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16)
을 위한 세계는 없다-316화(316/817)
***
아카데미의 극히 일부 학생만 받을 수 있는 개인용 훈련실.
각종 운동기구와 훈련용 허수아비가 가득한 백색 공간에서, 한 여학생이 태블릿 컴퓨터를 들어 올렸다.
『[속보] 성녀 기자회견장 괴한의 습격 받아.』
『[속보] 습격자는 10강 만박불통. 레독스의 총이 직접 추적 중.』
『[사진 속보] 자수한 만박불통.』
『[속보] ‘악의는 없었다’ 파문… 성녀의 요청에 따라 회견은 정상적으로 진행.』
손바닥보다 조금 큰 화면 위로 주욱 떠 오르는 속보들. 여학생은 잠시 기사 제목을 눈으로 훑다가, 별 감흥 없이 화면을 꺼버렸다.
성녀니, 습격이니… 훈련을 거를 정도로 의미 있는 속보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만박불통이 또 지랄병이 도졌나보다 생각할 뿐.
아무튼, 태블릿을 내려놓은 그녀는 훈련으로 돌아갔다.
태블릿 위로 수많은 기사 알림이 떠오르고, 요동치는 마나에 훈련실이 흔들리길 한참.
샤워실에서 간식까지 챙겨 먹은 뒤에야, 여학생은 다시 태블릿을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난 덕분일까, 화면에 떠오른 기사는 속보가 아닌 정식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성녀 “어떠한 시련과 마주해도 평화를 향한 의지에는 변화 없다…” 호주를 의식한 발언?』
『고개 숙인 호주 총리 “만박불통의 행동, 변명의 여지 없는 실수…”』
『“용납할 수 없는 테러 행위” 아카데미 측의 의례적인 강경 발언, 이유는?』
『성도는 ‘침묵’… 신도들은 ‘분노’』
『구경하는 미국, 침묵하는 유럽. 현대 ‘초인 정치’의 한계.』
『또야? 만박불통의 기행 열전.』
『15년도 더 된 10강 칭호, 이제는 바뀔 때?』
진실 따윈 없는, 재미없고 형식적인 뉴스의 연속.
하지만 그녀는 꾸역꾸역 뉴스를 읽었다. 때때로, 대중들이 믿는 정보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법이니까.
공산주의야말로 아샤의 구원이 될 거라는 믿음이 엘프와 공산병자들을 유지하는 것처럼.
그녀의 오라비가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이 퍼트린 환상을 믿는 것처럼.
입맛이 씁쓸해진 그녀는 재빨리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아무 문제 없다’던 스위스 국립은행, 결국 입장 바꿔 세계수의 결정 분실 최종 인정, 보상안 마련에 고심.』
『둔간 종합 제약, 새로운 영약 라인 ‘분홍 나비’ 발표.』
『시카고 증시 정상화, 빠른 안정을 위해 주지사가 직접 나서다.』
『영약 관련 주가 급등… 일각에서는 ‘엘프에게 전쟁 자금 대주는 꼴’ 우려도.』
『최신 IT 기술과 마법의 조화, 새로운 매직 워치 발매까지 초읽기….』
이번에 눈에 들어온 건 경제 뉴스였다.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지만, 동시에 현재로서는 가장 연이 없는 뉴스들.
한동안 기사를 훑던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기사들 뒤에는 수십, 수백억의 달러가 오가고 있건만, 지금 자신은 원하지도 않는 아카데미에 처박혀 있다니.
괜히 심술이 난 그녀는 휙휙 화면을 넘겼다.
같잖은 강아지 뉴스나, 사건사고 뉴스는 읽을 필요도,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화면을 넘기던 그녀의 손이 멈춘 건, 흔히 황색 언론이라 불리는 저질 언론사들의 뉴스란이었다.
