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56)
을 위한 세계는 없다-356화(356/817)
***
『내게 허락된 유일한 주사위. 이것을 그대에게 양도하겠다. 그 대가로 내 아이를 살려다오.』
거인이 내민 주사위를 본 순간,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 속에 담긴 어마어마한 힘 때문에? 아니.
반짝거리는 주사위의 빛을 따라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모든 고민들이 희미해진 까닭이었다.
포시스의 목숨, 화산쇄설, 붉은 별, 미국, 별, 전용섭, 그리고 복수…
고민이 사라진 빈자리로 차오르는 건 욕망이었다. 손만 뻗으면 저걸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욕망.
여명은 주사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그는 세티의 알몸을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만약 몸이 굳어있지 않았다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주사위를 잡았으리라.
『거래에 응하겠느냐?』
거인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당장이라도 ‘그러겠습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미그니움의 수많은 유혹을 견뎌낸 그의 이성이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붙잡았다.
그렇게 정신이 돌아온 찰나, 여명은 혓바닥을 씹어 피를 냈다.
입안에 피가 차고 눈앞이 아찔했지만, 인내심이란 본디 고통을 수반하는 미덕인 법.
목구멍으로 피가 흘러 들어간 뒤에야 여명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사위에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거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갑자기 이런 저열한 수를 쓰시는 이유가 뭡니까?’
『뭐라? 저열해? 감히! 내가 어떤 각오로 이걸 내어주는지 알고 그딴소리를…!』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주사위가 저열하지 않으면 대체 뭐가 저열….’
『정신을 홀려? 잠깐, 그대는 아직 자신의 신명을 깨닫지 못한 것인가?』
그때, 거인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명의 몸에서 번쩍-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도 태양처럼 강렬하게 반짝이는 빛.
주사위를 내밀던 거인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여명조차 놀라게 한 그 빛은, 등장만큼이나 갑작스레 사라졌다.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는 경고등처럼.
‘이게 뭔….’
얼떨떨하게 말끝을 흐리는 여명과 달리 거인은 침묵했다.
『….』
그리고 그 침묵이 길어지려는 찰나, 거인이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인정한다. 모든 건 나의 실수다. 내 아이를 쓰러트린 강함에 눈이 멀어 아직 신명을 모르는 자에게 덜컥 주사위를 내밀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군.』
‘….’
그건 여명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한 말이었다. 이곳에 다른 존재가 있는 걸까? 미그니움? 아니면 여명의 신?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거인은 어떤 답을 들은 것처럼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여명을 향해 말했으니까.
『인간 천여명. 마지막으로 묻겠다. 혹여, 주사위 말고 따로 원하는 것은 없느냐? 나는 이대로 내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거기까지 말한 거인은 먹먹한 표정으로 포시스를 바라봤다.
여명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저 히스패닉 양아치 살인마 새끼가 뭐가 이쁘다고?
하지만 원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쁜 법 아니던가.
여명은 잠시 입을 다물고 이대로 거래를 끝낼까 고민하다가, 문뜩 조금 전 거인이 말한 신명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제 질문 두 개… 아니, 세 개를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면, 포시스를 살려드리겠습니다.’
『질문? 주사위 대신 고작 질문 세 개로 내 아이를 살려주겠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입니다. 별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니.’
그러자 거인은 어디 해보라는 듯 삐딱하게 왕좌에 앉았다. 여명이 말했다.
‘신명이라는 게 정확히 뭡니까?’
『문자 그대로, 우리의 이름이다. 이 경우에는 세상에서 잊힌 이름을 뜻하는 것이지만… 굳이 아는 것을 물어봐서 내 진실성을 시험하지 말라.』
‘….’
***
속으로 뜨끔했으나 여명은 티를 내지 않고 바로 다음 질문을 꺼냈다.
‘그러면 별들은 왜 떨어진 겁니까?’
