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22)
을 위한 세계는 없다-322화(322/817)
***
퀴니 코완이 유언장을 작성하는 사이, 여명은 자신의 인생을 쭉 나열하기 시작했다.
인천, 플레이어, 만주, 아카데미, 드레이테리얼, 제미니 시티, 시카고, 그리고 다시 아카데미.
미그니움이나 부활처럼 차마 말해줄 수 없는 이야기나, 전대 가주처럼 중요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이야기가 빠진다 해도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길었다.
퀴니 코완이 스물두 장짜리 유언장을 다 적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결국 여명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건, 퀴니 코완이 유언장의 마지막 서명을 적는 시점이었다.
“흠.”
부드러운 펜을 따라 유언장 작성이 끝나고, 그렇게 두 개의 삶이 정리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청소부의 삶과 마무리만 남은 학장의 삶.
탁, 탁, 유언장을 가지런히 정리해 서랍에 넣은 퀴니 코완은 아무런 감상도, 평가도 내놓지 않았다.
여명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으나, 퀴니는 말 없이 여명을 바라봤다.
침묵.
그것은 기쁨의 침묵도 아니오, 슬픔의 침묵도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한, 무거운 침묵이었다.
여명은 초대 학장이 무엇을 억누르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그 침묵에 동조했다.
이윽고, 침묵이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 벽난로의 불씨가 방을 덥히길 한참.
퀴니 코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부 말한 건 아니로구나. 그렇지?”
이미 예상한 말이었다. 여명은 준비했던 대답을 꺼냈다.
“세세한 디테일까지 말씀드리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잖습니까.”
닳고 닳은 어른에게 장난질하느니, 그냥 뻔뻔하게 나가자는 심정으로 내놓은 대답.
다행히 퀴니 코완은 피식 웃을 뿐, 더 캐묻지 않았다. 물론 그냥 넘어갔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역으로 여명의 마음을 파고드는 말을 던졌다.
“그런 점은 제 어미를 꼭 빼닮았구나.”
“…예?”
“네 친모 말이다.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는 여자였단다. 모든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지만.”
“잠깐, 갑자기 그게 무슨….”
친모라니. 여명은 표정을 읽기 위해 퀴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가 늙은 학장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후련함과 기쁨,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착잡함뿐이었다.
대체 뭐야?
여명이 무어라 묻기도 전에, 퀴니 코완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나는… 일부러 아이를 낳지 않았단다. 잔인한 운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이를 낳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하지만 널 보니, 내가 틀렸구나. 태풍이 분다고 배가 멈추는 건 아니었는데… 이번에도 그녀가 옳았구나. 하긴, 언제나 그랬지.”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살짝 언성을 높이는 여명을 향해, 퀴니 코완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왜, 부모가 누군지 알고 싶니?”
함정에 걸어 들어가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여명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물었다.
“정말로 제 친모가 누군지 아신다면, 기꺼이 요구하겠습니다. 하지만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 증명은 못해.”
고민도 뭣도 없는 즉답. 여명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절 놀리시는 거라면….”
“놀리는 건 맞지만, 속이는 건 아니란다. 정말로, 지금의 나로서는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그래.”
“…증명할 수 없는데 어떻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여자의 감이지.”
“….”
“처음에는 나도 긴가민가했단다. 하지만 네가 말하는 모습, 그리고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녀의 핏줄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더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단순히 대화의 주도권을 위한 속임수인가? 아니면 정말로?
여명은 꼬이는 생각을 삼키며 학장을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서랍에서 새로운 종이를 꺼내 슥슥, 뭔가를 적어 여명에게 내밀었다.
[의뢰 계약서]1. 라날의 자유 보장 √
2. 두메아 전전대 가주 수색 √
3. 살아온 인생 말해주기 X
4.
5.
이게 뭔가 싶어 여명이 고개를 들자, 퀴니가 다시 펜에 잉크를 먹이며 말했다.
“다음 의뢰로 넘어가자꾸나.”