『현역 초인의 충격 고백. ‘초인 올림피아는 섹스촌이다!’』
『‘저건 처녀의 얼굴이 아니다.’ 30년 경력 AV배우의 충격적인 성녀 표정 분석!』
『혼혈, 어디까지 가능할까? 생물학자의 ‘이종족 탐방’』
조회수를 위해 내용과 상관없는 낚시성 제목을 쓰거나, 진짜로 쓰레기 같은 내용으로 가득 찬 뉴스들.
귀족들과 마법사들이 언론을 통제하는 아샤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그 자극적인 뉴스에 여학생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전부 헛소리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럴싸한 내용을 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킥킥거렸다.
특히 성녀의 처녀성을 운운하는 뉴스는 정말이지… 신도들이 두렵지도 않나?
그리고 물론, 모든 기사가 재밌는 건 아니었다.
지구인 특유의 선민사상이 짙은 기사나, 러시아에서 만든 ‘철혈의 아이들’을 미국이 학살했다느니 하는 기사에서는 그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그녀는 쓰레기 기사를 읽는 걸 멈추지 못했다.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이것 말고는 훈련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이상한 뉴스가 눈에 띄었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한국 언론, 그중에서도 삼류로 분류되는 언론들의 뉴스들.
『미국이 감탄하고 프랑스가 노리는 한국의 젊은 초인들!』
『‘동양인의 자존심은 한국이 지킨다’ 초인 육성에 소홀했던 일본이 피눈물을 흘리는 이유?!』
『미래의 10강 중 셋은 한국인? ‘삼한 혈통은 현대의 용사 혈통이다.’ 미국 초인 전문가의 충격 고백!』
뭔데 이거. 그녀는 황당무계한 제목을 읽으며 피식 웃어버렸다.
이번 아카데미 1학년 중 한국 출신들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대단하다고 할만한 건 전윤성과 천여명이 전부였다.
늘상 최고의 인재를 보내온 마탑이나, 아예 성녀를 보낸 성국과 비교하면 어쩌다 반짝한 수준.
그 와중에 전윤성은 미국인이니, 진짜 한국인 중 상위권이라고 할만한 건 박네티와 천여명 정도?
박네티는 최근 무슨 마음의 변화라도 생긴 건지 무단결석을 밥 먹듯이 하고 있고, 천여명…
그는…
‘…그는 진짜지.’
그녀는 테러 사건 당시 지하 벙커에서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며 입술을 씹었다.
빌어먹을 노인네들이 아니었다면, 천여명이나 성녀가 아닌 자신이 학생들을 구원했을 텐데.
그랬다면 승냥이 같은 언론들이 아무것도 못 한 자신을 물어뜯는 대신, 평소처럼 찬양 기사를 쏟아냈겠지.
하다못해 천여명이 먼저 앞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쯧.’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냈다.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제와서 무슨 생각을 한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우울한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는 다른 재밌는 기사로 눈을 돌리려 했다. 성녀와 비밀 호위 간의 은밀한 소문 같은 거나 보며 기분을 풀…
그때, 묘한 사진이 걸린 기사가 그녀의 시선에 걸렸다.
『천여명, 10강과 호각으로 겨루다.』
어이가 없는 제목이었다. 천여명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결국은 아카데미 학생이었다.
용의 해방자니, 뭐니, 용병단과 성녀가 몰려가 수십 년 만에 깨어난 용을 다구리한 이야기에 불과하고.
분명 그랬을 텐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기사를 눌러 사진을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 발과 주먹을 교차하는 두 남자의 모습이 찍힌 사진.
너무 흐릿해서 두 남자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사진이었지만, 문제는… 그 사진 속 남자들의 복장이 진짜 아카데미 경비원 복과 교복이라는 사실이었다.
‘요즘 합성 기술은 대단하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사진을 다운받았다. 오라비에게 보여주면 재밌어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사진을 다운받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화면을 새로고침한 순간.
‘응?’
기사가 삭제됐다. 뭐지? 조회수가 100도 안 되는 쓰레기 뉴스였는데?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다운받은 사진을 확인했다. 흐릿한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박살난 바닥과 교복 소매 사이로 슬쩍 드러난 팔찌 정도가…
팔찌를 확인한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흐릿한 사진 속 팔찌가 며칠 전부터 천여명이 갑자기 차고 다닌 팔찌와 똑같았으므로.
