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08)
을 위한 세계는 없다-308화(308/817)
***
양치기의 보고가 끝난 직후, 세티는 딜라와 양치기들을 돌려보냈다. 그녀는 여명과 함께 해변을 거닐며 말했다.
“예언 속 무주공산은… 역시 아카데미겠지.”
“적어도 한국은 그렇게 해석하는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명과 세티 둘 다 무주공산이 아카데미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면 모를까, 두 사람 모두 운명이 뒤틀리는 걸 몇 번씩이나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보물은…”
세티는 말끝을 흐렸다. 떠오르는 게 너무나 많은 까닭이었다.
아카데미 창고에 있는 각종 무술이나 마법, 커리큘럼, 하다못해 아카데미의 유명세마저 보물이라 하기엔 충분했다.
그중 어떤 게 예언 속 보물일까?
이것저것 비교해보며 고민에 빠진 그녀와 달리, 여명은 의외로 간단하게 답을 내놨다.
“기연.”
“…기연?”
그는 대답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너덜너덜한 노트를 꺼내 펼쳤다. 바오닉 레락이 쓴 작가의 노트.
이미 여명에게 들어본 적 있는 데다가 앞 부분을 살짝 본 적 있었기에, 세티는 어렵지 않게 노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노트 뒷부분에 적힌 내용이 그녀가 알던 것보다 훨씬 꼼꼼하고 방대하다는 것.
여명은 그녀에게 무언가 보여주려는 듯, 노트에서 [북쪽섬]이라고 분류된 부분을 펼쳤다.
그곳에 적혀 있는 건…
[코완 호텔의 12층 남자 화장실에서 3번째 변기 아래에는 회복 물약이 숨겨져 있다.]무슨 게임 이스터에그 같은 사소한 정보부터.
[출입 관리소 지하, F방에는 실탄과 소총이 준비되어 있다. 지하실 비밀번호는 ‘q1w2e3’ 이다.]아카데미 직원이나 알 수 있을 법한 정보, 그리고…
[북쪽 섬 동부 해변 방파제 중 접근 금지 팻말이 걸려있는 블록 아래에는 철문이 있다. 이 철문은 아카데미 섬 전역과 연결된 해저터널로 이어진다.]일반적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까지.
모르고 보면 피식 웃고 넘겼을 글이었지만, 마지막의 경우에는 상세한 그림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이거 전부 진짜인 거야?”
살짝 당황한 세티가 여명을 바라보자, 그는 노트를 접으며 대답했다.
“가보면 알겠지.”
세티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두 사람은 곧장 노트가 가리키는 장소로 향했다. 다행히 해변에서 방파제까지는 금방이었다.
드넓은 방파제에서 [접근 금지] 팻말을 찾는 건 조금 어려웠지만… 밤은 길었다. 두 사람은 밤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천천히 방파제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정말로 방파제를 채운 콘크리트 블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접근 금지] 팻말을 찾았다.
“저기 아래 철문이 있다고?”
팻말이 걸린 블록을 본 세티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거대한 콘크리트 블록 사이에 철문은커녕 팔 하나 들어갈 공간도 없어 보였으니까.
여명은 반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바깥에서 보니 그렇지, 테트라포드 사이에 공간이 얼마나 많은데.”
“…테트라포드?”
“저 방파제 블록 이름이야.”
여명은 능숙하게 방파제 블록… 아니, 테트라포드 위로 올라섰다. 세티가 그의 뒤를 따라 블록 사이 위로 올라간 그때, 그녀의 발이 쑤욱 미끄러졌다.
초인의 반사신경 덕분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조심해. 보기보다 위험하니까.”
“….”
어느새 다가온 여명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세티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입술을 비쭉이며 말했다.
“…그것도 다큐멘터리에서 본 정보야?”
“아니?”
“아니라고? 그럼 이 테트라… 어쩌고란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나 인천 출신이잖아. 방파제는 징글징글하게 봤지.”
앗, 세티가 뒤늦게 그의 출신을 상기하는 사이, 여명은 능숙하게 테트라포드 사이의 틈을 비집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정말로 철문이 있었다. 방공호나 하수도의 입구처럼 바닥에 딱 붙어있는 정사각형의 문.
녹이 슨 문고리를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문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이런 게 있을 수 있지? 아카데미 북쪽 섬은 완공된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섬을 짓기 전에 먼저 만들어져 있던 걸지도 모르지.”
여명은 그렇게 대답한 뒤, 힘껏 철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열린 철문 너머에서 보이는 건, 무저갱처럼 깊고 깊은 지하의 어둠뿐이었다.
“아무래도 진짜 같지?”
