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10)
을 위한 세계는 없다-310화(3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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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 레르몬토프는 창백한 피부를 가진 슬라브인이었다. 그녀의 짙은 담갈색 눈동자가 여명을 훑었다.
“눈이 좋군.”
숨어있다가 걸린 것치고는 담백한 맛이 있는 대답이었다. 여명은 당당하게 미소 짓는 세바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거기서 뭐 하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세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학생들이 몰려다니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왔지.”
“숨어서 말입니까?”
“숨은 게 아니라, 얘들이 날 못 본 거란다.”
너랑 다르게 말이지. 세바는 뻔뻔한 태도로 덧붙였다.
언뜻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향한 조롱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반박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세바 레르몬토프란 이름에는 그만한 위엄이 있었으므로.
거기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대련의 참관인이 되어주마.”
싸움 구경까지 시켜준다는데, 주저리주저리 따질 이유가 없었다.
세바가 대련실로 다가가자, 모세 앞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학생들이 우르르 그녀에게 길을 터줬다.
“1학년, 초인부의 홍세티, 맞지?”
세바는 대련실 입구에 서 있던 세티를 향해 물었다. 세티는 슬쩍 여명을 확인한 뒤 답했다.
“예.”
“저쪽은 마법부의 미리엄이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쟤가 누구를 빽으로 두고 있는지 알고 있니?”
“예, 알고 있어요.”
그 단호한 대답을 들은 세바는 낄낄 웃으며 중얼거렸다. 쌍으로 당돌한 커플이군.
“미리엄 양?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대련할 건가?”
대련실에 내동댕이쳐졌던 미리엄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티를 노려보며 마나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여기까지 질질 끌려온 게 어지간히도 억울한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대련은 성사된 걸로 하지.”
세바는 대련실의 문을 활짝 열며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 세바 레르몬토프는 외부 초청 교사의 자격으로 이 대련의 입회인이자 관리인이 되겠다. 불만 있는 학생 있나?”
당연히 반론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바와 세티는 곧바로 대련실에 들어섰다.
훈련실의 두 배쯤 되는 크기를 제외하면, 대련실의 내부는 훈련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잡티 하나 없는 흰색 벽과 바닥.
그 새하얀 공간 위로 두 여학생이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은 세바가 물었다.
“대련 규칙은 둘 다 알고 있겠지? 중상 입히지 말고, 내가 멈추라고 할 때 멈추지 않으면 자동으로 패배다. 알겠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바는 바로 동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 그러면 두 사람 다 준비하시고…”
팅! 그녀가 동전을 튕겼다.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회전한 동전이 땅에 떨어진 바로 그 순간.
“이 씨발년, 안 그래도 엿 같았는데 잘 됐다!”
미리엄의 손에서 불길이 솟구쳐올랐다. 화르륵-! 프랑스 그랑제콜에서 자랑하는 화염 마법이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세티와 미리엄 사이, 대련실을 뒤덮었다. 학생답지 않은 마나량과 열기.
그 무지막지한 불길을 본 학생들 사이에서 감탄이 흘러나왔지만, 그녀의 후견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세바는 시큰둥했다.
아마… 아니, 분명히 어릴 적부터 영약을 물처럼 처먹여 혈관의 마나를 빵빵하게 늘린 것이리라.
딱히 신기할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부자와 권력자들이 자식들에게 영약을 먹여대는 건 자본가들의 탈세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므로.
특히, 일찍이 차원문 너머에 거점을 마련한 프랑스인들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미식과 영약의 만남이랍시고 세계수 뿌리를 우려먹다가 엘프들에게 테러를 당한 자들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뭐, 그건 그거고.
학생 수준에서 저 정도 마나량은 절대적이었다. ‘그릇’이나 ‘성녀’ 같이 규격 외의 존재가 아니고서야 싸움의 결과는 뻔했다.
당장 세티는 불길을 피해 도망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결과는 볼 것도 없겠군.’
승자가 정해진 싸움처럼 재미없는 것도 없는 법.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세바는 불길에서 살짝 물러난 뒤, 슬쩍 여명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의 은신을 단번에 꿰뚫어 본 녀석.
이상할 건 없었다. 용병 출신 초인들은 대부분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바빠진 그녀의 ‘윗선’에서 한국을 조심하라고 명령이 내려온 이때, 녀석이 눈에 밟히는 건 단순한 우연일까?
