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26)
을 위한 세계는 없다-326화(326/817)
***
설익은 아침 특유의 이슬 냄새가 풍기고, 부지런한 학생들이 훈련장에 얼굴도장을 찍을 시간.
평소라면 부산했을 1학년 훈련장은 묘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침묵의 원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훈련장에 모인 거의 모든 학생들이 트레이닝 복을 입은 두 남학생을 훔쳐보고 있었으니까.
천여명과 전윤성.
1학년 투톱이라는 낯부끄러운 별명으로 불리는 두 사람이 한자리에서, 그것도 하필 대련실 바로 앞에서 몸을 푸는 광경이라니.
학생들은 각자 기대와 걱정, 그리고 궁금증을 품은 눈으로 두 소년을 힐끗거렸다.
-설마 둘이 싸우나?
-야, 거기 전화 돌리지 마. 괜히 구경꾼 늘리지 말라고.
-전윤성 저 새끼 설마… 또 그 짓하려고?
그리고 그 모든 시선과 상관없이, 두 사람은 별다른 긴장 없이 스트레칭을 이어 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긴장하지 않는 건 여명뿐이었다. 몸을 푸는 내내, 전윤성은 은근히 여명의 눈치를 보고 있었으므로.
“저기… 내가 너무 일찍 깨운 건 아니지? 뭐 중요한 걸 방해했다든가…?”
어깨 근육을 푸는 와중에, 전윤성이 물었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거 없어.”
“정말이지?”
“뭐, 이런 걸로 거짓말하겠냐.”
빈말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던 깨달음을 방해받은 건 사실이었지만,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청소부 형들을 떠올리며 찾아낸 깨달음이었으므로.
재가 되지 않은 숯이 언제든 열기를 품을 수 있는 것처럼, 청소부 형들과의 추억은 고작 방해 좀 받았다고 해서 잃어버릴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청소부들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그 깨달음 또한 계속 그의 정신에 남아있으리라.
물론, 불쾌한 마음이 아예 없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주먹질 몇 번이면 훨훨 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직접 처맞으러 왔으니, 화풀이 좀 해도 할 말 없으리라.
“준비됐어?”
짧은 상념과 함께 스트레칭을 끝낸 여명이 물었다. 전윤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여명이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전윤성이 재빨리 덧붙였다.
“미안, 내가 준비 시간이 좀 길어서.”
“시간 널널하니까, 여유롭게 해.”
그렇게 말한 여명은 마나를 끌어 올리는 전윤성을 살폈다.
새삼스럽지만, 녀석과 이렇게 마주 보고 있자니 TV에서 보던 유명인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어느 정도 사실을 동반하고 있었다. 전윤성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녀석이었으니까.
물론, 좋은 쪽으로 유명한 건 아니었지만.
‘…배신자의 아들.’
길거리의 청소부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조롱의 대상으로, 혹은 질투의 대상으로 삼은 녀석의 별명.
한국 언론들은 왜 그리 녀석을 싫어했을까.
차원문 너머에서 직접 만나 본 전용섭이야 반론의 여지 없는 개자식이었지만, 전윤성은 달랐다.
좋은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 언론에서 떠들던 것처럼 개자식은 아니었다.
테러 사건 당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거나, 실종된 세티와 자신을 찾으려 한 걸 보면 인간적으로 나쁜 것도 아니었고.
가진 실력에 비해 어딘가 모자라고, 억눌린 녀석…
그래, 딱 그 정도가 여명이 전윤성에게 내린 평가였다.
하지만 고작 몇 번의 행동과 대화로 사람을 파악할 수는 없는 법.
지금 당장 꺼림칙한 표정으로 전윤성을 바라보는 동급생들과 녀석을 향해 혐오를 감추지 않는 세티를 떠올려보면, 아직 그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그때, 훈련장 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그에게 다가왔다.
“야, 천여명.”
그와 같은 기숙사를 쓰는 동급생, 그는 편입학 날 여명과 방 내기를 했던 웨슬리였다.
리메가 대역을 하는 동안 친해진 건지, 녀석은 방금 자판기에서 뽑아온 이온 음료를 여명에게 내밀며 물었다.
“아침부터 대련장 앞에서 뭐 하고 있냐? 평소에 훈련도 안 하면서.”
“싸우러 왔지.”
여명은 이온 음료를 받아 들면서 전윤성을 향해 턱짓했다. 웨슬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흥,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저놈이 먼저 붙자고 했지? 이유는 말 안 해주고.”
“어, 어떻게 알았어?”
“쓰읍, 그럴 줄 알았다. 1등 된 뒤에는 좀 고친 줄 알았는데… 저 새끼, 아직도 그 버릇 못 버렸네.”
“버릇?”
“엿 같은 버릇이지. 저 새끼, 중등부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거의 100위권 언저리였던 거 알고 있냐? 근데 대련을 빙자해서 다른 사람 무술을….”
“여명, 준비 끝났어.”
웨슬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스트레칭을 끝낸 전윤성이 다가왔다. 녀석은 웨슬리와 붙어 있는 여명을 보며 말했다.
