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65)
을 위한 세계는 없다-365화(365/817)
***
조지 칸 선생은 여태껏 수업을 재낀 여명을 징계하거나, 혼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이번 정학이 어떤 의미이며, 교정 교육이 어째서 필요한지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아주 무뚝뚝하고, 꼼꼼하게.
-젊음의 자유는 자칫 방종으로 이어질 수 있고….
-마나라는 무기를 가진 초인은 더욱더 자기 수양에 힘써야 하며….
질려버린 여명이 챙겨온 ‘샤토 디켐’으로 상황을 무마해보려 했지만, 오히려 설교를 추가하고 말았다.
-자칫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선물을 건네기보다는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게 낫다. 특히 남에게 부탁받은 선물이라면 더욱….
그동안의 수업을 벌충하려는 듯, 설교는 계속 이어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전윤성과 아도가 정신줄 놓고 꾸벅꾸벅 졸 정도로, 오랫동안.
그리하여 해가 기울어지고 정규 수업조차 끝날 시간이 될 때쯤, 설교가 끝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천여명 학생? 부디 내 조언이 자네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여명은 간신히 질린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내가 아니라 자네가 해야지. 이걸로 7일 중 1회 출석일세.”
“….”
깐깐하시네. 여명이 쓴웃음을 삼키려는데, 이어진 조지 칸의 목소리가 그 쓴웃음을 박살 냈다.
“아, 그리고 반성문 써오게. 오늘 지각과 여태껏 빠진 수업 날까지 전부 포함해서, 하루마다 한 편씩.”
“…반성문이요?”
“그럼 빠진 수업은 다 없던 일로 하려고 그랬나?”
“….”
반성문? 시말서 같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학생에게 시말서를 쓰게 하다니.
‘이름만 다르지, 학생이나 노동자나 도긴개긴이네….’
검정고시는 봤어도 학교는 다녀본 적 없는 여명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떠올리는 사이, 아도-길로가 입을 열었다.
“조지 선생님, 이제 동아리실로 가시죠? 저도 그러려고 온 거니까요.”
여기서 아도가 말한 동아리실은 지구-아샤 문화 교류 동아리라는 고리타분한 이름을 지닌 동아리실을 뜻했다.
아도가 여명에게 해준 말에 의하면 동아리실에 ‘혼혈을 구분하는 마법진’ 같은 게 걸려 있다나.
조지 칸 선생님이 대체 왜 성녀나 세티 자매, 그리고 여명이 혼혈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려는 건지는 아도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초대 학장과 연관된 일이란 것 정도?
뭐, 아무튼.
아도의 제안을 들은 조지 칸 선생은 잠시 뜸을 들였다.
전윤성은 그가 교장과 가단 학부장의 말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릿속의 고민을 밀어버린 조지 칸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쇠도 달궈졌을 때 두들긴다고, 그래, 지금 바로 가지.”
그 엄격한 조지 선생님이 윗분들의 부탁을 이렇게 깔끔하게 무시하다니?
갑자기 궁금증이 생긴 전윤성은 슬쩍 눈치를 보며 세 사람을 따라 교실을 나섰다.
다행히 일행 중 누구도 전윤성이 따라오는 걸 말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렇게 팔 자른 놈과 팔 잘린 놈, 생활 지도 교사, 그리고 정체 모를 선배가 함께 다니는 기묘한 일행이 함께 걷길 잠시.
중앙 섬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면서, 조지 선생이 아도에게 물었다.
“성녀나, 세티 자매 같은 여학생들을 데리고 오는 건 어려울 것 같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아도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어렵죠. 저랑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선생님도 기대 안 하셨잖아요.”
“난 자네 여동생에게 기대했지.”
“장담하는데, 제 동생이 저보다 더 가능성 없을 겁니다.”
차마 동생에 대한 악담을 꺼낼 수 없던 아도는 그렇게 둘러댄 뒤, 뒤따라오는 천여명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걱정하지 마세요. 적어도 성녀랑 홍세티 둘은 오늘 동아리실로 올 테니까.”
