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23)
을 위한 세계는 없다-323화(323/817)
***
여명은 천천히 눈을 떴다.
혼란스러운 빛이 시신경을 찌르며 시야가 번쩍거렸지만, 곧 해저터널의 어둠이 그의 눈을 덮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여 시야를 되찾았으나, 퀴니 코완도, 샹들리에와 벽난로의 열기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눈을 감기 전에 마주했었던, 어두운 해저터널의 입구뿐.
뭐지? 환상? 비전유물?
여명은 재빨리 들고 있던 편지를 확인했다. 수백, 수천 년간 그를 기다려왔다는 퀴니 코완의 글이 적혀있던 편지.
하지만 황당하게도, 편지는 텅 비어 있었다.
?
눈을 비벼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편지에는 잉크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 편지에 뭔가 적혀 있지 않았어?”
“왜 그래? 둘 다 무슨 일이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성녀와 세티가 동시에 말했다.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여명은 문뜩 뭔가를 떠올리고 품을 뒤졌다. 그리고 눈을 뜨기 직전 퀴니 코완이 쑤셔 넣었던 종이를 찾아냈다.
[의뢰 계약서]고풍스러운 필체,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여명은 계약서를 만지며 그것이 현실의 물건임을, 그러니까 절대 환상이나 비전유물 속에서 얻을 수 없는 물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성녀가 몸을 밀착하며 속삭였다.
“의뢰서네? 누구한테 받아온 거야?”
“…퀴니 코완.”
“초대 학장…? 그 사람이 여기서 왜 나와?”
성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여명은 말없이 뒤돌아봤다.
저 멀리, 즐길 거라고는 영사기 한 대가 전부인 거대한 콘크리트 둥지 한가운데, 복잡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용이 보였다.
설명할 수 없는 기대감이 아래, 지금이라도 자신을 죽이라는 듯 분노가 뒤섞인 용의 눈동자.
그 눈빛을 잠시 마주하던 여명은 계약서를 깔끔하게 반으로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미 대가까지 받은 이상, 교장의 의뢰… 아니, 친구가 자유롭게 살았으면 한다는 어르신의 부탁을 지켜야겠지.
“잠깐만, 용 좀 보고 올게.”
짧게 중얼거린 여명은 해저터널이 아닌 용을 향해 걸음을 돌렸고, 바로 뒤에 서 있던 세티와 마주했다.
그녀는 무어라 질문하려다가, 그의 눈동자를 보고 말을 바꿨다.
“다 끝나면 무슨 일인지 알려 줄 거지?”
“응.”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티는 한 걸음 물러나 길을 터준 뒤, 아직도 뭔 일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성녀와 함께 여명의 등을 바라봤다.
저벅, 그에 비해 오르세 라날은 갑자기 다가오는 여명을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녀는 기다란 목을 뒤로 빼며 물었다.
[왜 다시 돌아와? 이제라도 날 죽일 생각이야?]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 없어. 그보다, 변신 같은 거 할 수 있어? 변신이 안 되면 몸의 크기를 줄이는 것도 괜찮고.”
라날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도 지구인은 지구인이구나.]“뭔 소리야?”
[지구인들이 유독 용에게 그런 걸 요구하더라고.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나요? 작아질 수 있나요? 뭐 그딴 거.]어떤 미친놈이 용에게 그런 걸 요구해? 하지만 거짓말이라기엔 라날의 반응이 너무 리얼했다.
아무튼, 라날은 발톱으로 턱을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할 줄 아는 용이 몇 마리 있긴 한데, 난 못해. 아니, 안 해. 그거 이상 성욕자들이나 익히는 마법이라고.]이상성욕… 상상도 못 한 단어를 들은 여명은 애써 표정을 피며 말을 이었다.
“이상성욕이고 뭐고, 마법사에게 직접 배운다면 얼마나 걸릴 거 같아?”
[…갑자기 그건 왜?]“의뢰… 아니, 부탁받은 일 때문에 그래. 네가 변신 좀 해줘야겠어.”