오해의 여지는 없었다.
지구인들은 물론이고, 아샤인 대부분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아샤의 옛 방식으로 만들어진 팔찌를 어떻게 착각하겠나?
그러니 다른 것도 아니고 이 팔찌가 사진 속에 찍혀있다는 건…
‘이게 진짜라고?’
그녀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꼈다.
삭제된 기사, 만박불통, 성녀의 기자회견, 그리고 천여명… 모든 게 하나로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직관이 진실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머리가 소리쳤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래, 이 빌어먹을 인생을 바꿀 기회.
그녀는 즉시 오라비에게 연락했지만, 통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또 어디서 노인네들의 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것이리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라비는 그녀와 달리 충성스럽고, 우직하니까.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설 수도 없는 일이라, 그녀는 결국 오라비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천여명과 자리를 주선해줘. 급한 일.]안타깝게도, 그녀는 문자를 받은 오라비가 난감한 표정으로 팔을 주물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
원래 이름보다는 교장실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는 사무실.
고풍스러운 장식보다 서류가 더 많은 그 방에서, 목에 사슬을 찬 만박불통이 만두를 퍼먹으며 말했다.
“히메나가 쩝, 참 수완이 좋아. 그 많은 기자들의 쩝, 카메라를 쩝, 다 회수하다니.”
“….”
“하지만, 쯥, 길어봤자 며칠 틀어막는 게, 쩝, 전부일걸? 뇌가 있는 정보기관이면, 쩝, 벌써 다 알게 됐을…”
“거, 입에 있는 거 다 처먹고 말하시오!”
쩝쩝거리는 소리를 참지 못한 코르부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만박불통은 수인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긴커녕, 익살스럽게 술까지 들이켰다.
“네가 저놈 스승이라면서? 고거 참, 제자 복이 대단하네 그려.”
갑자기 저놈이 된 여명은 만두 포장지를 뜯던 손을 멈추고 만박불통을 빤히 바라봤다.
“이놈아, 어른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어쩌냐? 대체 얼마나 막돼먹은 집안에서 자랐길래 장유유서도 몰라?”
“…어른답지 않은 어른에게 고개 숙이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여명이 그렇게 대답하자, 만박불통의 표정이 시큰둥해졌다.
“욕 대신 먹물 먹은 소리를 내뱉는 걸 보니, 좋은 부모에게 배운 좋은 집 자식이로구나. 내가 오해했다. 춘부장께 죄송하다고 전해드려라.”
“….”
이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여명이 눈살을 팍 찌푸리기 무섭게, 만박불통이 그의 손에서 포장 만두를 가로챘다.
히메나 교장이 그 꼴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상황에 만두가 입으로 들어가요?”
“굶으면 뭐가 달라지는고? 먹을 수 있을 때 먹는 게 남는 것이여.”
“….”
교장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뒤, 우걱우걱 만두를 처먹는 만박불통을 노려봤다.
“호주 총리가 당신을 위한 특별한 처벌이 있다던데요.”
만박불통은 코웃음 쳤다.
“특별한 처벌? 기껏해야 토끼사냥이나 시키겠지. 아니면 에뮤랑 전쟁하라고 보내거나.”
“….”
소속 국가를 마음껏 비웃는 그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호주 총리가 처벌 시늉만 할 걸 예상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교장은 울컥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만박불통을 수십 번도 더 죽였을 눈빛.
하지만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저 고집불통 초인과 대화해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산적인 대화로 돌아갔다.
“천여명 학생?”
“…예.”
“늦었지만, 고마워요. 저 미친 늙은이가 성녀에게 해코지하는 걸 막아줘서. 그리고… 미안해요.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
갑작스러운 사과를 마주한 여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과는 교장이 아니라 만박불통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만박불통은 실없이 만두만 씹어대고 있었다.
