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42)
을 위한 세계는 없다-342화(34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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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들도 빈손인 거 같고… 이거 참, 당황스럽네.”
천여명은 뒤편에 서 있는 호위들을 다시 한번 싹 훑으며 웃었다.
“의원님. 절 만나러 아카데미에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구겨진 미간과 목소리에서 실망이 뚝뚝 묻어나오는 게, 어지간히도 짜증이 난 모양.
“….”
예상하지 못한 태도를 마주한 홍용완은 습관적으로 미소 지었다. 입매가 뒤틀리는 걸 감추기 위한 미소.
“하하, 천여명,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공적인 이유로 아카데미에….”
홍용완이 능숙하게 말을 돌리려 했지만, 천여명은 대뜸 그의 말을 끊었다.
“제가 전윤성의 팔을 잘랐습니다.”
“….”
“한국인들과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좋은 선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거기까지 말한 여명은 쯧- 혀를 찼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까마귀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참, 스승님도 계신 자리에서 쪽팔리게….”
또한 홍용완은 반사적으로 여명의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까마귀를 곁눈질했다.
코르부스. 성녀의 호위를 자처하는 저 까마귀 수인은 뒷세계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자였다.
황금 씨족을 끝장낸 여자라고 했던가?
‘…하지만 스승이라니.’
물론, 저 수인이 천여명의 특별 수업 스승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당장 세티가 천여명을 따라 양치기가 아닌 저 수인의 수업을 듣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저 까마귀는 성녀만 신경 쓰고 나머지 학생에게는 수업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천여명과 친했던 걸까?
아니면 수인들이 으레 그렇듯 뭔가 주워 먹을 걸 노리고 끼어든 걸까.
어느 쪽이건 간에, 천여명이 그녀 앞에서 실망하는 모습을 어필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했다.
‘이거… 혹시?’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목덜미 타고 올라오던 그때, 여명이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의원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적인 업무 잘하시길 바랍니다.”
“자, 잠깐, 천여명!”
홍용완은 재빨리 여명을 붙잡았다. 정치인으로서의 감각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탓이었다. 이걸 놓치면 좆 된다.
“뭡니까?”
“아니, 그게….”
뭐라고 해야 하지? 홍용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임기응변과 아가리로 십수 년간 정계에서 버텨온 짬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그는 순식간에 그럴싸한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사실은 말이지… 자네에게 줄 깜짝 선물이 있네.”
“그래요? 어디에요? 제 눈에는 안 보입니다만.”
“…물론, 여기에는 없지. 사절단이 직접 가져올 예정이거든.”
“흐음?”
먹혔나? 시간을 번 홍용완은 자기 자신도 속을 정도로 그럴싸한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까놓고 말해서, 자네가 우리 대한의 미래 아닌가.”
은근한 목소리, 미소 띤 얼굴. 홍용완은 지역구 주민들에게 거짓말하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자네 말마따나 전윤성의 팔을 자른 것도 그렇고, 만박불통에게서 성녀님을 지켜낸 것도 그렇고… 고작 며칠 만에 구할 수 있는 선물로는 모자라지. 안 그런가? 그래서 조금 시간이 걸리는 걸세.”
여명은 흥미가 돋는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까마귀가 불쾌하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딱-! 부리를 다물었다.
역시 저 까마귀 년과 뭔가 있군. 홍용완이 그렇게 확신하는 사이 여명이 말했다.
“아주 대단한 걸 준비하나 봅니다?”
“하하, 물론이지. 기대하게. 이 이상은 밝힐 수 없지만, 내 장담컨대… 자네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일 테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거짓말이었지만, 홍용완의 얼굴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사절단의 의원들과 정부에게 뭘 어떻게 뜯어내야 할지, 빌어먹을 딸년은 또 어떻게 혼을 내야 할지 고민이 가득했다.
…뭐, 그건 그거고.
지금은 눈앞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여명에게 자신을 어필할 때였다.
