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68)
을 위한 세계는 없다-368화(368/817)
우리가 계단에 도달한 그날 밤에는 비가 내렸다.
오염된 구름과 흑마법, 그리고 나치가 만든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지독한 산성비.
지구 연금술에 아무런 조예도 없던 내가 비에 화학물질이 들어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면, 호들갑을 떠는 퀴니 덕분이었다.
그녀는 ‘치클론B’ 라는 말을 반복하며 파티원의 얼굴에 방독면을 씌웠다.
지구인이 또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나는 순순히 방독면을 썼다. 퀴니가 호들갑을 떠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나치란 족속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호들갑을 떨었다. 늙은 귀족들 앞에서도 넉살을 부리던 그녀답지 않은, 분노 섞인 호들갑.
-나치.
나는 뻑뻑한 방독면 아래로 그 단어를 읊조리며 비에 젖은 계단을 올려다봤다.
지상에서 하늘로 까마득하게 이어진 검은 계단은 황궁의 그것이 떠오를 정도로 웅장했고, 마탑의 그것과 맞먹을 정도로 오묘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훌륭한 방어시설임과 동시에 경외감을 일으키는 건물이었다.
누군가 저 계단 위에 서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해보라.
높이의 차이는 그 자체로 권력과 위엄을 만드는 법이다.
저 위에서는 일개 농부조차 황제와 같은 위엄을 뿜어낼진대, 하물며 그게 전 세계와 전쟁을 벌였던 전쟁 군주라면야.
-히틀러는 전쟁 군주가 아니야.
퀴니는 내 해석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미치광이였어.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개새끼고, 조국의 정신과 땅을 더럽힌 매국노라고.
나는 그녀의 분노를 긍정했지만, 해석까지 긍정하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에 히틀러는 그 이상이었다.
-멍청한 아샤인 같으니.
그녀의 말마따나, 이건 지구인과 아샤인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당장 이 땅의 귀족들 중 나치즘에 매혹된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순수한 민족, 강력한 국가, 위대한 리더, 그리고 우생학.
나치즘은 그 뿌리부터가 아샤 귀족들의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었다.
마탑이 여섯 번째로 번역한 지구 서적이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이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반대로 하층민들에게 공산주의가 널리 퍼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몰락한 총통의 사상에 귀족들이 매료되고, 절대권력을 가진 서기장의 사상이 하층민들을 물들이다니.
퀴니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이유가 뭐든 간에, 나치즘에 동조한 모든 아샤인들은 대가를 치를 거야.
라는 말을 남겼을 뿐.
그래,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우리가 이 지랄부터 막아야겠지.
지랄. 히틀러가 마왕으로 승천하는 일을 표현하는 것치고는 심심한 단어였다.
그 심심한 덕분이었을까, 퀴니와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계단을 올려다보며 침묵했다.
다행히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도를 끝낸 성녀가 자리로 돌아온 덕분이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방독면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덜 아름다웠다. 하지만 일행의 부담을 줄여주려는 그녀의 의도는 부드러운 어투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자, 자, 모두 얼굴 피세요. 신들께서 우리를 보우하십니다. 오늘 이 순간, 우리는 진짜 영웅이 되는 겁니다.
-영웅? 좋지. 근데 기왕이면 살아서 영웅이 되면 좋겠는데. 다섯 신들께서 그것도 알려주시던가?
-에이, 그거야 우리 실력에 달린 거죠.
그녀의 말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밤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질질 짜던 방랑 사제가 죽음을 앞두고도 능청을 부릴 수 있게 되다니.
이제 그녀가 어엿한 성녀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녀는, 마법사다운 표현을 빌리자면 잔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메꾸다 못해 타인의 부족함마저 채워줄 수 있는 사람.
하긴, 그러니까 신들에게 선택받은 거겠지.
나는 퀴니에게 힘을 불어넣는 그녀를 보며 오랜만에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퀴니가 늘 가지고 다니는 노트에 오늘 일을 어떻게 적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두려움에 찬 이야기는 아니리라.
