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28)
을 위한 세계는 없다-328화(328/817)
***
언젠가부터 ‘로드 하우 아카데미 학장 집무실’이란 정식 이름 대신, 교장실로 불리는 방.
야근의 원인인 서류 탑과 야근 시간을 증명하는 빈 커피잔이 늘어진 탁자 앞에서, 히메나 교장은 기지개를 켰다.
뚜둑, 뚜둑- 늙어버린 몸뚱이가 제발 잠 좀 자자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창문 밖에서 은근슬쩍 고개를 내미는 햇빛을 보아하니 오늘 잠은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정신력과 의무감, 그리고 진한 카페인뿐.
그나마 일이 끝이 보이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히메나 교장은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서류를 확인했다.
[초인 올림피아 개최지 선정 안내문.]제목을 읽자마자, 히메나 교장은 ‘드디어…’ 라고 짧은 한탄을 내뱉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질질 끌더니, 이제야 개최지를 선정했나. 예정보다 얼마나 밀린 건지…
‘이제 개최지 선정에 한 손 거들어 달라는 청탁 전화는 안 받아도 되겠네.’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적힌 국가의 이름을 보고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한국?”
예상외의 결과… 아니, 예상대로의 결과였다.
최우선 개최지였던 미국은 저번에 치렀으니 탈락, 또 다른 유력 개최지였던 스위스는 세계수의 결정을 도둑맞은 일로 바빠 탈락.
은근히 개최에 욕심을 내던 일본이나 프랑스가 뒤늦게 욕심을 드러냈지만, 유력 주자들이 사라진 이상 지난 십 수년간 개최에 목을 맸던 한국이 뽑히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올해는 자랑할 학생도 있으니 더하겠지.’
올해는 유독 한국 출신 학생들이 두드러진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홍세티, 박네티, 오시리, 이시스 그리고… 천여명.
마지막 이름을 떠올린 히메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얼마 전 그가 벌인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 까닭이었다.
“그가 주인공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무의미한 바람을 잠시 꿍얼거린 히메나 교장은 이내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주인공이 아니면 어떻고, 맞으면 어떤가.
한 명의 교육자와 학생으로서, 천여명 또한 그녀가 지켜주고 보듬어 줘야 할 학생인 것을.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교장은 서류에 싸인한 뒤, 탁자 아래 서랍을 열었다.
교장의 지문인식으로만 열리는 비밀 서랍.
삐빅- 오래된 전자음 함께 열린 서랍 안에 들어있는 건, 그녀의 주먹보다 더 큰 대구경 권총 한 자루였다.
세상에 딱 세 자루밖에 없는 마총 중 하나.
그건 초대 학장이 그녀에게 남긴 유품이자, 짐이었다.
대체 왜 후임 학장에게 마총을 남긴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보는 맛은 있었다.
새하얀 마나 메탈과 티타늄 합금, 그리고 용의 발톱으로 만들어진 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웠으니까.
심란할 때 이 총을 쥐면 저절로 마음의 안정을…
“…어?”
총을 쥐고 천장을 겨누던 히메나는 멍하니 총을 내려다봤다. 기다란 총신에 새겨져 있었던 ‘퀴니 코완’ 싸인이 사라진 까닭이었다.
그리고 초대 교장의 싸인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이었다.
[쇠똥구리]아니, 이거 이름은 맞나? 교장은 멍하니 글자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용을 살린 채로 해저터널의 문을 연 사람이 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하필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히메나 교장은 몇 번이고 총을 확인해봤다.
하지만 총 어디에서도 ‘퀴니 코완’의 싸인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미친 게 아니라면, 쇠똥구리란 자는 초대 학장과 그녀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이 틀림없었다.
“아….”
히메나 교장은 총을 다시 서랍에 넣고 심호흡했다. 멍한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봐도, 쇠똥구리란 학생은 없었다.
그럼 초대 학장의 비밀을 알아낸 게 외부인이란 말인가? 아니면 학생 중에 가명을 쓴 녀석이 있는 건가?
어느 쪽이건 간에, 그녀가 직접 지하로 내려가야 하리라.
쇠똥구리란 자와 만나서, 주인공에 대해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줘야…
-똑똑.
그때, 누군가 교장실의 문을 두들겼다. 히메나 교장은 부랴부랴 총을 서랍에 넣은 뒤 대답했다.
“들어와.”
곧이어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몰골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생긴 듯했다.
“…무슨 일이야?”
“저, 교장 선생님. 1학년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1학년에서? 왜, 무슨 일인데? 작년처럼 귀족 나부랭이가 여자 기숙사에 숨어들기라도 했어? 아니면 학생들끼리 칼부림이라도 했나?”
