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34)
을 위한 세계는 없다-334화(334/817)
***
학부장실의 분위기가 묘해지자, 대학원생이 대뜸 손을 들고 물었다.
“저, 학부장님? 저는 이만 돌아가도 될까요? 운동한 뒤에 계속 못 씻어서.”
가단은 미간은 꾹꾹 주무르며 답했다.
“그래, 오늘은 이만 돌아가려무나, 살로… 씁.”
뭔가 말하려던 그는 입을 다급히 말끝을 흐리며 손을 저었다. 대학원생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방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 사이, 뿔테 안경 뒤에 숨겨진 붉은 눈동자가 슬쩍 여명을 훑었다. 여명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관심은 이제 익숙했으므로.
아무튼, 방에 남은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호아나였다.
“아끼는 제자야?”
“난 가르치는 모든 제자를 아낀다.”
가단이 흥,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그러자 호아나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멋진 말인데. 진짜 교수 같아.”
“진짜 교수다! 임시 교사 주제에 날 뭘로 보는 거냐!”
버럭 소리 지른 가단은 이게 다 무슨 짓이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학부장실 구석에 있는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인 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석 반지… 그 빌어먹을 마도구를 정말 다섯 개나 더 만들어야겠나? 연예인도 아니고, 젊은 놈이 그걸 어디다 쓰려고?”
“이름이 빌어먹을 반지야?”
호아나가 끼어들자, 가단이 미간을 콱 구겼다.
“정식 이름은 아직 못 정했… 아니, 말 돌리는 것 좀 그만해! 내가 이렇게 낭비하는 시간이 현대 마법 학계에 얼마나 큰 손해인지 알아?!”
호아나는 무슨 일곱 살짜리 남동생처럼 버럭버럭 화를 내는 가단을 보며 피식 웃더니, 대뜸 여명을 향해 말했다.
“여명, 선배를 불러주겠니?”
여명은 바로 인벤토리를 여는 대신, 가단과 호아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직도 가단에게 데스나이트를 밝혀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은 까닭이었다.
“저 녀석 말고, 날 믿어다오. 내가 장담하는 데, 선배를 보면 저놈이 네 가장 큰 아군이 되어 줄 거란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한 호아나의 말. 여명은 오른손 주먹을 살짝 쥐었다.
“비밀, 지켜주셔야 합니다.”
“비밀? 비밀이 뭔데? 무슨 일인데 저리 심각한 거야?”
가단의 궁금증 가득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여명은 인벤토리를 사용했다.
사용하려했다.
하지만 그가 아공간을 움직이려는 순간, 문밖에서 무언가가 그의 감각을 간질였다. 여명은 인벤토리를 여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닫힌 문으로 향했다.
호아나가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벌컥 학부장실의 문을 열었다.
쾅!
문을 민 직후, 문에 귀를 대고 있던 무언가가 풀썩, 쓰러졌다.
“….”
여명은 덤덤한 눈으로 무언가가 쓰러진 자리를 내려다봤다. 곧이어 파스스- 마나 가루가 휘날리며 투명화가 해제되고, 누리끼리한 가운을 입은 대학원생이 드러났다.
호아나와 가단의 감각을 속일 수준의 투명화.
투명 망토만큼은 아니었지만, 웬만한 마법사를 훨씬 웃도는 수준의 마법이었다.
투명화 마법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여명 또한 미처 느끼지 못했을 정도.
“어, 저… 그게, 이건….”
여명은 빙글빙글 눈을 굴리는 대학원생을 내려다보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세요. 험한 말 나오기 전에.”
“네, 네….”
대학원생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너머로 도망쳤다. 호다닥 뛰어가는 걸음걸이가 어딘가 묘하게 익숙했다.
어디서 봤더라… 아, 그래, 구더기 공주가 뜀박질할 때 딱 저랬었다. 연구실에 찌든 사람들은 다 저런 건가?
뭐, 아무튼, 여명은 다시 문을 닫고 고개를 돌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단을 바라봤다.
“그… 미안하구나, 워낙 궁금증이 많은 학생이라서….”
