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5)
을 위한 세계는 없다-35화(35/817)
〈 35화 〉 NPC를 위한 우연 (6)
* * *
***
‘…뭐지?’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뒤를 잡히는 동안 어떠한 마나도,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뒤늦게 감각을 집중하자 아주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조금 더 돌리려는 순간, 차가운 총구가 볼을 꾹 눌렀다.
“어허, 그 이상 고개 돌릴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머리 위로 손들어.”
위협하는 말투가 사뭇 고압적이었으나, 방정맞은 목소리 때문에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다.
“좋은 말 할 때, 손아귀에서 힘 빼고 손들어.”
여명은 쥐새끼의 목울대를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녀석을 풀어줘야 하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우선 상대를 탐색해보기로 했다.
“…이건 사적인 문제다.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나도 사적인 문제야. 사람 살리는 게 내 취미거든.”
총잡이는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양 지껄였지만, 그녀의 말은 명백한 거짓이었다.
목 졸려 죽어가는 쥐새끼의 얼굴 위로, 실낱같은 반가움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이 녀석과 무슨 관계냐.”
“…아무 관계도 아닌데?”
두 사람 사이로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무거운 안개처럼 내려앉은 정적을 기다란 한숨이 밀어냈다.
“하아, 진짜 거짓말 못 하겠네. 사실은 월라드 하고 얼굴 정도는 아는 관계야. 됐지?”
여명은 월라드의 모가지를 쥔 채로 고민했다. 이대로 확 목을 꺾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얼굴에 겨눠진 총이 문제였다.
그는 한숨을 쉬고, 월라드를 바닥에 내던졌다.
“컥, 끅, 크흑, 쿨럭, 쿨럭!”
바닥을 구른 월라드는 축 늘어져 숨을 헐떡였다. 거품 섞인 침이 입가로 질질 흘렀다.
그리고 잠깐 그 꼴을 지켜보던 총잡이가 입을 열었다.
“사적인 문제라고 했지? 대체 저 사람이 너한테 뭘 잘못했길래, 닭 모가지 부러트리듯 죽이려고 한 거야?”
“…저놈이 내 은사를 죽이려 했다.”
“아하, 정당한 복수다?”
대화를 듣고 있던 월라드가 깜짝 놀라 끼어들었다. 아직도 헐떡이는 그의 입가로 침이 튀었다.
“아니, 콜록!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
“전부! 전부 오해란 말입니다. 흐으, 저 사람의 은사께선 제 은사이시기도 합니다. 제가 그분과 약간 오해가 있어서…”
“야.”
오해. 그 단어가 나온 순간, 여명은 녀석의 말을 끊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금빛 눈동자 아래로, 분노어린 감정이 일렁거렸다.
“초인과 무장한 덩치 다섯이서 몰려가 멱살 잡는 게, 네가 말하는 약간의 오해냐?”
“아니, 그건…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니라…”
“아가리 다물어.”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월라드는 물론이고, 총잡이조차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명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기세로 녀석을 노려봤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총잡이가 한숨 쉬듯 말했다.
“하, 저거 진짜 개새끼였네.”
쥐새끼는 대답하지 못하고 푹 고개를 숙였다. 여명은 마나를 모아 파양결을 일으켰다.
‘장난은 여기까지.’
그가 손날을 펴고 다음 일격을 준비한 순간, 그의 볼을 누르고 있던 총구가 다른 곳을 향했다.
탕!
총잡이의 총알이 노린 건 월라드의 종아리였다. 아무 전조도, 경고도 없는 공격이었다.
총을 맞은 월라드도,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여명도 얼떨떨하게 눈을 끔뻑였다.
“끄, 끄아악! 시발! 내 다리! 다리가!”
뒤늦게 고통을 느낀 월라드가 다리를 붙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특수한 처리라도 된 건지, 총알은 녀석의 종아리뼈와 살을 깔끔하게 꿰뚫었다. 종아리 구멍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여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흐름이 끊긴 탓에 파양결의 마나가 흩어지고 있었다.
“개새끼만 보면 쏘고 싶은 병에 걸려서 그만… 뭐, 그래도 살인은 아니니까.”
“…저 정도 상처면 과다출혈로 죽을 텐데.”
“3분 내로 치유 받으면 생명엔 문제없어.”
이미 해본 적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여명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상대의 모습을 확인했다.
총잡이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여명의 시야에 보이는 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가녀린 손과 거기에 들린 리볼버뿐.
‘…투명화 마법인가.’
