 쉽게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의태.
비슷한 변신 능력을 가진 말머리 이상의 양치기들조차 이렇게까지 마나를 숨기지는 못했건만…
“…잠입용이네.”
세티가 감상을 내놓기 무섭게, 중년의 양치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현재 아카데미 하위 노동자들을 살해하고 양치기로 바꿔치기하는 작업이 실행되고 있습니다.”
“…몇 놈이나 들어와 있지?”
“현재 22마리가 교체에 성공했습니다. 미군의 눈을 피해 작업하는 중이라 작전 진행이 늘어지고 있습니다.”
22마리… 여명은 그제야 세티가 따로 양치기를 불러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쇠미리는 물론이고, 아카데미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더러운 정보. 그래,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따로 양치기를 불러낸 이유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여명이 말했다.
“…걸렸을 때 리스크가 큰 그런 작전을 실행하는 이유가 뭐야?”
아카데미 창고를 노리다 못해 미쳐버린 건가? 여명이 나름 이유를 떠올리던 그때, 양치기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한 이유가 튀어나왔다.
“예언이… 있었습니다.”
“…예언? 무슨 예언?”
“그게…”
***
만주의 북쪽, 시베리아.
얼어붙은 콘크리트만이 남아있는 이름 없는 도시에서 전신을 가리는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턱, 턱- !
한때 벙커의 입구로 쓰였을 계단을 밟는 소리는 무겁고, 어두웠다. 살을 파먹는 시베리아의 추위마저도 그 발소리를 피해 도망칠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남자는 계단 끝자락에 자리한 철문과 마주했다. 바닥에 남은 흔적을 보니, 두꺼운 철문은 얼마 전에 열린 게 틀림없었다.
제대로 찾아왔군.
끼이익- 남자는 가볍게 한 손으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에서 그를 반겨준 건 벙커라기엔 너무 작고, 창고라기엔 너무 큰 공간이었다. 벽면 가득 핏자국이 남아있는 걸 제외한다면, 예상보다는 그럭저럭 아늑한 곳이었다.
“독화… 돌아… 왔는… 가…”
공간의 정중앙, 온갖 동물의 사체를 뒤집어쓴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독화라 불린 코트의 남자는 가볍게 묵례하고 철문을 닫았다.
파직, 흔들거리는 전구가 빛을 토해내는 가운데, 독화는 남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별내장, 왜 혼자 계십니까? 예카테리나는요?”
그러자 별내장이라 불린 남자가 손을 들어 방의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피를 가득 뒤집어쓴 창백한 여인이 쿨쿨 잠들어 있었다.
“…마나가 거의 안 느껴질 정도라니, 유럽에서 고생이 심했나 봅니다.”
“아니… 드레이… 테리얼…에서, 얻은… 상처가… 도졌…다….”
그런 거였나. 독화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내장은 머리 위에 올려진 어린 양의 시체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파순… 은…?”
“늦을 겁니다. 시카고에서 주지사를 놀리고 오겠다더군요.”
“티배깅… 나쁜… 버릇이야….”
쯧쯧, 혀를 차는 별내장을 향해, 독화가 덧붙였다.
“그리고… 시카고의 붉은 별, 그는 정말로 다섯 번째 꼭짓점이었습니다.”
“붉은… 별…? 스탈린의… 안배… 기어코… 패가… 전부, 모였는가…”
“예, 아마 CIA도 눈치챘을 겁니다. 첫 번째 대행자가 이 사실을 알면 잔뜩 겁을 먹을 테지요.”
“그거, 참… 멋진… 일이지만… 안타… 깝군… 늦었…어…”
안타깝다는 말과 달리, 별내장의 시체 같은 목소리에는 작은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그 이유를 짐작한 독화는 고개를 저었다.
“한국이 승리하는 겁니까?”
“그래, 한국… 해와, 달의, 아들… 그가, 한발… 빨랐다…”
한발 빨랐다라… 독화는 문뜩 주지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드레이테리얼에서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 가장 마왕에 가까웠던 자.
하지만 지금 그는 마왕은커녕 청문회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비록 독화 스스로가 파순처럼 쾌락을 쫓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가장 높이 올라간 자가 추락하는 모습은 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한 번 바뀐 운명이, 두 번 바뀌지 말란 법은 없지.’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독화는 별내장에게 물었다.
“…한국에게 어떤 예언을 주셨는지, 제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별내장은 대답 대신 빼빼 마른 품속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피에 젖은 종이 위에는, 말라붙은 피딱지를 잉크 삼아 적어낸 검붉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주인을 잃은 무주공산.보물은 주인을 가리지 않고, 보물을 가진 자가 주인이 될지니.
주인 없는 세상의 보물을 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