『복잡하고, 어리석은 질문이군.』
말은 그렇게 했으나, 거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원문 너머에서 유입된 마나로 인해 생각과 상상이 힘을 가지게 되었고, 천상과 지상을 이어줄 세계수가 온 세상에 퍼졌다… 그런 기술적인 이야기는 나도 이 이상 알지 못한다. 하지만…』
‘….’
『내가 아는 것을 말하자면, 어떤 별은 자발적으로 이 땅에 떨어졌다.』
‘자발적’이란 단어를 꺼내는 그의 시선은 여명에게 꽂혀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억지로 떨어졌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거인은 마지막으로 포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하지만 이 땅에 떨어진 방법이 무엇이건, 이유는 모두 똑같다. 우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외면할 정도로 현명하지 못했다. 그것이 전부다.』
‘…아이의 울음소리요?’
『지금 이 세상에 떨어진 별 중 축복받으며 태어난 용사나 성인(聖人)이 없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나 같이 제조번호가 찍혀있는 실험 쥐인 이유는?』
‘….’
『너희들은 죽은 세계수의 시체로 낚싯대를 만들고, 실험실에서 만든 미끼로 우리를 낚아 올렸다. 그렇기에 나는 이 시대를 경멸한다. 이 시대에 휩쓸려 우리를 떨어트린 모두를….』
혐오한다. 뒷말을 꺼내지 않은 거인은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포시스의 몸을 묶고 있는 시곗줄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대답은 되었나?』
여명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바로 생각하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제 신명이 뭔지… 하다못해 힌트라도 주실 수 있습니까?’
거인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다. 넌 이미 너무 많은 힌트를 가지고 있으니, 내가 줄 수 있는 힌트는 정답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정답을 말하는 대가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여명은 자신을 위해 주사위를 굴리고, 머리가 쪼개졌던 새 머리 거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은 없었다. 애초에 이 질문은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었으니까.
거인이 말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하라. 조금 전 질문에서 증명한 것과 같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성실히 대답하겠다.』
‘….’
여명은 바로 질문하지 않고 잠시 고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백 개쯤 질문한다고 할 걸- 같은 실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길 잠시.
그의 시선으로 불현듯, 포시스의 몸에 걸려있는 시곗줄과 회중시계가 보였다.
정지된 세계에서만 보이는 시계라니. 전용섭도 저걸 두르고 있던데… 대체 정체가 뭐지?
‘그 시곗줄은 뭡니까?’
『…마지막 질문이 그건가? 자신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내 아이와 관련된 질문?』
‘뭐 이상할 거 없잖습니까. 제 이름에 대한 힌트도 말 못하시는데… 아, 별을 떨어트린 방법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군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제 연인의 신명은?’
『둘 다 말할 수 없다.』
‘그거 보세요.’
여명이 그렇게 대답하자 거인은 무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언뜻 보면 안타까움 같기도 하고, 기대감 같기도 한 표정.
직후, 거인이 시곗줄을 만지며 대답했다.
『이것은 ‘예언자’가 자신의 대행자에게 부여한 시간의 권능이자 금제다. 내 아이가 받은 권능의 이름은 가속, 그리고 저기 있는 두 번째 대행자가 받은 권능은 짧은 도돌이표지.』
시간? 권능? 포시스의 가속 능력을 떠올린 여명이 되물었다.
‘권능이라니… 예언자가 신이라도 됩니까? 아니, 그보다 왜 대행자에게 금제를…?’
『쓸만한 짐승에게는 그만큼 단단한 목줄을 거는 것이 인간이지. 그대 또한 잘 알고 있을 터.』
쓸만한 짐승과 목줄. 문뜩 세티와 그녀의 자매들이 떠올린 여명은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거인이 다시 왕좌에 앉으며 말했다.
『이것으로 질문은 모두 끝났다. 이제, 약속을 지켜다오.』
여명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하자, 거인의 머리를 비추던 휘광이 일렁거렸다.
『거래는 이행되었다. 그대의 자비에 축복을, 그대를 간택한 그녀의 염원에 행운을….』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여명이 끼어들었다.
