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12)
을 위한 세계는 없다-312화(312/817)
***
학생들은 물론이고, 날벌레들조차 별을 베개 삼아 잠든 밤.
여명은 가볍게 기숙사 담장을 넘었다.
한걸음에 당직을 서는 기숙사 사감들의 감각에서 벗어나고, 두 번째 걸음으로 촘촘하게 깔린 CCTV 시야에서 벗어났다.
탁- 그가 담장 너머에 착지한 순간, 아카데미 전체에 넓게 펼쳐진 마법진이 그의 몸을 훑었다.
소위 ‘아카데미 테러 사건’ 이후 강화된 보안 마법진.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마법진이었지만, 그는 가볍게 마나를 움직여 마법을 털어냈다.
히메나 교장이 알려준 마법진의 주파수 덕분이었다. 이 주파수를 몰랐다면 아무리 여명이라도 고생깨나 했으리라.
어째서 교장이 그에게… 정확히는 성녀에게 이 주파수를 알려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뭐, 교장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설마 그 주파수를 밤 나들이에 쓸 줄은 그녀도 몰랐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곧바로 비각술을 펼쳐 기숙사 너머로 향했다.
밤의 아카데미는 낮의 활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조용했고, 그는 평소보다 더욱 발소리를 죽여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을까.
여명은 점심을 먹었던 직원용 휴게실 앞에 도착했다. 달린 거리가 상당했지만, 그의 호흡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휴게실 문고리를 잡은 여명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마나를 펼쳐 주변을 훑었다. 혹시라도 추적자가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오셨소?”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흑진주처럼 검은 까마귀였다. 여명은 문을 닫은 후 까마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당직 분들이 꽤 삼엄하셔서요.”
“제자가 미안할 게 뭐 있소. 그 양반들도 다 자기 일하는 것이거늘.”
여명은 작게 미소 지으며 휴게실 탁자에 앉았다. 그러자 까마귀, 코르부스가 그를 똑바로 보며 부리를 열었다.
“몸은 좀 어떻소?”
“아직 문제없습니다. 마나도, 근육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도 꿈속 존재가 해준 경고가 거짓말처럼 느껴집니다.”
“꿈의 경고를 가벼이 여겨선 안 되오. 특히 힘의 대가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더 그렇소.”
“….”
“앞으로 몸의 상태와 무술을 정비할 때까지, 최대한 힘 쓸 일을 줄이시오. 아시겠소?”
엄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 청소부 시절 그를 아끼던 시장 어르신들이 떠오르는 목소리였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인 뒤, 살짝 긴장을 풀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성녀는 좀 어떻습니까?”
그건 그냥 가볍게 분위기를 풀기 위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코르부스는 부리를 딱- 다물며 대답했다.
“직접 물어보시오.”
“예?”
그때, 누군가 그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슬쩍 탁자 아래를 확인해 보니, 성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입가에 침이 살짝 고인 게, 탁자 아래에서 잠들어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 듯싶었다.
여명은 그의 다리 사이로 올라오려는 성녀의 이마를 꾹 누르며 말했다.
“얘 왜 여기 있습니까?”
코르부스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따라오겠다고 억지를 부리셨소.”
“…그걸 그냥 들어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미안하오. 부리가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소.”
여명은 그 이상 코르부스를 탓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래서 그는 그냥 성녀의 양 볼을 붙잡고 탁자 위로 일으켰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성녀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안녕, 여명? 교복 이쁘다.”
“고맙… 아니, 여긴 왜 온 거야?”
“얼굴 보고 싶어서?”
성녀가 부끄러운 듯 몸을 베베 꼬며 말했으나, 여명은 그 가증스러운 연기에 속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얼굴은 어차피 예지로 보고 있으면서 뭔… 수련하는데 뭐 볼 게 있다고 따라온 건지 똑바로 말해.”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건지, 성녀는 곧바로 연기를 때려치우고 대답했다.
“교장이 자기 방에 가둬 놓고 종일 기자들이 보낸 질문지 외우게 했단 말이야. 얼굴이라도 봐야 좀 살 거 같았어.”
너무하지? 성녀가 투덜거렸으나, 여명은 역으로 교장에게 공감해버렸다. 성녀 때문에 참 고생하시네.
뭐, 아무튼.
“이제 얼굴 봤으니 괜찮지?”
“아니? 얼굴 보니까 또 다른 게 하고 싶은데?”
“….”
