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19)
을 위한 세계는 없다-319화(319/817)
…불쌍하고 귀여운 후배에게, 100년은 먹을 수 있는 양의 위장약과 유사시 사용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 총 한 자루를 남긴다.
부디 그녀가 좋은 학장이 될 수 있기를.
(중략)
…존경하는 나의 친구에게, 내가 사랑하는 1969년형 적색 포드 머스탱 보스 429 모델을 남긴다.
(중략)
…공포스럽고, 무자비하며, 징그럽게 연기를 잘하는 그녀에게, 내 통장에 있는 금액 중 54,270,980 달러를 기부 형식으로 남긴다.
이것은 그녀가 내게 처음 청구한 치료비 외상값에 인플레이션, 국제 표준 이자율을 더한 뒤, 미국 국세청의 공식 세율을 적용한 가격이다.
부디 이 일을 교훈 삼아 차원문 너머 사제들에게 바가지 쓰는 지구인이 없기를.
(중략)
…마지막으로, 아카데미가 매해 최신 영화와 드라마 등 영상물을 구매할 비용을 기부한다.
부대비용을 비롯한 모든 비용은 내 개인 저작권료와 인세에서 충당될 것이며, 이에 대한 공증 서류는 후임 학장에게…
『퀴니 코완의 유언장 중 발췌.』
***
시베리아 장벽을 감시하는 북만주 기지가 파괴되던 때.
미그니움은 여명에게 어떤 꿈을 보여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드높은 하늘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꿈.
꿈속의 지구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아홉 개의 구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만주에 둘, 아카데미에 여섯, 그리고 워싱턴에 하나.
대체 저 구슬들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미그니움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운명이 깨어났다.』
『모든 운명의 주인들 또한 깨어났음이니.』
『그대는 마땅히 그들의 운명을 빼앗아라.』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이었지만, 여명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드레이테리얼에서 미그니움은 또 한 번 운명의 주인을 언급했다.
『신의 힘을 세 개나 다루던 운명의 주인. 최고의 공물이로다.』
그녀가 말한 운명의 주인은 플레이어였다. 여명의 가족들을 앗아가고, 그 대가로 목이 잘린 원수.
녀석이 운명의 주인이었다는 힌트를 받고 나서야, 여명은 운명의 주인에 대해 고민했다.
플레이어가 운명의 주인이라면, 아카데미에 플레이어와 비슷한 녀석이 다섯이나 더 있다는 것일까?
룸메이트인 ‘작가’를 생각하면 영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딱히 답을 찾을 생각도 없었다. 운명의 주인이 무엇이고, 누구건 간에 여명에게는 더 중요한 일들이 산재해 있었으니까.
그의 앞길을 막지 않는 이상, 굳이 미그니움이 좋아할 만한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태껏 그가 마주했던 모든 운명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튀어나왔다.
[어떻게 운명을 집어삼킨 거야? 운명의 주인들을 죽인 건가? 아니면 순순히 받아냈어? 응? 어느 쪽이야?]연녹색 수룡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혓바닥 굴리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여명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말을 나불거릴 정도였다.
[아니, 아니지. 누구 걸 먹은 거야? 주인공? 에이, 설마 아니겠지. 그러면 바깥에서 온 자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랜덤 생성 개체? 아! 나이를 생각해보면 역시 랜덤 생성 개체를 먹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겠다. 녀석들을 먹은 거지? 그렇지?]용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여명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주인공, 바깥에서 온 자들, 그리고 랜덤 생성 개체?
하지만 용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강아지처럼 여명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자문자답했다.
[근데 정말로 올 줄이야.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퀴니가 옳았어. 나는 믿고 있었다니까?] [하하핫, 사실 거짓말이야! 그 버릇없는 늙은이 말은 안 믿고 있었어.] [그야 그렇잖아? 희망이란 병에 걸리기엔 나는 너무 많은 진통제를 먹었는걸. 아, 여기서 진통제는 체념을 뜻하는 비유야!] [근데 정말로 나타나 버렸네?! 이게 그건가? 마음을 비워야만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포기랑 마음을 비우는 거랑은 다른 거 아닌가? 뭐, 결과만 좋으면 됐지!]수다의 파도 앞에 질린 여명은 슬쩍 일행을 확인했다.
웬만해서는 눌리지 않는 성녀조차 질린 듯 용을 보고 있었고, 세티는 망치를 위아래로 흔들며 용과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아마 머리를 내려칠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대화의 필요성을 느낀 여명이 입을 열었다.
