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29)
을 위한 세계는 없다-329화(329/817)
좋은 사람은 단명하고, 개자식들은 지긋지긋하게 오래 산다는 사실에 비춰봤을 때, 사악함이야말로 장수의 비결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전대 성녀의 알려지지 않은 연설 중 발췌』
***
“…샤토 디켐?”
조지 칸 선생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여명은 입술에 침을 바른 뒤, 천천히 대답했다.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만든 귀부 와인이요. 좋아하시나요?”
“좋아하지. 그런 훌륭한 와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아니, 잠깐,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 거니? 혹여, 와인을 뇌물로 징계를 피하려는 거라면 얘기도 꺼내지 말거라.”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건 말건, 여명은 엉뚱한 대답을 내놨다.
“미군 출신이시죠?”
“….”
“그리고… 피터 오스틴 중장의 부관이셨고요.”
미국의 빅 쓰리, 브라우닝의 본명.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조지 칸 선생님은 물론이고 조용히 듣고 있던 전윤성마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라움이 침묵으로 이어지기 전에, 조지 선생님이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질문하는 거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맞아. 내가 군인이던 시절에는 그분을 모시는 부관이었다. 그때는 중장이 아니라 대위셨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역시 이 교사가 브라우닝이 찾던 그 사람이 맞았다.
여명이 기막힌 우연에 감탄하며 다음 말을 떠올리는 사이, 조지 선생님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안경을 벗었다.
브라우닝하고 어떤 관계냐, 언제 내 뒤를 캔 거냐… 묻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도, 그는 짧은 질문만을 입에 올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내 군 생활이 궁금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닐 텐데.”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확인하는 척, 슬쩍 고개를 두리번거린 뒤 전윤성에게 말했다.
“잠깐 선생님과 단둘이서 이야기해도 될까?”
잔뜩 분위기를 잡은 탓일까, 전윤성은 별다른 고민 없이 선생님을 바라봤다. 떠나도 되겠냐는 눈빛.
조지 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갔다.
그렇게 단 둘이 되고 나서야, 조지 칸이 물었다.
“천여명 학생, 시간이 많지 않으니 질질 끌지 말고 이야기해보게. 누가 보냈지?”
“성녀요.”
입에 침을 바른 덕분인지, 여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입에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은 예상외일수록 효과적인 법.
그런 면에서 성녀란 이름은 그 어떤 거짓말보다도 효과적이었다. 조지 칸 선생님의 얼굴 위로 서린 당황이 바로 그 증거였다.
“…성녀님? 1학년의 그 성녀님 말인가?”
“예.”
“그분이 왜…? 아니, 그보다, 네가 뭔데 성녀님의 전령을 자처하지?”
“아, 전령처럼 대단한 뭐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친구 사이에 부탁받은 겁니다.”
“…부탁?”
의아한 듯 미간을 좁히는 조지 선생님을 향해, 여명이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성녀가 시카고에서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사이에 브라우닝에게 어떤 부탁을 받았는데, 아카데미 선생으로 있는 옛 부관에게 선물을 전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선물이라는 게 설마… 샤토 디켐인가?”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어진 내용은 조지 칸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
교장 선생님에게 억류된 성녀는 선물을 전해주지 못했고, 그래서 몇몇 친구들에게 대신 선물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그건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그리고 동시에 정체를 숨기면서 브라우닝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여러모로 귀찮은 거짓말이었지만, 뭐…
‘제가 시카고에서 브라우닝에게 직접 부탁받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아무튼, 조지 칸도 거짓말이란 생각은 못 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성녀님과 함께 시카고를 구했다고 했지… 음, 그런데 그냥 선물만 보낼 사람이 아닌데, 혹시 선물 말고 다른 건 없었나?”
“아, 있었어요. 대단한 건 아니고, 언제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다… 브라우닝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데요.”
여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지 선생님은 오늘 만난 뒤로 가장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인데?
