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38)
을 위한 세계는 없다-338화(338/817)
…그는 요즘 시베리아가 왜 이렇게 뜨거운지 의아했다.
『스탈린 실종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인민흑묘군 대장의 마지막 기록.』
***
그레고리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견하고, 제임스 왓슨 박사와 프랜시스 크릭 박사가 DNA 구조를 밝혀낸 이래…
아니, 스파르타에서 나약하게 태어난 아이를 죽이고, 플라톤이 천성적으로 부족한 자를 사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 시절부터.
지구인들은 선천적인 우월함을 꿈꿨다.
근대에 이르러 우생학이란 이름을 부여받은 이 음습한 욕망은 전근대 제국주의와 융합하며 꽃을 피웠다.
원주민을 학살한 미국, 식민지를 착취한 유럽, 그리고… 나치까지.
과학의 가면을 쓴 야만적인 우생학의 이름 아래, 수백, 수천만의 인간이 피를 흘렸다.
하지만 나치의 패망으로 우생학의 무익함이 증명됐음에도, 지구인들은 우생학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차원문의 발견이 우생학 신봉자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까닭이었다.
마나의 여부로 귀족과 노예가 엄격하게 분리되는 사회라니!
혈통으로 물려받는 마나의 재능이야말로 우생학에 대한 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치에게 무의식적으로 동조하던 이들, 혹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적대 집단보다 우월하게 생각하고자 하는 이들은 초인을 인류와 다른 종으로 분류했다.
마나의 힘을 통해 인류에서 한 단계 진화한, 진정으로 우월한 생명체.
현대의 과학자들이 들으면 씁쓸한 비웃음을 흘릴 말이었으나, 당시 미국과 유럽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이런 관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아샤의 지배 계층인 제국 황제부터가 백인과 유사하며, 농노들은 흑인이나 아시아인과 비슷하다는 게 그들의 주된 논리였다.
직접 차원문 너머를 여행한 퀴니 코완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생학의 신봉자들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다른 집단을 혐오할 수 있는 명분뿐.
그리고 이런 관점은 소련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치에게 ‘저열한’ 민족 취급을 받던 러시아와 동유럽의 지배자들은 누구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차원문 너머의 ‘우월한’ 핏줄들을 구매했다.
개중에는 강제로 초인을 납치하는 자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광기와 혐오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탈린 때문에.
고작 조지아 촌놈에 불과했던 그가 ‘우월한’ 초인들의 왕국을 무너트리고, 제국을 쥐락펴락하며, 드워프를 겨자 가스 아래 파묻는 모습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우생학의 반박이나 다름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마나 좀 쓸 줄 아는 게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용이 인류를 지배하게 하자는 멍청이들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제12차 인민 회의에서 스탈린이 내뱉은 연설은 우생학의 마침표를 찍었다.
물론, 뒤로는 초인 육성에 목을 매는 소련의 행태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스탈린의 대답은 간단했다.
‘금의 아름다움과 철의 단단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들은 언제나 들고 있던 철을 금과 교환한다. 그리고 철을 무기로 만든 자들에게 살해 당하고, 가지고 있던 금마저 빼앗긴다.’
소련의 초인 육성은 우생학과 상관없는, 냉전 경쟁의 일환이라는 비유.
그 비유가 진심이건 그저 그럴싸한 변명이건 간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누가 감히 그 말에 반박하겠는가? 그건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는 자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공산주의 진영은 스탈린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진짜로 우생학을 배격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
“하지만 스탈린이 실종되고, 서기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 싸움이 격화되자…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아도-길로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제발 요약 좀 해달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의 침착함이었으나, 여명은 애써 말을 삼켰다.
두메아 가주가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 까닭이었다.
여러모로 시간이 아까웠지만, 수십 년을 시체로 보낸 어르신의 즐거움을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
여명이 드워프 왕에게 까칠했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며 물을 마시는 사이, 두메아 가주가 물었다.
-진실? 무슨 진실 말인가?
“…소련은 이미 남들 모르게 인체실험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일명, 철혈의 아이들 계획.”
-철혈의 아이들….
철혈의 독재자, 스탈린에게서 따온 게 분명한 이름.
두메아 가주가 집중하는 사이, 아도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저,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우생학적으로 완벽한 스탈린의 후계자를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게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스탈린의 후계자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의 자식이나,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어쩌고?
“그게… 모두 부족하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스탈린만큼이나 뛰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여명은 조용히 동의했다.
독재자는 필연적으로 대중에게 자신을 우상화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우상화 대부분은 현실과의 간극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법이지만… 스탈린은 달랐다.
