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48)
을 위한 세계는 없다-348화(348/817)
***
이상하다.
여명이 무언가 변화를 감지한 것과 동시에,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다들 왜 그래?”
앞서가던 그가 고개를 돌려 일행을 확인해 보니. 성녀, 쇠미리, 네티, 심지어 세티까지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함정.’
여명은 곧바로 무기를 들고 주변을 확인했다. 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한명 한명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몸과 마나 양쪽 모두 이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정신적인 함정인 걸까? 그렇다면 왜 자신은 걸리지 않은 걸까.
짧은 고민을 이어가던 여명은 염동력을 펼쳐 네 사람을 동시에 들어 올렸다. 우선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일단 베이스캠프로 돌아가 코르부스에게 조언을 구해야-
그때, 세티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세티, 괜찮아?”
여명이 반색했으나, 곧이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그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간택자.』
“…미그니움.”
여명이 움찔, 발을 멈춘 사이 세티의 몸을 빌린 미그니움이 염동력에서 벗어났다.
땅으로 내려서는 그녀를 향해 여명이 물었다.
“이거… 네가 벌인 짓이야?”
『나의 간택자야, 스스로 믿지 않는 질문을 어찌 입에 올리느냐? 그대도 잘 알다시피, 나는 이런 식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미그니움은 살짝 손을 튕겨 켜져 있던 손전등을 모두 꺼버렸다. 공기조차 잠겨버린 먹먹한 어둠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그러면 왜 나타난 거냐,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이 순간을 놓치기에 아깝더구나. 그래서 나왔지.』
“…이 순간?”
미그니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성녀에게 다가가더니, 대뜸 그녀의 안대를 벗겼다.
『신들이 까막눈이 되는 순간, 우리의 만남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 순간 말이다.』
간드러진 목소리 아래, 어둠 사이로 성녀의 오드 아이가 드러나며 억눌렸던 눈의 마나가 화악-!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 성녀를 건드리게 둘 수 없던 여명은 곧바로 염동력으로 성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다시 성녀에게 안대를 씌우며 말했다.
“…말장난할 상황도, 기분도 아니야. 도와줄 생각 없으면 그만 돌아가.”
『나의 간택자야, 섭섭한 말투가 꼭 청소부 시절의 그것과 같구나. 기억하느냐? 매일매일 내 유혹을 버티며 살아가던 그때. 그 당시의 그대는 참으로 재밌었다.』
“….”
『어디, 그 시절처럼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 보거라.』
“…좆까.”
미그니움은, 세티의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의 어둠이 마치 드레스 자락처럼 출렁거리며 그녀의 웃음에 호응했다.
잠시 그 어둠을 노려보던 여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그니움, 내가 그동안 죽인 사람들을 대가로 요구하겠다. 동료들의 정신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어떻게 해야 되돌아올 수 있는지 설명해.”
그의 진지한 목소리와 달리, 세티의 얼굴에는 기다란 미소가 걸렸다. 평소의 그녀와는 다른 소름 끼치는 미소.
『죽음의 대가라. 이제는 그런 것도 요구할 줄 알게 되었구나. 그대가 더욱더 무자비해진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
“….”
『하지만 이런 사소한 마법에 죽음의 대가는 필요 없노라.』
“사소한 마법이라고?”
여명은 미간을 좁히며 일행들을 확인했다. 성녀는 물론이고 쇠미리조차 대응하지 못한 함정이 사소하다니.
미그니움은 어둠과 석순 사이를 거닐며 말했다.
『자연스레 고인 마나에 종유석과 석순의 배열을 조작해 만든 원시적인 환상 마법. 은밀함은 쓸만하지만, 정신을 파괴하거나 고문하기엔 마나가 모자라지. 기껏해야 바라는 걸 보여주는 게 전부니라.』
“….”
『시카고에서 그대가 겪었던 꿈과 비슷하지만, 그 위력을 비교하면… 사소하고 또 사소하지.』
여명은 왜 자신이 이 마법에 걸리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태풍을 버틴 나무에게 산들바람은 아무 의미도 없는 법.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리얼한 꿈의 권능 속에서 살아남은 그가 고작 이런 환상 마법에 걸릴 리 없었다.
그러면 똑같이 꿈의 권능에서 빠져나왔던 세티는? 의문의 대답은 간단했다. 눈앞에 있는 미그니움.
여명은 세티의 몸을 강탈한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마법을 푸는 방법은?”
『풀어? 이 유익한 걸 굳이 풀 필요가 있느냐?』
“…유익하다고?”
『이것은 함정이 아니다. 기연이지. 나의 간택자야, 그대가 아야톨라의 꿈속에서 얻었던 깨달음을 떠올려보라.』
기연? 깨달음? 여명은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아야톨라의 꿈속에서, 그는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고 극복하며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몇 번이고 죽을 뻔하긴 했지만.’