그렇게 말한 성녀는 안아달라는 듯 양팔을 활짝 펼쳤다. 여명은 그녀를 안아주는 척 손을 뻗다가,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어라 성녀가 반항하기도 전에, 가장 가까운 의자에 그녀를 앉혔다.
“수련하는 거 구경이나 해.”
“예, 예 알겠습니다.”
성녀는 뭔가 의미심장하게 웃긴 했지만, 그 이상 떼를 쓰지 않았다. 코르부스는 여명과 그녀를 번갈아 보며 날개를 으쓱였다.
“잠시 자리를 비켜드리면 되겠소?”
“코르부스까지 그러실 겁니까?”
장난이라오- 코르부스는 웃으며 날개를 퍼덕이다가, 곧 웬만한 중형견보다 큰 크기로 몸집을 키우며 말을 이었다.
“자, 그러면 잡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내리겠소.”
***
첫 시작부터 대단한 가르침을 꺼내지 않았다. 코르부스는 기본 중의 기본부터 확인했다. 여명이 익히고 있는 무술들.
비각술, 파양결, 혜성검, 마리지천신공, 흑익류, 주가시빌리, 화산쇄설, 그리고 아직 진의만 있는 무술까지.
혈류가속처럼 너무 간단해 진의가 필요 없거나, 엘프 검술이나 플레이어의 검술처럼 진의를 모르는 무술들을 제외하고 보니, 그가 익히고 있는 무술은 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것만 해도 차고 넘치오. 평생 수련에 매진한 초인도 기껏해야 두세 가지 무술에 통달할 뿐이오.”
여명이 조금 부족하다는 표정을 짓자, 코르부스가 그리 지적했다. 그녀는 까마귀 특유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부리를 열었다.
“어디 보자… 꿈속에서 세계수의 마나와 동급으로 꼽힌 무술이 파양결, 주가시빌리, 그리고 아직 이름 없는 무술 이 세 가지가 맞소?”
“예. 그 세 개입니다.”
새 머리의 존재가 말해 준 다섯, 아니, 여섯 개의 힘. 그중 무술은 세 개가 전부였다.
“본인의 흑익류는 부족했나 보구려.”
자신의 절기가 목록에 끼지 못해서였을까? 코르부스가 아쉬운 듯 부리를 쩝쩝거렸다.
여명은 쓴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평가하건, 저는 흑익류도 훌륭한 무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무술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마나가 꼬이지 않도록 도와주는 흑익류의 능력 덕분에 그는 몇 번이고 목숨을 살렸으니까.
하지만…
“그 훌륭한 무술을 주가시빌리에 뒤섞어서 쓰시오?”
“아, 그건…”
“파순, 그놈이 준 마리지천신공도 주가시빌리에 뒤섞어 쓰고 있지 않소. 이쯤 되면 그냥 몸에서 뿜어내는 무술이면 전부 다 주가시빌리와 섞는 것 아니오?”
“….”
하지만 그게 편한 걸 어떻게 합니까. 여명은 굳이 대답을 꺼내 머리를 쪼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코르부스는 얄밉게 입을 다문 제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뭐, 괜찮소. 같은 바둑알이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듯, 같은 무술이 같은 결과를 내지는 않소. 제자에게는… 제자의 방식이 있는 것 아니겠소.”
“코르부스….”
“그리고 어차피 아카데미와 초인 올림피아에서는 화산쇄설도, 주가시빌리도 못 쓰니, 파양결과 흑익류만 써야 하지 않겠소?”
“….”
“대중이 보는 곳에서 흑익류 홍보 좀 해주시구려.”
익살스러운 말이었다. 지켜보던 성녀가 키득거리고, 여명의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익살스러운 말.
하지만 그 익살 속에는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담겨 있었다.
아카데미와 초인 올림피아에서는 주가시빌리와 화산쇄설 등 눈에 보이는 무술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
기껏 익힌 무술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사기꾼이 다 그런 법 아니던가.
한국 정부를 속일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코르부스는 크흠- 헛기침해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제자의 무술도 얼추 확인했으니, 이제부터 이름 없는 무술을 완성하기 위해 시간을 쓰겠소.”
기다리던 바였다. 여명은 코르부스가 어떤 방식으로 준비했을지 기대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곧이어, 코르부스는 탁자 아래에서 커다란 가방 하나를 꺼냈다. 네모난 무언가가 잔뜩 들어있는 가방.
뭐지? 여명이 고개를 기웃거리기 무섭게, 코르부스가 부리로 가방 지퍼를 주욱- 열었다.
가방 속에 담겨 있는 건… 여명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책?”
