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37)
을 위한 세계는 없다-337화(337/817)
***
두메아 가주의 등장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공간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그는 당황은커녕,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여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야 날 불렀군.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혹시, 드디어 데릴사위가 될 생각….
“아뇨, 가주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리고 우선, 마법 주파수부터 맞춰주시겠습니까?”
-주파수?
여명은 두메아 가주에게 아카데미 경보 마법진의 주파수를 알려준 뒤, 그대로 테이블 건너편을 가리켰다.
설렁설렁 주파수를 맞춘 두메아 가주가 그의 손을 따라 테이블 너머를 바라보기 무섭게, 낯선 남녀 한 쌍과 눈을 마주쳤다.
입을 벌린 채 경악하고 있는 붉은 눈의 소녀와 그 소녀를 지키려는 듯 탁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녀 앞에 선 청년.
-이 친구들은?
가주가 묻자, 여명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어…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그 대답을 들은 두메아 가주의 눈썹 또한 꿈틀거렸다. 그는 데스나이트답지 않게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쓸었다.
-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인가? 흠…….
가주의 창백한 눈동자가 청년과 소녀의 면면을 살피길 잠시. 두메아 가주는 뭔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놈, 내 부관을 닮았군. 이봐, 자네 혹시 미들 네임이 길로 아닌가?
“….”
아도-길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살로메를 보호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물론, 그가 상황을 이해하건 말건 두메아 가주는 느긋하게 살로메의 얼굴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에 비해… 저 아가씨는 누군지 영 모르겠군. 여명, 뭐 힌트라도 주시게.
이번에는 여명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못 알아보는 건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메아 가주와 살로메 사이에 닮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혈족 아닌가. 당연히 알아볼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그때, 살로메가 끼어들었다.
“롭 리어 두메아…?”
-오, 내 풀네임을 아는 사람과 드디어 만나는군! 성녀조차 내 이름을 몰라서 가주라고만 부르는 판이었거늘.
“….”
-복장을 보아하니 히라리아의 마법사인 거 같은데… 요즘 우리 가문은 어떤가? 여전히 잘 나가고 있나?
살로메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충격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애써 억누른 채 여명과 데스나이트를 번갈아 보다가…
-어허, 누가 밥상머리에서 장난질하라고 가르쳤나?
살로메가 탁자 아래에서 무언가 하려는 순간, 두메아 가주가 탁자를 톡- 내려쳤다.
곧이어 그의 손을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의 파장이 탁자를 징징 울렸다. 그의 검술에서 볼 수 있었던 느릿하면서도 변칙적인 파장.
그 파장에 노출된 살로메는 모으던 마나가 흩어진 듯 쿨럭, 기침을 토했다.
“살로메!”
놀란 아도가 살로메를 부축하려 했으나, 살로메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나, 난 괜찮아. 가만히 있어… 쿨럭, 이거… 진짜로… 두메아 비전 무술….”
-오호? 그 한 수에서 가문 비전까지 알아봤다? 자네들 혹시, 내 부관들의 자손인가? 도간, 그 녀석의 자식… 아니, 손자 손녀쯤 되나?
이쯤 되자, 여명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주의 귓가에 진실을 속삭였다.
“저 가주님, 사실은….”
-…음?
여명이 뒤늦게 상황 설명을 하려는 찰나, 살로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메아 가문의 51대 가주, 살로메 리어 두메아가 전 가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
살로메는 유려하면서도 과장되게 허리를 굽혔다.
한쪽 손을 가슴에 올린 채, 다른 쪽 손으로 옷자락을 잡고 비스듬히 허리를 굽히는 차원문 너머 예법.
뭐라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자세였다. 설마 지구에서 저런 자세를 볼 줄은 몰랐던 두메아 가주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가주는 여명을 바라봤다.
-여명?
시체나 다름없는 데스나이트의 얼굴 위에는 ‘저게 진짜냐?’ 라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긍정.
두메아 가주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다시 살로메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여명을 보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살로메를 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음… 솔직히 믿기 어렵군. 가주라기엔 너무 어리기도 하지만… 너무 미인이야.
“…예?”
-우리 딸이… 사실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거든. 마법은 기똥찼지만.
농담인가 싶어 가주의 얼굴을 확인해봤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여명은 뭐라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당혹 섞인 침묵이 몰려오기 전에, 살로메가 입을 열어 침묵을 몰아냈다.
“…할머님께서는 외면보다는 내면이 아름다운 분이셨죠. 저도 그분 아름다움을 물려받기 위해 언제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못생긴 건 맞나보네. 여명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두메아 가주가 피식 웃었다.
-…할머니? 엄마가 아니라? 내 손녀가 아니라 증손녀였군.
“예. 전 가주님께서 실종되신 변경백 전쟁은… 까마득한 과거니까요.”
잠시 세월의 무상함을 떠올리던 두메아 가주는, 탁, 탁, 테이블을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한데, 그게 사실이라면 좀 이상한 점이 있구나. 내가 49대고, 내 딸이 50대라면, 왜 자네가 51대지? 자네 부모님들은 뭐 하고?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살로메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여전히 떨리는 손끝을 숨기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죄송하지만, 출가외인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깁니다.”
-출가외인? 내가 말인가?
“예, 어쩌면 출가외인보다 더하지요. 네크로맨서에게 조종당하는 데스나이트라니!”
살로메는 그렇게 말하며 숨겼던 손을 번쩍 들었다. 로브 자락 안에서 튀어나온 그녀의 손에는 반짝이는 루비 덩어리가 박힌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가문의 수치…!”
마나를 머금은 루비가 번쩍이며 빛을 뿜어냈고, 그대로 주변으로 마나를 퍼트리려는 찰나.
