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47)
을 위한 세계는 없다-347화(347/817)
***
어두운 해저 터널.
투명 망토가 들어있던 돌 상자 앞에 도착한 성녀가 LED 손전등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어…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건가? 여기 철문, 닫혀있지 않았어?”
그녀의 말마따나, 상자 뒤편에 있던 거대한 철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제대로 기억하는 거 맞아. 우리가 투명 망토를 챙길 때는 분명히 닫혀있었어.”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철문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철문 주변에 누군가 만진 흔적은커녕, 먼지가 움직인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열려있었던 것처럼.
처음 온 네티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세티는 혹시 모를 함정이 있나 마나를 넓게 펼쳤고 쇠미리는…
“이 문 너머에 뭔가가… 잔뜩 있어요.”
철문 너머의 어둠을 보며 지팡이를 꽈악- 쥐었다. 그 모습을 본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마나를 따라 자신의 마나를 펼쳤다.
세계수의 그것과 유사한 여명의 마나는 손쉽게 쇠미리의 마나를 따라갔다. 그렇게 두 개의 마나가 얽히며 철문 너머의 어둠을 더듬길 잠시.
“…모두 무기 들어.”
여명이 대뜸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며 말했다. 쇠미리와 달리 그는 저 철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꿰뚫어 본 듯한 말투.
“뭔데? 뭐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성녀는 즉시 일행들의 몸과 무기에 축복을 걸기 시작했다. 여명이 저렇게 긴장하면 꼭 무슨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으니까.
번쩍-
축복의 빛이 손전등의 불빛과 얽히며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여명은 앞으로 나서며 세티에게 눈짓했다.
‘후위를 맡아달라’는 눈빛. 세티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일행의 맨 뒤에 섰다.
초인이 앞뒤에 서서 마법사와 사제를 보호하는 현대적이고 정석적인 포지션.
철컥- 여명이 건네준 소총을 받은 네티가 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와 동시에, 여명은 열린 문을 넘어 해저터널의 다음 칸으로 전진했다.
타닥, 타닥- 긴장감 가득한 걸음과 함께 함께 일행 모두가 문을 넘어온 걸 확인한 여명은 머리 높이로 손전등을 들어 터널의 천장을 비췄다.
정확히는, 천장에 박혀있는 마도구를 비췄다.
“흡.”
여명이 비춘 천장을 보자마자 네티는 질색했다.
천장에는 기다란 홈을 따라 띄엄띄엄 쇠구슬이 박혀있었는데, 저건…
“…괴수를 소환했던 그 마도구맞죠? 시카고에서 KGB가 뿌렸던 거.”
속칭, 베리야의 구슬.
시카고 비밀 경매장에서 튀어나온 무수한 괴수들을 떠올린 세티가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여명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똑같은 마도구는 아니야.”
“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마도구인 건 확실하다는 뜻이죠?”
“…응.”
네티는 조심스레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시카고에서 봤던 베리야의 구슬이 몇 개였더라?
만약 천장에 박혀있는 저 구슬 하나하나가 KGB가 뿌린 물건과 동급이라면… 이 해저터널은 삽시간에 괴수들로 바글거리게 되리라.
‘용의 둥지 뒤에 숨겨진 통로와 괴수들… 무슨 게임 속 던전도 아니고.’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장소를 만든 걸까?
네티의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맨 뒤에 있던 세티가 뭔가를 발견하고 일행을 부른 탓이었다.
“얘들아, 잠깐 여기… 이 철문 좀 비춰봐.”
그러자 일행들은 기다렸다는 듯 각자 손전등을 들어 철문을 확인했다.
일행이 통과한 문의 뒤편에는 마법진이 새겨진 톱니바퀴와 구불구불한 금속 파이프로 만들어진 복잡한 기계장치가 달려 있었는데, 기계장치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파이프들은 전부 천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형부.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문이 열리면 저 기계장치가 반응해서 천장의 마도구를 작동시키는 구조 같은데… 맞죠?”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던 성녀가 기계장치에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누군가 문을 열고 여기에 들어오는 순간, 괴수가 풀려나는 구조라니. 퀴니 코완도 악질이네.”
“….”
“뭐, 아무튼… 그래서 문이 왜 열려있던 걸까? 너무 낡아서 오류가 생긴 건가?”
여명은 천장까지 이어지는 파이프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류는 아닐 거야.”
무수한 파이프 중 대부분은 괴수를 소환하는 구슬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딱 하나. 문 바깥으로 이어지는 파이프가 있었다.
해저 터널 바깥, 용의 둥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파이프.
“아마 저 파이프 때문인 것 같아.”
여명은 손전등으로 그 파이프를 비추며 말했다.
“방법은 몰라도 용이 살아있는 걸 확인하는 파이프 같은데… 우리가 상자를 열 때 작동한 거 아닐까?”
성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말을 해석했다.
“어… 그러면 네가 용을 살린 채로 해저 터널을 뚫어서 이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 소리야?”
“아마도.”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떠올릴 수 없었다.
