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57)
을 위한 세계는 없다-357화(357/817)
***
『환생자? 정말인가?』
머리를 울리는 별의 목소리에 여명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게 진짜겠습니까? 당연히 거짓말이죠.’
갑자기 플레이어니, 뭐니 물어보길래 아카데미에서 ‘작가’를 속일 때 했던 거짓말을 똑같이 반복했을 뿐이다.
평소에 자주 사칭하던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감독’이나 ‘작가’ 같은 녀석들을 사칭하면 전용섭이 눈치챌 것 같아서 꺼낸 말이기도 했는데…
“…환생, 환생이라.”
여명의 의도가 먹힌 것일까? 전용섭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훑었다.
『…흐음.』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의심의 콧소리를 내는 별. 여명은 포시스의 정신 어딘가에서 궁시렁거리는 별을 향해 한 소리 했다.
‘뭘 또 의심하고 있습니까? 정말로 아닙니다.’
『하지만 그대는… 도돌이표 속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나.』
‘예, 그게 이상한 일입니까?’
『당연히 이상한 일이지. 내가 아는 한, 시간의 권능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별의 말마따나, 여명은 전용섭이 계속 시간을 뒤로 돌릴 때마다 그대로 기억을 유지했다.
덕분에 시간이 돌아갈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해주려는 별의 배려가 무색해졌으나,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도돌이표의 권능을 미리 알고 있어서 그런 거겠죠.’
여명은 별다른 감흥 없이 대답했다. 시간과 육체가 뒤로 돌아가는 경험은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여명이 만난 용이나 10강들의 존재감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손색이 있었다. 꿈을 통째로 조종한 야아톨라의 권능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러했고.
『….』
거기까지 이어진 여명의 생각을 읽은 별이 침묵하는 사이, 전용섭이 완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붉은 별. 네가 정말로 환생자라고 치자. 그걸 증명할 수 있나?”
“증명? 내가 왜?”
“만약 증명할 수 있다면… 미국이 기꺼이 너에게 손을 내밀 테니까.”
이건 또 뜻밖의 이야기였다. 사실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한 거짓말일까?
플레이어와 작가 모두 미국과 아무 연관이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컸으나, 전용섭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CIA는 오래전부터 너 같은 자들을 위한 특별한 지원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뭘 원하지? 돈? 힘? 명예? 네가 원한다면 평화도 줄 수 있다.”
“…달콤한 말은 믿을 수 없는 법이지. 내가 그걸 믿을 것 같나?”
전용섭은 쓰러진 포시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넌 이미 시카고를 테러했고, 우리 요원을 해쳤지.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미국은 네 상상보다 훨씬 더 넓은 가슴을 가진 나라다.”
그러자 여명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배신자를 받아줄 정도로?”
“…그래, 배신자도 품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나라지.”
노골적인 도발에도 전용섭은 걸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 삼아 한껏 분위기를 잡았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빨갱이들의 유산을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손을 잡아라. 냉전에서 패배한 자들의 무덤이나 파고 다니는 게 아니라, 승자의 자리를 함께 누리는 거다.”
한껏 힘을 준 목소리와 웬만한 배우 뺨치는 외모, 그리고 강렬한 눈빛까지.
마치 연극의 한순간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여명은 손을 내민 전용섭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혈청을 혈관으로 회수하며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증명하면 되지?”
전용섭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화색이 돌았다.
“따로 증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네가 환생 전에 어느 세계, 어떤 시간대에 살았는지 말해다오. 예언자께서 확인해주실 거다.”
“….”
겨우 그 정도만 듣고도 환생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그러나 허세라기에는 전용섭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다.
‘예언자란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뭐길래….’
시간의 권능을 나눠주는 것도 모자라 그런 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걸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초강대국인 미국이라면 이상할 것 없었으니까.
뭐 어쨌든, 그사이 가만히 듣고 있던 별이 끼어들었다.
