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67)
을 위한 세계는 없다-367화(367/817)
***
“운명의 주인…? 구슬? 그게 뭐죠?”
그릇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런 단어는 처음 듣는다는 듯한 태도.
성녀의 반응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여명과 세티는 조금 달랐다.
플레이어에게 운명을 빼앗은 장본인과 가진 구슬을 타인에게 양도한 자.
‘어떻게 해?’
‘일단 듣고 정하자.’
두 사람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고, 귀신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사이 귀신은 허공에 손가락을 휘둘러 어떤 환상을 만들어냈다.
물이 흐르는 시냇물과 조약돌 몇 개.
[운명의 주인이라는 건, 이 조약돌과 같은 존재들이다.]그는 환상으로 만든 조약을 집어 흐르는 물 위에 하나하나 올려놓으며 말했다.
[시간이라는 시냇물 바깥에서 온, 시냇물의 방향을 바꿔버릴 수 있는 자들.]어떤 조약돌은 물길을 틀었다. 또 어떤 조약돌은 물을 두 갈래로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놓인 조약돌은 아예 물길을 막아버렸다.
[이제 좀 이해가 가느냐?]귀신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성녀는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릇은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듯했고, 여명은…
굳은 표정을 숨기며 물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질문을 내뱉는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질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왜 이미 구슬을 잃은 세티는 그를 볼 수 있는가?
‘바깥에서 온’ 이란 단어는 플레이어나 작가 같은 바깥에서 온 자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운명과 시간은 정확히 무슨 관계인가?
어쩌면 여태껏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질문들의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순간.
귀신이 쯧, 혀를 찼다.
[미안하지만 이 이상은 안 된다. 어떤 지식들은 그저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존재들의 시선을 끄는 법.]“….”
[아, 그리고 넌 모르는 게 당연하니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단다. 용사란 족속들은 원래 좀 멍청한 편이거든.]그렇게 말한 귀신은 뭐가 그리 웃긴지 카랑카랑하게 웃었다.
“….”
이게 웃긴가? 여명은 어이가 없어서 일행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기대감이 박살 난 자리로 헛웃음이 차올랐고, 그 헛웃음을 본 성녀는 목에 걸린 성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거 제령 해줄까?”
“….”
“저런 귀신은 기도 한방이면 바로 천당행인데.”
농담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심. 여명은 피식 웃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성녀 같네.”
“평소에도 성녀 같거든?”
한마디 쏘아준 성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탑주 귀신에게 성물을 ‘겨눴다’.
그제야 성녀가 진심이라는 걸 눈치챈 걸까. 동전과 대낫, 그리고 검은 관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본 귀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자, 잠깐! 성녀여!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내 말을 이해하지 않았나.]“…응?”
성녀는 제가요? 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섯 신에게 계시를 받았을 것 아닌가. 용사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성녀의 의무…! 성녀씩이나 되는 자가 지구의 아카데미에 있는 것도, 그 계시를 따라서….]그때, 성녀가 그의 말을 끊었다.
“계시? 그런 건 받은 적 없는데요? 신들께서는 우리를 굽어살피실 뿐. 강제로 이끌지 않으세요.”
이번에는 귀신이 고개를 갸웃거릴 차례였다.
그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성녀와 여명을 번갈아 바라봤다.
[교리상으로야 그렇지.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 아니, 그럼 왜 성녀가 지구의 아카데미까지 와서 저놈하고 붙어 다니는 거냐? 성도와 사제단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걸 허락했을 리가 없는데.]“아카데미는 그냥 제가 오고 싶어서 왔어요. 그리고 여명이랑 다니는 이유는…”
성녀는 여명의 얼굴을 힐끔 확인한 뒤 말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니까?”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란 그릇이 반사적으로 여명을 바라봤다.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듯 하늘로 시선을 돌렸을 뿐.
이거 오늘 너무 많은 비밀을 알게 되는 거 같은데? 엉겁결에 따라온 그릇이 은근히 주변 눈치를 살피는 사이.
귀신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가 죽은 사이에 율법이 바뀌었나? 성녀가 연애질이라고?]“경전에 성녀는 사랑하지 말라, 같은 구절은 없어요.”
