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53)
을 위한 세계는 없다-353화(35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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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살점으로 물든 골목길 위로 노을의 붉음이 더해지고, 콘크리트가 토해낸 먼지가 거기에 회색빛을 더하는 순간.
대검을 든 남자는 느릿한 걸음으로 여명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말했다.
“…내 검이 두 번이나 막힐 줄이야.”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맹수가 적을 노려보는 것처럼 살벌하게 녀석을 노려보는 게 전부였다.
녀석 또한 대답을 바란 건 아닌지, 노을과 먼지로 얼룩덜룩한 선글라스를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탁한 눈동자가 여명의 눈과 마주하길 잠시.
녀석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교장의 기연은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거다. 그만한 힘이 있으면서 애들 먹을 거나 노리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여명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애들이 아니라 주인공이겠지.”
“…아, 그냥 기연 소문을 듣고 온 건 아니시다?”
그의 탁한 눈동자 위로 작은 기대감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녀석은 입술을 핥으며 검을 늘어트렸다.
“설마 땜빵으로 온 곳에서 공을 세울 줄은 몰랐는데… 고맙다?”
“혀가 길다.”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 사이로 늘어진 먼지가 서서히 걷히고, 서로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은 순간.
두 개의 검이 동시에 침묵을 찢어발겼다.
!!!!
녀석의 검은 이번에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본능적으로 휘두른 여명의 검을 튕겨낸 사이에 어깨를 쑤실 정도로 빠른 속도.
푸확-! 어깨를 찌른 검이 그대로 팔을 잘라내며 피가 튀었다. 여명의 검이 뒤늦게 녀석을 쫓았지만, 녀석은 훌쩍 거리를 벌렸다.
“느려, 느려.”
녀석은 여명의 잘린 왼팔을 보며 미소 지었다. 벌써 승리를 확신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러나 여명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잘린 팔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대뜸 검을 들어 녀석의 코를 가리켰다.
“…?”
녀석은 뭔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그의 콧등 위로 얇은 혈선이 그어지며 푹-!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처음 여명에게 베였던 바로 그 위치.
같은 곳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베였다는 걸 깨달은 녀석의 눈동자로 진한 즐거움이 피어올랐다.
그는 여명을 보며 말했다.
“이봐, 이름이 뭐냐? 이름도 모르고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실력인데.”
“알 거 없다.”
여명은 잘린 팔을 주워 어깨에 붙이며 말했다. 녀석은 쯧, 혀를 찼다.
“낭만을 모르는 양반이로구만. 통성명이 얼마나 중요한 건대.”
그렇게 녀석은 대검을 양손으로 꽉 쥐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포시스 G 웰스다.”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대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름 따위가 아니라 상대가 쓰는 비정상적인 가속이었으니까.
‘전조나 신호조차 없이 발동되는 가속… 무술이나 마법은 아닌데.’
일견즉해의 재능으로도 기술의 근원을 탐지할 수 없었다. 어떤 신성의 개입이나 축복인 걸까?
알 수 없었다.
여명이 짧은 세 번의 격돌 속에서 깨달은 건 주가시빌리나 다른 무술을 아껴가며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주가시빌리의 살기를 풀풀 풍길 수도 없고…
짧은 고민을 이어 나가던 여명은, 다음 순간 왼손을 반쯤 쥐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가속할 틈을 주느니 먼저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고 포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검을 휘둘렀다.
길이는 2배, 두께는 3배가 넘게 차이 나는 두 검이 충돌하며 강철과 혈청이 고함을 질렀다.
쾅, 콰앙-!! 여명은 무장 혈청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많은 마나를 실었다.
녀석에게 가속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임과 동시에 대검에 실린 녀석의 마나를 가늠해볼 의도.
그 의도를 간파한 포시스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대검을 휘둘렀다.
골목길이 박살 나고, 양치기들의 살점과 핏자국이 먼지 아래 파묻힐 정도로 강렬한 공방.
까그극-! 두 칼날이 이를 부딪치며 마나 가루가 튀어 오르고, 두 검이 정점에 이른 순간.
“시도는 좋았어.”
포시스가 갑작스레 가속했다. 여명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방어했으나 녀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배에 대검을 찔러넣었다.
그대로 피부를 가르고, 복근을 꿰뚫고, 장기를 헤집는 검.
푸욱! 등을 꿰뚫고 나온 검 끝으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척추를 비켜나갔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포시스는 검 손잡이를 90도 돌리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이름을 밝힐 생각은 없나?”