“잠깐만요. 저는 아직 대가를….”
“대가라니? 대가를 받기에는 숨긴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니?”
말렸네, 이거. 늙은이 혓바닥에 휘말렸다는 걸 직감한 여명이 머리를 쓰는 사이, 퀴니가 덧붙였다.
“왜 숨겼는지, 어떤 걸 숨겼는지 묻지 않으마. 대신, 나머지 의뢰까지 전부 받는다면 친모가 누군지 알려주마. 이걸로 괜찮겠니?”
대화의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왔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
여명은 계약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항의의 뜻을 담아 확 찢어버릴 생각이었는데… 계약서의 모퉁이를 잡는 순간, 마음이 픽 식어버렸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 아니, 유언장을 쓰는 어르신, 그것도 비전유물 속 잔재 의식에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탓이었다.
“…됐습니다. 그냥 넘어가시죠. 어차피 평생 얼굴도 못 본 사람입니다. 이제와서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손에 힘을 빼고 푹 한숨을 쉬었다. 퀴니는 계약서를 내려놓으며 한마디를 보탰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란다.”
“….”
“침묵은 암묵적 동의고.”
“…다음 의뢰 이야기나 하시죠.”
여명이 투덜거리자, 퀴니는 작게 ‘그런 점은 아빠를 닮았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친모 다음에는 친부인가? 여명이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자, 학장은 웃으며 계약서에 다음 의뢰 내용을 적었다.
[아카데미로 숨어든 대행자 암살]그것을 본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고 계약서와 학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예상조차 못 한 내용이었으니까.
“…암살?”
“문자 그대로의 의미란다. 사람 하나 죽여달라는 거지.”
“저도 눈이 있으니 그 정도는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대행자가 뭐냐는 겁니다. 어떤 직책 같은 겁니까?”
퀴니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미국 펜타곤 깊숙한 곳에 처박힌 예언자의 수족이란다. 이름 그대로, 예언자의 명령을 대신하기 때문에 대행자라 불리지.”
“….”
쉽게 말해 미국 요원이란 뜻 아닌가. 그런 사람을 죽이라고? 여명은 거절의 뜻을 밝혔다.
“거절하겠습니다.”
한국에게 복수하는 것만으로도 여념이 없건만, 미국이라니.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의외로 퀴니는 의외로 쉽게 거절을 받았다. 그런데, 종이 위에 체크한 내용이 조금 달랐다.
[4. 대행자 암살 △]삼각형? 여명이 왜 엑스가 아니냐고 묻기 전에, 퀴니가 먼저 말했다.
“대행자를 죽인 뒤에, 교장실의 창문을 기준으로 오른쪽 세 번째 책장 맨 아래 칸을 확인해보렴.”
“….”
너는 반드시 대행자를 죽일 거라는 듯, 확신이 담긴 어투였다.
뭐라 되물을 말이 없던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기 무섭게, 퀴니가 계약서에 다음 의뢰 내용을 적었다.
갑자기 학장다운 요구를? 의뢰 내용을 확인한 여명은 황당한 눈으로 퀴니를 바라봤다.
“…암살 다음에 나올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건 그렇지만, 여러모로 아쉽잖니. 내가 피땀 흘려 만든 아카데미인데, 와서 쌈박질만 하는 건 영… 나는 네가 아카데미를 즐기면 좋겠구나.”
“지금 제 수준으로 아카데미에서 배울 만한 게 딱히…”
여명이 말꼬리를 흐리자, 퀴니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카데미에서 꼭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건 아니란다. 친구… 뭐, 친구도 사귀기 어렵겠구나. 그럼 연애라도 하렴. 복수에 청춘을 바치기엔, 얼굴이 아깝잖니.”
“….”
갑자기 뭐라는 거야.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대화에 여명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퀴니가 대화를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초인 올림피아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잖니.”
그녀의 말마따나, 시간이 남아있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신명, 무술의 완성, 한국 정부 등 그에게는 아직 산적한 문제들이 너무나 많았다.