어쩌면, 녀석은 한국이 아카데미에 보낸 요원일지도 몰랐…
그때, 도망만 다니던 세티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타탁- 그녀는 방향을 바꿔 미리엄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불길을 피할 공간이 없어서? 아니, 그녀는 불길이 충분히 얇아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세티는 깃털처럼 가볍게 바닥을 박차고, 총알처럼 빠르게 내달렸다. 넓어진 만큼 얇아진 미리엄의 불길은 그녀를 막아내지 못했다.
“이년이!”
미리엄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불길을 모았다. 하지만 비각술을 펼치는 세티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결국, 미리엄은 불길을 모으는 걸 포기하고 다른 마법을 펼쳤다.
“엘랑의 불이여!”
다음 순간, 미리엄의 손에서 기다란 불길이 솟아오르며 화려한 검의 형상을 취했다.
-프레시외즈?
-대련에서 저걸 쓴다고?
불의 검을 본 학생들이 기겁했다. 그럴 만도 했다. 저건 프랑스 최고 마법사의 간판 마법이었으니까.
물론, 미리엄이 펼치는 마법은 원제작자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알제리의 도시 하나를 쓸어버렸던 원본과 달리, 그녀의 손에 들린 건 기껏해야 2m짜리 불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학생 수준에서는 위협적이었다. 세바가 보기에, 이 아카데미의 정면에서 저 검을 막을만한 학생은 고학년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문제는, 세티가 고작 학생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
세티는 프레시외즈를 보자마자 망치를 집어 던졌다. 마나가 담긴 망치는 맹렬하게 날아갔고, 미리엄은 전력으로 망치를 쳐냈다.
펑!
불꽃과 강철이 부딪치며 작은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격돌의 승자는 불꽃이었고, 패배한 망치는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망치를 본 미리엄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세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쌍년아, 내가 이겼…!”
그게 미리엄이 기절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어느새 미리엄의 코앞까지 다가온 세티는 온몸을 회전하며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여명과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줬던 바로 그 발차기.
미처 대비하지 못한 미리엄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쾅!
그대로 대련실 벽에 처박혔다. 그녀가 기절했다는 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대련실을 달구던 불꽃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므로.
사그라드는 불길 사이에서, 세티가 말했다.
“선생님? 제가 이긴 거 같은데요.”
“그래, 네가 이겼구나.”
그러나 세바는 승리를 선언하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얼굴로 세티에게 물었다.
“턱을 맞췄으면 죽었겠는데… 알고서 몸을 찬 거니?”
“아뇨? 그냥 급해서 찼어요.”
“그으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세바는 그제야 손을 들어 세티의 승리를 선언했다.
“승자, 홍세티! 만약 이번 대련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나와라.”
불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몇몇 학생들은 손뼉을 치거나, 또 어떤 학생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세티의 이름을 연호했다.
물론, 대다수의 학생들은 마지막 격돌을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프레시외즈의 열기가 어쩌니, 망치로 시선을 돌리는 게 어쩌니…
세바는 그런 학생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이곳은 이런 학교였다.
테러를 당하자마자 외부 교사를 초빙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곳. 초인의, 초인을 위한 학교.
‘…진짜 전쟁터는 평생 구경도 못 할 것들이.’
세바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사납게 웃는 사이, 세티가 대련실 바깥으로 향했다.
“홍세티, 훌륭한 대련이었다. 미리엄은 내가 보건실로 옮기마.”
“감사합니다.”
“혹시, 내 수업을 듣고 싶다면 말하거라. 너만 한 학생이라면 교육하는 맛이 있을 거 같으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스승님으로도 충분해요.”
“그래? 그건 아쉽구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세티는 그대로 대련실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바는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발로 툭, 쳤다. 동전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흐물흐물하게 휘어졌다.
니켈과 구리로 만들어진 5센트 동전이 반쯤 녹아내린 모습.
그건 조금 전 미리엄이 펼친 불꽃이 그저 겉보기만 그럴싸한 게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이만한 열기를 뚫고, 일격이라… 실력자랑도 정도가 있지.’
세바는 입술을 핥으며 기절한 미리엄을 업었다.
뒤늦게 그녀의 친구들이 몰려와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재촉해댔지만, 세바는 속도를 올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번 대련에 대한 다른 해석이 떠오르고 있었으므로.
***
“기강도 잡고, 겸사겸사 세바의 반응도 보고.”
‘왜 대련을 빙자한 쇼를 벌인 거냐’ 는 여명의 질문에, 세티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교실 의자에 앉던 여명은 물론이고, 그 옆에 미리 앉아 있던 쇠미리조차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소리죠? 걔들이 여명 욕해서 두들겨 팬 거 아니었어요?”
쇠미리가 묻자마자, 여명이 끼어들었다.