가단이 참담한 얼굴로 사과하기 무섭게, 호아나가 끼어들었다.
“거, 어지간히도 남자에 굶주렸나 본대? 하긴, 비실비실한 연구원들만 보다가 1학년 초인을 보니 눈이 돌아갈….”
“그게 무슨…! 호아나! 지금 저 학생이 누군지 알고…! 아오. 됐고,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두 사람의 투닥거림이 길어지기 전에, 여명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곧 인벤토리의 아공간이 열리며 허공에서 낯익은 데스나이트가 튀어나와 탁- 학부장실 바닥에 착지했다.
-요즘 자주 나오는 느낌이구나. 여긴 또 어딘가?
바라나 카시, 성기사단의 전전대 부단장은 주변을 둘러봤다.
여명은 그의 마나가 주변을 침범하기 전에, 아카데미 마법진의 주파수를 알려주고 가단의 보석 반지를 내밀었다.
바라나는 별말없이 주파수를 맞추고 반지를 끼며 물었다.
-죽은 자도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마도구라. 날 중히 쓸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사람을 소개해드리려고 불렀습니다.”
-사람? 새로운 인연을 맺기에는 죽은 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만.
사람처럼, 그러니까 데스나이트보다는 적당히 아픈 사람의 피부색을 되찾은 바라나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 학부장실 한쪽에 서 있던 가단은 입을 쩍 벌린 채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당황인지, 기쁨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뒤섞인 가단의 눈이 흔들리길 잠시.
바라나가 여명에게 작게 물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정체를 밝혀도 되는 것이냐?
모르는 사람? 여명이 쓴웃음을 짓는 사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단이 바라나를 불렀다.
“다, 단장…?”
그제야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바라나는 호아나에게 물었다.
-호아나, 이 친구는 누구인고?
“가단이요.”
-…?
바라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저 늙은이가 가단이라고?
졸지에 늙은이로 몰린, 아니, 이제는 늙어버린 가단은 천천히 바라나에게 다가갔다.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그의 걸음걸이는 몹시 불안정했다.
“다, 단장님. 어찌… 어찌 데스나이트가 되셨단 말입니까?”
-….
“저, 전부 저 때문이군요… 그렇지요? 제가 그날 멍청하게 앞으로 나서지만 않았어도…!”
덜덜 떨리는 가단의 목소리와 달리, 바라나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이제야 가단을 알아본 것처럼.
“단장님…!”
그렇게 가단이 통곡하며 쓰러지듯 바라나의 앞에 무릎 꿇으려는 순간.
바라나가 그의 목덜미를 콱 붙잡았다. 데스나이트의 완력은 늙은 마법사의 몸을 데롱데롱 들어 올리기에 충분했다.
바라나는 억지로 가단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단장이 아니라 부단장이다. 코찔찔이 가단. 아직도 직급을 못 외웠단 말이냐?
“….”
가단은 대답 대신 주름진 손을 뻗어 바라나를 꽉 끌어안았다. 차가운 포옹 너머, 이미 죽어버린 부단장이 늙은이의 등을 두들겼다.
-어찌 이만큼 늙고도 변하질 않았어. 대마법사가 된다더니.
“…대, 대마법사 됐습니다! 이 방! 이 방이 증겁니다! 보세요! 저 명패! 이 방 전체가 제 껍니다!”
바라나는 넓은 학부장실을 슬쩍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로구나. 나는 또, 호아나처럼 몹쓸 늙은이가 된 줄 알았지.
“갑자기 전 왜 때리십니까? 제가 뭘 했다고.”
흐뭇하게 보고 있던 호아나가 발끈하며 끼어들자, 바라나가 툭 대답을 내놨다.
-현 성물지기를 보고도 그 말이 나와?
“아니, 그놈은….”
말끝을 호아나를 신호 삼아, 두 늙은이와 한 데스나이트의 추억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전우들의 이야기, 늙어버린 삶, 그리고 꽃뱀.
한동안 과거를 쏟아내는 세 사람을 지켜보던 여명은, 눈치껏 호아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나가 있어도 될까요?’
호아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내저은 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장님, 들어보십시오. 글쎄 지구에 왔더니, 그 꽃뱀이…!”
