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2)
을 위한 세계는 없다-32화(32/817)
〈 32화 〉 NPC를 위한 우연 (3)
* * *
***
발걸음을 뗀 순간, 여명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호흡이 멈추고, 피와 근육 사이사이로 마나를 펼쳤다.
타닥!
괴물은 여명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에야 움직였다. 녀석은 맹수처럼 몸을 낮게 깔았다가, 뒷발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여명의 검이 괴물을 향해 호선을 그렸다. 괴물의 네 개의 앞발, 열여섯 개의 발톱이 동시에 여명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다음 순간, 늑대 괴물의 앞발과 여명의 검이 서로를 훑고 지나갔다.
“캬아악!”
그러나 피를 본 건 늑대 괴물뿐이었다. 녀석의 오른 앞발 중 하나가 툭, 잘려나가며 피를 뿌렸다.
땅에 떨어져 펄떡이는 팔, 거칠어진 숨소리.
괴물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녀석은 본능에 모든 걸 맡긴 듯, 이를 드러내며 여명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녀석의 목에 걸린 쇠사슬이 촤르르 소음을 내뿜고, 허공에 피가 튀는 그 순간.
여명은 숨을 내뱉었다.
후우
파양결은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럴만한 수준의 적이 아니었으니까.
그 대신, 남는 마나를 전부 감각에 집중해 녀석의 모습을 머릿속에 담았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근육의 움직임, 섬뜩하다 못해 뒤틀린 마나의 역겨움.
괴물의 움직임에선 배울 점이 많았다. 일반적인 인간에게선 배울 수 없는 깨달음들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재생력을 믿고 마나를 밀어넣어 심장과 혈관을 강제로 쥐어짠다… 나쁘지 않아.’
생각이 끝나는 순간, 여명은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괴물의 앞발과 검이 충돌했다.
촤악!
이번에는 왼팔이 잘려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괴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남은 발을 휘둘렀다.
‘더 배울 건 없겠어.’
공세가 뒤바뀐다. 여명은 양손으로 칼을 잡고, 늑대 괴물에게 파고들었다.
한 번, 남은 팔을 잘랐다. 두 번, 가슴을 길게 베고, 세 번째에 목젖을 베었다.
“캬오오오!!”
하지만 녀석은 죽지 않았다. 꺼져가는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명의 목을 향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쩍 벌어진 입과 흉측한 이빨이 여명을 노렸다. 하지만 녀석의 이빨보다 여명의 칼이 조금 더, 빨랐다.
푹!
기다란 검이 녀석의 입천장을 꿰뚫었다.
여명이 힘을 줄 것도 없었다. 관성의 법칙이 녀석의 뇌까지 칼끝을 배달해줬으니.
“캬, 캭, 켁…”
뇌를 뚫린 괴물은 몇 초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명이 입에서 검을 뽑자, 녀석의 몸이 축 늘어졌다.
검을 회수한 여명은 고개를 돌려 만석철을 바라보았다. 흉터가 가득한 그의 얼굴에는 얼떨떨함이 가득했다.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군… 인상적이야.”
“시험에 통과한 겁니까?”
여명이 천연덕스레 질문하자, 만석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여명을 바라보았다.
“통과하고도 남지. 남은 시험은 볼 것도 없겠군.”
시험용 괴물을 죽었다는 당혹감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그깟 괴물 따위, 다시 잡아 오면 그만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쓸만한 인재는 하늘이 점지해주지 않는 이상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법이다.
“천여명 단원, 축하하네. 자네는 지금부터 선죽 용병단 3번 팀의 일원일세.”
만석철은 여명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들겼다. 시험 감독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게 바로 이런 때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입구 쪽에서 들려온 가벼운 목소리가 그의 기분을 망쳤다.
“석철이, 사람 보는 눈이 많이 죽었네?”
목소리를 들은 만석철의 눈썹이 길게 휘어졌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김만수 부단장, 여긴 왜 왔소?”
부단장? 예상외의 직책에 여명이 고개를 돌려보니, 입구에는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 지금은 부단장 아니고 교관이라니까.”
“헛소리하러 온 거라면 돌아가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 석철아, 거기 그 신입 놈에 관해서 얘기 좀 하자.”
그제야 만석철이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 위로, 가로 진 흉터가 길게 휘어졌다.
“무슨 이야기?”
“그 놈, 3번 팀이 아니라 2번 팀으로 보내자.”
“…천여명 단원은 3번 팀에 배정되기로 했소.”
“아니, 인마. 3번 팀이면 바로 만주행이잖아. 저 정도로 재능있는 녀석을 괴물하고 난민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꼭 보내야겠냐?”
