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36)
을 위한 세계는 없다-336화(336/817)
머리부터 턱 끝까지 가리는 두꺼운 검은 베일을 뒤집어쓰고, 목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검은 로브에, 검은 장갑까지 껴서 온몸을 가린 여학생.
그녀는 여명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천여명.”
“밥 얻어 먹으러 온 건데, 고마울 거까지야.”
여명은 평소답지 않게 능청을 떨며 자리에 앉았다. 성질 나쁜(?) 천여명치고는 부드러운 첫인사였기에, 아도 또한 안도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세 사람 모두 착석하자마자, 그릇이 물었다.
“식사는 어떤 걸로?”
“뭘 시켜도 비쌀 거 같은데, 아무거나 시켜도 돼.”
“가격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퀼리티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대를 가진 레스토랑이니까.”
합리적인 가격? 아직 청소부 시절 금전 감각이 남아있는 여명은 메뉴판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런치 코스가 수십만 원인데 뭔 놈의 합리적인 가격이야.
다행히 이 점심은 그가 사는 게 아니었다. 여명은 대충 아도-길로가 시킨 코스와 똑같은 걸 시킨 뒤, 식탁에 몸을 기댔다.
“그럼, 날 부른 이유부터 말해볼까? 공짜 밥 사주려는 건 아니었을 거 아냐.”
“…아직 식사 전인데, 일 이야기부터 하시게요?”
“응.”
즉답이었다. 그릇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오라비에게 손짓했다.
곧이어 아도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룸의 바깥으로 나가려 했는데…
여명이 그를 불러 세웠다.
“선배, 어디 가십니까?”
“…으응?”
“제가 드린 제안은 선배한테 한 겁니다. 그릇이 아니라.”
“….”
아도는 슬쩍 그릇의 눈치를 봤으나, 이어진 여명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선배가 필요 없다면야, 이 제안 끝입니다.”
그릇은 아도가 다시 자리에 앉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얼굴을 가린 베일 때문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아마 인상을 찌푸리고 있지 않을까.
그녀는 한숨 비슷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말했다.
“이런 기 싸움은 할 필요 없는데요.”
“기 싸움? 내가? 누구랑? 너랑?”
여명은 식탁 위 컵에 물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네. 다시 말하지만, 내가 한 제안은 아도 선배에게 한 거야. 네가 아니라.”
“….”
“즉, 너는 이 거래에 꼽사리 낀 입장이란 뜻이지. 그러니 거래를 주도할 생각은 하지 마. 불쾌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기 싸움이 맞았다. 인천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을 아가리 파이팅.
묘해진 분위기 속에서 아도 선배가 두 사람을 눈치를 보는 사이, 그릇이 테이블을 두들기며 말했다.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분이시네요.”
“그래? 뭐라고 들었는데?”
“훨씬… 젠틀한 분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네 오라비 팔을 자른 놈이 젠틀은 뭔 놈의 젠틀. 여명은 황당함을 삼키기 위해 물을 마셨다.
“얼굴을 드러낸 사람한테는 젠틀해.”
“….”
장갑 낀 그릇의 손이 꽉 쥐어지려는 찰나, 아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천여명… 너무 그러지 말고, 누이 말 좀 들어줘. 내 뜻이 누이 뜻이니까.”
“선배가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어느 정도 주도권이 넘어온 걸 감지한 여명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릇은 잠시 그런 여명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직설적인 걸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직설적으로 말하죠. 아카데미에 숨겨진 기연을 찾자는 제안, 받아들이겠어요.”
“좋아, 세부 사항은….”
여명이 대답하기 전에, 그릇이 그의 말을 끊었다.
“제 오라비에게 그런 제안을 한 건 2학년 기연을 독점하기 위해서겠죠? 3학년 기연도 모아드릴 테니, 저희 쪽 지분을 늘려주세요.”
“….”
거기까지 다 파악했나? 여명은 짐짓 여유로운 척 숨을 삼켰다.
“싫은데.”
“…왜죠?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굳이 우리가 직접 기연을 모으는 대신, 아도 선배에게 부탁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괜히 눈에 띄기 싫어서?”
“그래, 맞아. 근데 3학년에 저학년이 들락거리는 꼴을 볼 거 같아?”
그릇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라면 괜찮아요. 저는 학년 상관없이 학교를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요.”
“…흐음?”
어떻게? 라고 묻기도 전에, 그릇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베일을 들어 올렸다. 아도 선배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그녀는 꿋꿋이 베일 아래 숨겨진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예상대로였다.
“역시, 아까 본 대학원생이 너였군.”
여명의 말마따나, 그녀는 가단이 데리고 왔던 대학원생이었다.
물론, 아까 전과 달리 떡진 머리도 아니었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뿔테 안경도 없었다.
샴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올려 묶은 상태였고, 신경 써서 화장을 끝낸 눈꼬리는 여우의 그것처럼 치솟아 있었다.
미모 때문에 얼굴을 가렸다는 소문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아름다운 외모.
하지만 그뿐이었다. 고작 외모에 혹하기엔, 세티랑 성녀가 더 이뻤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판단을 끝낸 여명은 컵에 다시 물을 따르며 물었다.
“평소에는 대학원생으로 변신해있는 거야?”
“…대학원생이 아니고 교원인데요.”
“꼬리표가 뭐든 간에, 왜?”
“당신도 이해할 텐데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1학년 수업은 시간 낭비라는 걸. 아, 연애라면 또 모르겠지만.”
“….”
또 기 싸움이야? 여명이 어이가 없어서 웃자, 그녀가 머리에 쓰고 있던 베일을 허공에 띄우며 덧붙였다.
“평소에는 옷에 마법을 걸어서 원격 조종하고 있어요.”
“…용케 안 들켰네.”