여명은 단번에 그것이 어떤 마법인지 알아보고, 작게 눈썹을 휘었다. 프레아 칸이 자매검을 숨기고 있었던 바로 그 마법이었다.
투명화가 얼마나 어려운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전신에 마법을 두르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저 총잡이는 대단한 마법사거나, 그보다 더 대단한 마도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리라. 어느 쪽이건, 쉽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싸워야 하나? 아니면…’
여명의 마나가 제자리를 찾는 사이, 골목 저편에서 다급한 군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어떤 미친 새끼가 식사 시간에 총질이냐!
헌병도 점심 좀 먹자!
용병 구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헌병들의 목소리였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게, 이 골목까지 오는 건 시간문제인 듯싶었다.
‘이렇게 될 걸 노리고 총을 쏜 건가?’
여명은 투명 총잡이를 노려봤다. 그는… 아니, 그녀가 틀림없는 목소리의 총잡이는 보란 듯이 리볼버를 핑그르르 돌렸다.
“어이쿠, 이제 곧 헌병이 오겠네. 이제 서로 갈 길 갈까? 저 녀석 저대로 내버려 두면 진짜 죽을 거 같거든.”
“싫다면?”
“왜?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게? 근데 말이야, 반드시 죽일 필요는 없잖아.”
“….”
“종아리뼈에 구멍도 났으니까. 치료해도 평생 뼈가 시릴걸. 저 정도면 충분히 죗값을 치른 거 같지 않아?”
“뼈가 시릴 때마다 복수심을 상기할 수도 있겠지.”
“어… 그 말도 맞는데…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거야. 맹세할게. 푸른 쥐는 앞으로 영원히, 그쪽과 그쪽 은사한테 얼씬도 하지 않을 거라고.”
얼굴이 보였다면, 윙크라도 할법한 말투였다. 여명은 대답 대신 총잡이가 있을 법한 자리를 지그시 노려봤다.
잠시 후, 그녀는 무안한 듯 슬쩍 말을 덧붙였다.
“아, 진짜. 이 정도면 믿어 줄만 하지 않나?”
“…내가 얼굴도 드러내지 못하는 녀석의 말을 믿을 정도로 바보로 보이나?”
“거참,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다니. 종교인들도 믿는 신 얼굴 한 번 안 보고도 잘만 믿거든?”
“난 신전 안 다닌다.”
“아 그래? 불신자라서 좋으시겠어?”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방치된 월라드는 반쯤 풀린 눈으로 숨을 헐떡였다. 과다출혈로 사망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젠장, 저러다 진짜 죽겠네.”
그것을 본 총잡이는 한숨을 내쉬고 총을 까딱거렸다. 총을 쏘려는 건가? 여명은 근육을 긴장시켰다.
탁.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총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두 팔을 들어,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고 ‘벌렸다’.
마법적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장막이 벌어지며 뒤편에 숨겨진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의 턱과 명치 사이… 매끄러운 턱선과 날렵한 목, 그리고 커다란 무언가.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여명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건 말건, 상대는 대뜸 가슴 사이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교차하는 검과 도끼 위, 피 흘리는 하트의 상징이 새겨진 펜던트였다. 그것은 지구의 것이 아니었으나, 지구인에게도 익숙한 상징이었다.
차원문 너머, 전사들에게 찬양을 받는 전쟁과 투쟁의 붉은 신, 레독스의 상징.
왜 하필 이럴 때 신의 상징을?여명의 한쪽 눈썹이 길게 휘어지는 순간, 펜던트 위로 마나가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총잡이가 불어넣은 마나가 아니라, 목걸이 스스로 내뿜는 마나였다.
“…성물?”
외부의 마나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마도구와 달리, 신의 축복을 받아 스스로 마나를 내뿜는 물건.
신앙의 증거이자, 믿음의 보상.
“단번에 알아보니 다행이네. 그래, 성물이야.”
성물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묵직했다.
단순히 사제들에게 보급되는 수준의 성물이 아니라, TV 너머에서나 볼 수 있던 고위 성물이 틀림없었다.
“…총잡이가 아니라 성직자셨군.”
“성직자보단 총잡이가 되고 싶긴 하지만.”
그녀는 펜던트를 붙잡고 뚜득, 가슴팍에서 뜯어냈다. 그리고 성물을 쥔 손을 그대로 여명에게 내밀었다.
“자, 받아.”
“…뭐?”
“맹세의 보증품이야. 만에 하나 푸른 쥐 때문에 그쪽 은사가 다치면, 그걸 들고 레독스 신전으로 가서 복수를 부탁해. 장담하는데, 교단은 맹세를 어긴 자에게 합당한 복수를 해줄 거야.”
