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33)
을 위한 세계는 없다-333화(333/817)
***
호아나 툴레의 이름이 나온 순간, 여명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했다.
그녀가 여명에게 줬던 반지… 데스나이트를 일반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도구를 다섯 개나 더 내놓으라고 한 게 문제였다.
그만한 마도구를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나 가져와야 하는 만큼, 여명은 호아나가 느긋하게 일을 진행할 거라 넘겨짚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점이 있었으니, 그녀가 붉은 투쟁의 신을 섬기는 성기사란 사실이었다. 느긋함이란 단어는 그녀의 사전에도, 그녀가 섬기는 신의 경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뒤에 벌어질 일은… 뻔했다.
그녀는 나이와 폭력, 그리고 그 외에 여명이 알지 못하는 수단을 동원해 마법학부장을 다그쳤으리라.
가단은 그 등쌀에 못 이겨 여명을 찾아왔… 아니, 잠깐.
‘성녀도 아니고, 나를 콕 집어 찾아올 이유가 뭐지?’
호아나와 그의 사이를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의심을 담아 되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절 찾아오신 겁니까?”
가단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호아나에게 준 반지를 네가 가지고 있잖니.”
“….”
물론, 당당하게 말한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뜻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마도구에 추적 마법을 걸어놓으신 겁니까?”
“어허, 추적 마법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는구나. 왜, 유명한 화가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에 몰래 싸인을 남기기도 하잖느냐? 나도 마도구에 비슷한 걸 남긴 거란다.”
“…그러니까, 추적 마법 비슷한 걸 마도구에 걸어 놓으셨단 거군요.”
“….”
한 번 더 추궁하자, 가단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무언의 긍정.
데스나이트들에게 달아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 여명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그가 무어라 말을 돌리기도 전에, 가단이 먼저 말을 이었다.
“원래는 호아나, 그 미친 늙은이를 추적하려는 생각으로 달아둔 건데, 어쩌다 보니… 끄응, 이해해다오. 너도 잘 알고 있잖느냐? 그 늙은이가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는데요. 저한테는 좋은 할머니 같은 분이셨습니다. 여명은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는 척, 인벤토리에서 반지를 꺼내 가단에게 내밀었다.
“우선, 이 마도구는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호아나 님의 문제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명백한 축객령. 가단은 여명과 반지를 번갈아 보며 가만히 숨을 삼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
-자, 잠깐! 기숙사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때, 기숙사 문 너머에서 사감의 고함이 들려왔다. 우당탕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는 덤이었고.
그리고 이어지는 익숙한 노인의 목소리.
-초빙 교사 권한으로 어떻게 안 될까?
그건 호탕하다 못해 팔팔한 호아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단의 수염이 문자 그대로 삐쭉- 솟아올랐다.
“저, 저 미친 늙은이는 아침잠도 없나!”
“어르신들은 보통 아침잠이 없….”
“그건 나도 안다! 나도 늙었으니까!”
그는 그대로 여명의 손을 놓더니, 떨리는 눈으로 기숙사 방을 두리번거렸다. 여명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방에 숨을 장소 같은 건 없습니다. 나가시려면 창문으로….”
“그래, 창문이 있었군!”
농담이었는데, 가단은 정말로 창문을 열고 낑낑거리며 난간에 발을 올렸다. 아침 바람을 따라 그의 하얀 가운이 펄럭거렸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호아나에게 말 좀 잘해주고! 나는…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창밖으로 뛰어내리기 직전, 가단은 여명의 손에 들린 반지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마나가 일렁이더니, 반지에 걸려 있던 마법이 해제되는 게 느껴졌다.
역시 아카데미 마법학부장인가, 여명이 미처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한 마법이었다.
“추적 마법은 해제했으니, 알아서 잘 써다오. 호아나에게 내가 여기 왔다는 건 비밀로 하고!”
“….”
역시 추적 마법 맞았네. 여명이 헛웃음을 흘리기 무섭게, 가단이 기숙사 창문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연세 때문에 혹시 다치진 않으실까, 여명은 걱정스레 창밖을 확인해봤다. 괜한 걱정이었다.
가단은 마치 깃털처럼 부드럽게 허공을 날아, 기숙사 담장을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
“….”
아침부터 이게 뭔 시트콤 같은 일인지.
여명은 멀어지는 가단과 반지를 번갈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쿵! 소리와 함께 기숙사 방문이 열리며 호아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천여명, 좋은 아침이구나!”
“예, 호아나, 좋은 아침입니다.”
호아나 툴레, 그녀는 뒤에서 고개를 내젓는 사감들을 뒤로한 채 방으로 들어왔다.
“정학당했다면서? 동급생의 팔을 잘랐다던데, 정말이니?”
여명이 일어나 인사하는 사이, 그녀는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 여명의 앞, 조금 전까지 가단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벌써 소문이 쫙 퍼진 건가, 여명은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예, 실수로 힘 조절이 실패해서….”