[뭐? 너… 날 안 죽인 이유가 설마…?]말끝을 흐린 용은 저편에 있는 성녀와 세티를 확인하더니, 슬그머니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용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한 건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여명은 정색하며 말했다.
“…신께 맹세코, 지금 네가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야. 그러니까 질문에 대답이나 해.”
라날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나도 몰라, 덩치 큰 생물일수록 배우기 어려운 마법이니까, 아마… 두 달쯤 걸리지 않을까?]“한 달… 실력 좋은 스승이 있으면 조금 더 빨리 익힐 수 있겠지?”
[…아마 그렇겠지?]“좋아.”
거기까지 대화를 나눈 여명은 곧바로 손을 쥐었다 폈다. 직후, 인벤토리가 그의 명령을 따라 두 명의 데스나이트를 꺼냈다.
-오, 또 싸움이야!?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여성 데스나이트 벨라디바와…
“….”
두칸 용병단의 제1부대장이었던 창술사.
여명의 키만큼 기다란 창을 든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주변을 확인했다.
그렇게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용에게 닿을 때쯤, 벨라디바가 여명과 용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야, 이번에는 용 사냥이냐?
“아뇨. 사냥은 아니고….”
-그럼 혹시, 용이랑 같이 사냥하는 거냐? 드워프 왕, 그 양반처럼?
벨라디바는 데스나이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어… 그런 건 아니고, 두 분께서 용을 지켜주시면 좋겠습니다.”
-…뭐 씨발?
“….”
-아니, 내가 잘못 들었나? 뭔… 누가 누굴 지켜?
벨라디바는 황당한 표정으로 귀 파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창술사 데스나이트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는 조용히 용과 주변을 확인하더니,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굳이 용병 출신인 나와 벨라디바를 꺼냈다는 건… 마나를 숨길 필요가 있다는 거군. 저 용을 비밀리에 지켜야 하는 건가?
그나마 이쪽이 대화가 통하는 쪽이었나.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마나를 숨기는 건 성기사 영감이 제일이지만… 우리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
그의 말을 증명하듯, 두 데스나이트는 능숙하게 마나를 숨기고 있었다. 당장 아카데미 보안 마법진이 그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물론, 보안 마법진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을 터.
여명이 그들에게 마법진의 마나 주파수를 알려주기 위해 마나를 끌어 올리는 사이, 벨라디바가 입을 열었다.
-뭐, 그런 이유라면 우리를 부른 것도 납득이 가는데… 궁금하네. 대체 어떤 간 큰 놈이 용을 노리는 거냐?
“범위가 좀 넓습니다.”
-넓다?
“학생일 수도 있고, 단순한 수준의 초인일 수도 있고….”
그때, 벨라디바가 추임새를 넣었다.
-우리 둘이랑 용을 동시에 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존나게 쎌 수도 있고?
“…예. 그러니 누군가 용을 죽이러 왔을 때,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창술사가 탁, 창끝으로 바닥을 찌르며 말했다.
-호위 겸 경보기라… 그다지 끌리는 임무는 아니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시선은 용이 보던 영사기와 간식, 그리고 DVD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뭐, 아공간 속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겠다.
-애송이가 한다면야, 나도 할게.
창술사가 동의하자마자 벨라디바 또한 동의했다. 여명은 두 데스나이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어차피 우리도 너한테 부탁할 거 많은 데 뭘… 자, 빨리 마법이나 연결해.
여명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우선 데스나이트들이 보안 마법진을 피할 수 있도록 주파수를 알려줬다.
그리고 곧바로 위장 속의 뒤틀린 마나를 살짝 끌어 올려 두 데스나이트에게 부정한 주문을 걸었다.
“시체 조종 마법을 조금 비틀어서 걸었습니다. 두 분께서 제 조종권에 저항하시면, 자동으로 제게 경보가 올 겁니다. 물론, 움직이시는 건 별문제 없으실 거구요.”
-이 엿 같은 마법을 이렇게 쓴다고? 아이디어 좋은데? 네크로맨서들이 알면 개빡치겠다.