“음? 어떻게?”
“그야… 천여명이 오잖아요.”
“…?”
조지 선생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아도-길로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손사래를 쳤다.
“어우, 그냥 제 말 한 번만 믿어보세요. 뭐하면 내기라도 하실래요?”
“아니. 나는 도박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냥 널 믿어보마.”
다행히, 조지 선생의 믿음은 현실이 되었다.
그것도 아도의 예상을 뛰어넘은 형태로.
***
로드 하우 아카데미 중앙 섬.
자습의 전당이라는 이름보다 그냥 ‘동아리 건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커다란 건물은 올해 특히 더 소란스러웠다.
학년과 학과를 가리지 않는 무수한 학생들로 북적여서?
아니면 학기 초 연이은 테러 때문에 억눌렸던 학생들의 열기가 터져 나와서?
그것도 아니면 이제야 불붙은 동아리실 쟁탈전 때문에?
정답은 전부였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독서 동아리원들이 비품으로 귀마개를 구매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만큼은 소란의 정도가 더 했다.
-…가, 이론 물리…!! 마탑…!!
-꺄아아!! …성…님! …이쪽을… 보셨…!!
소리가 얼마나 큰지, 아예 건물이 쩌렁쩌렁 흔들릴 정도.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그 어마어마한 소음을 접한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으며 앞서가는 아도에게 물었다.
“선배, 여기 평소에도 이럽니까?”
“…그, 글쎄? 시끄러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여명이 묘한 불길함을 느끼며 건물의 계단을 오르자, 귀를 찌르는 소음이 정확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릇! 마탑의 미래가 마법 동아… 아니, 이론물리학 동아리에 안 들어오는 게 말이 되냐!
-성녀님! 저희 동아리에 들어오셔야 해요!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을까.
이 소란이 성녀와 그릇 때문이라는 걸 확신한 여명은 한숨을 꾸욱 삼켰다.
그리고 목적지인 지구-아샤 문화 교류 동아리실 앞에 도착한 순간, 그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동아리실 앞에 적어도 수십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으니까.
“오, 청색의 베눌이시여! 성녀님! 문 좀 열어주세요!”
“그릇! 우, 우리 아버지가 마탑 마이스터 과정을 수료한 하원의원인데, 잠깐 시간 좀 내줘!”
게다가 모인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선배들뿐이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매일 두 사람과 만나는 1학년들과 달리, 선배들은 성녀나 그릇과 마주칠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뭐, 그건 그거고…
“저게 대체 뭡니까.”
인파에 질린 여명이 묻자, 마찬가지로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아도가 대답했다.
“전부 이론물리학 동아리의 껍질을 쓴 마법 동아리와 신앙연구 동아리원들로 보이는데… 제일 시끄러운 동아리들이지.”
“….”
“아마 성녀님과 내 동생이 한발 앞서서 동아리실에 먼저 온 모양인데… 어휴, 저 인파를 어떻게 뚫고 들어가냐.”
그나마 문이라도 닫혀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조지 선생이 앞으로 나서 학생들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호소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선배들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혹은 듣지 못한 척하든가.
어느 쪽이 진실이건 간에, 말로 상황을 타파하기 어려운 건 확실했다.
결국, 조지 선생이 한 명 한 명 학생들을 직접 설득할 기세로 나선 순간.
여명이 뒤꿈치를 들었다.
그게 무슨 기술인지 눈치챈 전윤성이 눈을 크게 뜨고, 그 표정을 본 아도가 기겁하며 물었다.
“야, 뭐 하려고?”
“선배들 좀 치우려고요. 시간 아깝잖아요.”
“아니, 잠….”
아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이 바닥을 찍었다.
쿵!
그의 발꿈치에서 시작된 충격은 삽시간에 건물 바닥을 타고 퍼져나갔다. 마나 조절이 얼마나 완벽한지, 그 큰 진동 속에서 창문도 하나 깨지지 않았다.