“오, 그러면 이것도 초대 학장의 기연이네? 아니, 분명 기연일 거야. 역시 사람은 착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니까.”
그렇게 말한 성녀는 긴장이 풀린 듯 총을 빙빙 돌렸다. 여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죽여달라는 용을 두들겨 패고 멋대로 문을 연 게 착한 일이었나?
…뭐, 아무튼. 여명을 비롯한 세 사람이 동시에 긴장을 푸는 걸 본 네티가 눈을 깜빡였다.
“용을 살려요? 착한 일? 그게 다 뭔 소리예요?”
그러자 성녀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그동안에 있던 일을 두다다 설명했다.
온갖 미사여구가 붙긴 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여명이 용을 안 죽이고 해저 터널을 열어서, 초대 학장과 만나 기연을 받았다.’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나 네티는 의외로 덤덤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형부가 하는 일이 다 그렇다나 뭐라나.
그 기묘한 신뢰에 여명이 고개를 내저을 때쯤. 쇠미리와 함께 주변을 확인하던 세티가 말했다.
“…어쨌든, 이제 저 구슬들은 어쩔까?”
여명은 구슬을 향해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지. 기연도 기연이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위험하잖아?”
“….”
세티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입을 연 건 성녀였다.
“핵무기에 데스나이트… 이제는 괴수를 불러내는 마도구? 이야, 교장이 알면 기절하겠다.”
그러려나? 여명은 피곤에 찌든 교장을 떠올리며 손을 쥐었다.
***
그로부터 대략 삼십 분 뒤, 여명 일행은 해저 터널의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반부와 달리 철문 너머의 해저 터널은 미로에 가까웠다.
다섯 명이 포지션을 잡은 채로도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동시에 구불구불한 복도, 드문드문 만나는 갈림길까지.
게다가 대체 얼마나 깊이 내려온 건지 몰라도 GPS까지 먹통이었다.
물론,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한 일행에게 별다른 장애는 되지 못했다.
세티와 네티는 왔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야광 펜으로 벽에 표시를 남겼고.
쇠미리는 세계수의 마나를 펼쳐 한발 앞서 길을 탐지했으며.
성녀는…
“사탕 먹을 사람? 성도에서만 파는 다섯 과일 맛 사탕인데.”
일행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쉴 새 없이 입을 조잘거렸다. 간식은 덤이었고.
“성녀, 너 아까 육포 나눠 주지 않았어? 설마 가방에 먹을 것만 챙겨온 거 아니지?”
서른두 번째 괴수의 구슬을 회수한 여명이 물었다. 성녀는 까득- 사탕을 씹으며 대답했다.
“아니? 물약이랑 붕대, 그리고 마실 것도 챙겨왔어. 아, 맞다. 혹시 목마른 사람?”
당당한 태도에 여명은 뭐라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실탄이나 총기는 그의 인벤토리에 들어있으니 저런 걸 챙겨오는 게 맞긴 하지만…
‘뭔가 묘하게 놀러 온 분위기란 말이야.’
물론 아무 일도 생기지 않고 놀러 나온 것처럼 편하게 기연만 챙기고 나가는 게 베스트이긴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한 걸까. 그동안 그가 쉽게 가려고 할 때마다 뭔가 벌어져서 그런가?
여명은 괜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천장에 있는 괴수의 구슬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거의 50개에 가까운 구슬을 회수할 때쯤.
해저 터널의 통로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매끈했던 통로가 점점 울퉁불퉁한 곳으로 변해갔다.
인공적인 터널에서 자연 동굴로 연결되는 듯한 모습.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천장에서 길쭉한 종유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두 번째 공간의 끝에 도달한 걸까?
기다란 석주를 마주한 일행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멈춰서 여명을 바라봤다.
“여기서부터는 뭔가 달라지는 것 같죠? 터널을 만들다가 자연 동굴과 만난 걸까요?”
네티의 말에 여명이 대답했다.
“글쎄, 일부러 이렇게 꾸며둔 걸지도 모르지.”
“예? 하지만 저 종유석은 아무리 봐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냄새 맡아봐.”
여명이 말을 끊자마자 네티는 코를 킁킁거렸다.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한 그녀와 달리 쇠미리는 곧바로 눈을 가늘게 떴다.
“바닷물 냄새가 안 나네. 이거… 전부 가짜야.”
“맞아. 바닷속에서 종유석이 만들어질 정도로 깊은 해저 동굴이라면 비린내가 나야 하는데… 콘크리트 터널보다도 냄새가 없어.”
***
그러게요?
여명의 설명을 들은 네티는 괜스레 뻘쭘해져서 옆에 있던 커다란 석순를 발로 찼다. 툭.
그런데 그 직후, 석순이 드르르륵- 소리를 내며 떨리는 게 아닌가?
“…어?”
네티는 갑자기 뭔가 싶어 일행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지만 당황하기는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갑자기?”
여명이 일행들을 보호하려는 듯 앞으로 나서는 가운데 부르르 떨리던 석주가 옆으로 밀려났다.