그러자 귀신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당연히 없지! 상식이니까! 만인의 사랑을 받는 성녀가 한 사람의 연인이 되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느냐? 사제단의 보편 교리 해석을 그딴 식으로 비틀면 안 되는…!]“예, 예. 율법 해석은 저승 가서 많이 하세요.”
귀신의 말을 끊은 성녀는 기도와 함께 성물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검은 모르닥이시여, 당신의 낫이 바라나이다. 여기 죄 많은 영혼에게 당신의 수의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를 미워하지 마옵시고, 그저 죽은 자에게 걸맞은 안식을 주소서….”
성물의 장식이 검은빛을 한움큼 토해내자, 귀신이 기겁했다.
[잠깐, 잠깐만!]그러거나 말거나, 치이익-! 성물의 빛에 닿은 그의 로브 자락이 타올랐다. 영락없이 언데드가 정화되는 모습.
[내,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용사를 위한 조언이다! 다 좋으니 이 조언이라도 듣고 제령 시켜라!]그제야, 성녀가 기도를 멈췄다. 귀신은 죽은 주제에 숨을 헐떡이며 너덜너덜해진 로브를 바라보다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거 아느냐? 아카데미 지하에 퀴니가 생전에 남겨둔 기연이 있다…! 내가 그 기연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조금 전 무례를 사과하면 내가 특별히 그 기연으로 이어지는 길을….]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녀가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귀신은 이런 염병-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또다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마탑주의 계단을 떠올린 여명이 잠깐 멈추라고 할 때까지, 계속.
***
대략 30분 뒤, 용의 둥지로 향하는 하수도.
[이미 해저 던전을 탐사하고 있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빌어먹을, 이 옷이 얼마짜린데! 죽어서 수선도 못 한단 말이다!]마탑주 귀신은 허공을 쿡쿡 밟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여명 일행의 반응은 시큰둥했는데, 중요한 질문을 쏙쏙 피해 가는 마탑주의 태도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째서 변경백의 아들로 생각하냐는 질문조차 ‘재수 없는 게 그놈 젊을 때하고 똑같다’는 황당한 대답으로 넘어가 버렸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결국, 그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건 얼떨결에 따라오게 된 그릇뿐.
“…정말로 아카데미 하수도 지하에 던전이 있어요?”
[그래, 당시 지구와 아샤의 모든 기술을 집약해서 해저에 깊고 깊은 터널을 지었지.]“초대 교장께서는 왜 그런 짓을?”
[운명이 그녀에게 요구한 바였다. 퀴니는 거부할 수 없었어. 심지어 그녀가 말년에 사귄 친구조차 던전 입구에 처박았어야 했지.]따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여명은 말년에 사귄 친구가 오르세 라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야.]그를 보는 귀신의 묘한 눈빛을 보아하니 아마 그들이 용을 죽였다고 확신한 모양.
여명은 일부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반응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운명을 바꾼 걸 보고 뭐라 지껄이는지 보고 싶었다.
뭐, 아무튼.
일행이 용의 둥지로 향하는 물길에 다다르자, 그릇이 움찔 몸을 떨었다.
“여, 여기로 뛰어내려야 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거 맞아. 그냥 물길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다가, 빛이 보이는 곳에서 상승하면 돼.”
간단하게 대답한 여명이 뛰어들 준비를 시작하자, 그릇은 우물쭈물 손가락을 꼬며 말했다.
“그게… 나는 수영 못하는데….”
“그래? 그럼 내가-”
그때, 성녀가 그릇의 목덜미를 콱 잡아당겼다.
“내가 안고 갈게.”
“….”
성녀에게서 이년이 어디서 자꾸 꼬리를 쳐-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여명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그대로 첨벙-! 여명이 먼저 물에 뛰어들자, 세티보다도 먼저 귀신이 따라붙었다.
귀신답게 그는 물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그는 일방적으로 말할 기회를 잡자마자 주둥이를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용사여, 다른 계집들 있을 때는 묻기 좀 어려워서 묻지 않았다만, 단둘이니 까놓고 물으마. 혹시 어머니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애미도 모르는 사생아라면 눈을 두 번 깜빡이고, 엄마가 누군지 안다면 아무 대답도 하지 말거라.] [엄마가 누군지 안다고? 그럼 혹시 어머니 이름이….] [아, 이거 반응을 보니 고아였구만.] [혹시 노예로 자랐느냐? 만약 그래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예로부터 황금 눈깔의 노예는 비싸게 팔렸거든.] [혹시 부모님이 널 버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애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고깝게 구는 이유가 그거라면….]귀신으로 너무 오랫동안 있었던 걸까, 아니면 살아있을 때부터 노망이 들었던 걸까?