그 대신, 복도를 채우고 있던 선배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마치, 도미노가 연달아 쓰러지는 것처럼.
그나마 실력이 있는 몇몇 선배들과 조지 선생이 충격을 버텨냈지만, 그런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제 들어갈까요?”
여명은 눈치껏 그의 어깨를 붙잡고 버틴 아도에게 말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저지를 줄 몰랐던 아도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여명과 아도, 그리고 전윤성이 쓰러진 선배들 사이를 가르며 문으로 나아가자, 조지 선생이 따라붙었다.
“천여명 학생?”
“네?”
“동아리 건물 내부에서 무단으로 무술 사용. 벌점일세.”
“…그것도 반성문 써야 합니까?”
“아니.”
그럼 괜찮네요. 여명은 쏟아지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아리실의 문을 열었다.
***
TV 속 청춘 아카데미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달리, 동아리실의 내부는 화려하지 않았다.
깔끔한 창문과 잘 닦인 바닥, 책상과 의자, 그리고 동아리 업무와 관련된 작은 책장들까지.
정갈하고, 평범한 방이었다.
물론, 그 방에서 기다리는 소녀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릇, 성녀, 그리고 세티.
여명이 동아리실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온 세 소녀는 각자의 방법으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는 그릇,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세티, 그리고 책상을 뛰어넘어 포옹을 걸어오는 성녀.
“성녀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성녀의 이마를 꾹 눌렀다. 양팔을 활짝 펼쳤던 성녀는 그제야 뒤따라 들어오는 조지 선생과 전윤성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삐쭉였다.
하지만 끝끝내 여명을 자신과 세티 사이 자리로 끌고 가는 건 성공했다.
아무튼, 여명이 대충 자리에 앉자 세티가 가장 먼저 물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한 거야?”
“선배님들이 길을 안 비켜주셔서, 물리적으로 타협 좀 했지.”
여명이 장난스레 대답하자 세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흘렸다.
“이제 더 유명해지겠네. 그것도 악명으로.”
“악명도 명성은 명성이지.”
여명의 말을 들은 그릇이 ‘이런 미친 양아치 새끼’라고 중얼거렸으나, 성녀가 찌릿 노려보자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네 사람이 그런 꽁트를 찍는 사이, 조지 선생은 교실 문을 잠그고 동아리실의 창문 커튼을 전부 펼쳤다. 바깥에서 동아리실 내부를 훔쳐볼 수 없을 정도로 꼼꼼히.
잠시 후, 커튼을 다 펼친 조지 선생이 말했다.
“모두, 이렇게 지구-아샤 문화 교류 동아리를 찾아줘서 고맙네.”
그러자 성녀가 기다렸다는 듯 저번에 조지 선생에게 받은 지구-아샤 문화 교류 동아리실 초대장을 꺼내 흔들었다.
“선생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여기 있는 모두가 안 믿을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분위기를 풀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조지 선생 또한 조금 가벼워진 태도로 말을 이었다.
“초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님. 그리고 문밖에 있는 학생들은…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군. 모두, 미안하네.”
“에이,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다 제가 잘난 탓이니까.”
성녀는 평소 여명이 그러하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조지 선생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야.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도 되겠나?”
“본론이요?”
“자네들을 굳이 이 동아리실로 부른 이유.”
여명은 은근슬쩍 아도 선배의 얼굴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뭐, 듣기로는 혼혈을 확인하신다고 하던데. 아닙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네.”
“…?”
여명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조지 선생님이 책장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쿵! 책장에 내려놨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특별… 아니, 특정한 혼혈을 찾고 있네.”
“특정한 혼혈이라…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초대 교장님께서 남기신 유훈 중 하나지.”
여기서 또 퀴니 코완인가. 대체 학교에 얼마나 많은 걸 남겨둔 거야?