“아, 그리고 내가 말했다는 건 우리만의 비밀로 하지. 사절단의 다른 의원들이 알면 화를 낼 테니 말일세.”
마지막으로 홍용완이 윙크하자 여명이 피식 웃었다. 다행이었다. 어이없는 웃음이건, 비웃음이건 간에 웃음은 좋은 징조였으니까.
“듣던 것보다 재밌으신 분이었군요.”
“듣던 거보다? 하하, 우리 딸이 내 이야기를 했나?”
오, 드디어 딸년을 써먹을 때인가?
홍용완이 반색했으나 여명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예, 종종… 의원님의 재력을 어필했죠.”
“…재력?”
천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더니, 은근슬쩍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의원님. 평소에 저에게 어떤 제안이 들어오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나는….”
“미국에서 그럽디다. 자국으로 귀화하면 빅 쓰리 중 하나가 직접 가르침을 내려주고, 미래의 빅 쓰리 자리를 약속하겠다고.”
“….”
“아, 그리고 백지 수표도 한 장 주던데요. 거, 전용섭이 왜 배신했는지 알겠더군요.”
“허허, 전용섭이라니, 그 이름은….”
“아,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죠? 제가 성녀를 구했다고. 그거 관련해서 성국에서도 비슷한 제안을 받았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여명은 까마귀를 바라봤다.
설마 이렇게까지 대놓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던 건지, 까마귀는 조금 당혹스러운 듯 여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 반응을 본 홍용완은 확신했다. 역시, 저 빌어먹을 까마귀는 다른 세력에서 붙여놓은 끄나풀이었다고.
설마 그 세력이 성국일 줄은 몰랐지만… 그는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까놓고 말해서, 한국에서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깁니다.”
“….”
홍용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천여명은 딸년에게 푹 빠져서 조종당하던 게 아니었나?
아니, 양치기들의 보고에 의심할 부분이 없었다.
천여명이 그의 딸에게 껌뻑 죽는 건 분명했다. 세티가 수업을 빠지라면 빠지고, 심지어 양치기에게 사생활이 낱낱이 보고될 정도였으니까.
그렇다면 이 태도는…
‘블러핑, 혹은 몸값 어필.’
진심으로 미국과 성도에게 붙을 거라면 그런 제안을 받았다는 걸 어필할 필요가 없었다.
까마귀 앞에서 저울질하는 걸 보여줄 필요는 더더욱 없었고.
즉, 이건 한국에게 어필해 최대한 자신의 몸값을 올리겠다는 뜻.
‘같잖은 용병 새끼가….’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이라던가?
되새겨보니 천여명이 그를 도발한 방법부터 몸값을 후려치는 방법까지 전부 용병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티의 치맛자락에 휘말린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용병이 아니었다. 다 잡은 물고기라면 또 모를까.
‘고작 사랑 따위에 눈이 멀어서는… 어리군, 어려. 어쩌다 하늘은 이런 놈에게 그런 재능을 내렸는지.’
거기까지 생각한 홍용완은 곧바로 딸의 이름을 팔았다.
“물론,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이네. 하지만 만에 하나 자네가 만족할만한 선물이 아니라면… 아쉽군, 딸아이가 슬퍼하겠어.”
“…뭐요?”
“세티 말일세, 자네가 미국인이 된다면 헤어질 확률이 높지 않겠나. 이미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은 대대로 애국자 집안이거든.”
세티의 이름이 나온 순간, 천여명의 기세가 변했다. 일반인인 홍용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적의.
“아 씨발, 진짜 참아주려니까….”
뭐지? 그냥 가볍게 떠보려던 홍용완이 뭔가 잘못 흘러간다는 걸 느끼는 찰나, 코르부스가 질색하며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부리를 파르르 떨더니…
“으… 보, 본인은 이만 가봐야겠소!”
그대로 카페 바깥으로 도망치듯 날아가는 게 아닌가.
까마귀 날갯짓 소리가 멀어지는 가운데, 천여명이 말했다.
“의원님.”
“…으, 응?”