그것도 하나하나가 무기로 써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두꺼운 책.
코르부스는 대답 대신 염동력으로 책 두 권을 들었다.
낡고 오래된 책에는 각각 [금강반야바라밀경]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저거 설마…
“여러 종교의 경전과 철학책이오.”
저 많은 책이 전부? 여명이 살짝 질린 표정을 짓자, 코르부스가 설명했다.
“제자의 진의를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생각해봤소.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본인은 팔다리를 움직이는 초식부터 떠올렸소.”
“….”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보는 것만으로도 무술의 몸놀림을 따라 할 수 있는 제자에게 초식은 중요하지 않더구려. 꿈속에서 제자가 펼친 무술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소.”
“그러면 경전을 가져오신 이유가…?”
“맞소. 지금 제자에게 필요한 건 사상과 철학이오.”
“…이제 와서요?”
여명은 진의야말로 마나를 움직이기 위한 사상과 철학이 아니냐고 되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코르부스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무술의 이름을 짓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그건….”
“제자의 깨달음이 진의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오.”
“….”
코르부스는 준엄하게 말했다.
“제자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지구의 불교에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있소. 돈오란 단박에 얻은 깨달음을, 점수는 깨달음 이후에 이어지는 꾸준한 수행을 뜻하오.”
지구인이 아닌 코르부스가 지구의 단어를 빌려 하는 설명. 여명은 그 배려에 감사하며 그녀의 가르침에 집중했다.
“지금 제자의 상태가 딱 그렇소. 태풍을 불러올 수 있으나 작은 그릇을 채우지는 못하고, 화산을 터트릴 수 있으나 계란 하나 익히지 못하고 있소. 이해하시겠소?”
“전부는 아니지만…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좋소. 그러면 본인이 경전과 철학책을 가져온 이유도 이해하시겠소?”
선대의 가르침에서 배우는 것.
그것은 인류가 역사를 기록한 뒤부터 계속 이어지던 전통이었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부스는 장하다는 듯 미소 지은 뒤, 가방을 뒤집어 책을 쏟아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부터 자본론, 사서삼경과 바가바드 기타, 심지어 다섯 신의 경전까지.
적어도 수십 권이 넘는 책들이 촤르륵- 탁자를 채우다 못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자께서는, 이 중에서 읽어본 책이 있소?”
여명이 꽤 많은 책들을 들어 올리는 순간, 성녀가 끼어들었다.
“다큐멘터리로 본 거 빼고, 진짜 읽어본 것만.”
“….”
성녀의 지적에 동의하듯, 코르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은 항변했다.
“다큐멘터리로도 뜻은 알 수 있습니다만….”
“안 되오. 직접 읽어본 것, 그것도 완독한 것만 뽑으시오.”
“….”
여명은 책들 사이에서 검은 신 모르닥의 경전과 맹자 등 딱 여섯 권을 뽑아 앞에 세웠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오만, 만화책으로 본 것도 제외하시오.”
“….”
여명은 여섯 권 중 두 권을 뺐다. 코르부스는 네 권만 남은 책을 보며 말했다.
“배울 게 많구려. 좋은 일이오.”
물론, 성녀는 조금 다른 감상을 남겼다.
“잠깐, 그러면 여명은 상식을 전부 다큐멘터리에서 배운 거야?? 대체 몇 편을 본 거야?”
***
같은 시각, 아도-길로는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낡은 창고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비밀 호위 임무 때문에? 물론 그런 핑계를 대고 기숙사를 나오긴 했지만, 그가 이 시간에 창고에 처박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희를 못 믿으시겠으면 2학년 옛 창고, 3층 오른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가서 옷장을 뒤져보세요.]보물 찾기 동료로 삼아준다는 말에 당황한 그에게 세티라는 계집애가 해준 말.
[거기서 찾은 보물은 가지세요. 계약금이에요.]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아도-길로에게, 세티는 성녀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물론, 아도는 그 말을 바로 믿지 않았다. 자신을 함정으로 몰아넣거나, 미끼로 쓰려는 건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보물이라는 말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가 엮여있다고 하지 않나!
결국, 그는 작은 손전등 하나만 들고 창고로 오고 말았다.
‘이게 잘하는 짓일까.’
아도-길로의 혼란한 마음을 증명하듯, 걸을 때마다 낡은 바닥재가 삐걱거리고 먼지가 손전등 불빛을 따라 나풀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도는 3층 오른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방에 도착했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으나, 세티가 말한 옷장이 문제였다. 기숙사 방보다도 큰 창고 벽면 가득 쌓여있는 게 전부 옷장이었으므로.