두메아 가주가 손을 튕겼다.
“아카데미에서 정체를 드러낸 걸 후회하게… 켁!”
언제 챙긴 건지 모를 숟가락이 가주의 손을 떠나 그대로 살로메의 이마를 후려쳤다.
따-악! 소리와 함께 살로메의 고개가 돌아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고작 그 실력에 경보 마법이라니. 어째, 인사할 때 지팡이를 만지작거린다 했어… 쯧, 딸에게 물려받지 못한 게 외모뿐만은 아닌가 보군.
“….”
설마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던 여명이 눈을 깜빡거리는 가운데, 두메아 가주가 탁자에 놓인 나이프를 들어 아도-길로를 겨누며 말했다.
-자, 젊은 친구. 자네도 우리 가문 사람인가?
“…예. 하지만 성은 받지 못했습니다.”
-방계인가? 뭐, 상관없으니 이번에는 자네가 말해보게. 대체 내가 실종된 이후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
살로메를 조심스레 받아든 아도는 아무 말 없이 여명과 두메아 가주를 번갈아 바라봤다.
떨리는 눈동자, 거친 호흡,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각오.
그렇게 무언가를 각오한 아도-길로가 슬그머니 허리춤으로 손을 옮기는 순간.
두메아 가주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제발. 생각이란 걸 좀 하게. 이 친구가 성녀랑 그렇고 그런 관계인데, 네크로맨서일리 있겠나?
“어… 그건….”
아도가 뒤늦게 멈칫, 하는 사이, 여명이 따져 물었다.
“아니, 어르신. 그렇고 그런 관계는 뭡니까?”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나? 얼레리꼴레리 할 나이는 이미 지났네만.
“….”
-자, 자, 서프라이즈는 이제 끝일세. 부관을 닮은 멍청한 후손이여, 어서 말해보게. 대체 내가 실종된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설명해보게.
두메아 가주가 닦달하자, 아도-길로의 얼굴 위로 갈등이 서렸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듯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기절한 살로메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말씀드리기 전에… 두 분 모두 약속 하나씩 해주십시오.”
-이 상황에? 뭐, 들어는 보지.
“전 가주님께서는 살로메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리고 여명 너는….”
꿀꺽, 침을 삼킨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음에 지구-아샤 문화 교류 동아리 방으로 나와 함께 가다오. 그러면 모든 걸 말하겠다.”
문화 교류 동아리? 여명은 그 동아리가 조지 칸이 성녀를 부른 동아리라는 걸 떠올리며 되물었다.
“이번 일하고 연관 있는 일입니까?”
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연관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좋아요. 약속하겠습니다.”
여명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두메아 가주가 한마디 했다.
-너무 쉽게 약속하는 거 아닌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함부로 약속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자네의 선의를 비난하는 건 아니네만, 물가에 있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조마조마하단 말일세. 그러다가 뒤통수 맞으면 어쩌려고.
“…단순히 선의 때문에 그런 건 아닙니다. 당장 살로메가 엘프에 대해서 모르는 걸 보면… 아도 선배가 교장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누이에게도 말 안 한 거죠. 그렇죠? 선배?”
아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였다. 만약 살로메가 쇠미리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혼혈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했을 리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장난질할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는데… 두메아 가주는 다른 곳에 꽂힌 듯 여명을 바라봤다.
-엘프? 자네 설마, 엘프도 꼬셨나? 성녀와 엘프라니… 다음에는 용 차례인가?
“…예?”
이건 또 뭔 소리야? 여명이 바라보자, 두메아 가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나는 자네가 초대 용사를 따라 하나 했지.
“….”
-나 젊을 때까지만 해도 귀족들의 로망이었거든. 모든 종족의 미인을 안고, 모든 종족에 후손을 남긴… 음, 늙은이 주책이 길었군.
여명이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나서야, 두메아 가주는 헛소리를 멈추고 다시 아도를 바라봤다.
-어쨋든, 나도 증손녀를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그러니 자, 이제 말해보게.
아도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순간, 그의 입 대신 닫혀있던 룸의 문이 벌컥 열렸으므로.
‘아, 음식!’
여명이 뒤늦게 데스나이트를 회수하려 했으나, 들어선 사람을 보자마자 손을 멈췄다.
다행히 음식이 담긴 끌차를 끌고 룸으로 들어온 건, 아는 얼굴이었다.
“아뮤즈 부쉬와 음료 나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 딜라 카탁포이어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물이 쏟아진 탁자와 쓰러진 의자, 기절한 살로메, 그리고 ‘너는 또 왜 그러고 있냐’ 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데스나이트까지.
개판이 된 룸을 쓰윽 훑은 딜라는 아주 조심스레, 여명을 향해 물었다.
“…주방에 식사를 조금 늦춰 달라고 할까요?”
“응, 부탁할게… 아,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예, 주인… 아니, 손님. 그럼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다시 불러주세요.”
여러모로 고급 레스토랑다운(?) 대응이었다. 여명이 한숨 돌리는 사이, 두메아 가주가 아도는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만한 네크로맨서에게 서빙을 시키다니… 이게 지구의 자본주의란 건가?
“….”
정작 그런 사정을 모르는 아도는 복잡한 눈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레스토랑에 첩자를?’ 같은 망상이 담긴 눈.
괜히 설명하기 싫었던 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전은 뒤, 룸의 문을 잠그며 말했다.
“아도 선배, 이제 진짜 설명 부탁드립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도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여명과 두메아 가주, 두 사람 모두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모든 건, 스탈린이 실종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의 권력을 잡은 직후에 시작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