어둠 저 너머를 꿰뚫어 본 여명이 물었다. 척 봐도 일반적인 하수도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저터널…? 그냥 도시 전설인 줄 알았는데…”
그런 전설도 있었나? 소문에 무관심한 여명은 개의치 않고 노트를 펼쳤다. 이번에는 [해저터널]이라고 적힌 부분이었다.
[스토리 진행]이라고 적힌 부분을 제외하면 가장 두꺼운 부분.그 방대함 때문일까? 적힌 내용의 섬세함은 조금 떨어졌다.
예를 들어 ‘1번 출구에서 동쪽으로 가면 영약이 있다.’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은 정보를 어렵사리 기억해 적어놓은 것 같은 내용.
하지만 그 내용 사이 사이로 보이는 ‘기연’들은 세티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소문으로만 들어본 무술, 보물, 영약… 그리고 심지어 하수도의 용까지.
“이거… 정말 바오닉이 쓴 거 맞아?”
“응. 녀석이 쓴 거야. 내가 직접 확인 했어.”
여명이 노트를 접으며 답하자, 세티가 바로 말했다.
“…죽이자.”
“저번에도 말한 거 같은데, 안 돼.”
“왜?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아. 만에 하나 녀석이 한국 정부와 손을 잡는다면…”
여명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첫째, 아카데미 한가운데서 이름난 귀족의 아들을 함부로 죽일 수 없어. 둘째, 녀석이 적은 정보가 전부 진짜라고 확신할 수 없어. 고로, 살려두는 게 이득이야.”
“그러면…”
세티가 다른 사악한 계획을 입에 담으려 하자, 여명이 선수를 쳤다.
“이미 구더기 공주의 독약을 먹여 놨어.”
“….”
그러니까 죽는 것보다 못한 꼴로 만들 필요 없어. 여명이 그렇게 덧붙였다. 세티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가 수긍한 것처럼 보이자, 여명이 계속 말을 이었다.
“확인은 했고, 이제 어떻게 할래? 지금 당장 들어가 볼까?”
“아니, 기연 탐색은… 따로 계획을 짠 뒤에 시작하자. 이런 일은 은밀할수록 좋으니까.”
“그래, 그러자.”
여명은 순순히 철문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벤토리에서 잡다한 쓰레기들을 꺼내 철문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이어 방파제를 벗어난 두 사람은 누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동시에 여자 기숙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CCTV를 피해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이어지길 잠시. 세티가 입을 열었다.
“그 노트… 며칠만 내가 가지고 있어도 될까?”
여명은 군말 없이 그녀에게 노트를 건넸다. 노트를 받은 세티는 심각한 얼굴로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종이 넘기는 소리와 발소리만이 울리기를 한참.
이윽고 두 사람은 1학년 여자 기숙사 담장 앞에 도착했다. 이 너머부터는 금남의 구역이었다.
여명이 가볍게 말했다.
“이제 들어가 봐.”
“…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트를 챙긴 세티는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여명과 마주 서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대로 까치발을 들어…
“와, 풋풋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흠칫,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담장 아래 개구멍에서, 녹색 머리의 소녀가 히죽거리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생양 자매의 막내이자 돌아온 네티에게 회초리를 맞던 바로 그녀, 이시스였다.
막내는 어딘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오늘 안 들어올 줄 알았는데… 형부 인내심 대단해.”
“….”
여명은 쓴웃음을 지으며 세티와 떨어졌다. 도저히 키스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안녕, 시스. 오랜만이야.”
“예, 형부. 오랜만에 뵙네요.”
“그… 저기,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냥 언니 돌려주러 온 거니까.”
“아, 그래요? 근데 그냥 안 돌려주셔도 돼요.”
“왜?”
“이대로 가시면 제가 혼날 거 같아서요.”
그녀의 말마따나, 세티는 고운 눈썹을 찡그린 채 막내를 보고 있었다. 네티를 때리기 전에 짓는 표정과 똑같은 표정.
여명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자매 간의 문제는 자매끼리 해결해야지.”
그의 익살스러운 대답에 막내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세티가 선수를 쳤다.
“내일 봐, 여명.”
그녀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담장을 넘은 순간, 막내가 개구멍에서 몸을 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
그 모습을 본 여명은 작게 웃은 뒤, 걸음을 돌렸다. 네티가 왜 회초리를 들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
기숙사의 아침은 자잘한 소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성녀님이 아카데미에 돌아왔다.
그다지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아침부터 수군거리기에는 충분한 소문.
여명은 밤새 청소하느라 깨어나지 못하는 작가의 몸을 흔들어 깨우면서, 기숙사 방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돌아오긴 하시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또 뛰쳐나갈 텐데.
-안 뛰쳐나가면 혹시 아카데미에서 난리 나는 거 아냐?
-또 뛰쳐나가면 지구랑 성도랑 관계 좆될 텐데.
