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25)
을 위한 세계는 없다-325화(325/817)
***
아직 새벽이 오지 않은 아카데미의 밤, 바다가 보이는 직원용 휴게실.
본래라면 당직 직원도 없을 조용한 공간으로, 잠옷 차림의 소녀가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막 침대에서 나온 듯 잔뜩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은 달빛조차 놀랄 만큼 선명한 하늘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색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머리카락도, 잠옷도 아닌 어깨에 매달린 커다란 가방이었다.
책이나 돈도 아니고, 비누와 샴푸, 그리고 갈아입을 옷이 든 가방.
대체 왜 이 꼭두새벽에 이런 가방을 옮겨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던 소녀는 푹푹 한숨을 쉬었다.
“왜 하필 내가….”
그녀, 희생양 자매의 셋째 네티는 투덜거림과 함께 끼익-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만에 하나 당직서는 교직원에게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평소라면 당직 직원들의 땡땡이에 사용되었을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건 익숙한 세 명의 남녀였으니까.
“드디어 왔구나!”
세 명의 남녀 중 안대를 쓴 소녀가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그녀를 반겼다.
네티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안대 소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웁.”
네티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몸에 들러붙은 검은 액체가, 그리고 거기에서 풍기는 냄새가 너무나 지독한 탓이었다.
“우웩, 이 냄새 뭐야?!”
잠이 확 달아날 정도로 지독한 냄새. 네티는 뒤로 물러나며 안대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지! 성녀님! 거기 정지! 다가오지 마세요!”
다행히 성녀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우뚝 멈췄다. 물론, 냄새는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네티의 코를 찔렀다.
“으웩, 비누랑 갈아입을 옷 가지고 오라는 게 이런 뜻이었어?!”
그러자 그녀의 언니… 머리에 말라붙은 오물을 떼고 있던 세티가 대답했다.
“그럼 뭘 생각했는데?”
네티는 버럭 소리 질렀다.
“적어도 이런 건 아니었지!”
“…헛소리 말고, 빨리 가방이나 줘.”
네티는 군말 없이 가방을 집어 던졌다. 자연스레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성녀가 가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휴게실 옆에 있는 샤워실로 향했다.
끼익- 먼지 쌓인 샤워실로 들어가려던 성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여명과 세티를 바라봤다.
“…다 같이 들어갈까?”
노골적인 농담이었음에도, 여명은 반응조차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성녀가 무안함을 느끼고 볼을 긁기 전에, 세티가 대답했다.
“그 좁은 곳에 뭘 같이 들어가? 빨리 씻고 나오기나 해.”
성녀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으며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쏴아아- 물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네티가 코를 막으며 물었다.
“언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냄새는 다 뭐고?”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건 언니가 아니라, 조용히 몸에 묻은 오물을 닦아내던 여명이었다.
“…해저터널 탐사하다가 함정에 빠졌어.”
“해저터널? 함정? 그게 뭔… 아니, 그보다 함정이면 뭐 부비트랩 같은 게 국룰 아니에요?”
“그러게나 말이다.”
“오물 함정이라니… 기숙사에서 몰래 도망친 학생들 엿 먹으라고 만든 함정 같네요.”
그런가? 여명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웃옷을 벗었다.
네티는 형부의 알몸을 보자마자 휙 고개를 돌렸고, 세티는 오물을 닦아낸 수건과 옷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으며 말했다.
“내가 괜히 오늘 탐사하자고 해서… 미안.”
“아니야, 미안할 게 뭐 있어? 기왕 해저터널도 뚫었으니 들어가는 게 맞지.”
“하지만….”
“괜찮다니까.”
전혀 다른 곳에 정신이 가 있는 형부와 그런 형부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언니.
네티는 두 사람 사이에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음을,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말하는 걸 애써 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람. 정말로 하수도에 용이라도 있었나?
그녀의 의문과 함께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하, 드디어 살겠다.”
오물을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성녀가 샤워실 바깥으로 나왔다. 멀쩡한 수건은 임시 안대로 쓰고, 손으로 하얀 머리카락을 터는 모습이 참으로 성녀다웠다.
뭐, 아무튼.
“다음에 누가 씻을래? 세티? 여명?”
성녀가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여명이 세티의 허리를 밀며 대답했다.
“레이디 퍼스트.”
“….”
세티는 슬쩍 여명의 눈치를 살핀 뒤, 순순히 샤워실로 들어갔다.
달깍- 샤워실 문이 닫히는 순간, 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딱히 대단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뭐지?’
묘한 위화감을 느낀 네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달려들던 성녀님도 그렇고, 정신이 딴 데 팔린 형부도 그렇고… 뭔가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뒤늦게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성녀. 평소 같으면 형부에게 재잘거리고 있을 그녀가 꾹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저러지? 진짜 무슨 일 있었나? 네티는 껄끄러운 침묵 속에서 눈을 굴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녀의 언니가 순식간에 샤워를 끝냈다는 점이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샤워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녀가 살짝 놀랄 정도.