여명은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어딘가 씁쓸한, 그러면서도 뭔가 기대하는 학장의 눈동자를 보자 차마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빈말을 내뱉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학장은 그제야 웃으며 계약서를 체크했다. 뭔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 느낌을 표현할 세도 없이 학장이 쪽지 세 장을 내밀었다.
“…이건?”
“약속한 대가.”
그녀가 내민 첫 번째 쪽지에는 스위스 국립은행의 금고 비밀번호와 승만 시티 중앙은행의 계좌가 적혀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뢰의 대가였다.
그리고 두 번째 쪽지에는 [19740809]라는 알 수 없는 숫자가 적혀있었는데, 여명이 이게 뭐냐고 묻자마자 학장이 대답했다.
“아카데미 모든 곳의 잠금과 경보, 그리고 마법진을 무시할 수 있는 비밀번호란다.”
“….”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을 위한 대가니까, 마음껏 사용하렴. 아, 그리고 무시만 할 수 있지, 해제는 못하니까. 조심하고.”
여명은 여자 기숙사에서도 쓸 수 있냐고 물으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지막 쪽지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4번째 검은 집, 4층 4번 방, 4번째 계단.]이것도 무슨 암호인가? 여명은 슬쩍 학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학장은 미소인지, 아니면 안타까움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여명에게 말했다.
“네 어머니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란다.”
“….”
친모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나. 의외로 충격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느낌도 없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검은 집이라는 곳… 정확히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건….”
그때, 학장의 몸이 흐릿해지며 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벌써 비전유물이 끝나는 건가?
여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흐릿해진 건 그녀가 아니라, 여명 자신이라는 것.
-#@%, 벌써??
역으로 학장이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이미 여명에게 닿지 않을 정도로 흐릿해져 있었다.
여명을 향해 무어라 떠들던 그녀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황급히 계약서를 여명의 품에 쑤셔 넣었다.
품에 넣는다고 계약서가 현실로 따라오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가 의아함을 삼키는 사이, 교장은 마지막으로 펜을 들어 여명의 손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답은 성녀에게 있다]그리고 그 글자가 완성되는 것을 끝으로, 여명은 눈을 감았다.
***
서재에 홀로 남은 학장은 말없이 그의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벽난로가 방을 덥히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늙은 몸은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죽음의 한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슬픔은커녕,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해냈어. 퀴니, 해냈다고. 씨발, 정말로 그녀의 아들에게….”
그녀는 성취감 속에서 미소 지었다.
마지막에 여명의 손바닥에 적은 글자는 잘 전해졌을까? 전해졌을 것이다. 마지막에 그가 글자를 읽는 걸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고마워요. 제가 좀 주책이었죠? 설마 저도 주사위를 굴릴 수 있게 될 줄은, 그것도 그녀의 아들을 위해 굴리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좋은 결과가 나왔나요?”
그렇게 말한 퀴니 코완은 고개를 들어 샹들리에 사이에 고인 어둠을 바라봤다. 어둠은 소리 없이 대답했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좋은 결과인가 보네요. 하, 이제야 파티원들에게 체면이 서요… 사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그녀를 빼면 제가 제일 잘한 거 같네요. 그렇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그녀의 아들에게 돌아간 것이리라. 퀴니는 자리에 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유언을 뭘로 할까… 퀴니 코완, 향년 79세….”
『
평생 낭만을 위해 살고, 사랑을 위해 죽었노라.
』
아직 안 돌아갔었나? 퀴니는 어둠을 보며 웃었다. 눈 코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웃었다.
“그거 참, 멋진 유언이네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멋대로 진실을 전한 대가를 받았다.
철퍽! 탁자와 바닥으로 피가 튀었다. 샹들리에가 흔들리며 빛이 일렁거렸다.
모든 이별이 그러하듯, 소리는 없었다.
고요함과 피 냄새, 그리고 장작 타는 향기가 조용히 뒤섞이는 가운데, 벽난로의 불빛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