“용이여, 저기…”
[응? 응!]다행히 용은 부르자마자 입을 다물고 여명을 바라봤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왜 여길 지키고 있는 겁니까?”
[설정을 말해줘, 아니면 진실을 말해줘?]“…둘 다 말해주시죠.”
“…저요?”
[응! 너! 그리고 내 이름은 ‘용이여’가 아니야. 라날이지.]라날이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세티가 뭔가 떠올린 듯 되물었다.
“라날? 오르세 라날?”
[오우, 내 성씨도 아는구나? 그… 공략집? 그거 보고 온 거니?]이번에는 여명이 대답했다.
“아니요. 데메론드와 오르세 타불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오라버니와 탕아의 이름을 알다니! 퀴니랑 동 세대였구나?! 역시 인간 나이는 구분하기 어렵다니까!]용은 진심으로 놀란 듯 목을 쭉 뒤로 빼고, 날개를 퍼덕였다. 여명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퀴니라면 혹시… 아카데미 초대 학장 퀴니 코완을 말하는 겁니까?”
[응, 너 퀴니랑 비슷한 나이 아니야? 우리 오라비가 살아있는 걸 보려면 그 정도 나이는 돼야 할 텐데.]“어… 당연히 아닙니다. 아마 초대 학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제가 그분을 할머니라고 불렀을 겁니다.”
[할머니? 퀴니는 그 말 싫어했는데? 죽을 때까지 언니라고 불리는 걸 좋아했어.]“….”
초대 학장의 기묘한 취향은 흥미로웠지만, 그뿐이었다. 라날이 뭘 착각하고 있는지 깨달은 여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에 대해 들은 건 바로 얼마 전입니다.”
[어? 정말?]“예.”
[그럴 리가? 우리 오빠는 이미 죽었을 텐데? 아, 너 혹시… 네크로맨서야?]“….”
누가 설명해준 건 아니었지만, 여명은 눈앞의 용이 성녀가 개입하지 않은, 원래 만주와 오르세 타불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야기하자면 길어지는데…”
그는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그가 뒤튼 운명에 대해 설명했다.
성녀가 미래를 예지해 만주의 재앙을 막고, 그가 만주의 용병단과 함께 오르세 타불의 폭주를 막은 것까지, 전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오르세 라날의 목이 휘어지며 물음표를 그렸다.
저게 뭔짓… 아니, 오빠가 살았다는 데 기뻐하지 않는 건가? 여명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용이 대뜸 물었다.
[왜 안 죽였어?]“…?”
[심장도 안 먹고, 뼈랑 비늘 값도 안 받고, 한국에게 찍히고… 왜 그런 멍청한 짓을?]지금 자기 오빠를 살린 게 멍청한 짓이라고 한 건가? 여명은 얼떨떨함을 삼키며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드워프 왕의 영혼과 옥새를 걸고 거래를…”
다음 순간, 용이 말을 끊었다.
[그거야 안 지키면 그만이잖아. 옥새도 이미 계승 받았겠다. 우리 오빠를 죽인다고 해서 죽은 지 수십 년도 지난 영혼 따위가 뭐 어쩌겠어?]“….”
이 미친년이 뭐라는 거야? 여명은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채, 용의 얼굴을 바라봤다. 용 또한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침묵.
침묵 속에서 세티가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중얼거리며 용의 뒤편으로 향하는 사이, 용이 말했다.
[이상하네.]“….”
[퀴니가 분명 악독하고 사악한 존재일 거라고 했는데… 넌 너무 호구 같아 보여. 연기는 아닌 거 같은데?]거기까지 말한 용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성녀를 바라봤다. 파충류 특유의 세로로 갈라진 동공 위로 총에 손을 올리는 성녀가 비췄다.
하지만 용은 성녀의 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여명을 보며 말했다.
[혹시, 성녀 앞이라서 착한 척하는 거야?]“….”
[굳이 그럴 필요 있어? 성녀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미래의 이득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잖아. 거기다 야한 것도 못 하고.]직후, 성녀가 버럭 소리쳤다.
“뭐, 뭐라는 거야?! 우리 야한 거 했거든?! 어?! 그렇고 그런 거 다했어!”