어린아이처럼 떠드는 가단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여명은 슬며시 문을 닫고 학부장실을 나섰다.
***
조금 시간을 돌려, 하수도 깊은 곳.
영사기에서 재생되는 영화에 푹 빠져있던 오르세 라날이 문뜩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파충류 특유의 눈동자가 커다란 전등과 콘크리트 천장 너머, 아카데미 마법학부장실로 향했다.
-뭐야, 왜 그래?
그 행동에 영화를 보던 데스나이트, 벨라디바가 용에게 시선을 주었다.
용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천장 너머의 마나를 음미하다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다시 푹 고개를 숙였다.
[천여명… 대체 아카데미에서 무슨 짓을 벌이는 건지.]-또 뭔데.
그녀가 재차 질문하자, 라날이 콜라 캔을 통째로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또 데스나이트를 불렀어. 나 말고 다른 용이 없어서 망정이지… 뒤틀린 용의 심장이 느껴질 때마다 흠칫흠칫 놀란다니까.]라날은 별일 아니라는 듯 중얼거린 뒤, 콜라 캔을 통째로 아그작아그작 씹으며 영사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에게는 너무 크고, 용에게는 적당히 작은 화면 위에는 근육질 마초 남이 정글에 숨은 귀쟁이들에게 m60 기관총을 갈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 라날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
[가라, 람보! 빨갱이들을 죽여!]용이 눈을 빛내며 마초 남의 활약을 보는 사이, 벨라디바가 물었다.
-야, 용용아. 천여명이 데스나이트를 몇 명이나 소환했냐?
[한 명. 익숙한 걸 보니 아카데미 첫날에 소환했던 데스나이트 같… 잠깐, 용용이가 뭐야?]라날이 되묻건 말건, 벨라디바는 맛도 못 느끼는 콜라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한 명이면 보나 마나 바라나 영감이겠네… 아카데미에 아는 사람이 있나? 시발, 거참, 부럽다. 부러워.
[부러워? 뭐가?]-뒤지고도 만날 사람이 있는 인맥이 부럽다고. 아, 세상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착하게 살 걸. 누구는 되살아나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그녀의 말과 시선이 향한 곳은 둥지 입구에 서 있는 또 다른 데스나이트였다.
두칸 용병대의 제1부대장. 그는 창을 든 채 둥지의 입구를 삼엄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용과 함께 영화를 보는 벨라디바와 달리, 용을 지켜 달라는 여명의 부탁을 착실히 지키고 있는 모습.
-저 새끼, 저거 또 대답 안 하네. 야, 두칸. 데스나이트 주제에 귀먹었냐?
벨라디바가 다 마신 콜라 캔을 던지고 나서야, 창을 든 데스나이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내 이름은 두칸이 아니다.
-아, 그래? 두칸 용병단 출신이라길래, 이름도 두칸인 줄 알았지.
-두칸은 내 아버지 이름이다.
아니, 여기서 아빠 이름이? 벨라디바는 팍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 이 아니라, 그럼 니 이름은 뭔데? 데스나이트들끼리 같이 썩어가던 그 긴 시간 동안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 미군 놈하고 너, 단 둘뿐이야.
-두하칸. 정식 이름은 두르마 하쉬칸이다.
-…하쉬칸? 성도의 사제 혈통이었냐?
두하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전에 갈라져 나온 방계다.
-어쨌든 성도 출신인 거 아냐.
벨라디바는 흥미로운 듯 두하칸을 위아래를 훑었다.
두두두두-!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총소리가 귀를 때리는 가운데, 벨라디바는 두하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성도 출신이라, 이거 갑자기 궁금해지네… 너 왜 성불 안 하는 거냐?
그녀의 말마따나, 두하칸을 비롯한 여섯 데스나이트는 성녀가 직접 성불시켜준다는 제안을 거부했다.
누군가는 가족 때문에, 누군가는 못 이룬 꿈 때문에, 또 누군가는 단순히 빨갱이를 죽이고 싶어서…
한데, 두하칸만은 성불하지 않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 여명의 인벤토리에 들어갔을 뿐.