“…후자입니다. 남학생들끼리 교직원의 입회 없이 대련을 벌였는데, 조금 크게 다쳤습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건지. 히메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사내놈들이 다 그렇지 뭐, 의료팀이랑 나츠카와 사제를 불러서 치료해줘. 치료비는 아카데미에서… 잠깐, 얼마나 다쳤는데?”
“오른팔을 잘랐데요. 깔끔하게 잘라서 치유는 별문제가 없는데, 하필 싸운 학생들이…”
“…천여명이지?”
“예? 어떻게 아셨어요?”
그 녀석, 상습범이거든. 히메나는 애써 뒷말을 삼킨 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냥, 감이지.”
히메나 교장은 ‘역시 교장님이셔’ 라는 듯한 비서의 눈빛을 외면한 뒤,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렸다.
“생활지도부의 조지 칸 선생을 보내. 둘 다 3일… 아니, 팔 잘린 학생은 3일, 그리고 천여명은 일주일 동안 정학 처분 내리라고 전달하고. 아, 그러고 보니 팔 잘린 학생은 누구야?”
“전윤성입니다.”
“….”
“…미군에 보낼 공문 초안을 준비하겠습니다.”
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차갑게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
천여명과 전윤성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아카데미를 달궜다.
만박불통에게 강함을 인정받은 천여명과 원래부터 강자로 분류되던 전윤성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전윤성의 팔이 잘렸다는 사실이 소문에 불을 붙였다.
-어쩌다가 그랬데? 전윤성, 그놈이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친 건가?
-사랑싸움이라던데?
-천여명이 투톱으로 불리는 게 싫어서 칼질한 거래. 용병들이 그런 거 엄청 따진다더라. 걔 용병 출신이잖아.
대답할 당사자들이 교직원에게 끌려간 덕분에,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소문이 어찌나 빨리 퍼졌는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학생들이 세티에게 몰려와 이유를 물을 정도.
물론, 세티라고 이유를 아는 건 아니었다.
전윤성과 대련하겠다는 말을 미리 듣긴 했지만, 왜 하필 오늘, 그것도 팔까지 잘라가며 싸운 이유를 그녀가 어찌 알겠나?
‘혹시….’
심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화풀이를 한 걸까? 혹은 악화된 몸 상태가 그의 정신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걸지도 몰랐다….
성녀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소문을 듣자마자 세티에게 달려와 도움을 청했다.
“어, 어쩌지? 우리가 괜히 혼자 둬서 여명이 사고 친 거 아니야? 전윤성 걔, 대놓고 미군을 빽으로 둔 놈이잖아. 앞으로 계획에 무슨 문제 생기는 건 아니겠지? 응?”
그렇게 당황하는 성녀와 달리, 세티는 침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여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여명도 다 생각이 있어서 벌인 일이겠지.”
“…그냥 빡친 거 아닐까? 어, 어쩌면 저번처럼 주가시빌리의 살기에 장악당한 거라든가?”
“하아… 제발, 그렇게 보고도 아직도 여명을 몰라?”
성녀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뒤에야, 세티는 그녀에게 답을 줬다.
“정 걱정되면 전윤성 팔 치료해준다는 핑계 대고 교무실에 가보면 되잖아.”
“…아! 그런 수가 있었구나.”
“….”
“근데, 그러면 세티, 너는…”
“나는 할 일이 많아.”
퀴니 코완이 남긴 계좌가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
한국 정부를 비롯해 아카데미의 기연을 노리는 녀석들을 감시하고, 한발 앞서 해저터널의 기연을 회수하는 것.
이제 곧 아카데미로 찾아올 엿 같은 한국의 정치인들을 속일 준비를 하는 것까지….
성녀는 새삼 세티가 계획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음을, 그리고 동시에 자신보다도 더 여명을 믿고 있음을 깨달았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낀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그러면 나 혼자서 여명 상태 확인하러 갈게. 바로 연락할게.”
“응, 잘 다녀와. 교직원들 있는 곳에서 이상한 거 하지 말고.”
“이상한 거? 내가 언제 그런 걸 했…”
세티는 단박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키스 이상은 하지 말란 이야기야.”
“….”
성녀는 자기를 뭘로 보는 거냐고 버럭 소리 지르려다가, 해저터널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반박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테니까.
아무튼, 성녀는 세티를 남겨두고 홀로 교직원 건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만난 교직원에게 전윤성의 치료를 하고 싶다고 하니, 선생님들과 교직원들 모두 순순히 여명과 전윤성이 있는 곳으로 그녀를 안내해줬다.
‘이럴 때는 성녀란 직위가 참 쓸만하단 말이지….’