『언제까지 이 지루한 대화를 계속할 것이냐? 빨리 내 아이를 치료해다오.』
‘이제 끝났습니다. 뽑아낼 수 있는 정보는 다 뽑아낸 것 같으니.’
여명은 속으로 별에게 대답한 뒤, 전용섭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긴장으로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
여명은 전윤성과 닮은 그 눈동자를 보며 살인과 제압, 둘 중 어느 선택지를 고를지 고민했다.
제미니 시티에서 그랬던 것처럼 목뼈를 부러트릴까? 아니면 그대로 목을 날릴까.
어느 쪽이건 기습만 성공한다면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고 끝낼 수 있겠지만, 미국과 전윤성의 존재가 걸렸다.
미국 입장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유명인이 살해당하는 것과 비밀 업무 중인 대행자가 제압당하는 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급생 아버지의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건, 뭔가 다른 의미에서 선을 넘는 느낌이었…
『내키지 않으면 죽이지 말라.』
그때, 그의 생각을 읽은 별이 속삭였다. 여명이 왜냐고 묻기도 전에 별이 덧붙였다.
『무릇 살인이란, 영웅의 미덕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감정의 발현이자 힘의 증명일 때의 이야기지. 내키지 않는 살인은… 영웅이 아니라 군인의 업이다.』
‘어… 꽤 골 때리는 조언인 거 아시죠?’
『나를 숭배하던 시대에는 다들 그랬다. 우리 신화의 영웅들이 얼마나 전문적인 살인자들이었는지 알면 놀랄 걸?』
그 뻔뻔한 대답에 여명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래도 위대한 존재의 조언은 조언인지, 속이 조금 편해졌으니까.
‘목뼈를 두 번이나 부러트리는 건 좀 미안하지만…’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전용섭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전용섭.”
“…말해라, 붉은 별.”
“너는 1848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가?”
“뭐?”
***
“1848년,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최초로 공산당 선언을 출판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지. 공산주의는 자신들의 목적이 기존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
그가 갑자기 빨갱이 같은 말을 내뱉자, 전용섭은 물론이고 가만히 듣고 있던 별조차 입을 다물었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여명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연기를 이어 나갔다.
“내 전생이 언제였느냐고? 난 1917년, 붉은 혁명을 기억한다. 적백 내전을 기억하고, 1941년, 대조국 전쟁을 기억한다.”
“너….”
그의 말에서 숨길 수 없는 소련의 향기를 맡은 전용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명은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진정한 혁명가는 협잡꾼과 부르주아지와 협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쉽게도 전용섭, 너는… 둘 다 포함되는군.”
그리고 다음 순간, 방울 소리가 울리며 전용섭이 내려놨던 완드에서 주문이 터져 나왔다.
손에 들지 않아도 발동할 수 있는 마법.
그건 전용섭이 여명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증거답게, 전용섭은 조금 전 반복한 전투를 떠올리며 공격을 시작했다.
마법과 주가시빌리로 틈을 만들지 못할 정도로 공격을 퍼붓고, 베리야의 구슬을 사용할 것을 예상하며 지원을 부른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시간을 되돌릴 틈만 있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도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반 마력장?”
전용섭은 갑자기 흩어지는 마법들을 보며 기겁했다.
설마, 소련의 인공 성물까지 가지고 있단 말인가? 또 그걸 지금껏 숨기고 있었고?
그는 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으며 권능을 사용했다.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흩어지는 마법 사이로, 미처 인식하지 못한 손 망치가 날아와 그의 턱을 후려쳤다.
빠각-! 망치에 맞은 전용섭의 고개가 픽 돌아갔다.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는 모양새가 심히 아슬아슬했다.
『아니, 내 조언을 듣고도 기어코 죽인 것이냐?』
별이 놀란 듯 말했지만,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자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턱이 돌아가서 그렇지.
“살긴 살았어요.”
여명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계획은 인공 성물의 반 마력장과 촉수를 이용해 기습하는 거였는데… 하필 촉수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피부에 이식하지 않으면 촉수는 사용할 수 없는 모양.