-이해를 못 하겠네. 변경백 전쟁에서 전사하고, 성녀의 장례까지 받으면 천국행은 따놓은 거 아니야? 왜 감각도 못 느끼는 이런 병신 같은 데스나이트의 몸을 유지하고 있는 거냐?
그때, 용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너희 감각 못 느껴? 그럼 콜라는 왜 처먹었어?]-…왜, 나는 양키 음료 좀 마시면 안 되냐?
[당연히 안 되지! 이제 그만 마셔! 내가 그렇게 처맞고 고작 두 박스 받아낸 거란 말이야!]-아, 거참 말 많네. 천여명 성격이면 다음에 트럭으로 가져다줄 테니 염병 그만 떨어.
그렇게 말한 벨라디바는 콜라 한 캔을 더 땄다. 용이 지느러미 날개를 파르르 떨며 성질을 부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두하칸을 바라봤다.
-야, 두하칸. 대답 안 하냐?
-…내가 지상에 남은 이유가 왜 궁금하지?
-오지랖.
참으로 원초적인 이유. 두하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벨라디바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무시하려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무시하면 벨라디바가 남는 시간 내내 자신을 괴롭힐 거란 확신이 들었으므로.
그래서 그는 사실대로 말했다.
-의뢰를 받았다.
-의뢰? 데스나이트가 무슨 의뢰? 염병, 뒤지면 의뢰도 끝 아니야?
-죽은 뒤를 상정하고 받은 의뢰다.
-…?
이건 또 뭔 씨발 같은 소리야. 벨라디바가 턱을 벅벅 긁는 사이, 두하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않나? 우리 정도 되는 인물들이 데스나이트가 되고, 우연히 천여명과 만나,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게 되었다는 사실이?
-어… 별로? 우리가 데스나이트 된 건 변경백 전쟁 때문이고, 도와주는 건 그냥 걔가 착해서 그런 거지.
-그래, 바로 그 점이다. 그는 착해. 우리 같은 데스나이트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나설 정도로.
-….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우리 여섯은 그 선의에 반해 그를 기꺼이 돕고 있다. 천여명 또한 우리를 알뜰하게 써먹고 있지. 당장 바라나가 없었다면 그가 얼마나 귀찮은 상황에 빠졌을지 생각해본 적 있나?
-뭔 소리야? 쉽게 말해.
-이 세상에서 보답받는 선의가 얼마나 있지? 내가 경험한 바로는, 별부리미 꽃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보다 낮은 확률이다.
엘릭서에 들어간다는 귀하디귀한 꽃, 별부리미 꽃은 싹을 틔우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고 알려진 꽃이었다.
벨라디바는 그제야 두하칸의 말 뒤에 숨은 의도를 파악했다.
-…천여명과 우리가 만난 게, 누군가의 계획이란 뜻이냐?
-글쎄, 꽃이 계획을 세우고 씨앗을 뿌리던가?
-아, 시발! 뭐라는 거야, 빙빙 말 돌리지 말고 그냥 설명해!
벨라디바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도끼를 꼬나쥔 그 순간, 용이 또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꽃은 계획을 세우고 씨앗을 뿌리지 않아. 그저 수많은 씨앗 중 하나라도 싹을 틔우길 바랄 뿐… 이사기녹의 경전에서 나온 말이지?]-…정답이다. 용이 경전을 읽었을 줄이야.
[정말 심심하면 신부터 찾는 법이거든… 아무튼, 해석해보자면 계획은 아니고, 누군가 뿌려 놓은 게 걸렸다는 소리네. 그렇지?]두하칸이 고개를 끄덕이자, 벨라디바는 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도끼로 머리를 긁었다.
-데스나이트가 씨앗이야? 염병, 무슨 시체 꽃도 아니고.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무식하기는.]-시발 용용아, 내 앞에서 아가리 자랑하다가 모가지 따인 마법사 두개골을 모아서 탑을 세워면 니 키보다 높을 거다. 진짜 뒤지고 싶어?
용은 벨라디바를 향해 혓바닥을 내밀었다. 원초적인 동시에 저열한 도발이었다.