벨라디바가 감탄하자,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걸로 호위 문제는 끝났고, 라날에게 퀴니 코안이 남긴 말을 알리면 끝이었는데… 여명을 보는 용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너…! 너…!]“…또 왜?”
[도, 동족이었어?!]“…?”
***
여명이 고개를 기울이자, 오르세 라날이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이 불길한 마나… 너, 저번에 항구에서도 데스나이트를 불러냈었지?]“…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대놓고 용의 마나를 쓰는데 어떻게 모르겠… 아니, 아니지. 너 설마, 동족이라서 오빠를 구해준 거야?]뒤틀린 마나를 쓰는 그 짧은 마나를 느낀 건가?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용의 감지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명은 다음부터는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인간이야.”
[그럴 리가…?]킁킁, 오르세 라날은 여명이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곧이어 눈살을 가득 찌푸리더니, 지느러미를 닮은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아무리 맡아도 이건 용의 마나인데… 너 혹시, 이상 성욕자야?]“….”
[그 검은 용 영감마냥… 인간 모습으로 하는 게 좋아서 변신한 거야? 그, 그래서 나한테도 변신 마법 배우라고 한 거고?]거기까지 말한 라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질색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미, 미안하지만 난 생각 없어. 난 정상적인 욕구를 가진 용이라고!]그녀가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어디까지 지껄이나 두고 봤을 뿐.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오해한 오르세 라날은 더욱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인간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배설기관이랑 생식기관이 같은 곳에 붙어있는 종족에게 성욕을 느낄 정도로 타락하진 않았어…!]“….”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용이었다. 여명은 한숨을 삼킨 뒤, 퀴니 코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째, 이 의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네요.
“오해는 여기까지 하고, 설명 좀 해봐. 이거 때문에 나를 용으로 착각한 건가?”
여명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위장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카할 마그두의 뒤틀린 마나.
그 불길한 푸른 마나를 보던 라날은 꼬리를 휘휘 내저었다.
[…착각이라니. 더 확실해졌네! 인간은 용의 마나를 가질 수 없어. 변신한 용이나, 그 애처럼 인간 껍질에 갇혀있는 게 아니고서야!]그 애? 여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 용의 심장을 먹었는데.”
[어쩌라고? 너 혹시, 사슴을 먹으면 뿔이 자라는 인간이야? 새를 먹으면 날개가 돋아나고 그래? 용의 심장을 먹으면 용의 마나를 쓸 수 있다고 누가 그러디?]“….”
그럴싸한 비유였기에, 여명은 바로 반론을 떠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반론을 꺼낸 건 저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성녀였다.
“용의 심장을 먹은 게 아니라, 위장에 이식한 거야!”
[…이식?]“대단한 건 아니고,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영약으로 먹을 수가 없어서… 위장에 용의 심장을 박았어. 그뿐이야.”
[….]다음 순간, 여명은 쓴웃음을 삼켰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라고 염병하던 용이 미친놈을 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탓이었다.
“…그렇게 이상한 일이냐?”
[인간이 만든 총의 방아쇠를 당기겠다고 사람 팔을 이식하는 용이 있다면, 무슨 소리를 들을 거 같아?]“…미친놈?”
[그렇지?]그건 좀 이상한 비유 같은데. 여명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변신 마법부터 익혀.”
[시, 싫어! 만박불통이랑 한 거래는 주인공이 올 때까지 날 살리는 거였다며? 변신이 대체 무슨 상관이야?]“…제발 이상한 오해 그만해. 변신 마법은 아카데미에서 나가기 위해서 배우는 거니까.”
[무슨 소리야? 아카데미에서 나가? 만박불통, 그 노인네가 그런 걸 부탁했을 리가…]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만박불통이 아니라, 퀴니 코완에게 부탁받았어.”
[…퀴니??]라날의 목이 휘어지며 물음표를 그렸다. 여명은 계약서를 꺼내 퀴니와 만난 걸 증명하려다가 문뜩, 한가지 맹점을 떠올렸다.
