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20)
을 위한 세계는 없다-320화(320/817)
***
[어떠냐?]여명은 대답할 수 없었다. 용의 마나가 흘러든 시야가 갑자기 뒤틀린 탓이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비유였다. 뒤틀린 건 그의 시야가 아니라 세상이었으므로.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흐물거리고, 아름다운 성녀의 몸이 일렁거렸다. 거대한 용의 몸은 색채를 잃고 마치 거대한 그림자처럼 텅 비어버렸다.
마치 뒷골목 마약쟁이들이 말하는 환각처럼 어지러운 광경.
용은 이런 걸 계속 보고 있던 건가? 여명이 어지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숙인 순간, 그는 예상하지 못한 것과 마주했다.
그의 가슴 한가운데, 마치 불타는 태양처럼 혹은 가열된 유리구슬처럼 빛을 내뿜고 있는 구슬.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여명은 그 구슬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용이 본 ‘운명의 구슬’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의 구슬 속에는 또 다른 구슬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들어있었으니까.
하나는 마치 짐승에게 잡아먹힌 시체처럼 난도질당한 채였고, 또 하나는 애인의 품에 안기는 여인처럼 다소곳하게 중앙에 박혀 있었다.
격렬하게 떨리는 구슬은 플레이어의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또 하나는 뭐지?
그의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오르세 라날이 대뜸 물었다.
[예쁘지? 근데 너무 빠지지는 마. 오래 보면 정신이 나가버리거든.]“이게 무슨… 왜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된 거야?”
[뭐 이상할 게 있어? 물에 빠진 사람 눈에는 물만 보이는 법이잖아. 운명에 빠지면 운명만 보이는 법이야.]“….”
이게 운명에 익사한 결과란 말인가?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용의 뒤편에서 긴장하고 있는 세티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즉시, 주인을 알 수 없었던 구슬의 주인을 깨달았다.
‘세티…?’
그녀의 가슴 속, 운명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었으니까.
내가 빼앗은 또 다른 운명은 세티의 운명이었구나. 그녀가, 나에게.
짧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는 가운데, 그의 시야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이마에서 손을 뗀 용이 손을 휘휘 젓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하자. 더하면 너도 빠지겠다.]“….”
[어쨌거나, 알겠지? 내가 어떻게 한눈에 네 정체를 알아봤는지.]“…혹시,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 더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미리 조심할 생각으로 물어본 질문이었다. 용은 가볍게 대답했다.
[글쎄? 나처럼 멍청한 실수를 할 사람이 또 있을 거 같지는 않네. 있어도 용이 아닌 이상 제정신이 아닐 테고.]있더라도 미쳤을 거란 말.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납득했다.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누구라도 오래가지 않아 미쳐버릴 테니까.
[아무튼! 진짜 왜 날 안 죽이겠다는 거야? 불통이 부탁해서 그랬다는 핑계는 대지 말고. 솔직히 죽이고 모른 척하면 되잖아.]라날은 보라는 듯 자신의 꼬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도축장의 돼지가 자기 살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여명은 눈을 주무르며 대답을 생각했다.
친구인 오르세 타불의 여동생을 죽이기 싫어서? 카할 마그두의 시체가 있는 판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용을 죽여야 할 이유가 없어서?
둘 중 어떻게 대답해도, 이 정신 나간 용은 인정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남은 대답은…
“…너 같은 거 안 죽여도 난 이미 충분히 강하니까?”
다행히 이 대답은 먹힌 것 같았다. 용이 날카로운 이빨이 다 드러날 정도로 살벌한 미소를 지었으니까.
[오… 내가 상상하지 못한 대답 중에서 가장 멋진 대답이야. 내가 인간이었으면 반했을지도 몰라!]“인간이었어도 필요 없어.”
여명이 반박하자, 용이 하하핫 웃어 재꼈다. 그리고 지하 공동에서 웃음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쿵! 여명의 바로 앞을 손으로 내려쳤다.
[어디 1학년 따위가, 수십 년간 지하에 처박혀 있던 오빠를 쓰러트렸다고 네가 뭐라도 된 거 같아?]“….”
[너는 기껏해야 이제 막 고개를 튼 새싹에 불과해. 이 세상에 진짜 강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으면, 조금 전 헛소리는 쏙 들어갈걸?]“…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네 그 오만한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게 비유해줄까? 조금 전에 데메론드와 오빠의 대화를 들었다고 했지? 그 데메론드와 동등하게 검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 거 같아? 적어도 열 명은 넘어. 그리고 주인공은 10년 내로 그 열 명 안에 들어갈 거고. 응? 알겠어? 그 강대한 엘프의 수장과 동등해지는데, 10년이야! 고작 10년! 운명의 파괴자, 네가 지금 자만하는 강함은 몇 년짜리일까?]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여명은 잠시 용과 눈을 마주하다가, 슬쩍 저편에 있는 세티를 확인했다.