[아, 물론 그러시겠지. 손도 잡고, 뽀뽀도 하셨겠지. 근데, 그거 알아? 사제들이 너한테 거짓말한 거야. 인간은 뽀뽀해도 임신 못 해.]그렇게 이죽거린 용은 딱하다는 듯 성녀와 여명을 번갈아 바라봤다. 여명은 ‘우리가 침대에서 얼마나-’ 라고 소리치는 성녀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라날, 왜 그렇게 도발하는 겁니까? 우리가 뭐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죽기 전에 말이라도 많이 하려는 거지. 솔직히 답답하잖아.]“…죽기 전?”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우린 그쪽 죽이러 온 거 아닙니다.”
[????]오르세 라날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귀를 팠다. 하지만 여명은 여전히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너 뭐… 용도 생명이다. 그런 거 지껄이는 용박이야?]“…아닙니다.”
[그럼 부자야? 용의 심장 정도는 막, 그냥 한 달 월급 아끼면 먹을 수 있고 그런 건가?]“아까 전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여명이 그렇게 쏘아주자, 용은 정말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여기 왜 왔어? 나랑 농담 따먹기하러 왔나?]“….”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드넓은 공동 저편, 용이 아닌 인간 사이즈로 만들어진 철문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해저 터널로 향하는 길을 열어 달라, 부탁하러 온 겁니다.”
[부탁? 안 죽이고?]“예, 이곳에 오기 전에, 만박불통과 거래했습니다. 당신은 주인공에게 죽을 운명이니, 우리가 죽이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제 이름은 천여명입니다.”
[오, 이쁜 이름이네. 근데, 내가 이름을 물은 게 아니라는 건 알잖아?]“….”
[널 뭐라고 불러야… 음… 그래, 운명의 강탈자? 파괴자? 파괴자 쪽이 더 멋있다. 운명의 파괴자! 천여명, 진짜로 날 죽이러 온 거 아니야?]“제가 왜 굳이 당신을 죽여야 합니까?”
[해저터널을 열어 퀴니의 보물을 얻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날 죽이고 강해질 테니까? 적이 강해지는 걸 막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자연스레 여명이 주인공과 적대할 거라는 어투였다. 여명은 용의 머리를 향해 망치를 조준하는 세티에게 하지 말라는 수신호를 보낸 뒤, 다시 물었다.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전 그 사람과 싸울 생각 없습니다.”
[그래? 하지만 네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주인공의 생각이 중요하지.]“그럼 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제가 그에게 뭘 했다고?”
[완전 엿 먹였잖아! 네가 비튼 운명은 전부 주인공을 위한 거라고, 운명의 구슬을 두 개나 먹는 동안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라날은 성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너는 성녀를 이용해서 주인공을 위해 마련된 만주 사냥터를 없애버렸고, 또… 성녀도 빼앗았잖아.]그러자 성녀는 기가 찬다는 듯 총을 뽑았다.
“내가 물건이야? 뺏고 빼앗기게?”
[이번 대 성녀는 좀 띨띨하네. 비유가 뭔지도 모르는 얘가 어떻게 성녀가 됐지?]“뭐? 이 썩을 도마뱀 년이….”
[하핫, 그래, 성녀 때문에 착한 척하는 게 아니라는 건 이제 알겠네. 아무리 성욕에 미쳐도 그렇지. 이런 여자 때문에 손해를 볼 리가 없어. 그렇지?]“야! 왜 자꾸 시비야?!”
[시비라니, 담백한 사실 인대?]용과 성녀가 으르렁거리는 그때, 여명이 끼어들었다.
“잠깐, 잡담은 그만하고, 이번에는 내가 질문하겠습니다.”
[질문?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해봐.]“운명의 주인… 아니, 내가 운명의 구슬을 두 개나 먹었다는 걸 어떻게 안 겁니까? 그것부터 설명해주시죠.”
[보면 아는데?]“…장난질 그만 하고, 좀 똑바로 설명해.”
확 짜증이 난 여명이 존댓말을 때려치우자, 용이 입을 다물고 그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몸체가 전등을 가리며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 여명의 몸이 검게 물들고 파충류 특유의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가 황금색 눈동자 위로 겹쳐진다.
[농담 아냐. 내가 보는 세상을 보면 너도 알게 될걸.]운명이 주인공을 위해 준비한 제물, 오르세 라날은 그렇게 말하며 여명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비늘 달린 발톱이 정확히 여명의 눈과 눈 사이, 미간을 쿡-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