그는 우상화에 걸맞은 실력을 가진 독재자였다. 그것도 세상의 절반을 주무른 독재자.
3선 이상 대통령에 재임한 미국의 루스벨트나 닉슨만이 그에게 비견될만했고, 공산권의 인민들은 그런 그를 열렬히 섬겼다.
다른 누군가와 그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으로 여겨질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여명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질 때쯤, 아도 선배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처음 철혈의 아이들에 대한 자료를 공개한 건 고르바초프였습니다. 일반적인 당 위원들의 지지는 받았지만, 특수군이나 KGB 같은 무력 세력이 없던 그가 던진 미끼였습니다.”
-미끼? 누구에게 던진 미끼인가.
“미국, 마탑, 유럽, 호주…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외부 세력들이요.”
다큐멘터리에서는 안 나오는 역사의 비밀. 그제야 조금 관심이 생긴 여명은 아도 선배에게 물컵 건네줬다.
아도는 물로 입을 축인 뒤 다시 말했다.
“철혈의 아이들과 그 데이터를 대가로 외세를 몰고 온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서기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여명이 끼어들었다.
“…혹시, 베리야가 실종된 이유가 외부에서 끌어들인 세력들 때문인 겁니까?”
“그, 그건 나도 몰라. 내가 아는 건 마탑이 모든 전투마법사를 끌어모아 시베리아로 보냈고, 그중에서 절반만 돌아왔다… 그게 전부야.”
“….”
군대에서 부대의 절반이 죽으면 사실상 부대 해체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그 부대가 귀하디귀한 전투마법사들이라면야.
마탑이 그 정도의 군사력을 갈아 넣었다니, 철혈의 아이들이 그만큼 가치가 있었다는 뜻인가?
-…철혈의 아이들에 관한 정보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런 손해를?
아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숙여 품에 안긴 살로메를 내려다봤다.
마탑의 미래 그 자체라 불리는 천재.
강대한 초인 한 명이 핵무기와 비견되는 시대였다. 저런 천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정보라면… 그래, 핵무기를 받아낸 것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한국의 정부에서 만든 희생양 자매의 선례를 떠올리자면… 핵무기와는 비교도 못 할 잔혹한 실험이 벌어졌겠지.
-무슨 실험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
여명과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걸까, 두메아 가주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도는 쓸쓸히 고개를 끄덕인 뒤, 설명을 시작했다.
비밀을 지켜달라거나,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은 없었다. 그저 담담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마탑이 강제로 재능있는 아이들을 납치하고, 실험실로 처넣은 이야기를.
우월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뽑고, 얼마나 많은 배를 갈랐으며, 얼마나 많은 죽음이 태어났는지를.
지구에 빼앗긴 권력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 아래, 소위 명가라 불리는 자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어떻게 가르고, 찢고, 조작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두메아 가주가 물었다.
-내 딸이 그 미친 짓거리에 손녀를 바친 것이냐?
아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할머님께서는… 도망치려 하셨습니다.”
-도망치지 못했군. 손녀는?
“가문의 지하 무덤에 계십니다.”
차마 죽었다고 말할 수 없었던 걸까, 아도는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두메아 가주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하, 하… 우리 가문이, 히라리아가 이렇게나 몰락했을 줄이야.
“….”
-…마탑 수뇌부 중 몇 명이 이 미친 짓거리와 연관되어 있나?
두메아 가주는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뭔가를 기대하는 듯했지만, 이어진 대답이 그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적어도 주요 학파의 지도부는 전부….”
-전부? 전부라고? 증거는 있나?
“…대마법사님들께서 제게 보낸 명령서가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대답에 두메아 가주의 미간이 왈칵 찌그러졌다.
-마법사로서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렸단 말인가! 돌아가신 마하간 탑주님에게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탄한 두메아 가주는 다시 고개를 내려 아도에게 말했다.
-내 증손녀… 살로메, 그 아이가 우리 가문의 혈통을 이은 건 맞느냐?
여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그런 질문을?
하지만 아도는 당연한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손녀분의 배에서 나온 아이가 맞습니다.”
-그럼 너는?
“저는… 손녀분의 난자에서 태어난 건 맞습니다만…”
아도는 말끝을 흐렸다. 손녀의 난자를 다른 여자의 배에 이식해서 낳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다는 듯이.
살로메와는 이복 남매도 아니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아빠도 다르고, 낳은 부모도 다르지만 그저 난자만 같을 뿐이라니.