[날 죽이면 천여명이 널 용서할까? 아마 개지랄할 것 같은데.]-팔다리 하나쯤 잘라도 성녀가 고쳐줄 거란 생각은 못 하냐? 이거, 영화만 보더니 현실감각이 떨어졌네.
[야만인.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성녀가 함부로 다니지 않는 거야. 성녀가 무슨 인간 포션이야? 그리고! 람보는 현실에 있던 일을 그대로 옮긴 훌륭한 영화야. 현실감각이 없는 건 뒤졌다 살아난 너겠지.]-이 파충류 새끼가 진짜…!
그렇게 데스나이트와 용이 신경전을 부리는 사이, 다시 평화를 되찾은 두하칸은 고개를 돌렸다.
벨라디바에게 너무 많은 걸 알려줬나 싶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 곧 천여명도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의뢰의 끝이 멀지 않았습니다. 성녀님.’
둥지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보며, 두하칸의 삭막한 눈동자가 빛났다.
***
학부장실 바깥으로 나온 여명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터벅, 터벅. 느릿느릿 걷던 그는 자판기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콜라를 뽑은 뒤, 자판기 옆 의자에 앉아 마법학부 건물 내부를 둘러봤다.
CCTV가 많다는 걸 제외하면, 구조 자체는 다른 아카데미 건물들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곳만의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면, 코를 찌르는 냄새였다. 진한 시약 냄새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오랫동안 씻지 못 한 사람들의 구린내까지.
‘대학원이란 대체…?’
여러모로 청소부 길드가 떠오르는 냄새였다. 물론, 청소부 길드와 달리 이곳의 선배들은 노동자보다는 좀비에 가까웠지만.
여명은 자판기에서 연달아 커피를 뽑아 마시는 선배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러다 피 대신 카페인이 흐르는 거 아니야?
아무튼, 잠시 마법학부를 구경하던 그는 이상한 점을 하나 더 찾아냈다.
지나가는 대학원생들은 그가 누군지 모르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점.
조금 전 가단을 따라왔던 대학원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상하네. 그 여자는 어떻게 날 알아본 거지?’
여명의 머리로 짧은 상념이 스치고, 그가 마시던 콜라가 줄어들 때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헐떡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자판기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처, 천여명? 여, 여기… 허억, 있었… 구나… 헉, 헉… 우, 우연… 허억… 이네.”
“…아도 선배.”
그는 여명이 팔을 잘랐었던 비밀 호위, 아도-길로였다. 대체 얼마나 급하게 뛰어온 건지, 땀이 범벅된 채로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드실래요?”
“허억, 어, 고마, 워….”
여명이 마시던 콜라를 내밀자, 아도-길로는 헐레벌떡 콜라를 마셨다. 그렇게 그의 목젖이 꿈틀거리길 잠시.
캬아-! CF에서나 나올법한 소리와 함께 아도-길로의 호흡이 돌아왔다.
여명은 빈 캔을 받아 습관적으로 쓰레기통에 넣은 뒤 말했다.
“선배, 저번에 드린 이야기 기억하시… 아, 급한 일로 오신 거죠? 죄송합니다. 그 껀은 일 끝나고, 따로 이야기하시죠.”
그러자 아도-길로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급한 일 없어.”
“그럼 왜 그렇게 뛰어 오셨…?”
여명이 되묻기 전에, 아도-길로가 그의 손을 콱 붙잡았다.
“천여명, 너야말로 급한 일 없지? 혹시, 점심시간에 다른 약속 있어?”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슬쩍 마법학부장실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아직도 자신을 부르지 않는 걸 보니, 가단과 바라나의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는 모양.
호아나가 껴 있으니 하루 종일 걸리진 않겠지만… 아마 오후까지는 이어지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아도-길로에게 대답했다.
“…아뇨, 딱히 약속은 없는데요.”
“그러면, 저번에 했던 권유도 이야기할 겸, 우리 남매랑 같이 식사하지 않을래? 내 누이도 아주 관심이 많더라고.”
“누이요? 선배의 누이라면….”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그릇! 1학년 마법과 입학 1순위이자… 내 호위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