“대화 중이이야? 기다릴까?”
웨슬리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여명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니, 기다릴 필요 없어. 지금 바로 하자.”
“야, 잠깐…!”
웨슬리는 그런 여명을 막으려 했다. 여명은 그가 건네준 이온 음료를 챙기며 가볍게 대답했다.
“음료수 고맙다. 대련 끝나고 내가 아침 살게.”
완곡하지만, 분명한 뜻이 담긴 말. 웨슬리는 더 말리지 않고 팔짱을 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당해보면 알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웨슬리의 뒤편으로 구경꾼들의 시선이 몰리고 누군가 휴대폰을 드는 가운데, 여명과 전윤성이 대련실로 들어갔다.
***
“무장은 자유, 시간은 무제한, 승패는 항복 선언까지. 괜찮지?”
“편한 대로 해.”
전윤성이 새하얀 대련실 벽에 붙은 기판을 눌러 대련 옵션을 조절하는 사이, 여명은 훈련용 검을 만지작거렸다.
실전용 검 정도는 아니었지만, 날이 서 있는 검.
학생들이 이런 걸로 싸워도 되나 싶었지만, 여명은 곧바로 그런 생각을 떨쳐 냈다.
초인이란 족속들의 싸움은 원래부터 과격하기 짝이 없었다. 최신 의료 기술과 치유 기적, 그리고 일반인을 훨씬 상회하는 재생력 덕분이었다.
아니, 격투기나 올림피아까지 갈 것도 없었다. 당장 여명부터가 만주에서 대련한 용병의 팔을 잘라버리지 않았던가?
‘이름이 애국단의 정마필이었나 뭐 그랬던 거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니, 정마필뿐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의 아도-길로, 드레이테리얼에서 만났던 핀엘, 심지어 아야톨라까지… 그동안 여명은 상대의 종족과 강함을 가리지 않고 팔을 잘랐다.
…뭐, 목을 자르는 것보다는 낫지.
여명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갈 때쯤, 전윤성이 옵션을 맞추고 대련실을 활성화했다.
“시작한다.”
전윤성의 말을 신호 삼아, 새하얀 대련실 벽으로 마나가 흐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전자음으로 이루어진 목소리가 울렸다.
<좌, 1학년 무술과 입학 순위 1위, 전윤성.>
<우, 1학년 초인부 편입생, 천여명.>
<대련 룰은 무장, 자유. 시간, 무제한. 승패는 항복 선언으로 판정합니다.>
<관찰 교사, 없음. 현재 가장 빠르게 올 수 있는 교직원을 호출합니다..>
<대련 시작까지 3초….>
<…2초.>
그때, 여명이 검을 늘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시작부터 전력으로?”
전윤성은 대답 대신 검을 허리에 걸고 주먹을 들었다. 여명 또한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손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1초.>
<대련, 시작!>
대련실 프로그램이 싸움을 선언한 바로 다음 순간, 전윤성이 먼저 달려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돌진, 내지르는 주먹도 더할 나위가 없었다.
만약 주먹질에 정석이 있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전윤성의 주먹이 교보재로 쓰이리라.
물론, 그 주먹은 여명의 얼굴을 후려치지 못했다. 쒜에엑-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여명의 손날이 그의 팔뚝을 노린 탓이었다.
손으로 펼치는 검술. 전윤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주먹을 꺾어 여명의 손날을 막았다.
직후, 여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왼발을 휘둘렀다. 퍼억-! 전윤성의 하체를 후려친 발에서 찰진 소리가 울렸다.
“…!”
전윤성은 입술을 꽉 깨물며 신음을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반대쪽 무릎을 치켜들어 여명의 복부를 노렸다.
나쁘지 않았지만, 그만큼 뻔한 수였다. 대놓고 막으라는 공격이었으니까.
그러나 여명은 전윤성의 기대를 배신했다. 복부로 오는 무릎을 막기는커녕, 역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손과 무릎, 공격과 공격이 교차하고 서로의 복부와 얼굴에 유효타가 꽂혔다.
!
전윤성의 고개가 돌아가며 그의 다부진 몸이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그에 비해 여명은 한 걸음 물러났을 뿐, 별다른 반응 없이 전윤성을 바라봤다.
“끙….”
바닥을 구른 전윤성은 곧바로 반동을 이용해 땅을 박차고 일어났다. 설마 첫 공방에서 유효타를 맞을 줄은 몰랐던 건지, 표정에서 당황이 느껴지고 있었다.
“배를 내주고 얼굴을 노리다니… 검이었으면 죽었겠네.”
전윤성은 피가 흘러나오는 코를 스윽, 문질렀다.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했네.”
그 말과 함께 전윤성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정석적인 움직이었지만, 공격의 주체가 바뀌어 있었다. 팔과 주먹이 아닌 발.
휘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확대되는 발을 보며 여명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발이 그리는 궤도가 너무 익숙했으므로.
‘비각술.’