여명이 말꼬리를 흐리자, 호아나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등을 두들겼다.
“하하, 죽이지만 않으면 됐지. 괜히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단다. 상대가 오죽 도발했으면 그랬겠니?”
“….”
“그리고 젊을 때는 다 그렇게 실수하고 그런 거란다. 나도 젊을 때 선배 어금니 박살 내고, 후배 뼈 부러트리고 그랬어.”
“…?”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오르는 가운데, 호아나가 그의 손에 들린 반지를 발견하고 웃었다.
“그 반지, 쓸 생각이니? 마침 잘 됐구나.”
“잘 됐다니요?”
“그, 저번에 약속했잖니. 너랑 나랑 같이 가단 그 새ㄲ… 아니, 마법학부장을 만나러 가자고. 마침 서로 시간이 남는 것 같으니, 오늘 가자꾸나.”
“….”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단이 도망친 방향을 바라봤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딱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저, 호아나, 사실은….”
“말 안 해도 안단다. 가단이 널 찾아왔지?”
“…알고 오신 거였습니까?”
“아니, 처음부터 알고 온 건 아니란다. 하지만… 여명, 너도 겪다 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읽기 쉽단다. 평소에는 음흉하게 꿍시렁거리다가, 정작 일이 닥치면 뻔한 짓거리만 벌이거든.”
“….”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이 듬뿍 담긴 조언이었다. 여명이 무의식적으로 그 조언을 머릿속에 새겨넣는 사이, 호아나가 말을 이었다.
“아, 혹시, 다른 일이 있다면 바깥에서 기다리마.”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가시죠.”
“그래도 되겠니? 괜히 내가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 중요한 일을 미루는 거라면…”
“아닙니다. 반성문이 있긴 한데, 꼭 지금 쓸 필요 없습니다.”
여명 나름대로 배려가 담긴 말. 호아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 억지에 어울려줘서 고맙구나. 그러면… 우리가 먼저 가단의 연구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까?”
“….”
의외로 가단이 정상이고, 호아나가 악당 아닐까? 그의 머리로 짧은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여명은 금세 그 상념을 떨쳐냈다.
어느 쪽이 정상이건 간에, 그에게 이득이 되는 쪽은 호아나가 분명했으므로.
‘나도 속물이 다 됐네.’
자책 아닌 자책을 되새기면서, 여명은 호아나를 따라 방을 나섰다.
***
오래전, 마법사들의 도시 ‘히라리아’에서 에어컨 혁명이란 사건이 일어났었다.
누군가는 냉기 마법사들이 냉장고와 에어컨을 박살 낸 탓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징집병들의 빵에 톱밥을 섞어 넣은 게 원인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의 음모거나, 초대 용사가 남긴 저주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그 사건이 몰고 온 여파였다.
깊은 탑, 혹은 마탑이라 불리는 마법사들의 민낯이 까발려진 것.
하늘을 날고, 기후를 조종하는 강대한 마법사들도 총에 맞으면 피를 흘리고, 독가스를 뒤집어쓰면 죽는다는 사실이 지구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마법사들의 저력을 경계하며 숨죽이고 있던 지구의 국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차원문을 넘었다.
이미 변경백령을 침략하던 프랑스는 물론이고, 호시탐탐 엘프 숲을 노리던 미국, 일본, 영국, 소련…
고도화된 자본과 조직화된 국가 권력의 침탈은 ‘마나가 뭔지도 모르는’ 미개한 지구인들을 향해 꼿꼿이 턱을 세우던 마법사들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이른바, 수치의 시대.
땅을 비옥하게 했던 번개 학파의 마법사들은 값싸게 생산되는 지구산 비료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였고.
염동력과 토지 마법으로 건축 시장을 장악했던 지질 학파는 철근 콘크리트와 거대 건설 기계 앞에 무릎 꿇었으며.
수년간 수련해온 화염 마법은 고작 농노의 반년 치 월급으로 구매할 수 있는 AK-47 한 자루, 수류탄 하나와 비교당했다.
결론적으로, 지구의 국가들이 아샤를 유린하는 동안 마법사들은 아샤를 지키긴커녕 자신들의 기득권조차 지키지 못했다.
많은 마법사들이 히라리아를 떠나거나 은둔했고, 아예 지구로 전향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물론, 시대의 흐름을 읽고 변화를 종용하던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가 증명하듯, 뛰어난 개인은 전설 될지언정 시대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나마 현대에 이르러, 자본주의, 혹은 지구 학문과 결합한 마법사들은 나름대로 새로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호아나? 저기, 죄송한데….”
[마법학부장실]이란 명패가 걸린 고급스러운 방 안, 과거의 이야기를 읊고 있던 호아나는 말을 멈추고 자신을 부른 여명을 바라봤다.여명이 조금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요약해주시면 안 될까요?”