얼핏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 말이었기에, 여명은 두메아 가주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불쾌함에 아도를 해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메아 가주는 분노하지도, 혐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동정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생물학적 아버지가 길로… 내 부관의 핏줄이더냐?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키워주신 부모는?
“델리아 리어 두메아… 가주님의 따님, 살로메의 할머님께서 저를 거둬주셨습니다.”
“….”
딸의 이름이 나온 순간, 두메아 가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잔잔한 호수처럼 작은 흔들림이었으나, 그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은 가볍지 않았다.
-내 딸이 너를 손자로 여기느냐?
“…과분하게도, 그렇게 여겨주십니다.”
-그럼 됐다.
뭐가 됐다는 걸까. 아도는 그렇게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미 몇 번 두메아 가주와 이야기를 나눠온 여명은 알 수 있었다.
너도 두메아다.
가주께서는 그 말을 하고 싶었다는걸.
하지만 가족이란 오묘한 법이며, 남들과 다른 사정을 가진 가족의 관계는 더욱 오묘한 법이었다.
여명은 대화에 끼어드는 대신, 두 사람의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게 내버려 뒀다.
그리고 그 침묵에 눌린 모두의 어깨가 무거워질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 사정은 잘 들었습니다… 살로메와 거래에 대해서 조금 더 진지하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여명은 이마에 혹이 난 살로메의 얼굴을 힐끗 바라본 뒤, 다시 아도를 보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약속대로 문화 교류 동아리도 찾아가고요.”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는 아도-길로의 뒤통수로, 창문을 뚫고 강렬한 햇빛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빛은 그를 밝히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긴 살로메 위로 진하디진한 그림자를 드리웠을 뿐.
무언가 불길한 징조 같아 보여서 그랬을까,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염동력을 사용해 룸의 곳곳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방 전체에 햇빛이 가득 차오르며 그림자를 밀어냈는데… 여명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점이 하나 있었다.
점심의 태양은 예상보다도 더욱 밝다는 점.
기절해 있던 살로메가 눈을 찡그리며 깨어나는 건 물론이고, 데스나이트조차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으, 자네 갑자기 뭐 하는 겐가?
두메아 가주가 한 소리 하기 무섭게, 여명이 변명을 내뱉었다.
“그게, 햇빛이 좀 필요한 거 같아서….”
그의 말꼬리가 흐려지는 찰나, 살로메가 벌떡 일어났다.
“이, 이 사악한 네크로맨서!”
햇빛 때문에 눈을 찡그린 상태에서도 지팡이를 들어 올린 모습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물론, 이미 한 번 실패한 일을 다시 시도한다는 점에서 부족함이 보이긴 했지만.
-살로메, 헛짓거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이름으로 부르지 마! 역겨운 데스나이트 주제에!”
-거, 입담하고는.
두메아 가주가 뭐라고 말하건, 살로메는 지팡이에 마나를 가득 모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경보 마법을 완성하려는 찰나.
여명이 조금 전에 펼친 염동력의 방향을 바꿔 그녀의 지팡이를 빼앗았다.
“너, 너…! 감히!”
마나가 흩어지는 건 물론이고, 지팡이까지 빼앗긴 살로메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여명은 허공에 뜬 지팡이를 회수하며 대답했다.
“분위기 망치지 말고, 대화 좀 하자.”
“엿이나 처먹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 같은 네크로맨서에게 굴하지 않아…!”
그녀가 악에 받쳐 소리친 순간, 갑자기 아도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누이, 날 믿고 잠시만 말을 들어줘.”
“오, 오빠?”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하지만 전부 오해야. 내가 너한테 미처 말하지 못한 사실 때문에 생긴 오해니까… 부탁해. 말 좀 들어줘.”
살로메는 뭐라 말도 못 하고 여명과 아도, 그리고 두메아 가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잠시 후, 그녀는 뭔가를 각오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이야기하겠어요.”
두메아 가주가 피식 웃으며 주책을 떨었다.
-이거 보게, 남매가 쌍으로 비슷한 소리를 하는군! 천여명 군, 자네가 봐도 놀랍지 않나? 우리 가문이 이렇게 가족애가 뛰어나다니까?
여명은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서로를 챙기는 남매의 모습은 청소부 형들을 떠올리게 했으므로.
하지만 그의 미소도, 경계 어린 살로메의 눈빛도, 그리고 아도의 한숨도 오래가지 못했다.
곧 이어진 두메아 가주의 주책이 모든 걸 박살 내버렸으니까.
-그러니 어떤가? 우리 증손녀, 세 번째 아내 정도면 차고 넘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