“사정을 아는 선생님들도 이해 해주시고, 무엇보다 친구가 없어서요.”
“….”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요. 당신도 똑같잖아요? 천재의 고독이라고 할까… 굳이 수준 떨어지는 것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과 시간을 쏟다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죠.”
여러모로 정신 승리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여명은 슬쩍 아도 선배의 얼굴을 확인해봤다. 역시, 그 또한 누이를 보며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흠흠, 어쨌거나, 제가 아카데미 내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건 이해하셨겠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릇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대로 거래하실까요? 비율은 칠 대 삼으로, 물론, 저희가 칠. 어떠세요?”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그릇이 생각보다 골 때리는 인간이라서? 아니면 그녀가 제안한 비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혹시 비율이 문제라면, 육 대 사까지도 양보할 생각이 있….”
그녀의 말꼬리가 길어지려는 찰나, 여명이 대뜸 질문을 꺼냈다.
“그릇, 너는 왜 이 제안을 받는 거지?”
“…네?”
“내가 학부장과 함께 이상한 짓을 하는 것도 봤을 거고, 아도 선배의 팔을 자른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왜? 무슨 깡으로?”
“….”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던 걸까, 그릇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 이상한가요? 기연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한 번만 더 거짓말하면, 이 거래는 없던 걸로 하지.”
기 싸움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던 걸까, 그가 강하게 나가자 그녀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평소에 얼굴을 가리고 다녀서 그런가, 말투에 비해 표정 관리는 영….’
여명이 그런 무례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그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천여명, 이 세상에 어떤 거대한 흐름이 있다는 것… 알고 있죠?”
“…?”
“운명, 시나리오…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으로 세상이 굴러가고 있죠.”
여기서 또 운명이? 여명은 애써 놀라움을 숨겼다. 그건 고작 학생의 입에서 나올 단어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릇이 일개 학생은 아니지만… 세계수나 드워프 왕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는 건 사실 아닌가.
‘당장 성녀도 운명이 뭔지 몰랐는데.’
여명이 조금 질린 표정을 짓건 말건, 그릇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이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시죠? 간단해요. 전 천재거든요.”
이거, 거짓말이다.
여명은 그의 팔찌를 바라보는 그릇의 눈빛에서, 그리고 묘하게 과장된 말투 속에서 그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굳이 그걸 지금 들춰낼 필요도, 이유도 없었기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여명이 침묵하길 잠시. 그릇은 그걸 무언의 긍정이라고 판단한 듯, 계속 떠들어댔다.
“조금 전에 왜 이 거래를 하고 싶냐고 물었죠? 솔직하게 말할게요.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도태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도태?”
“예, 도태,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도태가 아니면 뭐겠어요?”
“…이해하기 어려운데.”
“당신 곁에 있는 홍세티가 바로 그 증인 아닌가요? 당신과 열애설이 난 뒤에 홍세티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흐름에 올라탄 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죠.”
“….”
“그리고 이번 기연만 해도 그래요. 만약 제가 이런 거래가 있었다는 걸 몰랐다면? 그대로 뒤처졌을 테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도태되는 거죠.”
이쯤 되자, 여명은 그릇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미처 만나보지 못한, 상승욕에 중독된 인간상.
주인공과 얽힌 이유가 뭔가 했더니… 이런 성격이라면 ‘운명’대로 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이 자리에서 여명과 거래한다 해도, 더 큰 이익이 있다면 바로 주인공에게 달려가지 않았을까?
‘원래 같으면 절대 손잡지 않을 인간상이지만….’
여명은 그녀가 내민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퀴니 코완의 의뢰가 걸려 있었으므로.
게다가 운명적이게도, 두메아 가주가 그의 인벤토리에 있지 않은가.
‘이제 슬슬 가주님을 꺼내 볼까.’
여명이 적절한 순간을 가늠하며 그릇의 눈치를 보는 사이, 그릇이 대뜸 말꼬리를 돌렸다.
“아 맞다. 저기, 천여명? 우리 거래에 하나 더 추가해도 될까요?”
“추가한다고? 뭘?”
“당신 취향은 잘 알고 있지만… 전 아직 순결을 유지해야 하는 몸이라서요. 제 몸에는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셨으면 해요.”
“….”
여명은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아도 선배를 확인했다. 선배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말인 건지, 물컵을 쥔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 취향이 뭔데?”
“잡종이요.”
푸흡- 물을 마시던 아도 선배가 물을 뿜었다. 여명은 젖은 식탁과 그릇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잡종? 잡종이 취향이라고?”
“조금 순화해서 혼혈이라고 할까요?”
“….”
“취향을 들키는 게 부끄러운 건 알겠지만, 정확하게 짚고 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홍세티, 성녀, 박네티, 그리고 쇠미리… 당신 옆에 붙어 있는 여자들은 전부 혼혈이잖아요. 그리고 때마침, 저도 혼혈이고. 아 물론, 제 이름은 이상하지 않지만.”
“야! 너 그걸 말하면…!”
보다 못한 아도가 소리 질렀지만, 그릇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빠는 가만히 있어. 괜히 나중에 밝혀졌다가 이상한 짓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
“자, 천여명? 맹세해주실 수 있죠? 이미 여자도 많은데, 굳이 저까지 건드릴 필요 없잖아요?”
여명은 멍하니 그릇의 얼굴을 바라봤다. 성녀나 세티는 그렇더라도, 쇠미리는 또 왜 혼혈이란 거야? 이름이 이상해서?
의미 없는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직후, 그는 반쯤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릇… 아니, 살로메 두메아.”
“어? 제 성은 어떻…”
“맹세할 테니까, 조상님은 네가 알아서 설득해라.”
살로메가 뭔 소리냐고 되묻기 전에, 여명은 그대로 인벤토리를 열어 데스나이트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