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74)
을 위한 세계는 없다-374화(374/817)
***
홍용완 의원은 떠올랐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쿵! 바닥에 떨어진 직후, 그는 신음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어으, 악… 끄으… 자, 잠깐만….”
그건 여명을 향한 애원이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지금 여명의 상태는 누가 봐도 이성이 끊어진 사람의 그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여명의 폭력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그는 정밀하게 ‘고통스럽지만 죽지 않을 수준’을 지켜가며 홍용완을 두들겼다.
밟고, 차고, 던지고, 찍고…
영약을 건강식처럼 처먹은 덕분일까. 홍용완은 초인도 아닌 주제에 꽤 오랫동안 버텼다.
물론, 기껏해야 2분을 넘기지 못했지만.
여명은 피떡이 돼서 기절한 홍용완 의원을 바닥에 내던진 뒤, 시리를 향해 말했다.
“잘 찍었어?”
시리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그녀는 교복 소매에서 작은 휴대폰을 꺼냈다.
“네, 처음부터 다 찍긴 찍었는데… 이걸 어디다 쓰시려고요?”
그녀가 통쾌함과 궁금증이 반반 섞인 얼굴로 묻자,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세티 보여 주려고.”
“….”
이런 정신 나간 커플 같으니. 시리는 작게 고개를 내저은 뒤, 기절한 홍용완과 여명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제 어쩌실 거예요?”
“압박은 충분히 했으니, 정보를 캐야지.”
그렇게 말한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이것저것 준비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마약이 든 분사기, 기생충 주사기, 그리고 묘하게 분홍색이 감도는 물약 한 병과 진짜 분홍색 가루가 든 봉투.
여러모로 아카데미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을 본 시리는 웃었다. 눈물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은 그녀의 미소는 묘하게 음습했다.
“그러면 저는 계속 연기하면 되죠?”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굳이 더러운 꼴 볼 필요 없….”
그러자 시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할게요! 아니, 하게 해주세요.”
애매한 미소 한 번, 한숨 한 번. 그녀가 할 연기가 무엇인지 아는 여명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마. 봐주는 거 없이 리얼하게 갈 거니까.”
시리는 반색하며 연기를 준비했다. 스스로 뺨을 때리고, 옷을 구기고, 강제로 마나를 역류시켜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고…
그사이 여명은 기절한 호위들의 상태를 확인한 뒤, 조금 전에 꺼낸 회복약의 뚜껑을 열었다.
각성제가 섞인 구더기 공주의 회복약.
웬만한 초인에게도 독하게 느껴지는 물약의 딸기 향기가 사라지기 전에, 여명은 그대로 기절한 홍용완 의원 머리 위에 물약을 부었다.
***
-자, 잘못했어요… 형부….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가운데, 홍용완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목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인지, 숨쉬기가 어려웠다.
-요, 용서해주세요.
저 목소리, 분명 빌어먹을 붉은 양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홍용완은 씨발- 욕설과 함께 눈을 떴다.
그렇게 눈곱과 피딱지가 가득한 그의 시야 너머로 들어온 건…
“제발….”
겁에 질려 무릎 꿇은 채 상처가 가득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시리와-
“뭘 잘못했는데?”
삐딱하게 소파에 앉아있는 여명이었다. 피에 젖은 그의 교복은 무슨 공포 영화의 그것처럼 섬뜩했다.
하물며 저 피가 자신의 피라면야.
홍용완은 그제야 기절하기 전에 무슨 짓을 당했는지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계속 기절한 척했다.
하려 했다.
하지만 초인의 날카로운 감각은 그가 움직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빌어먹을 사위는 반색하며 그를 불렀다.
“아이고, 장인어른, 벌써 깨어나셨네요?”
소파에서 일어난 여명이 그를 향해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홍용완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사, 사위….”
“예, 우리가 장인 사위 관계긴 하죠. 아직은.”
“이, 이러지 말게… 이 상황은, 내,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이제 이쯤하고… 돌아가게….”
이 상황에서도 사위를 위하는 척, 그리고 동시에 자신은 아무 상관도 없는 척하는 홍용완.
여명은 그런 홍용완을 들어 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장인어른. 끝까지 모른 척하실 겁니까? 계속 이러시면 저 섭섭합니다.”
“무,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몰라도… 나는… 정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이 말했다.
“그래요? 제가 죽인 놈하고는 말이 좀 다르시네요.”
“….”
죽였다고? 누구를? 홍용완의 본능이 경고를 울리는 가운데, 여명은 그의 품을 뒤지며 말했다.
“그놈이 글쎄, 목에 칼을 들이밀었더니 이렇게 말합디다. 전부 장인어른이 절 엿 먹이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 자기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살려달라나.”
“누, 누가 그런 미친 소리를?”
“누구긴 누굽니까. 저하고 처제를 감시하던 장인어른의 호위 놈이죠.”
여명과 눈을 마주친 홍용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맞은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흘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그, 그건 모함일세! 모함! 사위, 내가 아카데미에 온 첫날에 자네도 보지 않았나? 호위들이 날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걸!”