만약 이 환영 마법이 아야톨라의 꿈과 비슷한 종류의 마법이라면, 나아가 일부러 그런 상태를 만드는 마법이라면…?
고통이나 죽음의 위험 없이도 여명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는 법.
이 환영 마법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욕망을 마주하고 극복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이 가설이 맞다면…
“…이게 퀴니 코완이 남긴 두 번째 기연인가?”
『정답이다. 간택자여.』
“….”
긴장이 풀린 여명은 푹 한숨을 쉬었다. 일행이 위험에 빠진 게 아니라는 안도가 담긴 한숨이었다.
미그니움이 사뿐사뿐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퀴니 코완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겠구나. 설마 경지가 너무 높아서 기연이 소용없을 줄이야.』
“….”
『아무튼, 궁금증은 다 풀렸느냐?』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로구나.』
“질문? 무슨 질문?”
미그니움은 여명의 주변에 떠 있는 소녀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음영조차 없는 먹먹한 그림자가 무심하게 시야를 뒤덮은 가운데, 그녀가 작게 말했다.
『이 아이들의 운명 구슬. 언제 빼앗을 것이냐?』
“….”
여명이 침묵으로 대답한 바로 순간, 기절한 소녀들의 몸에서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니 빛나는 건 그녀들의 몸이 아니라 구슬이었다. 그녀들의 몸에서 서서히 솟아나는 구슬.
성녀의 가슴 사이에서 떠오른 구슬은 익숙했다. 만주에서 봤던 바로 그 구슬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쇠미리의 구슬은 마치 빛을 숨기려는 듯 얇은 나무줄기가 구슬 곳곳을 뒤덮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네티의 구슬, 묘하게 익숙한 그 구슬은 마치 반월처럼 반만 빛나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단단한 어둠에 잠식되어 아무런 빛도 내뿜지 못했다. 마치, 전기가 끊긴 전구처럼.
잠시 구슬들을 바라보던 여명은 뒤늦게 미그니움이 만주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운명이 깨어났다.』
『모든 운명의 주인들 또한 깨어났음이니.』
『그대는 마땅히 그들의 운명을 빼앗아라.』
간단한 추론으로 운명의 주인 중 하나가 성녀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적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여명의 동료이자 사랑이었다. 그런 그녀의 운명을 빼앗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의 운명은 그녀의 것이다.
쇠미리나 네티라고 다르지 않았다. 운명의 주인이라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애초에 운명의 주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운명의 구슬인지 뭔지, 그딴 거 알고 싶은 생각도 없고 뺏을 생각도 없어.”
『어째서? 뭔지 몰라도 귀한 것이라는 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 않느냐.』
“같은 편이니까.”
그러자 미그니움은 웃었다. 여태껏 보여준 과장된 웃음이나 비웃음이 아닌, 대견함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같은 편이라… 그래, 빼앗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바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진정으로 강한 신은 강탈하지 않고 공양받는 법이니.』
“…?”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치켜드는 여명.
미그니움은 자신의, 정확히 세티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첫 번째에게 물어보거라.』
***
“으, 으으….”
묵직한 꿈의 잔향 속에서 네티는 눈을 떴다.
머리를 울리는 두통, 목을 타고 흐르는 짙은 피로감, 그리고 눈가에 살짝 고인 눈물.
“이, 씨이이발….”
그녀가 깨어나서 처음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형부를 죽인 감각이 아직 손에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마흔네 번이나 꿈속의 형부를 죽인 감각.
크게 숨을 들이쉬어도 이 감각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44명의 형부가 죽어가며 흘린 비릿하고 뜨끈한 피 냄새가 아직도 콧구멍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엿 같은 환영, 엿 같은 꿈! 진짜 형부는 총알 좀 맞아도 안 죽는다고.
“끅, 크흐….”
그녀는 신음하며 눈을 깜빡였다. 짙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번에도 꿈인가 싶어 주변을 더듬어보자, 단단하면서도 따스한 뭔가가 만져졌다.
그녀는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형부의 손.
꿈속에서 몇 번이고 붙잡고, 몇 번이고 쏴버린 바로 그 손이었다. 네티는 씨발, 속으로 욕을 삼키며 권총으로 손을 뻗으며
이번에는 얼굴 보기 전에 쏜…
그때, 거친 손바닥이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네티, 일어났어?”
형부의 손, 형부의 목소리. 네티는 대답하지 않고 더듬더듬 권총을 집었다.