용이 사람의 필체도 알아볼 수 있던가?
아마 못 알아보지 않을까? 알아본다 해도 겨우 계약서 한 장. 용이 믿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추가로 퀴니 코완과 만났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퀴니 코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남겼던 말도.
‘…혹시?’
생각을 끝낸 여명은 곧 조금 전까지 난리 치던 용의 말을 역으로 이용했다.
“라날, 너는 인간을 좋아하는 이상성욕자야. 그렇지?”
여명이 딱 원하던 대답이었다. 그는 즉시 퀴니의 말을 인용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침묵은 암묵적 동의.”
[…퀴니의 궤변이잖아? 미친, 그걸 여기서 써먹… 아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여명은 대답 대신 계약서를 꺼내 용에게 내밀었다. 솔직히 긴가민가한 증거였지만, 다행히 라날은 퀴니의 필체를 정확히 알아봤다.
[퀴니의 필체… 그리고 이 종이… 이건 진짜잖아! 왜 처음부터 이걸 내밀지 않은 거야? 나만 바보 됐잖아!]“….”
그러게 말이다. 여명은 용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욕망을 꾹 참았다.
***
용과 대화를 끝낸 여명이 다시 해저터널 입구로 돌아가자, 세티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여명, 괜찮아?”
무슨 일을 겪었는지, 왜 갑자기 용을 탈출시키려는지 묻지 않는 배려심이 담긴 말. 여명은 웃으며 대답했다.
“심각한 건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줄 테니까, 우선… 자리를 옮기자.”
여명이 그렇게 말하며 해저 터널 안으로 들어가고, 세티와 성녀 또한 별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둠으로 가득한 해저터널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GPS도 안 켜지는 구불구불한 복도, 일정하지 않은 천장, 표시로 삼을 것 하나 없는 밋밋한 벽까지.
일반적인 터널보다는 마치 게임 속 던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였다.
일행이 손전등과 나침반 등 준비물을 챙겨와서 망정이지, 뭣도 모르고 들어왔으면 길을 잃기 딱 좋았으리라.
아무튼, 용의 둥지와 좀 거리를 둔 여명은 발을 멈추고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담요 하나를 꺼내 바닥에 깔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담요 위에 앉은 뒤, 여명은 심호흡하며 설명을 준비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퀴니 코완을 비전유물 속에서 만나서 거래했다? 그에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비전유물이 맞긴 한가?
고민이 길어지는 가운데, 여명은 애써 입을 뗐다.
“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이상한 일 겪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괜찮아.”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세티의 한 마디. 여명은 그녀에게 웃어준 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성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 여명…”
“…응?”
성녀는 은근한 손짓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를 타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심상치 않았다.
“그, 나는,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거든? 근데…”
“…?”
“세티는 좀 거북하지 않을까?”
갑자기 뭐라는 거야. 딸깍, 딸깍, 여명은 손전등으로 성녀의 얼굴을 비췄다.
“너 뭔 소리 하는 거야?”
이번에는 성녀가 당황할 차례였다.
“어… 분위기 타서… 셋이서 하자는 거 아니었어?”
“….”
침묵.
황당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애틋함이 뒤섞인 침묵에서는 달콤 쌉싸름한 냄새가 났다.
여명은 성녀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과장된 소리를 내뱉었음을, 동시에 혹시라도 자기 말대로 상황이 흘러가도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꿰뚫어 봤다.
그리고 세티는…
“풉.”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그녀의 웃음소리를 따라 긴장과 고민이 다 쓸려나가고, 여명은 이게 다 뭔가 싶어 고개를 저었다.
오직 성녀만이 ‘에이 아깝네’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순간.
딱! 세티와 여명이 동시에 성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악!”
성녀가 이마를 붙잡고 뒤로 넘어가건 말건, 여명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에 적힌 [답은 성녀에게 있다] 라는 글자를 슬쩍 확인한 뒤… 그냥 솔직하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조금 전에, 퀴니 코완과 만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