“….”
“이 정도면 믿을만하지?”
여명은 잠시 펜던트를 든 손과 투명한 허공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순순히 펜던트를 받았다.
그녀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성물과 레독스 교단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파는 사이비가 나오면, 직접 칼을 들고 뛰어드는 자들이었으니까.
펜던트를 챙긴 여명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길을 터줬다.
총잡이는 커다란 상체를 다시 투명화 마법 사이로 숨기고, 다급하게 쥐새끼에게 달려갔다.
“월라드, 이 등신 새끼. 총알 한 발을 못 버티냐.”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손에서 새하얀 빛이 일렁거렸다. 사이비들이 보여주는 가짜 빛이 아닌, 진짜로 기적을 일으키는 신성의 빛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인천 교구의 성직자조차 저 정도 빛을 뿜어내지는 못했는데…
‘저 정도 성직자가 왜 푸른 쥐와 일하는 거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질문이 되지는 못했다.
월라드와 투명한 성직자를 지켜보던 여명의 귓가로, 헌병들의 외침이 들려온 탓이었다.
3번이랑 11번 골목 확인해! 거기만 남았어!
여명은 등을 돌려 골목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인연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떠날 순간이었다.
떠나는 그의 등 뒤로,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저런 말을 하면 꼭 다시 만나게 되던데.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김만수와 천여명이 마주친 건, 용병단의 베이스캠프 바로 앞 도로였다.
“먼저 출발한 놈이 왜 나랑 동시에 도착해?”
여명의 옷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김만수는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거라고 확신했으나, 여명의 표정이 지나치게 담담했다.
“길을 헤맸습니다.”
“길을 헤매? 지도는 어따두고?”
“잃어버렸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여명을 보며 만수의 눈썹이 길게 휘어졌다.
뭐라고 한마디 쏘아주고 싶은데, 차에서 곯아떨어진 원죄가 있다 보니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하아, 그래, 일단 베이스캠프까진 왔으니 됐다.”
결국, 김만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베이스캠프로 들어섰다.
끼익.
문을 열자마자, 낡은 경칩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게 초인종 대신이라도 되는 건지, 캠프 내부에 있던 열댓 명의 용병들이 동시에 두 사람을 쳐다봤다.
“어? 부단장님? 징계받는 중 아니셨습니까?”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총기를 손질하던 중이었는지, 그의 앞에는 깔끔하게 분리된 자동소총이 놓여 있었다.
“징계받는 중 맞다. 만주는 교관 자격으로 왔어.”
“교관이요?”
중년인은 그제야 힐끗, 김만수의 뒤에 서 있던 여명을 바라봤다.
여명이 생각보다 어려 보인 걸까,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성질 좀 죽이라고 늘 말하지 않습니까. 그 짬에 보모 노릇이라니.”
“인마, 헛소리하지 말고. 다음 출동 언제야?”
“출동이라면 뭐… 딱 맞춰 오셨습니다.”
“딱 맞춰 왔다고?”
중년인은 실실 웃으면서도 능숙하게 총을 조립했다.
“바로 오늘, 그것도 딱 세 시간 뒤에. 북만주로 원정 간 녀석들 지원하러 갑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이면… 김만수는 한숨을 쉬었다.
“첫날부터 실전이라, 신입이 운도 좋군요.”
“원정 지원이 장난이냐? 첫날인 놈이 뭘 어떻게 따라가?”
“장난이라뇨, 부단장님? 저도 이틀 만에 따라갔습니다만?”
“너는 군필이니까 그렇고 이 새끼야, 신입은 미필이니까, 오늘 자리 배치만 할…”
김만수가 거부하려는 순간, 뒤에 서 있던 여명이 끼어들었다.
“가겠습니다.”
김만수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것을 본 중년인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오랜만에 괜찮은 친구가 왔구만! 그래, 그래야지! 용병업계에 왔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달깍, 어느새 총기 조립을 끝낸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동소총을 어깨에 걸고 여명의 앞에 섰다.
“신입, 이름은?”
“천여명입니다.”
“여명, 선죽 용병단 3번 팀에 온걸 환영한다. 나는 팀을 이끄는 톈린이라고 한다. 다른 놈들 이름은…”
톈린은 슬쩍 베이스캠프를 훑어보곤, 어깨를 으쓱거렸다.
“첫 출동에서 뒤지지 않으면 알려주마.”
일제히 피식거리는 용병들의 웃음 사이로, 김만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주물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