“용병단이 정부 할당량을 채우려면 한 명이라도 많이 더 만주로 단원을 보내야 하오. 아시잖소?”
만석철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김만수는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천여명과 괴물의 시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푹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다른 놈 보내면 되지. 방금 너도 봤잖냐. 저 신입의 잠재력. 2번대에서 몇 년만 키우면, 초인이 되고도 남을 거야.”
“….”
“지금 우리 용병단에 초인이라곤 나랑 단장 다 포함해도 아홉 명밖에 안 되잖냐. 근데 여기서 한 명 더 추가해서 두 자릿수가 된다? 그럼 인마, 우리 용병단도 이제 직접 차원문을 넘을 수 있어.”
만석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명이 보여준 가능성, 그리고 초인이란 존재의 희소성을 생각해보면 부단장의 말이 백번 옳았다…
그의 고민이 깊어지던 순간, 천여명이 슬쩍 손을 들었다.
“저… 제 의견은 상관없는 겁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여명에게 쏠렸다. 당돌한 질문이었으나, 김만수는 피식 웃으며 여명의 질문을 받았다.
“물론, 우리 신입 단원 의견도 중요하지. 근데, 생각할 게 뭐가 있냐?”
그는 성큼성큼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더니, 곧이어 여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부단장의 권한을 걸고 약속하지. 2번대로 오면 무술이랑 영약을 지원해주마. 내가 장담하는데, 3년 내로 초인이 될 수 있을 거다.”
김만수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며 여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초인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어.’
만석철이 눈치채지 못한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괴물과 싸울 때는 마나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부단장이라는 사람은… 실망스러웠다.
만석철과 달리 그는 초인 아닌가. 초인이 돼서, 상대의 몸을 직접 만지고도 상대가 초인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 하다니.
‘중견 용병단의 부단장 정도 되는 사람도 이 정도란 말이지….’
여명은 슬쩍 뒤로 물러나, 김만수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 부단장님?”
“딱딱하게 부단장님이라고 부를 필요 없어. 김만수, 만수 형이라고 불러도 된다.”
거리감을 재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여명은 애써 아쉬운 표정을 가장했다.
“부단장님,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죄송합니다.”
“…뭐? 죄송?”
김만수의 눈썹이 슬쩍 휘어졌다. 마치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고?”
“예, 전 만주로 가고 싶습니다.”
여명은 고개를 숙여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계획은 용병단에서 실전 경험을 쌓는 거지, 뭣도 아닌 초인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었으니까.
“인마, 너 만주가 뭐 하는 땅인 줄 알고 말하는…”
“부단장. 신입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소만.”
김만수가 무어라 더 말하려 하자, 만석철이 끼어들었다.
“부단장께선 지금 징계를 받아 일개 교관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오. 이 이상은 월권행위가 될 수 있소.”
“허? 석철이 너 인마…”
“내가 오늘 일을 단장께 말하면, 다음 징계에선 교관이 아니라 화장실 청소부가 될 거요. 정말로 그러고 싶소?”
“….”
“천여명 신입 단원, 자네는 원하는 대로 3번 팀에 소속되어 만주로 가게 될 걸세. 내가 직접 등록을 도와주지. 자, 어서 가세.”
만석철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버리곤, 여명을 이끌고 지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던 김만수는,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와, 씨, 저거 진짜 미친놈이네.”
신입은 정말로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 건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김만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나이 때 그에게 누군가 무술과 영약을 준다고 했으면 항문이라도 빨았을 텐데. 역시 재능있는 놈들은 다른 건가?
그는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여명이 쓰러트린 늑대 괴물로 시선을 돌렸다.
절단 된 앞발, 깔끔하게 뇌를 뚫은 일격까지.
10년 차 용병이 처치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깔끔하게 처리된 시체였다.
“쓰읍, 역시 아까운데… 그냥 콱 만주까지 따라가?”
단장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 소리를 태연히 지껄이면서, 김만수는 두 사람을 쫓아 지하를 나섰다.
***
세티는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 위로, 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뺨을 쓸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았다.
한국 정부의 눈을 피해 싸구려 모텔방을 전전했던 게 바로 어제 같은데, 기숙사의 침대는 무슨 솜사탕 덩어리처럼 푹신했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
그녀는 크게 기지개를 켠 뒤, 시계를 확인했다. 7시 30분. 입학식 까진 아직 한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더 잘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 바다 넘어 한국에 있는 쇠똥구… 아니, 여명씨는 지금도 고생하고 있을 텐데, 자신은 잠 욕심이나 내고 있다니.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아침을 준비했다. 간단하게 세안을 맞치고, 입학식에 입을 교복을 준비하고…
마지막으로,미처 풀지 못한 짐을 확인했다.