뭔가 깨지거나 부서지는 징조인가? 아니, 아니었다.
석주가 지나간 자리에서 드러난 건 동굴과 다른 또 다른 길이었다.
“숨겨진 길…? 네티, 어떻게 찾은 거야?”
“…저, 저도 모르겠는데요.”
“우연? 이야, 역시 네티랑 같이 다니니 운이 좋네.”
오랜만에 듣는 형부의 칭찬에 네티는 놀란 가슴도 잊고 뒤통수를 긁었다. 헤헤, 이런 행운이.
형부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비밀스러운 길을 살피며 말했다.
“일단 이쪽으로 가볼까?”
언니는 반대했다.
“아니, 예정에 없던 길이잖아.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어. 일단 동굴을 다 탐사한 뒤에 돌아오면서…”
“아니. 괜찮아. 네티가 찾은 길이잖아.”
형부는 뭔가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언니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대로 석순 뒤로 향했다.
자신이 찾은 비밀 길로 가는 탓일까? 길을 확인하며 조심스레 나아가는 형부의 등이 유난히 믿음직스러웠다.
언니는 매일 이런 걸 보고 산단 말이지. 딱히 질투는 나지 않았지만, 아쉽기는 했다. 만약 언니가 아니라 자신이 인천에 갔다면 어땠을까.
‘탐사 중에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하는 거람.’
네티가 짝, 짝 자신의 볼을 때릴 무렵 거대한 석순들로 나눠진 갈림길이 나타났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냐고 묻는 언니에게, 형부가 의외의 대답을 꺼냈다.
“나랑 네티는 오른쪽으로 갈게, 나머지는 왼쪽으로 가줘.”
“예? 형부, 저랑요?”
“왜, 싫어?”
“아뇨, 아뇨. 그건 아닌데….”
형부랑 단둘이 어두운 해저 동굴로? 네티는 은근슬쩍 세 언니들을 확인했다.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그녀뿐인 듯, 언니들은 ‘문제가 생기면 무전기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갈림길 너머로 가버렸다.
괜히 부끄러워진 네티는 쓰읍, 코를 긁으며 형부와 함께 오른쪽으로 향했다.
언니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작 형부와 단둘이 되니 말문이 막혔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남자, 그것도 형부랑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거지? 언니 이야기?
저벅, 저벅 발소리만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했던 네티가 다큐멘터리 이야기라도 할까 고민할 때쯤.
갑자기 통로가 끝났다. 도착한 곳은 두 사람의 손전등을 비춰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방이었다.
반짝이는 종유석 아래, 산처럼 쌓인 금화와 보석들이 가득한 방.
손전등을 받은 금화들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였다.
네티는 멍하니 금화들을 보며 말했다.
“와… 엄청… 고전적이네요. 비밀 길 뒤에 숨겨진 보물 방이라니. 건설자가 어릴 때 알피지 게임 좀 했나봐요.”
“그러게, 무슨 용 둥지마냥 꾸며놨네.”
여명과 네티는 조금 흥분한 상태로 방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보물로 가득 찬 방 구석에는 기묘하게도 침대와 탁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위에 쌓인 먼지를 보니 아마 십 년 넘게 주인이 오지 않은 듯했다.
“형부, 언니 부를까요? 여기다가 2차 베이스캠프 설치하면 되겠어요.”
네티가 흥분한 목소리로 묻자, 여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쪽에서 먼저 연락할 때까지 우리는 여기에 있자.”
“예? 하지만 언니 쪽은….”
그녀의 말꼬리가 길어지기 전에, 형부가 갑자기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네티.”
“네, 넵?”
“잘했어. 이런 보물 방을 찾다니… 전부 네 덕분이야.”
“….”
“훌륭한 일을 한 아이에게는 상이 있어야겠지?”
가까워지는 형부를 본 네티는 숨을 죽였다. 어? 뭐야 이거?
그녀의 근육이 발끝부터 척추까지 쫘악 곤두서 순간, 여명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마침 여기, 침대가 있네?”
“….”
“네티, 어떻게 할까? 응?”
꿀이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 네티는 설탕을 한 움큼 집어 먹은 것처럼 꿀꺽 침을 삼켰다.
그녀의 침묵을 동의로 생각한 걸까? 형부는 천천히 그녀의 교복 상의 사이로 손을 뻗었다.
거친 손가락, 부드러운 손길, 하나하나 풀리는 단추.
네티는 어버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브래지어에 손이 닿은 순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혀, 형부… 어, 언제부터 제 마음을 알고 계셨어요?”
“처음부터.”
“…처음부터요?”
“응. 우리가 만난 그 순간부터… 네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어. 너무 늦었지? 미안해.”
네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나 달콤한 말이라서? 아니면 의심 때문에? 아니,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를 흔드는 건 확신이었다. 햄릿이 했던 확신과 같은 종류의 확신.
직후, 그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상의 사이로 파고드는 형부의 손과 그녀의 손이 교차된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허리춤에 걸려 있던 권총을 뽑아-
탕!
그대로 형부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