그래서 되는대로 세티에게 받아놓은 망치를 던졌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위력 조절은커녕, 던지는 각도도 틀려서 목이 아닌 턱을 맞춰버렸다.
『그래도 훌륭한 기습이었다. 이번에 기절시키지 못했으면 적어도 세 번은 더 싸워야 했을 테니.』
턱 사이로 침을 흘리며 기절한 전용섭을 향해, 별이 딱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명은 ‘목뼈를 부러트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라는 대답을 삼킨 뒤, 기절한 포시스를 어깨 위에 짊어졌다.
이제 별과의 약속을 지킬 때였다. 뭐, 일단 금제를 풀 수 있는 적절한 장소부터 찾아야겠지만.
곧이어 그가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데, 뒤에서 철컥- 누군가 총을 드는 소리가 들렸다.
“머, 멈춰요.”
스칼렛 오하라. CIA 요원인 그녀는 여명의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지만, 꿋꿋이 여명을 겨눴다.
“붉은 별. 포, 포시스… 그 멍청이를 놔줘요. 당장.”
“….”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목숨 아까운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여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죽고 싶나?”
“…죽일 테면 죽여봐요, 평생을 엿 같이 산 내 인생…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묘하게 거슬리는 여자였다. 손가락을 튕겨 그녀를 기절시키려던 여명은 이참에 그녀에게도 거짓 정보를 심기로 했다.
“아니, 네가 여기서 죽는 일은 없을 거다. 죽일 거라면 차원문 너머에서 죽였겠지.”
“…뭐라고요?”
“잘 생각해보라고. 스칼렛 오하라.”
여명은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말한 뒤,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다행히, 뒤통수로 총알이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
전용섭이 자리 잡고 있던 빌딩은 여명의 예상과 달리 호텔이 아니었다.
바로 앞으로 바다가 보이는 호화로운 비지니스 빌딩.
그 용도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건 복도로 나가자마자 경보가 울렸다는 사실이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경보가 울릴 줄 몰랐던 여명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대신, 제3의 길을 찾았다.
그러니까, 복도 창문을 깨고 바깥으로 뛰어내렸다는 뜻이었다.
『아름다운 곳이로군.』
여명이 얼음송곳을 발판 삼아 건물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는 사이, 별이 말했다.
확실히, 어둠 사이로 야경을 뽐내는 도시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빌딩 정면에 있는 항구를 가운데 두고 좌측으로는 커다란 다리가, 오른쪽으로는 조개나 용의 비늘을 닮은 지붕을 가진 아름다운 건물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본 여명은 다른 의미에서 안도했다.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 극장… 시드니였나.’
로드 하우 아카데미에서 불과 몇 시간 떨어지지 않은 도시였다. 자칫해서 차원문 너머로 날아왔으면 어쩌나 했건만,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도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성검이 직접 수호하는 도시였으니까.
자칫 도주가 늦으면 성검과 칼부림을 벌여야 할지도 몰랐다.
성물지기를 두들겨 패던 성검을 떠올린 여명은 짧게 혀를 찬 뒤, 가까운 건물 옥상에 착지했다.
삐이이이잉 – !
뛰어내린 빌딩에서 들려오는 경보가 귀를 찌르고, 저 멀리에서 경찰차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할까.
일단 어깨에 메고 있는 포시스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건 확실했다.
문제는, 너덜너덜한 초인을 데리고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언데드였다면 인벤토리에 넣어가는 건데…
『여기까지 와서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지? 그녀의 간택자여. 죽으면 금제를 풀 수 있다는 식의 헛소리는 용납할 수 없다.』
그의 생각을 읽은 별이 걱정스레 한마디 했으나 다행히 그의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명이 GPS를 확인하기 위해 꺼낸 휴대폰 화면 위로, 그를 도와줄 사람의 문자가 떠올라 있었으므로.
[구더기 공주]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