하긴, 그녀가 직접 지은 아카데미 아닌가, 꼼꼼히 뭔가를 숨겨 놨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서, 정확히 뭘 하면 될까요?”
조지 선생은 꺼낸 책을 활짝 펼치며 대답했다.
“복잡한 절차 같은 건 없다. 그냥 이 책에 손바닥을 올리고 마나를 불어넣는 게 전부니까.”
그가 펼친 책 페이지에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꽤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
책 전체에 저 마법진이 새겨진 걸까? 그렇다면 꽤 어마어마한 마도구일 텐데, 동아리실에 굴러다니다니.
여명은 새삼 로드 하우의 돈지랄을 실감하며 책을 받았다.
“혹시, 이거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죠?”
“이 페이지들을 보면 알겠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무 문제도 없던 물건이다. 그래도 의심이 간다면… 흠, 솔직히 말해서 특정한 혼혈이라는 건 혼혈 학생들을 파악하고 보호하기 위한 초대 학장님의 핑계에 가깝다는 게 내 의견이다.”
“….”
글쎄요, 제가 본 초대 학장은 절대 그런 핑계를 댈 사람이 아닌데.
직접 그녀를 봤다고 말할 수 없었던 여명은 속으로 말을 삼키며 성녀와 세티에게 책을 내밀었다.
그러자 조지 선생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자네부터 하지 않고?”
“아, 저는 순혈이라서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자네는 한국인치고는… 꽤 특이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않나. ”
“….”
세계수가 저보고 순혈이라고 했어요- 라고 말할 수 없던 여명은 또 다시 말을 삼켰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순혈이 맞는지 확인도 하고, 겸사겸사 성녀와 세티가 쓰기 전에 문제가 있나 실험도 해보지 뭐.’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크흠, 헛기침하며 책을 바로 앞에 펼쳤다.
“그러면 우선, 저부터 해보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여명은 책 페이지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어떤 카운트다운도 없이 그대로 마나를 불어넣자…
번쩍!
책의 마법진 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요동치는 마나도 없었고, 대단한 마법이 펼쳐진 것도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빛이 나온 게 끝.
‘역시 순혈이라 그런 건가.’
역시 세계수 말이 맞았네. 여명은 뭔가를 기대하는 일행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끝인가 봅니다.”
그러자 조지 선생은 여명이 마나를 불어넣었던 페이지를 확인했다. 역시나, 달라진 건 없었다.
혼혈이라면 마법진에 손바닥 문양이 생긴다는 걸 알고 있던 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순혈이었군. 의심해서 미안하네.”
말 뿐만 아니라, 그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출생의 콤플렉스를 건드렸다고 오해한 듯했다.
차원문 너머 순혈이지만, 지구에 버려진 고아…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물론, 그가 지구에 버려진 고아는 맞았지만, 그 사실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청소부들은 그에게 어떤 가족보다도 더 많은 애정을 주었으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의심할 만 하셨….”
그때, 성녀가 끼어들었다.
“정말로 괜찮아? 혹시 어디 아프거나 ‘안 보이던 게 보이거나’ 하는 건 아니지?”
“응? 괜찮아. 그런 게 있으면 바로 눈치….”
여명이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 사이, 옆자리의 세티가 그의 허벅지에 글자를 썼다.
‘위에, 안 보여?’
또 뭔데? 여명이 고개를 들어보자, 반투명한 노인이 뚱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침묵.
여명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다리가 없는 걸 보면 무슨 귀신 같기도 한데…
남들도 다 보이는 귀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조지 선생은 못 본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저 반투명한 노인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 티가 났다.
세티, 성녀, 그릇.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남정네들과 달리, 세 소녀는 여명의 머리 위를 빤히 보고 있었으니까.
“천여명 학생? 무슨 일인가?”
이상함을 느낀 조지 선생이 물었으나, 정작 여명의 귓가를 뒤흔든 건 머리 위 노인의 목소리였다.
[이런 니미, 변경백, 고놈이 기어코 불알을 고치고 자식을 낳은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