“쩝, 내가 뭘 했다고.”
“제발 닥쳐요.”
“아니, 그렇잖은가. 내가 성녀를 죽이겠어. 아니면 뭐, 성추행을 했겠어?”
그때, 코르부스가 끼어들었다.
“그럼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이오?”
“…쩝, 사람을 찾으려고 했지.”
“사람?”
“그래, 사람. 성녀가 위험해졌을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사람.”
만박불통의 시선이 여명을 향했다. 10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탁한 눈동자가 여명과 마주했다.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여명은 꽉 닫힌 만박불통의 창을 꿰뚫어 보며 물었다.
“왜죠?”
“왜냐면… 그놈이 성검이 점찍은 놈일 테니까?”
“….”
거짓말이다. 눈을 마주한 여명은 그렇게 확신했으나 굳이 그 확신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이 거짓말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꺼내는 척, 손을 뒤로 빼 인벤토리에서 혜성검의 비전유물을 꺼내며 물었다.
“찾으시는 사람은 제가 맞습니다. 됐나요?”
“….”
“그러니 말해보세요. 찾아서 뭐 하려고 하신 건데요?”
“어… 그건…”
그동안 청산유수처럼 내뱉던 만박불통의 입이 막혔다. 그렇게 여명은 물론이고,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쯤.
만박불통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제자로 삼으려고 했지! 그 뭐시냐, 군자삼락이라, 인재를 가르치는 것은 즐겁지 아니한가! 모르나?”
본래 목적을 밝히느니, 밑천을 까겠다는 말. 여명은 그냥 고개를 돌렸다.
“필요 없습니다.”
“…뭐라?”
설마 단박에 거절당할지 몰랐던 걸까? 만박불통의 미간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내 제자가 되면 그깟 혜성검보다 몇 배는…”
“제게는 이미 훌륭한 스승이 계십니다.”
여명은 만박불통의 말을 끊고 슬쩍 코르부스를 바라봤다. 코르부스 또한 빙그레 미소 지으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갑자기 소외된 만박불통은 무어라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조용히 만두를 우물거렸다.
그리고 뭔가를 고민하던 히메나 교장이 다시 말했다.
“…천여명 학생? 여기에 불러온 이유를 말해주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요.”
“예, 뭐든 물어보시죠.”
“천여명 학생은 얼마나 강한 거죠?”
다소 뜬금없었으나,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기자회견이 끝날 때까지 그를 교장실에 가둬둔 이유가 그것뿐이었으므로.
아무튼, 여명은 만박불통과 싸운 직후부터 고민했던 답을 내놨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예, 제가 얼마나 강한지, 전력으로 싸워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은 제대로 싸울 상황도 아니고. 여명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포장 만두를 전부 먹어 치운 만박불통이 말했다.
“못해도 100위 정도.”
그 뜬금없는 말에 히메나 교장이 되물었다.
“…100위요?”
“내가 적당히 봐줬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내가 그렇게 봐줘도 100위권 초인까지는 거뜬히 잡을 수 있다네.”
“….”
“그러니 그 상황에서 내 머리통을 후려 찬 저 친구는 적어도 100위권 위라는 거지.”
히메나가 무어라 답을 찾지 못하고, 코르부스가 부리를 딱- 다물건 말건, 만박불통은 계속 지껄였다.
“이것도 학생이라 마나가 부족하다는 걸 기준으로 삼은 걸세.”
“….”
“사용하는 무술과 몸 상태까지 다 따지면… 어디 보자… 어디 세계수의 결정 같은 것만 하나 먹이면, 진짜들만 모인 50위까지도 거뜬할 것 같은데.”
세계수의 결정 이야기가 나온 순간, 코르부스가 여명의 어깨로 날아왔다. 그녀는 표정 관리를 하는 여명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들었소? 제자가 전력을 다하면 20위까지는 거뜬하겠구려.’
‘….’