“와, 엄청나게 빨리 씻네….”
네티는 쓴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저희 자매는 다 저 속도로 씻어요. 느긋하게 씻는 건 사치였거든요.”
희생양 자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성녀 또한 쓴웃음을 지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성녀가 입을 다물자마자, 또다시 묘한 침묵이 휴게실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세티가 샤워실에서 나오고, 여명이 샤워실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저, 성녀님 혹시 형부한테 무슨 일…”
네티는 여명이 씻는 틈을 타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질문하려 했으나, 여명의 샤워 속도는 그녀의 상상 이상이었다.
세티와 비교해도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속도. 아무리 남녀의 차이가 있다지만, 저게 말이 되나?
“…뭐야? 씻은 거 맞아?”
성녀 또한 네티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새 옷을 챙겨 입는 여명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걱정과 달리 깨끗해진 여명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청소부의 법칙. 빨리 씻으면, 쉬는 시간이 늘어난다.”
“…?”
지극히 노동자다운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리길 잠시.
그녀와 상관없이 오물 묻은 옷과 휴게실을 싹 정리한 여명이 짝- 손뼉을 쳐 시선을 모았다.
“자, 그럼 몸도 다 씻었겠다. 오늘은 이만 해산할까?”
“해산하자고? 아직 시간…”
뭔가를 기대하고 있던 걸까?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세티가 말끝을 흐렸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해 뜰 때까지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어. 괜히 사감에게 들키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등교 후에 해도 되잖아?”
“….”
성녀와 세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서로 뭔가를 속삭였다. 하지만 대화가 잘 풀리지 않았는지, 그녀들은 여명의 말에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간에 낀 네티가 갑자기 이게 뭔가 싶어 눈치를 살피는 사이, 여명이 작별 인사와 함께 먼저 직원 휴게실을 떠났다.
“교실에서 보자.”
네티는 여명이 떠나간 문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아는 형부는 언니를 남겨두고 먼저 떠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뭔 일이야 대체?”
***
여명과 헤어진 세 소녀는 나란히 1학년 여자 기숙사로 향했다.
평소라면 시끄럽게 떠들었을 성녀도, 세티도 아무 말이 없었다. 흡사, 커다란 고민에 빠진 사람들처럼.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네티가 물었다.
“…두 사람, 형부한테 뭐 잘못했어요?”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아 진짜, 뭔데 그래요?”
성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푸후- 한숨 쉬며 아래에서 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박불통의 분신과 만난 이야기.
자살희망 용을 두들겨 패고, 숨겨진 방법으로 해저터널에 들어간 이야기.
갑자기 주운 초대 학장의 편지와 기연들, 그리고…
여명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
어머니란 단어가 나온 순간, 네티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 이거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정보 아닌가? 그녀는 곧바로 언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정작 언니는 별다른 말 없이 하늘만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들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 네티는 곧바로 성녀에게 물었다.
“…혀, 형부 어머니에 대한 정보가 뭔데요?”
“여명의 어머니는 검은 집에 계신다더라.”
“검은 집? 그게 어딘데요?”
성녀는 세티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교단의 사형수들이 잠든 무덤이야. 성도에서 가장 불길한… 사형집행실 옆에 세워진 납골당.”
“…예?”
“장례와 검은 신 모르닥님의 교리상,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무덤은 만들어줘야 하거든.”
“….”
그런 곳에 왜 형부의 어머니가 있지? 아니 그보다 형부는 고아라고 하지 않았었나?
네티의 생각이 복잡하게 꼬이는 가운데, 성녀가 툭 뒷말을 덧붙였다.
“왜 여명의 어머니가 그런 곳에 있느냐… 정확한 건 나도 몰라. 그냥, 여명과 만난 초대 학장이 그렇게 말했대. 네 어머니가 검은 집의 4층에 있다나? 근데 여기서 웃긴 게 뭔지 알아?”
“…웃긴 점?”
“검은 집은 3층까지 밖에 없어.”
“….”
“성도에서 사형당한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어. 아직 3층이 다 차지도 않았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4층이 있을 수 있어?”
“그러면…?”
“여명이 만난 초대 학장이 거짓말을 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성녀가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순간, 세티가 끼어들었다.
“…학장이 준 은행 계좌와 비밀번호가 전부 진짜라면?”
“….”
“그러면… 여명의 어머니에 관한 말도 진실일 가능성이 높겠지.”
성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긍정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뭔지 모를 환상이 한 말이야. 넘겨짚지 말자.”
“진짜 환상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환상은 계약서 같은 거 못 남겨.”
“그건 그렇지만…”
말끝을 흐리는 성녀. 세티는 보채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성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걸.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논리와 상관없이 멋대로 굴러가는 몹쓸 바퀴 아니던가.
세티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혼자 돌려보내지 말걸 그랬나.”
“뭐래, 지금은 혼자 두는 게 좋을 거 같다며.”
아까 둘이서 뭘 쑥덕거렸나 했더니, 그런 말이었나? 네티는 눈살을 팍 찌푸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사람, 형부가 심란한 거 알면서 보낸 거였어요?”