여명은 용의 둥지로 향하는 그 잠깐 사이에 주절거리는 귀신을 보며 조금 안쓰러움을 느꼈다.
청소부 시절, 가족에게 버려지고 골방에서 술만 퍼먹던 노인네들이 딱 이랬으니까.
[그 동정 가득한 시선은 뭐냐?]그의 시선을 읽은 귀신이 역으로 물어올 때쯤, 여명은 용의 둥지에 발을 디뎠다.
간단한 마법으로 물에 젖은 옷을 말린 그는 세티와 성녀, 그리고 그릇을 차례대로 물에서 꺼내 올렸…
[어?! 까마귀야! 니 제자 놈 좀 봐라! 저놈이 또 새 여자를 데리고 왔다! ]때마침 그릇을 본 오르세 라날이 고함을 질렀다.
코르부스에게 교육받고 있던 그녀는 수업에서 빠질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처럼 두다다- 달려오더니, 그대로 호들갑을 떨어댔다.
[이 난봉꾼! 펩시콜라! 유니콘의 재앙!]“…펩시콜라?”
[콜라 하나로 승부하지 않고 잡다한 음료에 다 문어발을 뻗는 펩시랑 너랑 똑같… 악!]다행이 오르세 라날의 주접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따라온 코르부스가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쳤으니까.
“스승님, 라쉬크는요?”
“통관 문제로 먼저 올라갔소. 아마 밤에나 돌아올 것 같소만… 저 소녀는 또 무엇이오?”
“어쩌다 보니 엮인 친구입니다. 신경 쓰실 일은 없을 겁니다.”
“…부디 그게 사실이길 빌겠소..”
아무튼, 코르부스와 짧은 인사를 나눈 여명은 귀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전전대 마탑주는 코르부스에게 콧구멍을 붙잡힌 채로 질질 끌려가는 용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용이… 살아있군?]그는 고개를 돌려 구멍 뚫린 해저터널의 입구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릇과 성녀가 옷을 다 말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대뜸 여명을 향해 물었다.
[왜 살렸지? 살려야만 다른 길이 열린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냐? 누구에게 들었지?]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몰랐습니다. 용을 살린 이유는, 꼴 받게 해서… 가 아니고, 제 친구의 여동생이라서 그랬습니다.”
[그러면 친구도 용이겠군. 오르세… 오르세 어쩌고. 드워프 왕가의 그 붉은 용?]“예. 오르세 타불이라고 합니다.”
[용의 친구… 그놈과 똑같군. 검은 게 아니라 빨간 거지만. 아니, 아니, 드래곤을 타본 적 있느냐?]“오르세 타불이 몇 번 태워주긴 했습니다.”
[오… 용사에, 용의 친구에, 드래곤 라이더에… 칭호가 끝이 없군. 또 다른 칭호는?]예전에 만났던 드워프 왕도 그렇고, 귀신들은 왜 이렇게 칭호에 집착하는 거지?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귀신은 그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허공에 아주 복잡한 마법진을 그리더니, 그 너머로 여명을 뚫어져라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여명이 그게 무슨 마법진이냐고 물으려는데, 그는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천천히 어떤 칭호들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유니콘의 주인, 혜성의 계승자, 세계수 결정의 선택을 받은 자, 용을 쓰러트린 자, 만주의 구원자, 우라간의 주인, 황금 옥새의 정당한 계승자, 우정의 수호자, 드래곤 라이더, 유일무이한 편입생, 갈림길의 제자, 희생양의 구원자, 마경의 주파자, 피눈물의 주인, 모든 살기의 지배자, 드레이테리얼의 구원자, 공산당의 천벌, 상인의 친구이자, 약탈자의 천적, 기사단의 친우이자 은인, KGB의 악몽, 바이콘의 기쁨…….]기나긴 칭호를 견디지 못했음인가, 그의 마법진이 파직-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러나 귀신의 시선은 깨진 마법진이 아니라 여명에게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칭호가 없다고?]“…바이콘의 기쁨?”