사소한 수다를 떠는 놈, 정치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놈… 온갖 학생들이 떠드는 이야기 중 여명의 관심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거대 괴수 사냥했던 호위 성기사들도 왔을까?
-당연히 왔겠지. 호위인데.
-니들도 영상 봤냐? 막타 칠 때 존나 멋있던데…
-우리 기숙사 투톱하고 붙이면 누가 이길까?
-솔직히 호위가 이길 듯?
-전윤성은 몰라도 천여명은 이길만하지 않나? 솔직히 난 천여명이 비밀 성기사일 줄 알았어.
이 나이 또래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누가누가 더 강한가 하는 이야기.
잠시 그 이야기를 듣던 여명은 이내 관심을 끊었다. 이제와서 학생다운 이야기는 그에게 너무 먼 이야기였으니까.
뭐, 아무튼.
그는 반쯤 흐느적거리는 바오닉과 함께 교복을 챙겨 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그를 본 몇몇 학생들이 ‘오늘은 제시간에 등교하네’ 같은 소리를 수군거리건 말건, 그는 작가에게 물었다.
“바오닉.”
“또, 왜…”
“아카데미에 준비된 기연들, 지금부터 전부 챙길 생각이야. 원하는 거 있냐?”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 건지, 꾸벅꾸벅 졸던 바오닉이 흠칫, 정신을 차렸다.
“어… 괜찮아? 아직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는데.”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우리가 기연을 다 먹으면, 주인공이 성장 못 할 거 아냐… 아직 히로인하고도 접점이 없는데.”
여명은 그의 말을 음미하며 다음에 꺼낼 말을 고심했다.
바오닉은 아직까지 그를 플레이어 같은 ‘바깥에서 온 자’로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충분히 이용해야 했다.
여명이 말했다.
“지금까지 주인공이 안 나오니까 하는 말이야.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 아니겠어? 주인공이 없거나, 자기가 주인공인지 모르거나.”
“그건…”
“진짜 주인공이라면 우리가 기연 먹으면 알아서 나오겠지. 안 나오면 거기서 끝이고.”
“….”
바오닉은 반박할 말을 찾으려는 듯 미간을 구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 저기, 그, 나 원하는 거 말하라고 했지?”
“어.”
“그러면 나는, 하수도의 용의 심장을 가지고 싶은데…”
혹시나 말하지 않은 보물이 있을까 떠본 건데, 역으로 가장 좋은 걸 말해버리는 바오닉.
여명은 한숨을 참았다. 거참, 파순과는 다른 의미에서 욕망에 충실한 녀석이었다.
“…바오닉.”
여명이 이름을 부르자, 작가가 손사래를 쳤다.
“노, 농담이야.”
그렇게 기연에 대한 이야기를 끝낸 직후, 여명은 자기가 없던 동안 아카데미에서 있던 일들 물었다.
어제 쇠미리에게도 듣긴 했지만, 소문이나 정보는 여러 각도에서 알아볼수록 좋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오닉이 해주는 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명과 세티의 연애사 때문에 교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 그가 전윤성과 함께 1학년 투톱으로 불린다는 것 정도가 그나마 들어볼 만한…
그때, 바오닉이 설명을 끊었다. 한 남학생이 두 사람의 길을 막아선 까닭이었다.
“…전윤성.”
아침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건지, 땀에 젖은 전윤성은 어딘가 진지한 얼굴로 여명과 바오닉을 마주했다.
뭐야?
여명이 녀석과 눈을 마주하고, 바오닉이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조차 이상함을 느끼고 시선을 보낼 때쯤.
전윤성이 표정을 피며 말했다.
“돌아왔구나.”
“…?”
“다행이다.”
정체를 알아챈 게 확실한 말투. 여명이 ‘니가 말했냐?’ 라는 뜻을 담아 바오닉을 바라보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전윤성이 그 모습을 보며 덧붙였다.
“바오닉은 아무 말 안 했어. 그냥 나 스스로 알게 된 거야.”
“어떻… 아니, 너도 그 하수구에 있었지.”
플레이어를 죽였던 바로 그때, 전윤성도 있었다. 별로 도움은 안 됐지만.
“…나에 대한 건 너 혼자 알고 있는 건가?”
“어… 그건 아냐, 미군도 알고 있어.”
미군? 여명이 눈을 가늘게 뜨자, 전윤성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내가 비밀인지 모르고… 너희를 찾고 싶은 마음에…”
“….”
“저기, 괜찮다면 잠깐 훈련장에 같이 가지 않을래? 여기서 말고,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뜻밖의 제안이었다. 여명은 잠시 전윤성을 바라보다가, 그의 아버지의 목뼈를 부러트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하고도 대화할 때가 되긴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