쿨럭, 여명은 피를 토하며 포시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패배자의 절망이나 분노는 보이지 않았다.
사냥감을 덫에 몰아넣은 데 성공한 사냥꾼의 눈빛.
포시스가 이상함을 느끼는 찰나, 여명이 입을 열었다.
“붉은 별.”
“…뭐?”
포시스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 바로 그 순간, 여명은 왼손을 쥐어 인벤토리에서 솔방울을 꺼냈다.
정확히는 시베리아 잣나무의 잣송이를 카피한 외관에, 붉은 마나 메탈이 코팅된 폭발물.
정식 명칭은 7MZh3. 속칭…
“…스탈린의 불알? 이 미친 새-”
뒤늦게 솔방울의 정체를 깨달은 포시스가 검을 놓고 가속하려 했지만, 여명이 솔방울을 터트리는 게 조금 더 빨랐다.
***
!!!!!!!
화염 폭풍에 휘말린 포시스는 정신줄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폭발음 때문에 고막이 찢어진 듯 귀가 얼얼했고, 익어버린 피부의 신경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미친 새끼. 아카데미에서 스탈린의 불알을 터트려?’
아카데미 경보 마법진을 속이면 뭐 하나, 불알에서 솟구친 불기둥은 수십 미터 바깥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지금 그의 발아래가 허전한 이유도 똑같았다.
폭발의 충격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불기둥에 휘말려 붕 떠 있는 상태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포시스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번화가의 전경이나 노을은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먼지 섞인 어둠뿐.
‘설마, 하수도?’
깨달음은 추락과 함께 찾아왔다.
쿵! 축축한 하수도 바닥으로 추락한 그는 쿨럭 피를 토했다. 뒤늦은 충격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후려친 까닭이었다.
“God damn it…!”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었으나, 포시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발의 잔향과 하수도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천장이 박살 난 하수도 저편에서 흐릿한 누군가가 보였다.
포시스는 상대를 향해 말했다.
“위가 아니라… 아래로 터트렸군. 번화가가 아니라 하수도로 내려올 이유가 있었나?”
“눈에 띄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그 대답과 동시에, 하수도의 먼지와 어둠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살기가 실체화된 붉은 아지랑이.
“주가시빌리…! 진짜 붉은 별이라고?”
붉은 별,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 너머에서 걸어오는 그의 얼굴은 어느새 시카고를 공포로 물들였던 붉은 별의 그것으로 변해있었다.
“하, 1번과 2번이 널 얼마나 열심히 추적했는데… 이런 곳에 있었다니.”
얼마나 황당한 건지, 포시스는 쿨럭쿨럭 피를 토하면서도 입을 멈추지 못했다.
“빨갱이 새끼가 왜 아카데미의 기연… 아니, 왜 용 비늘 나침반을 노리는 거냐?”
“알 거 없다.”
“알 거 없다고… 시발, 혓바닥 한번 더럽게 짧네.”
거기까지 말한 포시스는 어느새 재생한 팔을 움직여 아공간을 열었다. 미군 출신들이 곧잘 사용하던 무기 아공간.
녀석이 그 속에서 꺼낸 건 일반인은 양손으로 들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기관총이었다.
“총알맛 좀 보면 길어지려나?”
다음 순간, 포시스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성녀의 대물 저격총에 쓰이는 50구경 탄환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붉은 아지랑이를 꿰뚫었다.
두두두두- !
여명은 총알을 피하지 않았다. 그 대신 혈청을 작은 방패로 바꿔 얼굴을 가리고 그대로 총알 비 앞으로 뛰어들었다.
총알에 맞은 부위가 퍽, 퍽! 폭발하며 살점이 튀었으나 골목길에서 쌓아온 살기는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여명은 손을 뻗어 염동력으로 총구를 꺾어버렸다. 끼기긱- 소리와 함께 주둥이가 꺾여버린 기관총은 쏟아내진 못한 총알과 함께 그대로 폭발했다.
fuck! 욕설을 내뱉은 포시스는 기관총을 내던지고 하수도 저편으로 가속했다.
아무 전조도 없이 발동되는 무식한 가속.
애써 좁힌 거리가 다시 벌어지자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살폈다.
까놓고 말해서, 포시스의 육체와 마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무술로만 겨뤘다면 주가시빌리 없이 쓰러트릴 수 있는 정도.
문제는 저 가속이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가속은 근접 전투는 물론이고 이런 사격전에서도 말도 안 되는 이점을 제공했다.