“내 욕을 했어? 왜?”
세티는 어깨를 으쓱이며 간단히 설명했다. 매일 데리러 오던 남자 친구가 안 오니, 이때다 싶어 시비를 건 거라고.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침마다 데리러 갈까?”
“됐네요. 어차피 교실에서 만날 텐데, 뭐. 난 괜찮으니까 느긋하게 등교해.”
오글거린다는 듯 고개를 젓는 세티와 달리, 쇠미리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를 데리러 오는 건?”
“….”
“노, 농담인데….”
동시에 눈썹을 들어 올리는 여명과 세티를 본 쇠미리가 서운한 듯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전에, 여명이 다시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세바의 반응을 봤다는 건 무슨 소리야?”
“내가 이렇게 뜬금없이 힘을 뽐내면, 나와 한국 정부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글쎄… 아마 한국 정부가 지시한 일로 알지 않을까? 아마 한국 정부의 뒤를 캐겠지.”
“그렇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 정부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들었을 때 이야기잖아. 세바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여명이 반론하자, 세티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바 레르몬토프는, 주지사의 부하일 확률이 높아.”
“뭐?”
세바? 무슨 소리인지 몰라 쇠미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여명은 뭔가 떠올렸다는 듯 턱을 쓸었다.
쇠미리가 재차 물었다.
“어… 천검이 누구의 부하라고요? 세티가 미리엄의 머리채를 붙잡을 때부터 숨어서 구경하고 있던 건 저도 봤는데.”
“일리노이 주지사의 부하. 우리가 시카고에서 만났던 다른 주지사의 부하의 이름이… 유리 레르몬토프였거든.”
“…아?”
“가명일 가능성도 있지만… 혹시 모르잖아? 그래서 아카데미에 돌아오는 동안 그녀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어.”
“진짜였나요?”
“정확한 건 확인 못 했어. 하지만 세바에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남동생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무한류가 강해질수록 소리가 없어지는 검술이라는 건 알아냈지.”
소리 없는 검술. 여명은 주지사의 부하를 떠올리며 입술을 쓸었다.
“세바 레르몬토프가 주지사의 부하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본디 돈을 받고 움직이는 용병. 주지사의 재력이라면 세바정도 되는 용병을 좌지우지하기에 충분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문뜩, 조금 전 훈련실에서 전윤성과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군은 세바 레르몬토프가 보물을 노리고 아카데미에 왔다고 의심하는 중이다….’
미군에게 의심받는 주지사의 부하, 한국 정부, 10강 중 둘, 그리고 미군까지?
아카데미에서 대체 뭘 노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상한 일이었다.
작가의 노트에 적힌 기연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저만한 세력이 꼬이다니?
특히 10강에 속하는 고수들. 그들이 뭐가 아쉽다고 아카데미까지 오겠는가?
이 정도면, 작가의 노트에 적히지 않은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다고 가정하는 게 맞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여명이 입을 열려는 순간.
교실 앞문이 쾅! 열리며 선생님이 들어왔다. 익숙한 빨간 머리의 여 선생님, 제미니 선생님이었다.
“안녕, 여러분?”
오랜만에서 봐서 그런가, 그녀의 분위기는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에 봤던 것과 조금 달라져 있었…
“여러분들이 훈련실에 몰려가느라 첫 수업이 30분이나 늦어졌지만! 이 선생님은 너무 기뻐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훈련에 진심일 줄이야!”
아, 그냥 화난 거였구나. 여명이 입을 다물자마자, 제미니 선생님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전부 결석 처리하고 제시간에 온 학생들만 데리고 진도 나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여러분에게 안내할 게 있어서 그럴 수가 없네요.”
“….”
“흠흠, 안내할 건 두 가지예요. 우선, 내일 북쪽 섬에서 성녀님이 돌아온 기념으로 기자회견이 열릴 거랍니다. 기자들이 몰려올 테니, 가능하다면 북쪽 섬에 가는 걸 자제해주시고, 인터뷰는 절대, 절대! 하면 안 돼요! 아시겠죠?”
학생들은 술렁거림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제미니 선생님의 말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성녀님의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호주에서 아주 유명한 초인 분이 아카데미를 방문하실 거랍니다.”
호주의 유명한 초인? 학생 중 하나가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성검께서 오시나요?”
“아뇨? 그분은 시카고에서 있던 일 때문에 의회에 붙잡혀 계세요.”
곧바로, 교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호주에서 성검 말고 유명한 초인은…
“만박불통께서 방문하실 겁니다. 모두 가능하면, 그분과 마주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