짐은 가볍다 못해 단출했다. 인스턴트 라면 세 봉지, 여명씨와 개인적으로 연락하기 위해 준비한 대포폰 하나, 그리고…
새하얀 천에 감싸인 검 한 자루.
그녀는 조심스레 검을 들어 올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명이 그녀에게 직접 건넨 검이었다.
검을 감고 있던 천을 살짝 풀자, 손잡이에 새겨진 태양 인장이 드러났다.
지금은 사라진, 차원문 너머 제국의 인장. 지구의 물건이 아니란 증거.
세티는 인장을 손가락으로 훑으면서, 여명이 그녀에게 이 검을 건네 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건… 차원문 너머에서 온 검이네요? 이걸 왜 저한테?
세티, 아카데미에 가면, 이 검과 똑같은 검을 가진 녀석이 있는지 찾아줘.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내 가족의 원수가 아카데미에 있을지도 몰라. 녀석을 추적할 단서는… 이 검과 똑같은 검을 쓴다는 것뿐이고.
그렇게 말하며 검을 건네주던 여명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세티에겐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기꺼이 검을 받은 뒤, 아카데미에서 원수를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문제가 있다면, 아카데미에서 똑같은 검을 쓰는 학생을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점이었다.
검을 쓰는 사람이 너무 많기도 했고, 무엇보다 학생용 보급 무기가 아닌 시그니처 무기를 대놓고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우선 입학식부터 끝내고, 차근차근 학년을 뒤지는 수밖에 없….’
그녀가 나름의 계획을 세우던 그때, 기숙사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진짜 금을 녹여 바른 듯, 반짝이는 금발의 소녀.
세티 또한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아카데미의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성검이 직접 아카데미로 데리고 온 학생이었으니까.
그녀는 커다란 짐가방을 낑낑거리며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이 기숙사 방에 배정된 게 틀림없었다.
‘하필 룸메이트가….’
은밀한 학창생활을 계획하고 있던 세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유명인사의 룸메이트라니. 첫 단추부터 꼬였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얼굴 위로 영업용 미소를 띄웠다.
1년, 어쩌면 3년을 함께 해야 하는 룸메이트 아닌가. 굳이 첫인상을 망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검을 짐가방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금발 소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룸메이트가 된 홍세티라고 해요.”
“헥, 흐, 저기, 그… 안녕, 안녕하세요.”
짐가방의 무게 탓인지, 금발 소녀의 뽀얀 얼굴 위에는 홍조가 띄워져 있었다.
“힘들어 보이시는데, 좀 도와 드릴까요?”
“그, 그래 주시겠어요?”
소녀가 허락하자마자, 세티는 그녀의 가방을 들어 올렸다. 나름 묵직한 가방이었지만, 초인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무게였다.
세티는 가볍게 짐가방을 침대 옆으로 옮겨준 뒤, 소녀를 향해 미소지었다.
“혹시, 더 옮겨야 할 게 있나요? 도와드릴게요.”
“아뇨, 아뇨. 이거 하나뿐이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인사는 끝이었다. 소녀는 우물쭈물하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세티도 굳이 이 이상 대화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짐을 다 정리한 금발 소녀가 세티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저, 홍 씨라면… 한국분이신가요?”
“예, 한국에서 왔어요.”
아, 역시 그렇군요. 소녀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도, 동향 사람이네요. 저도 한국인이거든요.”
“…한국인이셨어요?”
“그게, 태어난 곳만 한국이지, 갓난아이일 때 호주로 이민 와서 실제로는 호주사람이나 다름없지만요.”
거짓말이네. 세티는 단번에 소녀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간파했다. 그녀의 눈썰미 덕분이라기보단, 상대의 거짓말 실력이 너무 형편없는 탓이었다.
어색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떨리는 목소리라니.
‘…평생 거짓말 한 번 안 해본 사람인가?’
세티는 굳이 그녀의 거짓말을 지적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한국 사람인 척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을 때, 세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세티씨.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제 이름은… 미리예요. 쇠미리.”
“…설마, 성이 쇠 씨에요?”
“예, 그, 뭔가… 이상한가요?”
당연히 이상하지. 김 씨나 이 씨도 아니고, 일주일도 안 돼서 쇠 씨를 둘이나 만나는 게 정상이야?
세티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가까스로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특이한 성 씨라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예요.”
“그, 그렇죠? 특이한 성 씨죠? 저희 아버지가 좀, 특이한 성 씨로 유명하세요. 하하, 하…”
어색한 웃음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쇠미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