귀신과 그릇은 동시에 다른 말을 꺼냈고 여명은 어색하게 볼을 긁었다.
“….”
다행히도 그 어색함이 오래가는 일은 없었다.
때마침 손전등을 든 쇠미리가 해저터널 입구에서 나온 덕분이었다.
“아, 여명! 왔어요? 탐사 준비 끝내놨는데… 그 귀신은 누군가요?”
[…이젠 하다 하다 귀쟁이도 운명의 주인이야? 이번 시대는 정말 개판이로군. 개판이야.]***
그릇, 살로메 두메아는 불과 조금 전까지 흥분에 몸을 떨었다.
전대 마탑주와 용사, 그리고 지하터널까지.
기연 쪼가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비밀이 그녀에게 활짝 공개되었으니까.
‘역시 천여명과 접촉한 건 옳은 선택이었어.’
그녀는 자신의 천재성에 전율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운명이란 게 존재한다는 걸 눈치채고, 심지어 그 운명을 이끄는 자와 손잡다니.
생각해보니, 운명의 주인이란 단어도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 같은 천재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운명의 주인을 참칭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흥분 어린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용의 둥지에 들어서서 진짜 용과 데스나이트를 보고, 여명의 칭호를 듣는 순간.
그녀는 문자 그대로 영혼이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공산당의 천벌? KGB의 악몽?’
지구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듣는 순간 오금이 저릴만한 칭호들이었다.
이 사람, 대체 공산권과 무슨 관계지? 황금 옥새의 주인이라는 건 드워프의 편이란 뜻인데…?
그러고 보니 만주에서 구한 용도 드워프 왕가의 수호룡이었다. 때마침 드워프도 철저한 미국 편이고.
‘혹시… 미국에서 키워낸 공산당 사냥개 같은 건가?’
최근 고향에 들끓는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전쟁 분위기가 고조된다는 걸 아는 그녀로서는 웃어넘길 수 없는 가설이었다.
게다가 걸리는 칭호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이콘의 기쁨.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칭호란 말인가.
‘성녀와 세티가 그에게 매달리는 이유가… 설마?’
평생을 음모와 암투 속에서 살아온 그릇의 상상력은 안 좋은 쪽으로 폭주했다. 그리고 그 폭주의 정점을 찍은 건 귀를 드러낸 쇠미리였다.
‘엘프…!’
아카데미에는 엘프 공주가 있다. 쇠미리는 엘프다. 쇠미리는 여명에게 호감이 있다.
즉, 여명이 엘프 공주마저 유혹했다는 결론을 내린 그릇은 몸이 떨리는 가까스로 참았다.
이 순간, 그녀를 첩으로 삼으라던 전대 두메아 가주의 말이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아니, 이건 필연이다. 그녀는 있지도 않은 운명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운명의 기회인 줄 알았는데, 사실 음험하고 위험한 음모의 구렁텅이였을 줄이야!
‘…어쨌든, 침착하자.’
그녀 자신을 바라보는 여명의 눈길을 최대한 피하며 성녀에게 들러붙었다. 그래도 이 중에서 성녀가 가장 순결할 것 같았으므로.
성녀는 ‘갑자기 왜 이래’라며 질겁했지만, 다행히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기회를 봐서 챙길 건 최대한 챙기고, 여명이 유혹하면… 튀자.’
성녀의 뒤통수에 숨은 그릇이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할 때쯤.
마찬가지로 생각을 정리한 귀신이 말했다.
[천여명. 해저터널을 어디까지 탐사했느냐?]“마법진이 설치된 동굴까지 탐사했습니다.”
여명의 대답을 들은 귀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야 날 제령 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구나. 네 번째 계단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거렸다?]여명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귀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근엄하게 허리를 펴며 말했다.
[운이 좋은 줄 알거라. 내가 바로 그 계단을 만든 장본인이니.]“아,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마탑주의 계단이라서… 그리고 가능하면 마지막 용사의 방도 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귀신은 실망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보더니, 대뜸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알면 안 되는 걸 참 많이도 알고 있구나.]“…어쩌다 보니.”