그녀는 작은 손 망치를 휘휘 흔들며 벼락을 모으고 있었다. 신호만 주면 언제라도 용의 두개골을 날려버릴 수 있는 모습.
곧이어 세티가 ‘준비 완료’라는 듯 여명과 눈을 마주쳤다. 여명은 손짓으로 대답했다.
‘잠깐만.’
그러거나 말거나, 용은 과장된 자세로 말했다.
[자, 운명의 파괴자야, 날 죽이고 내 심장과 피, 시체를 제물로 삼아! 그리하여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악!]안타깝게도 용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여명이 인벤토리에서 산의 눈물을 꺼내 그녀의 앞발을 찍어버렸으니까.
[이런, 씹! 존나 아파! 잠깐, 잠깐만!]산의 눈물과 라날의 크기를 비교하면 잘해봐야 이쑤시개에 찔린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파양결의 마나가 상처를 들쑤시는 고통은 이쑤시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악!]결국, 고통을 참지 못한 라날은 여명에게 다른 앞발을 휘둘렀다.
여명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염동력을 일으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우드득, 팔을 꺾었다.
용의 뼈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통을 주기에는 충분한 위력.
라날은 여명이 일부러 위력을 아끼고 있다는 걸 깨닫고 소리쳤다.
[야, 이! 죽이라고 했지, 고문하라고는 안 했어!]여명은 가볍게 대답했다.
“어차피 죽일 거, 어떻게 하든 내 맘이지.”
[이, 이거 완전 미친놈이었네!]“….”
누가 누구한테 미친놈이래. 여명이 대답 대신 염동력에 힘을 싣자, 용의 팔이 거꾸로 돌아갔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라날의 비늘이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이, 이런다고 내가 사, 살고 싶어 할 거 같아? 어차피 고문당해도 죽는 건 똑같아!]“마음대로 해. 난 밤새 할 수 있으니까.”
죽고 싶은 용과 죽일 마음이 없는 인간의 치졸한 말다툼.
지켜보던 성녀는 물론이고, 무술을 준비하던 세티마저 얼이 빠질만한 광경이었다.
다행히 이런 황당한 상황에 익숙한 세티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해저터널로 향하는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성녀는…
“치유할까?”
[뭐? 야 이 미친년아! 네가 그러고도 성… 아악!]“전능하신 백색의 울쓰바티시여, 당신의 딸이 기도드리나이다. 이 무례하고 정신 나간 용에게 당신의 따스한 빛을 내려주시옵소서…”
고문받는 용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용이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으나, 비명은 둥지 주변을 흐르는 하수도 물살에 휘말려 사라졌다.
뭐, 아무튼, 정신 나갈 것 같은 비명과 고문이 이어지길 잠시.
오르세 라날이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그만! 그만해! 내가 졌어! 안 죽을게! 안 죽을 테니까! 그만해!]여명은 기다렸다는 듯 염동력을 멈추고, 칼을 뽑았다. 용의 피를 한껏 머금은 산의 눈물이 요사스럽게 빛났으나, 곧바로 성녀의 치유가 상처를 보듬었다.
[미친…]지켜보던 오르세 라날은 어이가 없어서 콧김을 내뿜었다. 미친 새끼, 다른 생물도 아니고 용이 직접 죽어 주겠다는데 그걸 고문해?
그녀는 무어라 한바탕 욕을 쏟아내려다가, 여명이 세티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돌리는 걸 보고 욕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하, 안 됐네. 날 죽이지 않으면 해저터널의 문은 열리지 않아!]용의 말마따나, 세티는 해저터널로 이어지는 두꺼운 철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여명은 세티와 용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별말 없이 황금 옥새를 꺼내 들고 문으로 향했다.
잠시 후, 홀로 남아 상처를 치유하던 성녀가 말했다.
“…너도 참, 살려줘도 지랄이다.”
[누가 살려달래? 어차피 너희 손에 안 죽으면 주인공 식탁에 올라갈 운명인데… 드디어 내게도 자유가 온 거라고. 놓치고 싶지 않아.]“누구 식탁에 올라가느냐를 자유라고 부르진 않아.”
[내게는 그게 자유야!]“…운명에 순응하지 말고 발버둥 치면 되잖아.”
[하, 예지를 가진 성녀라서 그런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니, 너는 운명 파괴자랑 함께했었지. 모를 만도 하네.]“…으응?”
[운명은 바꿀 수 없어. 진실이 왜 잔인한지 알아? 진실은 변하지 않아서 잔인한 거야.]성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더더욱 여명의 말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여명이 운명을 바꾼다며?”