“응.”
즉답이었다. 성녀 또한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네티는 답답함에 가슴을 두들겼다.
“어이구, 이 화상들!”
“…?”
“우리야 부모님이 다 이상한 사람들이라서 크게 상관없다지만, 형부는 다르잖아요! 여태껏 고아인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사실 사형수 납골당에 처박혀 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걸 그냥 내버려 둬요?”
“아니, 아직 여명의 어머니가 진짜로 거기에 있다고 확정된 건 아니….”
“떽!”
네티는 반박하는 성녀님의 말을 끊은 뒤, 발로 바닥을 쾅쾅 내려치며 말했다.
“이래서 연애 소설 한 번 못 읽어본 것들이란! 평소에는 그렇게 현모양처인 척하면서, 결정적일 때 사람 마음을 모른다니까?”
“….”
“뭐해요?! 당장 안 가고?! 해뜨기 전에 기숙사에서 끌고 나와서 위로 해주… 끅!”
세티는 발광하는 동생의 이마를 때려 입을 다물게 한 뒤, 푹 한숨을 쉬었다.
“오버하지 마.”
“오버라니! 언니야말로 왜 그렇게 침착해?”
세티는 바락바락 대드는 동생을 보며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 아니면 여명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동생의 뻔뻔함 때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사람은 가끔, 특히 초인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여명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여리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알겠지?”
그렇게 말한 세티는 동생을 빤히 내려다봤다. 네티는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뺏겨도 난 모른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티의 정수리로 꿀밤이 날아들었다.
세티가 아닌, 성녀의 꿀밤이었다.
***
누가 그랬던가?
고민은 두뇌의 채찍이고 고뇌는 정신의 윤활유라고.
누가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이 옳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음에도, 여명의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맑았으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퀴니 코완, 어머니, 그리고 운명.
모든 것들이 고민이 되어 여명의 머리를 쑤시고 있었다. 어찌나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세티와 성녀에게 감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애써 쓴웃음을 삼켰다.
‘어쩌면, 손등에 적힌 글자 때문일지도.’
여명은 손을 들어 지금은 씻겨 나간 글자를 떠올렸다. 퀴니 코완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자.
[답은 성녀에게 있다]대체 무슨 뜻일까? 문자 그대로 성녀가 하는 말이 다 정답이란 뜻일까? 아니면 그가 모르는 어떤 암호문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 그동안 쌓인 모든 의문과 마찬가지로.
그래, 풀리지 않은 의문. 그게 문제였다.
지금 그의 머리를 찌르는 두통의 원인이 그것이었다. 너무나 많이 쌓인 의문들이 결국 한계를 맞이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동안 자신의 정체에 대해 뭐 하나 제대로 풀린 게 있던가?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용사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샤인이고, 4천 살이나 먹은 불가해한 자이며, 이 땅에 추락한 별이자…
‘…이번에는 성도에서 사형당한 자의 아들이라.’
지랄하네. 여명은 기숙사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워 팔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사춘기 중학생도 아니고, 이제 와서 나는 누구인가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니.
당장 눈앞의 할 일이 태산인데,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불교에서 심마, 혹은 번뇌라고 부르는 게 바로 이런 고민인가 싶었다
‘답이 없네.’
여명은 고민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세티나 성녀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지 않은 점일까.
만약 그녀들에게 이런 꼴을 보였다면, 한심한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했으리라…
‘….’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숙사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은 서서히 노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청소부 시절이었다면, 이제 막 새벽 청소를 끝내고 형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갔을 시간.
‘춘식이 형, 오늘도 편의점 김밥 먹어요? 그냥 콩나물국밥 먹으러 가자니까요.’
‘됐어, 난 이거면 충분해.’
‘아니, 그렇게 돈 아껴서 어디다 쓰려고요?’
‘차 살 거야. 존나 쌔끈한 차를 사서, 고속도로에서 과속 딱지 뗄 거다.’
어째서일까? 그 시절의 대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득바득 돈을 모으던 춘식이 형과의 대화.
생각해보면, 목표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형의 삶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비록 형의 삶과 노력은 보답받지 못했지만…
“….”
그것을 시작으로, 청소부들의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치킨집을 차리겠다던 제임스 형, 가정을 꾸리겠다던 덕배 형… 그들의 꿈과 삶, 그리고 현재의 자신.
단순하지만 솔직했던 옛 시절을 떠올릴수록, 생각 사이로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그의 머리를 간질였다. 그게 무엇인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잡아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고민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지만 다음 순간, 누군가 기숙사 방문을 두들겼다.
-똑똑.
갑작스러운 소리에 여명의 집중력이 흩어지고, 머리를 쑤시던 고민들이 생각의 아래로 사라졌다.
“….”
깊게 숨을 들이쉰 여명은 고개를 돌렸다. 시계를 보아하니 사감이 올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기, 천여명? 나 전윤성인데… 저번에 약속한 대련, 지금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