-끄응, 다들 먼저 깨어났군요.
그때, 애송이가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 막 변경백 작위를 계승한 녀석은 꿀처럼 진한 황금색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다들 잘 주무셨습니까?
-푹 쉬었지.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방독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녀석은 그제야 방독면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입과 코를 가린 방독면을 만지작거렸다.
왜 씌웠냐는 질문은 없었다. 어련히 이유가 있으니 씌웠겠지- 라는 태도.
그건 동료를 향한 믿음이 확고하다고 할 수도, 혹은 무심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태도였다.
그의 진심이 어느 쪽이건 간에, 나는 애송이의 저런 면을 좋아했다.
전설 속 용사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옛 변경백들이나 귀족들처럼 냉혹하지도 않은 그런 모습을.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녀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마치 동네 마실이라도 가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아직 의식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리자고 대답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계단 저 꼭대기에서 비명 섞인 벼락이 치며 의식의 시작을 알렸다.
-염병.
나는 쓴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나란히 섰다.
-성공할 수 있겠지?
-언제나 그렇듯, 확답은 못 드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대화하며 계단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빗줄기가 굵어졌다.
귀를 때리는 빗소리 속에서 나는 퀴니와 성녀가 자리를 잡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을 보호할 전사가 한 명쯤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마지막으로 아쉬움을 삼키며 애송이와 함께 계단에 발을 올렸다.
계단은 침입자를 인식하자마자 수많은 흑마법과 강령술, 그리고 저주를 준비했다.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끔찍한 마나가 계단 위에서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때 당시의 기분을 표현해보자면, 놀라움은 없었다.
우리 넷은 함께 수많은 경이를 목도하고 기적을 실현한 장본인들이었다.
용사 파티라는 낯간지러운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던 우리는 놀라움보다는 조금 더 통속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아, 씨발.
성녀의 욕설이 수만, 어쩌면 수십만의 저주로 빗어진 사색적인 정적을 깨부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딱히 격식 있는 성녀는 아니었으니까.
-온다.
애송이 용사는 검을 뽑으며 답했다. 그의 검에 박힌 보석 꿀이 반짝거리며 그의 의지를 대변하는 찰나.
바로 다음 순간, 계단에서 죽음이 쏟아졌다.
나는 그보다 좋은 표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저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무수한 언데드라니.
속도를 보아 맨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 30초 남짓.
그 30초 동안, 나는 계단에 걸린 흑마법과 강령술, 그리고 저주를 분석하는 동시에 밀려드는 언데드를 처리할 가장 적절한 마법을 떠올렸다.
파티원들과 함께 나치를 추적하며 쌓아온 경험 덕분에 나는 꽤 빠르게 두루마리를 펼치고 냉기 마법을 준비할 수 있었다.
퀴니가 마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고 성녀는 조금 더 직접적이었다. 그녀가 만든 축복의 빛이 계단 꼭대기로 향하는 길을 일직선으로 비췄다.
그리고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역시나 변경백이었다. 그는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금빛 마나가 요동치며 그의 뒤로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금빛 용사는 죽음과 충돌했다.
보석 꿀이 번쩍일 때마다 피와 살점 튀고, 온갖 오물이 빗물과 뒤섞여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엄밀히 말해, 언데드들은 용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칼과 수류탄, 심지어 기관총으로 무장했음에도 그랬다.
이런 간단한 사실을 나치가 모를 리가 없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희망적인 가능성과 비관적인 가능성을 모두 계산해봤다.
희망적인 가능성은 히틀러가 마왕 승천을 코앞에 두고 조급해졌을 가능성이었다. 우리가 괴링과 볼프람 지퍼스를 죽였으니,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관적인 가능성이 조금 더 현실적이었다. 녀석들이 뭔가 함정을 준비했다는 것.
용사 파티에게는 불행히도, 녀석들의 의도는 후자였다.
-잠깐, 뭔가 이상해요!
