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54)
을 위한 세계는 없다-354화(354/817)
***
쿠구궁…!
폭발에 휘말린 하수도가 진동했다. 폭발이 지나간 자리로 후두둑 콘크리트 먼지가 떨어지고 발아래 고여 있던 물은 증발해 수증기가 되어 있었다.
먼지와 뒤섞인 수증기가 창백한 스모그가 되어 시야를 가리길 잠시.
“생각보다 튼튼하군.”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포시스에게 다가갔다. 화산쇄설에 휘말려 몸의 절반이 새까맣게 타버린 그는 스모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시스는 다가오는 여명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신의 신음 소리 때문에?
아니, 폭발의 충격이 아직도 두개골에 남아 삐이이- 이명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커허, 흑, 헉….”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폐와 심장이 동시에 찌그러지는 기분이었음에도, 포시스는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움직여라, 아직 끝이 아니다.
신경이 다 타버린 오른팔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움직이는 왼손과 다리를 사용해 어찌어찌 일어난 순간.
“fuck….”
그는 바로 코앞에 서 있는 여명과 눈을 마주쳤다. 여명은 마치 단두대의 그것처럼 덤덤하게 검을 들어 올렸고, 그대로…
삐이이이 – !
한계에 도달한 몸으로 가속을 사용하자 귀에서 더 큰 이명이 울렸다.
운이 좋다면 고막이 터졌을 테고, 운이 나쁘다면 뇌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
고작 검을 피하기 위한 것치고는 막대한 대가였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커흑…!”
가속으로 거리를 벌린 포시스는 피를 토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처절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본 여명은 생각했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상황에서 저렇게 도망가는 이유가 뭐지?
아카데미의 경비원들을 기다리나? 아니, 경비원들이 아무리 빨라도 지금은 무리였다. 그러면 떠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동료가 있군.”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욱 빨랐다. 여명은 비각술을 펼쳐 녀석에게 따라붙었다. 고작 10초도 되지 않는 순간 만에 거리를 좁힌 그가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
소리 없이 날아온 총알이 그의 발치를 맞췄다.
걸음을 멈춘 여명이 고개를 돌려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자, 하수도 저편에서 붉은 머리의 여성이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붉은 별! 멈추세요!”
“….”
“이 이상의 폭거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어서 검을 거두세요!”
그녀는 여명이 익히 알고 있는 여자였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세력도 아니고 미국의 CIA에 소속된 요원인데.
‘스칼렛 오하라.’
그렇다면 바닥에 기어 다니는 포시스 또한 미국 소속이란 뜻인데… 그 순간 문뜩, 여명은 퀴니 코완이 그에게 했던 의뢰 중 하나를 떠올렸다.
[아카데미에 숨어든 ‘대행자’ 암살]바닥을 기고 있는 포시스가 그 유명한 미국 예언자의 대행자인 걸까? 여명은 의문이 떠오르는 즉시 스칼렛을 떠봤다.
“CIA와 대행자가 아카데미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
그의 입에서 CIA와 대행자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스칼렛은 표정을 숨겼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과 심장 박동까지는 숨길 수 없었으니까.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 여명이 연이어 물었다.
“예언자가 날 잡아 오라고 하던가?”
“….”
기만과 거짓은 상상력이란 토양 위에서 싹트는 법.
스칼렛이 눈동자 위로 떠 오르는 의구심을 숨기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할수록, 그녀의 총구가 흔들렸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붉은 별.”
“….”
“할 말은 끝났나? 그러면 이제 끝을 보지.”
여명이 무장 혈청의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스칼렛이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모두…! 모두 오해로 벌어진 일입니다! 붉은 별, 저희는 당신에게 어떠한 악감정도 없고, 따로 당신을 노린 적도 없습니다!”
“오해? 보자마자 검을 휘두르는 오해라… 그 오해,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걸.”
여명이 차가운 눈으로 포시스를 내려다보자, 스칼렛이 입술을 씹었다.
