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7)
을 위한 세계는 없다-37화(37/817)
〈 37화 〉 프롤로그 이후의 세계 (2)
* * *
***
북만주에 가까워질수록, 트럭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영원히 이어질 거 같던 벌판이 끝나고, 산과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산에는 침엽수가 듬성듬성 숲을 이루고 있었다. 산을 끼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강에는 살얼음이 떠다녔고, 차갑게 식은 공기가 코를 찔렀다.
그제야, 시베리아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이실감 났다.
“이제 곧 도착이다. 자, 자, 다들 일어나! 임무 전에 무기 확인해!”
풍경을 눈에 담고 있던 여명의 귓가로, 톈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이미 무장을 끝마친 상태였다.
이제 막 눈을 뜨는 다른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여명 또한 군말 없이 무기 가방을 꺼냈다.
장만이 챙겨준 래밍턴 MH750과 수류탄, 그리고 용병단에서 받아온 보급용 철검 세 자루.
근접 무장 일색이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는 용병은 없었다.
원정대 지원 임무에서 신입이 총을 쏠 일이 어디 있겠나. 총은 숙련된 용병들이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용병들이 전부 무장을 끝내고, 군용 트럭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그 순간.
…?
여명의 감각이 추락했다. 아니, 그의 현실이 길게 늘어졌다.
군용 트럭의 엔진 소리도, 김만수 부단장의 헛구역질 소리도 전부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작아졌다.
‘이건, 대체…’
마나를 끌어 올리려 했으나, 그의 육체는 정신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샤아아
늘어난 현실 사이로, 그림자가 차올랐다.
그것은 별빛조차 집어삼키는 밤하늘 속 태초의 그림자였으며, 동시에… 익숙한 그림자였다.
‘…미그니움?’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림자는 그저 묵묵히 그의 정신을 휘감고,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렸다.
분리된 정신이, 늘어난 세계가 날아올랐다. 발 아래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군용 트럭이 멀어졌다. 만주의 산맥들이 멀어졌고, 그다음에는 한반도가 멀어졌다.
이윽고 별과 마주 볼 높이까지 솟아오르자, 그림자 사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의 간택자여.』
현실과 괴리된, 끈적한 목소리였다. 여명은 그제야 이것이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그니움의 꿈.
『저곳을 보아라.』
여명은 그림자를 따라 서쪽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미국이었다.
슈퍼맨들의 나라, 냉전의 승리자, 인류 최강국.
하지만 그곳은 어둠으로 덮여있었다. 빛이라고는 단 하나뿐이었다. 워싱턴의 깊숙한 곳, 작게 반짝이는 구슬 하나.
『느껴지는가?』
저 빛의 구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늘어난 세계 속, 저 머나먼 땅에서도 빛의 구슬만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제, 다음 구슬을 찾거라.』
그다음으로 그의 시선이 닿은 건 호주였다.
정확히는 호주 대륙의 서쪽, 로드 하우 섬이라 불리는 곳.
여명도 잘 아는 곳이었다. 저 아름다운 섬 위에 지어진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로드 하우 아카데미였으니까.
하지만 아카데미에 시선을 집중한 순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국과 달리, 아카데미에는 여섯 개나 되는 구슬이 반짝이고 있는 탓이었다.
어떤 구슬은 다른 것들보다 찬란했고, 어떤 구슬은 깨져있었으며, 어떤 것은 숨어있었지만…
여섯 개의 구슬이 동시에 내뿜는 빛을 숨길 수는 없었다. 각양각색의 빛이 얽히고설키는 모습이 눈이 아플 정도였다.
…대체 저 구슬은 뭐란 말인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그니움의 그림자는 그의 시선을 다음 장소로 이끌었다.
『다시 한번, 발아래를 보아라.』
그의 바로 아래, 음울한 붉은 색으로 물든 한반도와 어둠에 휩싸인 시베리아 사이에 있는 곳.
만주.
그곳에는 두 개의 구슬이 반짝였다. 하나는 만주 기지를 출발해 다급하게 북쪽으로 향하는 중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만주 균열 바로 앞에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여명의 정신이 아래로 추락했다.
현실의 그가 타고 있는 군용 트럭이 아니라, 균열이 보이는 언덕 위로.
톈린이 말했던 북만주 기지가 있는 자리였다. 분명 무장한 용병들과 초인이 있어야 하는 곳이었지만…
그곳에 남아있는 건 불타는 폐허뿐이었다.
주변 산기슭과 숲에는 괴물들이 들끓었고,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용병들의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꿈속의 망상? 아니면 예지몽?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여명은 현실의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타는 기지에서 멀지 않은 곳, 선죽 용병단의 군용 트럭이 보였다.용병단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방비하게 기지로 접근하는 중이었고…
‘한국 정부의 양치기?’
그들을 향해 돼지머리와 소머리를 뒤집어쓴 괴인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설마, 한국 정부가 북만주 기지를 파괴한 범인이란 말인가? 대체 왜?
솟아오르는 의문 속에서, 미그니움이 입을 열었다.
『운명이 깨어났다.』
『모든 운명의 주인들 또한 깨어났음이니.』
『그대는 마땅히 그들의 운명을 빼앗아라.』
이해할 수 없는 말, 이해할 수 없는 꿈.
여명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미그니움을 노려봤다.
하지만 꿈속의 주인인 미그니움은 아무런 의문도 풀어주지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웃으며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더욱 분발하거라, 나의 간택자.』
‘잠깐…!’