우리 중 가장 먼저 계단의 함정을 찾아낸 건 성녀였다. 나는 빗물을 얼려 수십 마리의 좀비를 동시에 꿰뚫어 죽이며 물었다.
-이상한 건 나도 눈이 있으니 알아!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 설명해 줘야지!
-성불하는 영혼이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저주가 더 진해지고 있다고요!
나는 그제야 계단 아래를 볼 수 있었다. 변경백을 비롯한 우리가 죽인 시체들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않았다. 썩은 피와 살들은 계단에 닿는 순간 그대로 계단에 흡수됐다.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 위쪽 계단에서 쏟아지는 새로운 언데드들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주고 있었으므로.
흑마법적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녀석들은 누더기처럼 기워진 피부색과 숨길 수 없는 신체적 특징을 자랑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여러 개거나, 혹은 하나도 없거나.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살점 덩어리가 있는 건 평범한 수준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이 계단 내부에 있는 모든 게 재활용되고 있군.
-쉽게 말해요!
-언데드를 죽여 봤자 다시 살아나고, 죽이는 과정에 쓴 우리 마나도 빨아 먹고 있다는 말이다. 나도 좀 배우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기술이야.
-해법은?
애송이 용사는 검을 휘두르며 물었다.
-일점돌파하든가, 계단을 통째로 박살 내야겠지.
아쉽게도 계단을 부술 화력은 우리에게 없었다. 결국,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용사는 빗줄기 사이에서 소리쳤다.
-길을 뚫겠습니다! 성녀를 부탁합니다!
-뛰기나 해!
곧 용사의 검에서 금빛이 일렁거렸다. 변경백 가문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황금의 무술.
그가 검을 휘두르자 세상이 반으로 갈라지며 기다란 도로가 생겨났다. 나는 필사적으로 녀석의 뒤를 쫓았다.
성녀와 퀴니 또한 달리고 또 달렸지만, 빌어먹을 계단은 너무나 높았다.
-방금 그 검술, 몇 번 더 할 수 있나?
계단 중간, 위아래로 고립된 파티를 보며 내가 물었다. 애송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끝입니다. 더 하면 히틀러와 싸울 마나도 안 남을 겁니다.
-씁, 큰일 났군.
나는 이번에는 내가 길을 뚫겠다고 말했다. 일개 좀비라면 혼자서 수십만 마리도 죽일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이 계단에서 죽인 좀비가 못해도 수만 마리는 넘었고.
-빗줄기만 아니면 통째로 불태워버리는 것을.
내가 투덜거리며 마법을 준비하는 사이, 갑자기 성녀가 애송이에게 다가와 무어라 귓속말했다.
이 다급한 상황에 무슨 귓속말이야? 내가 눈치를 주려는 찰나, 애송이가 검을 멈췄다.
***
왜?
방독면 아래, 변경백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왜 그러나?
용사는 대답 대신 검을 놓고 좀비 사이로 뛰어들었다.
-저, 저 미친놈!
용사의 돌발행동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퀴니는 기겁하며 비장의 폭탄을 꺼냈으나, 성녀는 우리 둘을 막아섰다.
-뭐 하는 거냐! 성녀! 또 기도 대신 술이라도 마신 거야?!
-기다려보세요. 기적을 보여줄 테니.
그녀의 말보다 우리를 놀라게 한 건, 이어진 용사의 행동이었다.
-빌? 가라달에서 양을 몰던 빌이죠?
용사는 머리가 여섯 개나 달린 거대한 살덩이 괴물의 이름을 불렀다. 이 계단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목소리.
내가 저게 대체 무슨 미친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살덩이 사이에 처박혀 있던 얼굴 하나가 대답했다.
-예, 용사님! 저 양치기 빌입니다! 저 좀 죽여주십쇼!
살덩이를 휘둘러 용사의 목을 후려치는 그것의 목소리는 빗물에 젖은 입술만큼이나 축축했다.
용사는 살덩이를 피하며 계속 물었다.
-다른 분은요? 다른 분들도 계십니까?
그제야, 나는 좀비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이해했다. 그것은 괴성이나 저주의 말이 아니었다.