‘중요한 건 아닙니다만, 포시스… 이 친구, 목줄이 풀리면 주인에게서 도망칠까요?’
『뭐라?』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와 어깨를 들썩이는 거인을 향해, 여명이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만약 도망칠 야성이 남아있다면… 제가 금제를 풀어줄 수 있습니다.’
『….』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대가로 무엇을 주실 겁니까?’
거인은 대답 대신 예의 주사위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그대로 주사위를 든 손을 꽉 쥐었다.
그가 다시 손을 폈을 때, 그곳에 놓인 건 주사위가 아닌 새하얀 조개였다.
누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음에도 여명은 조개 속에 주사위가 봉인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거인의 목소리가 그 느낌을 확신으로 바꿨다.
『가져가라. 그대가 신명을 깨닫게 되면 쓸 수 있도록 봉해놨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개가 정지된 시간을 가르며 여명의 주머니를 향해 날아갔다.
묵직해진 주머니의 감각을 느낀 여명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 이건 미처 묻지 못한 건데, 전용섭이 가진 짧은 도돌이표는 대체 뭐 하는 권능입니까?’
***
“안 돼!”
전용섭은 포시스의 얼굴로 떨어지는 붉은 별의 검을 보며 소리쳤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아무리 빠른 마법이라도, 이 순간 초인의 검보다 빠를 수는 없었으므로.
젠장.
전용섭은 눈을 질끈 감으며 다음 수를 준비했다.
저 빌어먹을 놈 때문에 권능을 낭비하는 건 아쉬웠지만, 펜타곤으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나았…
그때, 붉은 별이 검을 멈췄다.
어찌나 아슬아슬한 순간에 멈췄는지, 검기에 잘린 포시스의 머리카락들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왜 멈춘 거지? 전용섭은 그의 완드, 황무령(黃巫鈴)을 겨누며 물었다.
“…이제와서 대화라도 할 생각이냐?”
붉은 별은 대답 대신 기관단총을 들었다. 구소련 특유의 기술로 만들어진 총구가 전용섭의 미간을 노렸다.
전용섭은 즉시 반응했다.
“팔장신(八將神), 태세(太歲)!”
방울이 짤랑거리는 것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이 붉은 별의 전신을 붙잡았다. 녀석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
염동력 같은 초보적인 마법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출력을 자랑하는 마법이었지만…
붉은 별의 어깨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과 동시에, 주문에 틈이 생겼다.
두두두두! 곧바로 기관단총의 사격이 이어졌다. 전용섭은 탁자 아래로 몸을 던지며 주문을 외웠다.
“이 방위에 네가 서 있을 흙은 없을지니!”
그사이 붉은 별이 날아오듯 거리를 좁혔다. 전용섭의 머리 위로 기다란 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검을 휘두르면 닿는 거리. 마법사와 초인의 간극.
“팔장신(八將神), 황번(黃幡)!”
다행히 전용섭의 주문이 붉은 별의 검보다 한 걸음 더 빨랐다.
완드에서 주문이 터져 나온 바로 다음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쭈욱- 벌어졌다. 전용섭은 녀석에게 인식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다음 주문을 쑤셔 박았다.
“태세!”
꽈악-! 쥐어진 주먹을 따라 예의 보이지 않는 힘이 붉은 별의 목을 졸랐다.
한국 정부가 그에게 처먹인 막대한 영약을 증명하듯,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붉은 별의 목뼈를 압박했다.
아무리 주가시빌리라도 인간인 이상 목뼈가 부러지면…!
그렇게 전용섭이 여명의 목을 꺾어버리려는 듯 강하게 주먹을 쥔 바로 그 순간.
붉은 별이 그를 향해 똑같이 주먹을 쥐었다.
으드득!
그건 염동력이 전용섭의 어깨를 으깨버리는 소리였다. 갑작스레 발동된 염동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전용섭의 온몸을 붙잡았다.
“마법? 대체 어떻… 컥!”
뒤늦게 전용섭이 경악했지만, 붉은 별은 그 이상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문자 그대로 전용섭을 ‘휘둘러’ 천장에 처박았다. 천장을 비추던 전등이 깨지며 유리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크흡!”