“이런 씁.”
아도는 속았다- 라고 생각하는 한편, 설마? 하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는 무수한 옷장들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손전등을 비춰댔다.
그렇게 얼마나 옷장을 털었을까?
등이 땀으로 축축해지고, 그 빌어먹을 남녀가 자기를 똥개훈련 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쯤.
그는 교복으로 가득 찬 옷장 사이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뭔가 있다’ 라는 걸 염두에 두지 않으면 절대 찾을 수 없을 만큼 무식하게 숨겨진 나무 상자.
‘설마, 이건가?’
아도는 다 낡아빠진 비단 리본이 묶여있는 나무 상자를 들어 손전등을 비추고, 흔들고, 귀를 기울여봤다. 하지만 딱히 보물이라고 부를만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곧 겉만 봐서는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조심스레 나무 상자의 비단을 뜯었다. 끼익- 낡은 잠금장치의 비명과 함께 상자가 열렸다.
“….”
상자 속 내용물을 본 아도는 숨을 삼켰다. 상자 속에 있는 건 물약이었다. 그것도 현대 지구의 제약회사에서 만든 물건이 아니라, 꽤나 옛 방식으로 만들어진 물약.
딱 봐도 영약이 분명했다. 마시지 않고 경매장에 골동품으로 팔아도 꽤 받을 수 있는 영약으로 보였다.
이걸 팔면 학비는 물론이고, 지구에 정착할 돈까지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아니, 아니지.’
아도는 잠깐이지만 유혹에 넘어간 자신을 자책했다.
겨우 이깟 보물 때문에 믿어주신 어르신들과 누이를 배신하다니,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그리고 세티와 여명이 대체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이런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준 건지 고민해봤다.
2학년 중에 믿을 만한 게 자신뿐이라는 말은 척 봐도 거짓말이었다. 이만한 보물이면 간이고 쓸개고 빠질 동급생을 줄 세우면 운동장의 절반은 채울 수 있었으니까.
그러면 대체 왜 자신일까. 뭐 대단한 보물 추격 능력이나, 욕심을 가진 것도 아닌데?
자신이 가진 가치는 기껏해야 누이와…
아, 혹시 보물을 미끼로 ‘그릇’과 인연을 노리는 건가? 그런 거라면 충분히 말이 됐다.
당장 시크릿 소사이어티의 요원이 그들의 대역을 맡고 있지 않았던가.
성녀와 손을 잡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가능성은 더더욱 올라갔다.
그릇과 성녀, 두 사람의 정치적 힘과 재능을 생각하면 장래에 무슨 짓을 벌일 수 있을지, 어리숙한 아도조차 예측할 수 없었…
그때, 그의 뒤통수에서 누군가 말했다.
“잿가루 꽃으로 만든 자양강장제군.”
어딘가 잔잔한 마나가 담긴 늙은이의 목소리.
아도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동양적인 옷을 입은 늙은이가 그가 든 영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별부리미 꽃으로 만든 것보다는 효율이 낮지만, 이렇게 액체로 먹으면 나쁘지 않지. 좋은 영약이야.”
“….”
“근데, 자네는 안 먹는 게 좋을걸? 이게… 양기가 가득한 영약이라, 젊은 사내놈이 먹으면 한 일주일 정도는 밤에 잠을 못 잘게야.”
“다, 당신은 누구….”
아도가 뒤늦게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누에처럼 길고 굵은 노인의 눈썹이 휘어졌다.
“내가 누군지 몰라? 뭐 이딴 덜 떨어진 새끼가… 아, 혹시 지구인이 아닌가?”
“….”
“흠흠, 애송아,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순간, 허공에서 파삭-! 마나로 이루어진 가루가 튀었다.
아도는 저 가루가 아카데미 보안 마법진의 가루임을, 그리고 동시에 눈앞의 노인이 아카데미에 무단으로 침입한 범죄자임을 깨달았다.
그는 곧바로 검을 뽑았다.
“물러나! 무단 침입자!”
“무단 침입자라니, 밤중에 이런 곳을 기어 다니는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 어이쿠!”
보안 마법진은 노인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노인 주변에서 마나 가루가 펑펑 터져 나오더니, 곧바로 창고 전체가 떠나갈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웨에에에에에에에엥!!
아카데미 비상벨이었다. 아도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검을 다잡는 사이, 노인은 눈살을 가득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니미, 여기가 군 기지야? 무슨 보안을 이따위로 해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