많은 의미가 함축된 대답이었다. 귀신은 여명의 위아래를 훑은 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다. 용사라면 무릇 어쭙잖게 굽신거리는 것보다 너처럼 자신만만한 게 나은 법이지… 어쨌거나, 내 질문에 하나만 더 대답하면 퀴니가 준비한 마지막 두 기연이 뭔지 알려주마.]이번에는 또 뭘 물어보시려고? 여태껏 제대로 된 대답을 피한 그와 달리 여명은 어디 해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질문은 여명의 예상과는 조금 벗어난 종류의 것이었다.
[전대 성녀와 퀴니, 두 사람과 만나 대화한 적 있느냐?]“…두 분 모두 제가 철들기 전에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제가 감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들도 아니었고요.”
[그건 내 질문의 답이 아니다.]꿈에서 만난 것도 만났다고 해야 하는 건가? 여명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 분 모두 만나서 대화한 적 있습니다.”
[그러면 됐다.]그렇게 말한 귀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속에 쌓인 무언가를 홀가분하게 내뱉는 한숨.
그 한숨 덕분이었을까? 그의 분위기도 조금 바뀌었다.
아까 전까지는 술값에 벌벌 떠는 노망난 늙은이였다면, 지금은 마치 해장국을 싹 비운 노신사 같은 분위기라고 할까?
“뭔가 답을 찾으신 겁니까?”
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넌 그놈 아들이 맞다. 그 고자 새끼가 나보다 낫구나.]“….”
[넌 안 믿는 눈치지만… 글쎄, 내 입장이 되면 다를 게다.]여명은 그와 말다툼하는 대신 쇠미리와 일행들을 불러 모아 탐사 준비를 시작했다.
세티의 자매와 리메에게 기숙사 알리바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물품을 챙기고, 둥지에 남은 데스나이트들에게 무전기를 건네주고….
그렇게 사람 넷과 귀신 하나가 해저터널로 떠나려는 순간, 그릇이 성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저, 저는요?”
그러고 보니 쟤가 있었지. 여명이 굳이 따라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려는데, 세티가 끼어들었다.
“데리고 가자. 쟤도 여기까지 온 김에 해저 동굴에서 기연 얻어가야지.”
“….”
살짝 감동하는 그릇과 달리, 일행들은 세티가 그런 선의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을 증명하듯, 세티가 조용히 여명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기회가 오면 운명의 구슬을 빼앗자.’
가끔 보면 독한 면이 있다니까. 여명은 세티의 볼을 살짝 꼬집은 직후, 그릇을 일행에 추가했다.
***
“귀쟁아. 너는 어떤 꿈 꿨어?”
해저 동굴에 도달하기 직전, 성녀가 물었다. 쇠미리는 애매한 미소로 화답했다.
“멋진 꿈이요.”
“멋지긴 뭘, 기껏해야 인민의 아버지 쇠똥구리와 인민의 어머니 쇠미리… 뭐 그런 빨갱이 꿈이나 꿨겠지. 안 그래?”
키득거린 성녀는 돌아올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쇠미리는 침묵했다.
진실을 아는 여명은 괜히 쓴웃음을 지었다. 해저터널의 어둠 덕분에 쇠미리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귀까지 새빨개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성녀는 괜히 이리저리 말을 걸어댔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귀신이 ‘전대 성녀가 쟤 반만 시끄러웠어도 파티 해산했을 거다’라고 말할 때쯤.
그릇이 걸음을 멈췄다. 해저 동굴의 마법진에 빠졌다는 신호였다.
성녀는 우뚝 굳어버린 그릇을 바닥에 눕히며 말했다.
“내기할 사람? 얘 오늘 내로 못 깨어난다에 만원.”
“그러면 저도 못 깨어난다에 만원.”
쇠미리가 능청스레 맞장구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반대편에 거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그릇에 대한 믿음이 없네.”
여명은 나 아니었으면 너도 못 깨어났을 거라고 지적하는 대신, 손전등 위에 앉은 귀신에게 말했다.
“이제 곧 계단인데. 뭔지 설명 좀 해주시죠.”
[오냐, 드디어 내가 나설 때구나. 아이야, 계단의 이름이 마탑주의 계단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짧게, 요약 부탁드립니다.”
여명이 그의 말을 끊고 부탁했지만, 마탑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싫다. 내가 그거 만드는 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세 소녀가 동시에 피식 웃는 사이 귀신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고로, 내가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부터 이야기하마. 때는 수십 년 전, 우리 용사 파티가 괴수의 이상 증식을 조사하기 위해 지하 마굴로 향하던 시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