어마어마한 충격에 전용섭은 피를 토했다. 본능적으로 몸에 마나를 두르지 않았다면 그대로 척추가 조각났을 충격.
붉은 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전용섭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다시 천장으로, 다시 바닥, 천장, 바닥…
쾅, 쾅, 쾅! 전용섭의 몸이 연달아 천장과 바닥에 도장 자국을 남겼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골백번 죽을 충격이었음에도 그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저번처럼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됐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가 붉은 별의 염동력을 풀었을 때…
“이름값에 비해 실력은 별로군.”
붉은 별이 든 기관단총의 총구가 그의 이마를 꾸욱- 눌렀다.
그리고 붉은 별이 방아쇠를 당긴 순간.
전용섭은 권능을 발동했다.
***
지구의 악보에는 도돌이표라는 기보가 있다.
다 카포, 코다, 달 세뇨 등 세부적인 부분을 넘어가고, 본질적으로 도돌이표가 뜻하는 바 간단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연주하라.
평생 음악과 별다른 인연 없이 살아온 전용섭이었으나, 예언자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권능의 이름은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대행자의 그것처럼 과하지도 않고, 세 번째 대행자의 그것처럼 너무 직설적이지도 않은 이름.
멍청한 세 번째 대행자는 고작 1분도 안 되는 시간을 되돌리는 주제에 거창한 이름이라고 비웃었지만…
전용섭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 떡이 되어 누워있는 세 번째도, 지금 붉은 별 앞에서 땀을 흘리는 자신도 결국 게임판의 말일 뿐이었으니까.
그나마 바둑 알이나 체스의 폰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스스로 살 방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리라.
“붉은 별… 넌 대체 정체가 뭐냐?”
전용섭은 방울 달린 완드로 붉은 별을 겨눈 채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싸움의 긴장감이 가득했다. 고작 말 몇 마디 나눈 상대에게 보여주는 긴장감치고는 참으로 살기등등했다.
그러나 붉은 별의 반응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전용섭을 노려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첫걸음에 무장 혈청과 기관단총을 꺼내고.
두 번째 걸음에서 마나를 끌어 올린 뒤.
세 번째 걸음과 함께 땅을… 박차지 못했다.
전용섭이 한발 앞서 주문을 완성한 까닭이었다.
“삼살방(三煞方), 재살(災煞)!”
곧이어 방의 전구와 의자, 심지어 스크랩한 사진 사이에서 청색의 주문이 터져 나오며 붉은 별을 덮쳤다.
녀석이 뒤늦게 방아쇠를 당겼지만, 이미 완성된 주문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파지직! 찰나의 순간 속에서 청색 섬광은 총알을 전부 집어삼키며 붉은 별을 집어삼켰다.
일반적인 초인이라도 치명상을 면하기 어려울 강력한 마법이었으나, 전용섭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초인과 마법사의 싸움이 아니었다. 상대는 마법‘도’ 다룰 수 있는 초인. 주문을 쓸 시간을 줘선 안 된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강하게! 몰아치고 또 몰아쳐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강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번쩍거리는 주문 사이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수류탄 다발이 그를 향해 날아왔으니까.
이런 미친 새끼. 마법만 있는 게 아니었다고?
전용섭은 기겁하며 염동력으로 수류탄을 붙잡았다. 녀석에게 그대로 되돌려주려는 생각이었는데…
탕!
붉은 별이 수류탄 다발을 쏴버렸다. 자폭? 아니, 주가시빌리가 고작 이런 폭발에 휘말려서 치명상을 입을 리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간 전용섭이 재빨리 쉴드를 펼쳤지만, 기절한 세 번째 대행자와 CIA 요원까지 챙긴 게 화근이었다.
카가각-! 폭발 사이로 날아온 붉은 별과 그의 검이 쉴드와 충돌하며 불씨를 토했다.
제기랄.