‘가능하면 써보고 싶은데….’
하지만 뭘 어떻게 빼앗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조도, 마나의 움직임도 없는 기술을 어떻게 훔치겠는가?
여명의 짧은 생각이 이어지는 사이, 포시스는 또 다른 대검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가속.
하수도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대검은 벽과 바닥, 그리고 그 외에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며 여명에게 쏟아졌다.
속도는 곧 위력이었다. 가속한 검은 마치 대전차 로켓의 그것 같은 폭발적인 힘으로 여명의 검과 충돌했다.
쩌- 엉 !!
하수도 전체가 흔들리며 어둠이 전율하길 잠시. 가속의 힘을 받은 포시스는 허리를 크게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번쩍이는 검광이 붉은 아지랑이는 물론이고, 여명의 몸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그 검이 승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농축된 살기와 그것을 이용하는 주가시빌리의 재생력은 끔찍할 정도였으니까.
공중 폭격으로 사냥해야 했던 런던의 괴수가 이럴까?
포시스가 여명의 검을 막기 위해 멈칫거리는 순간 재생은 이미 끝나 있었다.
어깨를 갈라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복근과 장기를 동시에 베어도 걸음 하나 느려지지 않았다.
“미친.”
당혹감에 놀랄 만도 하건만, 포시스는 그 와중에도 기회를 노렸다.
‘일격에 머리를 날려야 한다.’
그렇게 확신한 그는 한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푸확-! 피가 튀며 여명의 턱과 목이 길게 베였다. 머리를 베지 못한 포시스와 여명의 눈동자가 교차했다.
이제 한동안 가속하지 못하겠지. 그렇게 확신한 여명이 공세로 돌아선 순간.
녀석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던지며 물러났다.
여태껏 보여준 적 없는 연속 가속.
녀석에게도 꽤 부담되는 행위였는지, 코와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노림수는 성공이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그는 커다란 대전차 로켓을 꺼냈다.
“Surprise Mother fucker!”
상스러운 말과 함께 발사된 로켓은 포시스와 똑같이 ‘가속하며’ 날아왔다.
모든 게 채 몇 초가 흐르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고, 여명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
폭발음과 섬광이 터져 나오며 하수도를 밝혔다. 여명의 머리가 있던 위치에서 터진 폭발이었다.
포시스는 대전차 로켓을 내려놓으며 승리를 자신했다.
아무리 강대한 주가시빌리라 해도 뇌가 터지면 죽는 법.
10강의 알파 원이나 맥팔레인도 아니고, 코앞에서 로켓을 맞고도 살아남는 인간 따위가 있을 리…
“이제야 뭔지 알겠군.”
그때, 폭발의 연기 사이로 여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대체 어떻게? 곧이어 여명의 얼굴을 본 포시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피부가 벗겨지고 살이 터진 그의 상체와 달리, 얼굴은 멀쩡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얼굴을 뒤덮고 있는 붉은 막 때문에.
“…무장 혈청? 솔방울에 주가시빌리에… 아주 빨갱이 종합세트가 따로 없군. 대체 너 같은 놈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스탈린이 숨겨 놓은 사생아라도 되냐?”
“알 거 없다.”
순식간에 상처를 재생한 여명은 혈청을 다시 손목으로 옮겨 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대검을 꺼내는 포시스를 향해 말했다.
“네가 쓰는 그 가속 기술. 이름이 뭐냐.”
“…왜, 배우고 싶냐?”
여명은 고개를 저은 뒤 붉은 검기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니, 나는 이미 다른 신에게 소속된 몸이라서.”
“….”
신이란 단어가 나오자, 포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축복이라는 걸 용케도 알아봤군. 빨갱이의 감이냐? 아니, 그보다 빨갱이가 신을 섬긴다고? 스탈린 마르크스교의 총대주교나 뭐 그런 거냐?”
“비슷하지. 정답은 아니지만.”
“아, 그래…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겠어?”
“아니, 가속의 재사용 시간을 기다리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명이 그렇게 선언하자, 포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사이에 그걸 다 눈치챘다고? 하, 말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나? 아니면 Mother fucker 그냥 재수가 없는 날인가…?”
녀석이 말끝을 흐리는 순간, 여명의 검이 흐릿해졌다. 연달아 가속을 사용한 육체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검과 거리.
포시스가 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다시 한번 가속을 사용했지만, 불씨를 토해내는 검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화산쇄설의 불씨.
다음 순간, 검에서 터져 나온 폭발이 하수도를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