‘뭐, 때때로 진실이 거짓보다 놀라울 때도 있는 법이니….’
그런 여명의 생각을 증명하듯, 조지 칸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나자고…? 그 인간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제와서 그 일을 후회하는 건 아닐 텐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여명은 그냥 조용히 그의 중얼거림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정도 감정을 가라앉힌 조지 칸이 말했다.
“성녀님을 대신해 이런 이야기를 전해 줘서 고맙구나. 처음에는 네가 정학을 피하려고 선생에게 뇌물을 내미는 또라이인 줄 알았다.”
“…하하.”
여명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깟 정학 따위가 뭐라고.
그가 조지 칸을 보자마자 굳이 샤토 디켐 이야기를 꺼내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말문을 튼 건 그런 사소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 그건…
“저, 선생님? 중요한 건 아닌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정학에 대해 궁금한 게 있나?”
“아뇨, 잘못한 게 있으니 정학은 당연히 받아야죠. 제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라….”
여명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천천히 질문을 꺼냈다.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최근에 미국에서 온 학생이나 교직원이 있나요? 선생님도 미국인이시니까, 혹시나 해서 여쭤봅니다.”
***
“왜 안 오지…?”
성녀는 병실 베개를 꽉 끌어안으며 꿍얼거렸다. 베개에서 나는 여명의 체취 때문일까, 아니면 벌써 몇십분간 엘프와 한 공간에 있어서일까? 마음이 심란했다.
“전화도 안 받고… 진짜 무슨 일 있나? 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녀의 목소리 끝에 있는 건 침대 앞에서 책을 읽고 있던 귀쟁이였다.
귀쟁이, 쇠미리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냥 정학 처리가 길어지는 걸 수도 있고.”
“와, 말투 봐. 넌 걱정도 안 돼?”
“…딱히? 애초에 아카데미에서 여명은 무슨 일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벌이는 쪽에 가까운데, 위험할 게 뭐 있어?”
“….”
세티와 묘하게 비슷한 말투였다. 성녀는 자신만 여명을 못 믿고 걱정하는 건가 싶어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잠시 후, 괜히 심통이 난 성녀는 쇠미리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뭐 읽어?”
“나의 아버지 스탈린.”
“뭐? 뭐야 그게?”
“스탈린의 딸, 스베틀리나가 쓴 책이야. 직접 소련의 마지막을 본 사람이 쓴 책이라 좀 기대하고 읽었는데, 베리야가 승천했다느니 하는 헛소리에 거짓말도 많고, 억지 해석도 많고… 그다지 재밌는 책은 아니네.”
“….”
이 빨갱이가 뭐라는 거람. 성녀는 슬쩍 책의 내용을 훔쳐봤다.
[시베리아 사태는 미국과 베리야가 손을 잡고 벌인 음모이며… 베리야는 그 대가로 승천을…]저건 또 뭔 개소리야? 음모론 찌라시도 저것보다는 잘 썼겠다. 흥미를 잃은 성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쇠미리를 바라봤다.
이상한 책을 읽는 빨갱이긴 하지만, 외모만큼은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다운 귀쟁이.
그 외모를 보다 보니, 새삼 이상한 사실이 떠올랐다.
이 귀쟁이는 왜 여명을 돕는 걸까?
물론, 여명이 진성 빨갱이의 길을 걷고 있긴 하지만… 그건 이 엘프와는 별 상관없는 문제 아닌가.
인천의 인연 때문에? 그깟 목걸이 두 개 찾아준 게 뭐라고.
혹시, 여명을 이용하려는 걸까? 아니, 애초에 이 공주님이 아카데미에 온 이유가 뭐지?
설마 소문처럼 엘프와 인간의 평화의 증표가 될 남편감을 찾으러…?
말도 안 되는, 그래서 더욱 그럴싸한 상상이 성녀의 머릿속을 채우던 그때.
쇠미리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끊었다.
“이상한 생각은 거기까지.”