“….”
호아나는 멍하니 여명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미안하구나, 늙으면 주저리주저리 말만 늘어난다니까.”
“…아뇨, 제 억지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예의도 바르지. 어쩌다 이런 청년이 성녀님에게 낚였을고. 호아나는 [마법학부장 가단]이라고 새겨진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내가 가단을 만난 건 수치의 시대 초기였단다. 그 멍청한 녀석은 지구인 꽃뱀에게 걸려서, 루마니아로 납치당하고 있었지.”
“…납치요?”
“아, 너는 잘 모르겠구나?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런 시절이었단다. 지구인들이 마나를 다루는 혈통을 조사하겠답시고 마법사들이나 초인을 지구로 모으던 시절.”
“….”
“제 발로 지구로 향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납치당한 사람들도 많았어. 특히, 공산권 국가들이 그런 짓을 많이 했지. 왜, 너도 그건 알지 않니? 초인의 간을 먹으면, 초인 된다느니 하는 그런 도시 전설. 그것도 다 그 시절에 나온 거란다.”
여명은 말을 아꼈다. 다큐멘터리에서 보고 이미 아는 사실이라서? 아니, 초인의 간이 어떻게 쓰이는지 떠올랐으므로.
아무튼, 여명의 침묵을 놀람으로 해석한 호아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가단을 구해준 건, 성기사단이 전장으로 가던 시절이었지. 게오르게인가 뭔가 하는 빨갱이를 섬기는 인신매매단을 전부 처리하고, 감옥에 갇힌 녀석을 꺼내줬더니…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아니?”
“…글쎄요, 마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나요?”
“아니? 제발 전쟁터로 따라가게 해달라더라. 하긴, 꽃뱀 때문에 마탑을 벗어난 마법사라니. 낯짝이 아무리 두꺼워도 마탑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겠지.”
“….”
호아나는 다시 생각해도 웃긴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에 비해 여명은 절대 가단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좋게 말하면 사랑 때문이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했다는 소리였으니까.
“…아무튼,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성기사단은 녀석을 데리고 변경백령으로 향했었지. 그리고 알다시피… 졌고.”
세월이 상처를 치료한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게 있는 걸까? 패배를 입에 담으면서도, 호아나에게 후회나 고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뒤… 가단은 우리를 따라 성도로 가지도, 그렇다고 마탑으로 가지도 않았어. 대신, 초대 학장을 따라 지구로 향했지.”
“…두 분은 전우셨군요.”
호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우라니, 보모라면 모를까. 그때 가단은 기껏해야 벼락 구름 네 다섯 번 쓰면 뻗는 반쪽짜리 마법사였어. 내가 그놈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려줬는지 알아?”
“….”
살려준 횟수는 모르겠지만, 가단이 왜 호아나를 피해 다녔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고… 가단 이 녀석, 왜 이렇게 늦지? 설마 눈치챈 건가?”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여명은 추적 마법이 해제된 보석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호아나 또한 그 반지를 바라보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이르지만, 여명… 바라나 단장님, 지금 꺼낼 줄 수 있겠니?”
“지금이요?”
여명은 거부감을 내비쳤다. 데스나이트에 대해 아는 사람을 굳이 늘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호아나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가단도 단장님을 보면… 생각을 바꿔 먹을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녀석은 단장님에게 진 빚이 어마어마하니까.”
“….”
또 무슨 빚이 있길래? 여명이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하는 사이, 끼익- 학부장실의 문이 열렸다.
한데,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가단이 아니었다.
기름기 가득한 검푸른 머리카락을 대충 묶은 포니테일 머리, 붉은 눈동자가 흐릿해 보일 정도로 도수가 높은 뿔테 안경, 그리고 드문드문 얼룩이 진 가운을 입은 여성.
누가 봐도 오늘내일하는 대학원생처럼 보이는 여성은 대뜸 눈살을 팍 찌푸리더니, 여명과 호아나를 번갈아 봤다.
“…?”
짧은 침묵.
갸웃거리는 대학원생의 머리를 따라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뒤이어 따라온 가단의 목소리였다.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어? 빨리빨리 실험 시작 안 하면 수업에 늦….”
뒤늦게 자신의 의자에 앉아있는 호아나를 발견한 가단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대학원생과 마찬가지로 잠시 침묵하다가, 방 구석에 서 있는 여명을 향해 말했다.
“혹시… 호아나에게 마도구를 다섯 개나 요구한 게 너였느냐?”
여명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생선 가게 고양이를 믿다니. 플로리나에게 속은 이후, 내 최대 실책이로군.”
가단의 한숨이 길게 늘어지는 것과 동시에, 호아나의 눈썹이 길게 휘어졌다.
“그 꽃뱀 이름 아직도 기억하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