[아까 한 말 또 하게 할래? 1학년 수준으로는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니까? 날 먹어야 그나마 가능성이…]“1학년 수준 아닌데? 여명이 지금 아파서 그렇지, 지금도 혼자서 아카데미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을걸?”
[…?]“정말이야. 다섯 신을 걸고 맹세해.”
[뭐 그딴 거에 신을 걸어? 이거 진짜 또라이년이네.]“…그만큼 여명을 믿는 거지. 네가 운명을 믿는 것처럼.”
성녀는 헛웃음을 흘리는 용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상대하기 귀찮다는 태도였다. 용도 그것을 느꼈는지, 조금 답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너희는 날 죽여야 해. 내가 살아있는 한, 저 해저 터널의 문은 안 열려.]“걱정도 팔자네. 여명에게는 황금 옥새가 있어.”
[하! 퀴니가 옥새 같은 꼼수를 대비하지 않았을 거 같아? 그게 원래는 누구의 손에 들어가는 건지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냥 나를 죽여.]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편에서 황금색 마법진이 번쩍였다. 성녀가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문은 여전히 굳건히 닫혀 있었다. 정말 황금 옥새로도 문이 열리지 않는 문이라고?
[봤지? 그냥 퀴니의 안배를 따라. 그게 너희도, 나도 편한 길이야.]그 순간, 여명과 세티가 있던 방향에서 콰아앙!! 폭발음이 울렸다.
세티의 홍단벽력과 여명의 화산쇄설이 동시에 터지는 소리.
하수도가 흔들리는 위력을 본 오르세 라날은 침을 삼켰다.
[…안 된다니까 그러네.]용이 무어라 중얼거리건, 여명과 세티는 계속 문을 두들겼다.
쾅, 콰앙, 콰아앙!!
둥지 주변 물줄기 덕분에 소리와 진동이 퍼지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사람들이 몰려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
[그냥 죽이라니까.]낭비도 저런 낭비가 없네. 라날은 답답함과 황당함을 느끼며 자세를 다잡았다.
저 두 사람이 언제쯤 포기하고 자신을 죽이러 올지 두고 볼 셈이었는데…
쩌적-! 어느 순간, 철문에서 작은 파열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문의 두께가, 그곳에 걸린 마법진이 토해내는 비명.
[어?]용의 얼굴 위로 황당함이 피어나는 사이, 일행에 합류한 성녀가 두 사람에게 축복을 더했다.
번쩍이는 신의 축복 아래, 홍단벽력의 번개와 화산쇄설의 불씨가 뒤섞였다.
앞서나가는 건 세티의 망치였다. 쾅! 망치가 문의 틈을 벌리는 순간, 여명의 검이 틈 사이를 찔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불씨.
!
폭발음은 없었다. 두꺼운 문 안쪽에서 이어진 폭발은 들썩이는 고요만을 불러왔다.
하지만 고요가 불러온 결과는 확실했다. 산산조각난 문의 파편들이 비산하고, 멍하니 입을 벌린 용의 비늘을 때렸다.
[어… 어떻게…? 그 문은 내가 죽어야만 열리는 건대…?]질문하는 용을 향해, 여명이 대답했다.
“보면 몰라? 안 열고 부쉈잖아.”
***
“마나 메탈에 마법진에… 이 문이 용보다 비싸겠는데.”
땀에 젖은 세티는 문의 파편을 확인하며 혀를 찼다. 사실, 문이라고 하기도 뭐했다.
황금 옥새가 잠금을 풀기는커녕 문으로 인식조차 못한 걸 보면, 그냥 벽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쩐지… 여명 아니었으면 이거 치우는 것도 일이었겠다.”
성녀의 말마따나, 큼직큼직한 철문의 파편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바리케이드였다.
여명이 인벤토리로 손쉽게 파편을 회수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뭣도 모르고 문을 부쉈으면 고생깨나 했으리라…
그때, 문을 인벤토리에 넣던 여명이 움찔, 손을 멈췄다. 무언가가 인벤토리에 들어오는 걸 거부한 탓이었다.
뭐지?
파편 사이를 확인하는 여명의 시야로, 예상하지 못한 물건이 보였다.
“…편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작디작은 편지 봉투.
“뭐야, 그거?”
망연한 용을 구경하고 있던 세티와 성녀가 뒤늦게 여명에게 다가왔다.
“편지네? 이거 설마, 문 사이에 있던 거야?”
성녀가 나름대로 추리를 내놨으나, 여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편지의 서문에 적힌 글자가 그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으니까.
[내 친구를 죽이는 대신 힘겹게 문을 연 멍청이에게.수백, 어쩌면 수천 년간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퀴니 코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