전용섭은 녀석의 마법을 경계하면서 쉴드를 너머로 마나를 전개했다.
방에 준비된 마법진들이 그에게 호응하며 마법을 일으켰고, 곧이어 붉은 별의 전신에 온갖 주문들이 쏟아졌다.
벼락과 불길이 피부를 태우고, 칼을 베는 바람과 추위가 뼈와 근육을 찢었다.
하지만 쉴드를 압박하는 붉은 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에 실린 마나를 늘리는 게 아닌가.
“이런 엿 같은…?”
단순한 주가시빌리가 아니라 극의에 도달한 수준이었나? 전용섭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녀석의 검이 쉴드를 뚫었다.
그리고 미간에 검이 틀어박히기 직전, 그는 권능을 사용했다.
***
“붉은 별…!”
전용섭은 한 손으로 미간을 주무르고, 완드를 든 손으로는 붉은 별을 겨눈 채 말했다.
연달아 권능을 사용한 탓일까,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고작 몇 분 만에 두 번이나 죽을 뻔했다.’
좁은 공간, 그의 보호가 필요한 두 머저리, 그리고 주가시빌리와 마법사의 상성을 따져봐도 어이가 없는 결과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스탈린이 살아 돌아온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혼란스러워하는 전용섭과 상관없이, 붉은 별은 아까와 똑같이 움직였다.
첫걸음에 무장 혈청과 기관단총을 꺼내고.
두 번째 걸음…
“히라리아의 바람이여!”
그때, 전용섭이 먼저 선공을 가했다. 죽이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 방의 벽 너머로 밀어서 전장을 바꾸기 위한 공격.
그의 의도는 정확히 성공했다. 붉은 별은 갑작스러운 기습을 피하지 못했고, 바람에 휘말려 콘크리트 벽을 뚫고 저 너머로 날아갔다.
이제 넓어진 전장을 이용해 해법을 찾아야…
그렇게 심기일전하는 전용섭의 시야로, 붉은 별이 흘린 구슬이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다섯 개 남짓한 구슬.
“…베리야의 구슬?”
전용섭의 욕설과 동시에, 구슬이 열리며 주변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구슬 주변으로 아공간의 어두운 입구가 드러나고, 그 너머에 잠들어 있던 섬뜩한 눈동자가 전용섭을 노려봤다.
그와 마주하는 눈동자만 족히 수십 쌍.
어디 사막 한가운데라면 모를까, 붉은 별과 상대하면서 몰래 처리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KGB 기관단총에, 주가시빌리에, 베리야의 구슬…
“이런 빨갱이 새끼가 어디서 갑자기….”
첫 괴수가 바닥으로 내려서는 순간, 전용섭은 권능을 사용했다.
***
“쿨럭, 붉은 별… 이 정신 나간 새끼.”
전용섭은 권능의 반작용으로 들끓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거리낌없이 베리야의 구슬을 흩뿌린 모습을 본 탓인지, 적의를 숨기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붉은 별의 반응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 순간이 반복된다는 걸 모를 테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전용섭은 더 이상 녀석과 싸울 수 없었다.
이길 수 없어서? 아니, 대행자의 의무 때문에.
“그만!”
전용섭이 기관단총을 꺼내는 붉은 별을 향해 소리쳤으나, 붉은 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는 손을 양손 머리 위로 올리며 말했다.
“붉은 별, 싸움이 아닌 대화로 풀지.”
“대화? 이제와서?”
“…그래, 이제와서.”
그렇게 말한 전용섭은 침을 삼켰다. 자칫하면 권능을 낭비할지도 몰랐으나, 그가 대행자인 이상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입술을 핥은 그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붉은 별, 너는… 바깥에서 온 자냐?”
“…흐음?”
“만화나 소설 작가, 독자, 게임 플레이어… 아무튼 그런 존재인가?”
전용섭은 필사적으로 붉은 별의 반응을 살폈다. 당황할까? 아니면 코웃음? 그것도 아니면 부정?
눈썹의 떨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눈빛과 달리, 붉은 별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환생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