그리고 그대로 안전장치를 풀고 총을 들어 올리려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여태껏 만난 꿈속의 형부들과 달리, 지금 그녀를 안고 있는 여명은 교복을 벗기긴커녕 역으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줬으니까.
혹시 진짜인가? 아니면 이것도 환상?
아직도 환영 마법의 여파에서 깨어나지 못한 네티는 바로 권총을 쏘는 대신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형부….”
“응, 여기 있어. 괜찮아? 목마르지? 물 줄까?”
이번에는 꿈속의 형부들처럼 걱정 가득한 목소리였다. 네티는 수많은 가짜 형부들을 걸러낸 질문을 꺼냈다.
“우리 언니 엉덩이에 점… 왼쪽이랑 오른쪽 중 어느 쪽에 있는지 알아요?”
“뭐? 갑자기 그건 왜?”
“중요한 질문이에요… 대답해주세요….”
“중요하다니….”
당황스러운 목소리. 스물두 번째처럼 시간을 끌까? 아니면 다른 녀석들처럼 거짓말을 하려나.
어느 쪽이건 바로 머리통을 날려주마. 네티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결연하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순간.
여명이 말했다.
“으음, 세티 엉덩이에는… 점이 없는데…?”
“…어?”
처음으로 나온 정답이었다. 네티는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고 형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진짜인가?
진짜건 아니건 간에, 이어진 말은 네티를 당황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점은 허벅지 안쪽에 있어.”
“…예?”
“그, 왼쪽 골반에서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허벅지 안쪽에, 귀여운 점이 하나 있거든. 세티 엉덩이에 가까운 점은 그거 뿐인데… 대답이 됐으려나?”
“어…… 예. 충분히 대답이 됐어요.”
만약 이게 가짜면 그냥 죽자.
네티가 황당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한숨을 내쉰 바로 그때, 여명의 뒤통수에서 누군가 손전등을 켰다.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와 반대로 볼이 빨개진 소녀. 그녀의 언니였다.
“…내 동생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이상한 거 아니야. 중요한 질문이라고 했단 말이야. 응? 네티, 그렇지?”
형부가 재빨리 변명을 내뱉었지만, 언니는 그대로 손전등을 휘둘러 여명과 네티의 이마를 한 대씩 후려쳤다.
뻑!
골이 흔들리고 난 뒤에야, 네티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손전등에 맞은 이마가 지독하게도 아팠으니까.
“으아으….”
아무튼, 그녀가 이마를 붙잡고 바닥을 구르길 잠시.
현실에 익숙해진 네티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성녀님과 쇠미리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게 다 뭐래요?”
“퀴니 코완이 준비한 기연이야.”
“기연?”
여명은 그녀에게 물을 건네며 최대한 짧게 설명했다.
환영 마법을 통해 욕망과 마주하고 그걸 극복하는 종류의 기연.
그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네티는 입에 물고 있던 물을 푸흡- 뿜었다.
“왜 그래? 사레 들렸어?”
형부가 걱정스레 물었으나, 네티는 말은커녕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욕망이라니, 그 개꿈이 전부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이었다니!
아니, 아니지. 환영에서 스스로 깨어난 걸 보면 자신은 욕망을 극복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 그녀는 욕망에 굴하지 않았다! 부끄러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네티는 슬쩍 염동력을 펼쳐봤다.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마나가 움직이는 게 아닌가?
“이, 이게 기연…?”
정말로 형부에 대한 욕망을 극복했다고 실력이 늘다니, 세상에 이런 어이없는 기연이 어딨어?
당황한 네티는 슬쩍 형부를 바라봤다. 언니의 손전등 빛 아래 드러난 쇄골 라인이 참…
“…씁, 형부.”
“왜? 더 궁금한 거 있어?”
“무의식적인 욕망이 의식적인 욕망이 된 것도, 욕망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글쎄? 어떻게 보면 극복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
“….”
네티는 입을 다물었다.
묘한 침묵 사이로, 언니가 주변 석순의 위치를 지도에 옮겨 담는 소리만이 이어지길 한참.
문뜩, 네티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는 성녀를 보며 이상한 걱정을 떠올렸다.
“저기, 형부. 만약에… 성녀님이 이 기연을 극복하지 못하면 어쩌죠? 성녀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고 그냥, 욕망을 마주하고도 극복하기보다는 순응해버릴 수도 있잖아요.”
“….”
“설마, 영영 못 깨어나시는 건…?”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한 시간만 더 기다려보고, 안 되면 강제로 깨울 거야.”
“그래도 돼요??
“안될 건 또 뭐야. 기연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네티는 ‘하긴, 그렇네요. 기연인데 무슨 문제 생기겠어요?’ 같은 생각을 하며 안도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
네티와 여명은 깨어난 성녀를 보며 자신들이 안일했음을,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