“…그, 그 점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두 저희 대행자의 실수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드리겠습니다.”
“여긴 법정이 아니다. 인정이나 사과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한 여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스칼렛이 황급히 손을 들며 말했다.
“보, 보상! 이번 일에 대해 보상하겠습니다!”
여명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포시스의 등을 지그시 짓누른 뒤에 물었다.
“…보상?”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정보와 목숨을 교환하자고?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스칼렛이 곧바로 대답했다.
“하, 합리적으로 생각하세요. 저희 대행자를 죽여 펜타곤의 추적을 받느니, 차라리 정보를 받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정보가 진짜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그쪽 말은 어떻게 믿지? 증명할 수 없는 개소리에 넘어갈 생각 없다.”
“….”
그러자 스칼렛은 말문이 막힌 듯 잠시 눈을 굴리다가, 포시스의 숨소리가 옅어지는 걸 보고 다급히 말했다.
“사실만 말하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원하는 사람, 정보… 뭐든지 말해보세요. 첫 번째 질문은 제 질문이 사실이라는 증명을 위해 쓰겠습니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행자를 살려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기라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모습.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여명은 포시스의 목에 검을 대며 물었다.
“주가시빌리를 극한까지 익힌 사람들의 명단을 불러봐라. 단, 현재 살아있는 놈들만.”
붉은 별이 할만한 질문. 그 질문을 받은 스칼렛은 곧바로 대답했다.
“저, 전 드레이테리얼 동궁정백 비코프… 옛 지배자들 소속의 독화… 그리고… 당신. 이렇게 셋입니다.”
“….”
여명은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다른 두 명의 이름이 정확하게 나온 걸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CIA의 정보가 어마어마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여명은 포시스의 목에 겨누고 있던 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킴 필비는 현재 어디 있나.”
시카고에서 그를 습격하고, 붉은 차원문으로 도망친 KGB의 이름.
“해럴드 에이드리언 러셀 킴 필비….”
스칼렛은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잠시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거린 뒤 말했다.
“그는 동궁정백 비코프와 손을 잡고 차원문 너머에서 혁명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 외에는 아직 저희도 파악하지 못했고요.. 됐나요?”
“나쁘지 않은 정보군. 목숨 하나로 쳐주지.”
“그럼 이제 포시스를 풀어주….”
여명은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이 녀석 말고, 그쪽 목숨.”
스칼렛이 무어라 항변하려 했으나, 여명은 경고의 의미로 포시스의 등을 짓눌러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이 녀석의 목숨값은 다음 질문으로 받지. 한국 정부를 뒤에서 조종하는 ‘각하’의 정체가 뭐냐.”
설마 그런 걸 물어볼지 몰랐다는 듯, 스칼렛의 눈동자에 경악이 서렸다.
“다, 당신이 그걸 왜…?”
“질문을 허락한 적 없다. 너는 대답만 해.”
“….”
스칼렛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 사이로 아카데미 경비원들의 것이 분명한 무수한 발소리가 들릴 때쯤.
그녀가 조심스럽게 일을 열었다.
“한국 정부의 각하, 그는… 이승만의….”
그 순간, 스칼렛의 등 뒤와 여명의 발아래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번쩍 – !
화약이나 LED처럼 과학적인 빛이 아니었다. 순수한 마나로 만들어진 빛.
여명이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스칼렛을 노려보는 사이, 주변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차원문 특유의 격렬한 마나.
여명이 빨갱이들이 사용하는 붉은 차원문을 떠올리기 무섭게, 스칼렛의 등 뒤에서 금빛 구멍이 생기며 스칼렛 빨아들였다.
‘또 이거냐.’
하긴, 빨갱이가 쓰는 걸 미국이 못 쓸 리 없었다. 여명이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 발아래에서 콰아아- ! 금빛 차원문이 열렸다.
포시스가 들어가기에 충분한 크기의 타원형 차원문.