아야톨라나, 기사단장처럼 순위와 상관없는 강자들을 많이 봐서 그런 걸까? 여명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난 순위의 위력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당장 저 만박불통이 10강이란 이유로 대접받는 게 현실이었으니까.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교장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미 학생 수준은 아니란 거군요.”
“학생 수준? 아니, 아니지. 학생 수준이지. 그릇이랑 성녀도 학생 아닌감?”
“….”
“그러고 보니 셋 다 1학년이구만? 허허, 잡종들이 아카데미에 들어올 시기와 딱 겹치는 건 우연의 일치……”
“…궈타오. 그 이상 지껄이면 나도 그냥은 안 넘어갈 겁니다. 진심으로.”
여명이 잡종이란 단어에 담긴 뜻을 읽고 눈살을 찌푸리자, 만박불통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교장은 잠시 만박불통을 노려본 뒤, 다시 여명을 보며 말했다.
“천여명 학생. 혹시… 실력을 숨기길 바라시나요?”
“네?”
“이대로 오늘 있었던 일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거예요. 기자들도 따라붙을 거고, 기업들이나, 정부 기관에서도 헤드헌터를 보내겠죠.”
“…그게 뭐? 제 능력껏 관심받으면 좋은 거지 뭘.”
“닥쳐요, 제발.”
만박불통의 말과 달리, 교장은 진심이었다.
유명세라는 건 보호구 없는 칼과 같아서,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을 다치게 하는 법이다.
경쟁자에게 꽃을 주느니, 새싹을 짓밟는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아카데미의 경비 시설이 이렇게나 과도한 이유도, 냉전 시대에 벌어진 무수한 암살 시도 덕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교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천여명 학생?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일을 알리지 않는 걸 추천드리겠어요. 물론 천여명 군이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망도 있겠지만…”
“교장 선생님. 잠깐만요.”
“…?”
“오늘 있던 일, 정말로 막을 수 있긴 한 겁니까? 카메라를 회수했다고 해서, 본 사람들의 입을 전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둘의 공방을 본 사람이 너무 많았다.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암암리에 퍼지는 건 전혀 다른 문제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교장도 확신하지는 못하는 말투였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사실 그의 마음은 이미 숨기는 것보다는 실력을 드러내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애초에 이름을 날리기 위해 온 아카데미 아니었던가?
문제는, 이름이 알려지는 정도였다. 갑자기 100위권 수준의 학생이 되는 건 그가 생각해도 과했다. 비정상적인 천재성은 오히려 의심을 불러오는 법.
그래서 여명은 절충안을 내놨다.
“교장 선생님, 배려는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역시 밝히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 그리고 제가 생각해도 100위권은 너무 과한 것 같아요.”
“…?”
“차라리 적당히 강하다 수준으로 말하면 어떨까요? 마침 제가 용병 출신이니, 실전 경험 덕분에 강하다는 핑계도 먹힐 거구요.”
“10강하고 싸웠는데, 사람들이 그걸 믿어줄 리가….”
말끝을 흐리던 교장은, 여명이 만박불통을 바라보자마자 뭔가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만박불통이 뒤늦게 분위기를 읽고 눈썹을 찌푸렸다.
“나보고 거짓말을 하란 것이냐? 또, 그걸 어떻게 속이는고? 거기 있던 초인들이 바보야?”
교장이 재빨리 대답했다.
“카메라도 빼앗겼겠다. 본인이 봐줬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나는 거짓말하기 싫….”
고집부리는 만박불통의 귓가로, 철컥- 무언가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교장이 받아온 호아나의 리볼버가 장전되는 소리였다.
“…내가 정확히 뭐라고 하면 되겠나?”
***
다음날, 호주로 압송된 만박불통은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에게 ‘초인 랭킹 200위권에 준하는 학생이 있다’고 떠들어댔다.
대부분은 성녀 습격이라는 미친 짓의 전말을 밝히기 싫어서 내뱉은 헛소리라고 생각했으나, 한국만은 달랐다.
특히, 소식을 들은 홍용완 의원은 입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