“…으, 응?”
“뭔 으응? 이야. 이상한 생각하고 있었잖아.”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안 했거든!”
“정말? 다섯 신께 맹세할 수 있어?”
쇠미리가 책을 덮고 빤히 성녀를 바라봤다. 그 깊은 녹색 눈과 마주한 성녀는 괜히 찔려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 이딴 일로 신께 맹세하는 성녀가 어디 있어?”
“….”
“그리고 그쪽이야말로 이상한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냐?! 원래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바보 눈에는 바보만 보이는 거 몰라?”
순간의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지구 종교의 격언까지 사용하는 성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쇠미리는 한숨과 함께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도적인 무시. 성녀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애초에! 나는 이상한 생각 같은 거 할 필요가 없거든?! 내가 여명이랑 어디까지 진도를 나간 줄 알…!”
“어디까지 했는데?”
“….”
“여명이랑, 너. 둘이서 어디까지 했냐고. 왜 갑자기 입을 다물어? 자랑하려던 거 아니었어?”
설마 역으로 이런 질문을 해올 줄 몰랐던 성녀가 입을 다문 사이, 쇠미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성녀는 당연히 풋풋한 사랑을 할 줄 알았는데… 사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천박한 사랑을 하고 있었구나… 그런 거였구나.”
“….”
연달아 펀치를 맞은 성녀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쇠미리가 ‘하긴, 그러니 다섯 늙은이들이 그렇게 틀어막았겠지.’ 라고 중얼거리길 잠시.
쇠미리가 다시 입을 열어 성녀를 난타하려는 차에, 드르륵- 병실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온 건 아까 전에 방 바깥으로 도망친 웨슬리도 아니요, 병실을 관리하는 간호사도 아닌… 진지한 표정의 여명이었다.
“여명!”
성녀는 베개를 집어 던지고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갔지만, 여명은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웨슬리랑 전윤성이 아직 저기에 있어. 포옹은 나중에 하자.”
“아, 응….”
성녀가 쭈그리가 돼서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사이, 쇠미리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별 건 아니고… 조금 거슬리는 일이 있었어.”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문을 닫고 병실 구석 의자에 앉았다. 성녀는 애꿎은 베개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설마, 정학이 아니라 퇴학당한 건 아니지!?”
“내가 뭐 살인한 것도 아니고, 일주일 정학 맞아. 근데….”
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기다리다 못한 쇠미리가 웬만한 건 꿈으로 공유받을 수 있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여명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아카데미에 대행자가 있어.”
“….”
대행자. 미국의 예언자가 부리는 특수한 초인들을 뜻하는 말.
성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행자가 아카데미에 올 거라는 건 퀴니 코완의 계약서를 보고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여명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문제였다. ‘온 게’ 아니고 ‘있다’ 고?
곧이어 이어진 여명의 말은 그녀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우리가 시카고에서 돌아오는 것보다 한발 앞서서… 아카데미에 잠입한 거 같아.”
“…그새 교장한테 물어본 거야?”
“아니, 교장은 이런 걸 물어보면 대답은커녕 날 의심했을걸. 우연찮게 알만한 사람과 마주해서, 기회를 봐서 물어봤어.”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면 고민이 머리카락과 함께 쓸려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성녀가 손을 들었다.
“정확히 누군데?”
“아직 정확한 정체는 몰라.”
“모른다고? 근데 어떻게…?”
여명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켜서 사진을 띄웠다. 직원 교육을 받는 열 명 남짓한 신입 교직원들이 찍힌 사진.
보안이고 뭐고, 당장 SNS에 올려도 이상할 거 없는 평범한 사진이었다.
뭔데 이게? 성녀가 사진에서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하고 안대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쇠미리가 콕, 직원 사이에서 한 여성을 집었다.
붉은색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하고, 성녀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의 변장을 한 그 사람은…
“…스칼렛 오하라? CIA가 여기 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