꿈이 뒤집혔다. 늘어났던 세계가 수축하고, 정신이 다시 육체를 향해 날아갔다.
미그니움의 그림자가 멀어지고, 죽음과 피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순간.
여명은 꿈에서 깨어났다.
***
‘…이건?’
뭔가 타는 냄새를 맡은 톈린은 군용 트럭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냄새는 북만주의 침엽수림 너머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단순한 화약 냄새? 아니었다. 화약 냄새 사이로, 나무와 살이 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톈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 위로 희미하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게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무전기를 들어 북만주 기지에 통신을 보냈다. 대답은커녕, 간단한 신호음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톈린은 숙련된 용병답게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뭔가 일이 꼬였다. 그것도 아주 엿같이.
“정지! 전원 정지해!”
그는 운전석을 두들겨 차를 멈추고, 다른 용병들의 시선을 모았다.
준비하고 있던 용병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가득 메운 연기를 확인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저거 설마….”
“대장, 북만주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통신이 먹통이라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선… 우리 용병단은 여기서 전원 하차한다. 자는 놈들 다 깨우고! 주변부터 경계해!”
톈린이 명령을 내린 순간, 눈을 감고 있던 여명이 천천히 눈을 떴다.
“…신입?”
눈을 뜬 신입의 주변으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위기가 닥치니 드디어 긴장 하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닌 듯싶었다.
여명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검과 샷건을 뽑아 들더니, 톈린에게 다가와 말했다.
“톈린 선배님. 지금 당장 후퇴해야 합니다.”
“후퇴? 너 인마, 설마 겁먹은 거냐?”
“시간이 없습니다. 부대 일부라도 후퇴해서 후방에 상황을 알려야 합니다. 북만주는 이미 함락됐습니다.”
“함락? 그게 대체 무슨 소….”
톈린의 질문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순간, 다른 용병들이 타고 있던 군용 트럭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온 탓이었다.
‘…대전차 로켓?’
톈린이 그것의 정체를 떠올림과 동시에, 로켓이 트럭을 강타했다.
콰과광!!
강력한 폭발이었다. 두꺼운 군용 트럭조차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붕 떠오를 정도였다.
불꽃과 비명, 당혹과 공포가 뒤섞인 충격파가 용병단을 강타했다.
바로 옆 트럭에 타고 있던 톈린의 몸이 붕 떠오르고,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우웁, 이런, 씨… 발…”
다행히 그가 떨어진 곳은 푹신한 흙 위였다. 골이 흔들리긴 했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아아악!”
“내 팔! 내 팔이!”
하지만 운이 좋았던 톈린과 달리, 단번에 죽지 못한 자들은 팔다리가 날아갔거나, 급소에 파편을 맞은 상태로 비명을 내질렀다. 현장에 있는 구급키트로는 살릴 수 없는 부상이 대부분이었다.
“200M 전방! 서쪽 숲 사이! 적은… 10명 이상!”
“시발, 갈겨!”
그나마 정신이 남아있는 자들은 로켓이 날아온 방향으로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요란한 총소리가 공기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말 그대로 견제 사격에 불과했다. 침엽수림 사이에 숨어있는 적들에게, 소총으로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은 한계가 있었다.
유탄이나 박격포를 준비해왔다면 또 모를 일이었지만, 용병들에게 지급된 화기는 자동소총과 산탄총이 전부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괴물을 잡으러온 거지, 무장한 인간들과 전쟁을 하러 온게 아니었으니까.
‘지형과 화력 모두 열세.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없다.’
용병단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대로라면 전멸은 시간문제였다.
“시발, 다들 후퇴해! 숲으로 산개해라!!”
상황판단을 끝낸 톈린를 후퇴를 입에 올렸다. 몇몇 용병들이 명령을 따라 엄폐물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등 뒤로, 적들이 다시 한번 로켓을 발사했다.
마법이라도 쓰고 있는 걸까? 상대가 발사한 로켓은 정확히용병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과광!!
터져오르는 폭발 사이로, 피와 살이 튀었다. 수많은 용병들이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후퇴! 후퇴해!”
이미 승산은 기울었다. 신입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북만주 또한 멀쩡하지는 못하리라.
“개죽음당하지 말고 후퇴하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톈린은 앞으로 나서며 총을 갈겼다. 다른 부하들이 도망갈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줄 심산이었다.
‘…신입이랑 부단장은 어디 있지?’
두두두두!
총소리가 귀를 어지럽히는 순간에도, 톈린은 주변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둘은 반드시 살아서 도망쳐야 했다.
‘젠장, 괴물이 남하하기 전에 만주 기지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건 초인뿐인데…!’
톈린은 허리춤에서 수류탄을 뽑아 집어 던진 뒤, 가장 앞에 있는 트럭의 뒤편에 엄폐했다.
신께서 도우셨는지, 그가 찾던 두 사람 또한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엄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무기를 빼든 채,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 모두 상태가 나쁘지 않아보였다.
옷이나 조금 상한 신입과 달리, 김만수는 몸 곳곳이 그을려있긴 했지만… 초인에게 저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톈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신입! 부단장님!이대로라면 괴물들이 남하할 겁니다! 두 분 다 만주 기지로 후퇴해 소식을 알리십시오!”
나머지 용병들이 다 죽는 한이 있어도, 괴물들의 남하는 반드시 막아야 했다. 톈린은 비정한 마음으로 다른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전원! 두 사람을 엄호해라! 시간을 벌어!”
톈린의 명령을 내린 다음 순간, 두 사람이 움직였다.
도주 경로가 아닌, 적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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