언어.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과 똑같은 언어.
그건 빗줄기에 가려진 비명이자 공포였고, 죽은 자들의 애타는 아우성이었다.
-저는 헤움노에서 온 시몬입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입이 달린 좀비가 말했다. 용사는 좀비를 쓰러트리는 대신 그의 공격을 받아내며 말했다.
-당신은 지구인이시군요.
-예, 수용소에서 끌려왔지요.
거기까지 말한 좀비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듯 뜸을 들이고는, 다른 좀비들을 밀어내며 말했다.
-용사님. 저를 구원해주십쇼.
그것이 시작이었다. 입이 있는 자들은 용사에게 이름을 밝히며 구원을 애원했고, 입이 없는 자들은 용사를 향해 간절히 손짓했다.
계단에 걸린 마법은 그들이 용사를 공격하도록 종용했지만, 더 이상 피와 살은 튀지 않았다. 용사는 그들의 공격 속에서도 계속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용사는 입이 없는 자들의 이름을 스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폴란드에서 온 율리안, 겔차 왕국의 전 왕세자 사랄, 이름 없는 산에서 화전을 일구던 힘비, 드워프 파간, 순례자 홀…
황금빛 눈동자는 영혼을 꿰뚫어 보듯 모든 좀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수만 마리… 아니, 수만 명의 좀비의 이름이 끝나자.
빗줄기 말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계단에 걸린 흑마법조차 기회를 엿보는 듯 침묵했다.
기적이라고 할만한 광경을 여러 번 봐왔음에도,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름이 대체 무엇이길래, 용사는 상대를 꿰뚫어 보는 무술까지 써가며 그들의 이름을 물은 것일까?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하려고?
침묵의 끝에서, 용사가 양손으로 검을 들었다. 그는 손잡이에 달린 보석 꿀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오래된 기사의 예법이었다.
직후, 그가 말했다.
-먼저 이번 대의 용사이자, 꿀의 혈통을 이은 정당한 제국 변경백의 자격으로서. 당신들에게 사죄를 구합니다.
좀비들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나는 죽은 자들의 눈동자가 그렇게 간절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저는 구원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계단 저편, 꼭대기에서 검은 벼락이 쳤다. 독일어와 뒤틀린 마나가 뒤섞인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빗줄기 사이로 울렸다.
-하지만 맹세컨대, 제가 저 위에서 기다리는 악을 처단하고도 살아있다면.
나는 이어지는 말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저주받은 자들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들의 구원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담담한 목소리. 담담한 태도.
-그러니, 제게 길을 내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으로 검을 털었다. 기다란 검신을 따라 물과 피가 뿌려졌다. 죽은 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들을 썰어버리던 검의 맹세를 믿지 못해서? 아니, 그들을 조종하는 계단의 마법에 저항하기 위해서.
-캬아아악!
바로 다음 순간, 마법에 저항하지 못한 거대한 살덩이 괴물 하나가 용사를 뛰어들었다.
하지만 괴물이 용사 파티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좀비 한 명이 녀석의 몸을 붙잡은 까닭이었다.
헤움노에서 온 시몬.
눈 대신 입이 달린 그는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말했다.
-맹세는 받았습니다. 이제 가십시오.
그것을 시작으로 저주받은 자들이 둘로 갈라졌다. 마법에 저항하지 못하고 달려드는 좀비들과 그것을 막는 좀비들.
죽은 자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집어삼키고, 움켜쥐었다.
그것은 어떠한 믿음보다도 간절한 기도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용사의 등을 때렸다.
-뭐 하고 있나! 어서 가야지!
용사는 웃지 않았다. 웃기에는 너무나 처절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것은 각오를 다진 사내의 표정이었다.
곧이어 그는 계단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갈라지는 죽음 사이를 달리고 또 달리면서, 나는 확신했다.
오늘 우리는 히틀러를 무찌르고, 앞으로 수백 년간 이어질 전설이 되리라.
하지만 그 생각은 반만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