여명이 재빨리 포시스의 몸을 붙잡았지만, 차원문은 포시스를 끌어당기는 동시에 여명을 밀어냈다.
또 이렇게 놓치나? 킴 필비나, 동궁정백이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럴 순 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을 연달아 당할 정도로 그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여명은 이를 악물고 포시스의 옷자락을 붙잡는 동시에 염동력을 펼쳐 최대한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차원문이 꿈틀거리며 더욱 강하게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화아악-! 보이지 않는 용이 그의 몸을 물고 흔드는 것 같은 충격이 몸을 감쌌다.
여명은 이에 질세라 무장 혈청을 뻗어 포시스의 등을 찔렀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혈청을 낚시 바늘 모양으로 바꿔 포시스의 몸에 고정했다.
차원문 너머로 쏟아지는 피, 파도치는 마나, 소리 없는 비명.
정체불명의 금빛 차원문의 마나와 여명의 힘겨루기가 이어지길 잠시.
어느 순간 차원문이 포시스를 끌어당기는 대신, 그대로 주둥이를 닫으려 했다.
그를 통과하게 하느니 포시스를 죽여버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움직임.
여명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그 순간, 여명은 포시스를 끌어당기던 힘을 거꾸로 돌렸다. 근육과 염동력, 그리고 터질듯한 마나가 방향을 바꿔 발아래 차원문으로 돌진했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차원문이 뒤늦게 두 사람을 전부 밀어내려 했으나,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여명은 너덜너덜해진 대행자의 몸을 방패 삼아, 차원문으로 돌입했다.
***
번- 쩍!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 무시무시한 추락감이 몸을 휘감는 찰나.
차갑게 식은 공기가 변하는 걸 느낀 여명은 포시스의 몸에 박아 넣었던 무장 혈청을 회수했다.
곧이어 그는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족히 수백 미터는 추락한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실제로 그가 떨어진 차원문은 3미터가 조금 안 되는 천장에 열려있었다.
그것도 고급스러운 장식이 가득한 방의 천장.
정신을 차린 여명은 곧바로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든 그의 눈이 긴장과 적의로 번뜩였다.
적의 차원문을 넘어온 만큼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까닭이었는데…
정작 그가 기대한 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떨어진 공간에 있는 건 머리부터 떨어져 기절한 스칼렛과 죽기 직전인 포시스, 그리고 신문을 오리고 있는 익숙한 남자뿐.
남자는 천장에서 떨어진 여명과 포시스를 보고도 별로 당황하지 않은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3번 대행자와 우리 반푼이 요원이 사고를 쳤군.”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방을 훑었다.
어떤 고급 호텔의 VIP룸처럼 보이는 방의 벽에는 남자가 스크랩한 무수한 기사와 사진이 가득했는데, 그것을 본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스크랩된 기사와 사진은 전부 그의 동급생, 전윤성의 것이었으니까.
여명의 표정을 본 남자가 물었다.
“이 아이를 알고 있나?”
“…얼굴은 알지. 미국의 미래, 전윤성.”
“가엽고, 동시에 자랑스러운 아이지.”
남자는 천천히 신문을 내려놓은 뒤 허리춤에서 방울이 가득 달린 작은 완드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사 대신 충고부터 하지. 미국의 요원을 죽이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걸세. 붉은 별.”
“충고? 충고는 그쪽이 들어야지. 무슨 일인지 모르면 함부로 충고하지 마. 특히 먼저 공격당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여명이 이죽거리자, 남자가 죽어가는 포시스를 힐끗 바라봤다. 그는 상황을 이해한 듯 한숨과 함께 말했다.
“3번 대행자는 결함품이라서… 후, 그래도 그는 미 국무성의 재산일세. 여기서 멈추는 게 어떤가. 멍청이를 훈계하는 건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충분한지 아닌지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거다. 전용섭.”
여명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온 순간, 전용섭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어쩐지 아침부터 재수가 없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