“전윤성 말입니다. 사실은 적당히 얼굴이나 패줄 생각이었습니다. 근데 어쩌다 팔까지 잘랐는지 아십니까? ”
“그, 글쎄?”
“조금 친해지니까, 그놈이 주제도 모르고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세티를 멀리해라.”
“….”
“의원님. 전 말입니다. 제 소유물을 가지고 남이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정말, 진짜 존나게 싫습니다.”
이 미친 새끼가 갑자기 뭐라는 거야? 홍용완은 차갑게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를 보며 침을 삼켰다.
“그리고 하나 더, 만주에서 제가 왜 용을 풀어줬는지 아십니까?”
“…모, 모르겠군. 언론에서는 자네의 정의로운 심성 때문이라던데.”
“정의로운 심성이요? 하! 사실은 전윤성과 똑같은 이유입니다. 한국군이 멋대로 용을 나누자고 해서 풀어준 겁니다.”
“….”
“숟가락만 올린 주제에 비늘을 내놔라, 뼈를 내놔라, 피는 반으로 나눠야 한다… 씨발, 용을 잡은 건 난데, 왜 군이 지랄인지. 다 좆 같아서 용 보고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천여명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후우- 숨소리를 따라 홍용완 의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의원님. 세티는 제 껍니다. 그러니까 씨발, 딸 장사할 생각일랑 하지 마십쇼. 장인어른 대접을 받고 싶으면 그만한 대가를 내놓은 뒤에 하시고… 아시겠어요?”
“….”
홍용완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여명이 눈치챌까 이를 가는 것도 꾹 참은 상태였다.
알려진 것보다 훨씬 미친 새끼란 생각에 손이 덜덜 떨렸지만, 그건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딸아이의 머릿속에 금제가 있는 이상, 천여명은 다 잡은 물고기였으니까.
그랬을 텐데…
천여명이 갑자기 뒤편에 서 있는 그의 호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하들은 의원님이랑 생각이 다른 것 같네요.”
“생각이 다르다고? 그게 무슨…”
홍용완이 그의 손을 따라가자 호위 중 가장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분노와 혐오로 가득한 눈으로 천여명을 노려보는 얼굴이.
저 새끼는 또 왜 저래? 홍용완이 당황하건 말건, 호위가 천여명을 향해 걸어왔다.
천여명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온 호위를 올려다봤다.
바짝 깎은 머리에 절도 있는 자세… 아마 군 출신이리라.
“본 적 있는 얼굴인데. 누군지 모르겠네.”
“네가 만주에서 용을 풀어주던 순간,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 그래? 군인이셨군. 근데 어쩌라고?”
“정말로 그딴 이유로 용을 풀어준 거냐?”
“여태껏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정말 그런 이유로 풀어준 거 맞아.”
호위는 꾸욱- 피부가 빨개질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 용의 비늘과 뼈가 있었다면 조국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됐을지, 생각해본 적 없나?”
“그럼 돈 주고 사 갔어야지. 누가 삥 뜯으래?”
“….”
“할 말 없으니까 표정 바뀌는 것 보게, 왜, 한판 붙을까?”
그러자 호위는 기다렸다는 듯 웃옷을 벗었다. 넥타이마저 풀어 헤치는 모습이 여간 험악한 게 아니었다.
엿 됐군. 홍용완은 저 멀리서 카메라를 들이미는 기자들을 보며 두 사람을 말렸다.
“어허, 자네 왜 이러나. 임무를 생각해야지! 그리고 천여명. 자네도 정학 중인데, 괜히 이런 일에 휘말리지 말고….”
그때, 천여명이 말을 끊었다.
“정학 중 대련은 금지지만, 어른의 가르침은 또 다른 이야기죠.”
“….”
“어때요. 애국지사 나리, 어디 한 번 가르침을 주시렵니까?”
웃음과 함께 이어진 이죽거림. 애초부터 호위가 아니었던 남자는 그 이상 참지 않았다.
“그래, 따라와라 이 개새끼야. 네가 진짜로 우리나라의 미래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