그녀가 천벌 받을 생각을 떠올리며 여명과 전윤성이 함께 있는 병실로 향하길 잠시.
알콜 냄새가 가득한 방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가 처음으로 본 건 여명도 아니고, 전윤성도 아닌…
뚱한 표정의 웨슬리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쇠미리였다.
“…뭐야, 너 왜 여기있어?”
뜻밖의 장소에서 금발의 귀쟁이를 본 성녀가 반사적으로 으르렁거리자, 쇠미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여기 웨슬리랑 같이 증인으로 왔어요. 중간부터 카메라가 꺼진 탓에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학생 증언만 듣겠다고 하셔서요. 그러는 성녀님은요?”
“…비밀이야.”
“….”
묘한 신경전을 한 성녀는 웨슬리에게 물었다.
“저기, 웨슬리… 맞지? 우리 여명 어디 간 건지 알아?”
왜 성녀와 쇠미리가 여명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거 같지? 웨슬리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생활지도부 선생님에게 끌려갔어.”
“….”
참으로 아카데미스러운 대답.
당당히 용에게 맞서고, 아야톨라를 상대로도 겁먹지 않던 여명도 여기서는 학생이구나… 성녀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상을 느꼈다.
하긴, 빨갱이 엘프 대빵의 딸도 학생 노릇을 하고 있는데, 여명이라고 못할 건 또 뭔가?
묘하게 아카데미에 빨갱이들이 꼬인다고 생각하면서, 성녀는 병실 침대에 앉았다. 아니, 침대에 앉기 전에 쇠미리에게 물었다.
“둘 중 어느 쪽이 여명이 누운 침대야?”
그러자 쇠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비밀인데요?”
“….”
성녀가 귀쟁이를 노려보고, 쇠미리의 눈동자가 반월을 그렸다.
누구 하나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서로를 찔러버릴 듯한 분위기.
괜히 중간에 낀 웨슬리는 놀란 눈으로 두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바깥으로 나갔다.
의외로 여명은 존나게 나쁜 호색한이 아닐까, 그런 의문을 품은 채로.
***
생활지도부실은 알려진 것과 달랐다.
드라마 속 그것처럼 살벌하지도 않았고, 인터넷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어두컴컴하지도 않았다.
그냥 여느 교무실처럼 사무용 탁자와 컴퓨터가 놓여있고,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는 그런 곳.
‘생각보다 평범하네.’
사무실을 둘러보던 여명이 묘하게 실망감을 느꼈다. 드라마는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그에 비해 전윤성은 잔뜩 움츠린 채 땅만 보고 있었는데, 팔을 잘릴 때보다도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이게 진짜 학생과 가짜 학생의 차이인 걸까.
아무래도 퀴니 코완의 부탁처럼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은 못 할 거 같다고 여명이 생각하는 사이, 한 교사가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흑인 특유의 짧고 검게 곱슬 진 머리카락, 고지식한 안경과 눈빛, 그리고 선생님보다는 군인에 가깝게 단련된 몸까지.
여러모로 선생님보다는 군 교관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그는 여명과 전윤성이 앉아있는 탁자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반갑다. 전윤성, 천여명.”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선생님이 본론을 꺼냈다.
“아주 젊음을 만끽했더구나. 아침부터 입회인 없이 대련, 훈련용 검에 마나를 담아서 칼질, 그리고 둘 다 팔에 상처를 입은 것까지.”
“….”
“무슨 생각으로 벌인 일인지 모르겠다만, 둘 다 이번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거다. 이해했나?”
“예, 이해했습니다.”
여명이 대답하자마자, 선생님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펼쳐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교장 선생님의 명령과 교직원 회의 결과, 둘 다 정학이다. 전윤성, 너는 3일. 천여명, 너는 일주일이다. 이의 있나?”
고작 정학으로 끝난 건 물론이고, 정학 날짜가 다른 걸 보니 교장이 나름 두 사람을 배려해준 듯했다.
여명은 사람 좋은 교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보낸 뒤,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본 흑인 선생님의 눈썹이 휘어졌다.
“천여명 학생, 이의 있나?”
“아뇨, 그건 아니고… 선생님 성함을 아직 못 들어서요.”
선생은 그제야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지 칸, 2학년 담당인 조지 칸이다. 조지 선생님이라고 부르도록.”
그 순간, 여명은 불현듯 시카고에서 들었던 브라우닝의 말을 떠올렸다.
자기의 옛 부관에게 술을 전달해 달라는 부탁.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지만, 이 아카데미에 군인처럼 보이는 조지 칸이 둘이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명은 그냥 대놓고 물었다.
“선생님, 혹시… 샤토 디켐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