여명 또한 발을 들어 비각술로 대응했다. 그러나 정작 펼쳐진 두 사람의 비각술은 전혀 달랐다.
전윤성의 발차기가 굳건하고 절도 있는 칼과 같았다면, 여명의 발은 부드럽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채찍 같았다.
오리지날리티를 따지자면 여명의 비각술이 본류에 가까웠다. 전윤성의 비각술은 무언가 알맹이가 없는… 겉모습만 따라 한 무술에 가까웠다.
‘뭐지?’
묘한 기시감을 느낀 여명이 눈살을 찌푸린 순간, 전윤성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발이 맹수의 발톱처럼 여명의 가슴을 향해 쏟아졌다. 세티와 비슷한,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날아차기.
여명은 물러나며 손으로 쏟아지는 발차기를 막고, 흘려냈다. 전윤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성난 기세로 발을 휘둘렀다.
서서히 고조되는 호흡 사이로, 바람을 가르는 발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리고 발소리가 정점에 이르기 직전, 여명의 손이 흐릿해졌다.
챙!
다음 순간, 두 사람 사이로 금속과 마나가 충돌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윤성은 거의 공중제비를 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물러났다.
그의 손에는 언제 꺼낸 건지 알 수 없는 검이 들려 있었다.
“…방금 그거, 무슨 무술이야?”
“엘프 검술.”
여명은 손날을 휘휘 흔들며 말했다. 사실 엘프 검술이 아니라 구궁검의 응용에 가까웠지만, 사실대로 말해줄 의리는 없었다.
…뭐, 아무튼.
전윤성이 ‘엘프 검술이라니….’ 라고 중얼거리는 사이, 여명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을 탁, 발로 차 허공에 띄웠다.
휘릭- 떠오른 검을 잡은 그는 검을 늘어트리며 조금 전 공방에서 떠오른 궁금증을 입에 담았다.
“야, 비각술은 어디서 배웠냐?”
“….”
전윤성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검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역으로 질문했다.
“그러는 너는 누구한테 비각술을 배운 거야? 용병 출신 아니었어?”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걸 보니 아직 매가 부족한 듯싶었다. 여명은 검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용병 출신 맞아. 비각술은 세티에게 배웠고.”
“홍세티가? 그럴 리가….”
녀석의 눈이 커지는 걸 본 여명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데.”
“….”
전윤성은 무안한 듯 코를 찡그렸다가, 순순히 대답을 내놨다.
“나는… 아는 사람에게 배웠어.”
아는 사람이라. 이 경우에는 자연스레 그의 아버지를 떠올려야겠지만, 여명이 만난 전용섭은 비각술 같은 무술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마법사였다.
‘웨슬리가 했던 말도 그렇고, 뭔가… 의심이 간단 말이지.’
때마침 의심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기에, 여명은 천천히 검을 들었다.
“이제부터는 진지하게 해.”
“…나는 계속 진지했는데?”
“그럼 빡세게 해. 잘못하면 팔 잘린다.”
“….”
직설적이다 못해 협박에 가까운 말에 전윤성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하, 미소 지었다. 마나가 넘실거리는 검과 묘하게 어울리는 미소였다.
“좋아. 어디 해보자고.”
그렇게 말한 전윤성은 다리를 넓게 벌리고 어깨에 힘을 실었다. 머리 높이까지 검을 들어 올린 채, 정면으로 여명을 마주한 모습이 몹시 위협적이었다.
검술 이름은 몰라도, 꽤 고급 검술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자세.
그에 비해 여명의 자세는 편안했다. 적당히 늘어진 손과 어깨. 그나마 곧게 선 다리는 나무 뿌리처럼 굳건했다. 진짜 엘프 검술의 기수식이었다.
그렇게 자세를 잡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동자를 마주했다. 겹쳐지는 호흡, 팽팽하게 당겨지는 긴장.
그리고 이어지는 출수.
이번에도 시작은 전윤성이었다. 그는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벼락처럼 검을 내려찍었다.
번쩍!
녀석의 검에서 터져 나오는 마나의 빛 아래에서, 여명은 똑바로 검을 마주했다. 황금빛 눈동자 위로 비치는 전윤성의 검술은 총알과 같았다. 빠르고, 효율적인 살인 무기.
주가시빌리와 비슷한 부류인 걸 보면, 아마 미군에서 쓰기 위해 만든 무술 중 하나가 아닐까?
뭐, 어디서 만든 무술이건 간에, 전윤성의 속내를 시험하기엔 딱 좋은 검술이었다.
‘그래, 이제 네 정체를 까볼 때도 됐지.’
여명은 곧바로 엘프 검술을 펼쳐 대응했다. 그의 검이 담쟁이 줄기처럼 구불구불한 궤도를 그리며 녀석의 검을 막아선 직후.
쩌엉 – !
마나와 마나가 충돌하며 두 사람 사이로 마나 가루가 튀었다. 바깥에서 지켜보는 동급생들이 술렁거릴 정도로 높은 수준의 마나의 충돌.
그 충돌을 신호 삼아, 두 개의 검이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