“….”
“저놈들은 전부 군부에서 날 감시하기 위해 붙인… 아! 그래, 군부! 군부 녀석들이 범인이 틀림없어!”
속사포처럼 튀어나오는 거짓말에 스스로 감화된 걸까,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자, 자네는 만주에서부터 군부와 악연이 있었지. 고작 그 악연 하나 때문에 자네를 노린 게 틀림없어! 이, 이…! 매국노 새끼들!”
떨리는 목소리, 흥분한 말투, 눈물이 고이는 눈.
홍용완의 행동은 연기의 영역을 넘어서 있었다. 그가 인간쓰레기라는 걸 몰랐다면, 여명조차 껌벅 속아 넘어갈 정도로 완벽한 연기.
하지만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여명은 냉정하게 그를 소파에 내던졌다.
“믿어주게! 난 정말로 범인이 아니야!”
소파 위에서 꿈틀거리는 홍용완이 소리치는 가운데, 여명은 그의 품에서 빼앗은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예, 뭐, 장인어른이 하시는 말도 그럴싸하긴 합니다.”
그의 말에서 희망을 찾은 걸까. 홍용완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 새, 생각해보게. 내가 왜 자네를 함정에 빠트리겠나? 자네가 내 딸과 결혼만 하면 내 정치 생활은 탄탄대로인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자네에게 다른 년을 붙인단 말인가? 떼어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척, 거짓을 내뱉는 화법. 그건 전형적인 사기꾼의 화법이었다.
여명은 그 화법에 휘말리는 대신,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무릎 꿇은 시리에게 다가갔다.
“불.”
그녀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껌뻑였다. 여명은 한 번 더 말했다.
“담뱃불 붙이라고 이 씨ㅂ… 아니, 불이나 붙여.”
시리는 그제야 화들짝 놀란 연기를 펼치며 화염 마법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명이 사죄의 의미로 그녀에게 살짝 윙크하는 사이, 값비싼 쿠바산 궐련에서 알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국회의원이 외국산 담배를 피우네.
여명은 담배를 빨아들이며 홍용완을 바라봤다. 그는 겁에 질린 와중에도 여명이 거짓말에 넘어갔을까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장인어른.”
피와 담배 냄새가 뒤섞이며 코를 찌르는 가운데, 여명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다 좋습니다. 다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무, 문제? 나와 호위를 폭행한 거라면 괜찮네. 내가 다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어.”
홍용완 의원은 희망의 끝자락을 붙잡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여명이 내뱉은 담배 연기와… 주먹이었다.
퍽!
고개가 돌아간 홍용완은 으헉, 신음을 내뱉었다. 여명은 기절하려는 그의 목덜미를 붙잡아 소파에 처박았다.
“장인어른, 제가 용병 출신이다 보니, 사람을 믿는 게 참… 어렵습니다.”
“으, 으으….”
“저희 업계 불문율이 하나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사람은 죽기 직전에야 진실을 말한다.”
목소리에 살기를 살짝 섞자, 홍용완이 몸을 떨었다. 여명은 그의 목을 지그시 누르며 계속 말했다.
“그렇다고 장인어른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 이렇게 합시다.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진실로만 대답하세요. 만약 거짓말을 하시면… 음, 그냥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아시겠죠?”
홍용완이 고개를 끄덕거리기 무섭게, 여명은 아까 꺼내놓은 분사기를 들어 그의 앞에 놨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구, 군용 분사기일세. 내용물은 아마, 초인을 제압하기 위한 약이 들어있지 않을….”
“예, 마약이 들어있더군요. 그리고 다음 질문도 그렇게 빙빙 돌리시면… 그냥 거짓말하신 걸로 치겠습니다.”
“….”
살기를 느낀 홍용완이 조용해졌다. 곧이어 여명은 기생충이 들어있는 주사기를 그에게 내민 순간.
그가 흐읍, 숨을 삼켰다.
“장인어른. 이게 뭔지 아십니까?”
“….”
목덜미를 붙잡은 손을 따라 그의 고민이 느껴졌다. 여명은 잠시 시간을 줄까 하다가, 그냥 주사기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모르시나 보군요. 사실, 저도 이게 뭔지 모릅니다.”
“….”
“그러면… 뭐, 장인어른 몸으로 확인해야겠네요.”
그렇게 여명이 주사기를 그의 목에 가져다 댄 직후, 홍용완이 소리쳤다.
“이, 이건 마폭고(魔爆蠱)야! 마폭고!”
“마폭고?”
“뇌, 뇌혈관 장벽을 뚫고 뇌에 기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생충일세. 정확한 마법 주파수를 입력하면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암살용 기생충이지.”
여명이 그걸 어떻게 아냐고 되묻기도 전에, 홍용완이 덧붙였다.
“나, 나도 예전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소문만 들었지, 실물은 처음 보는 걸세. 대체 군부가 이런 걸 어디서…?”
“….”
연기파도 이런 연기파가 없었다. 여명은 헛웃음을 참은 뒤 그의 목에 주사기를 찔러넣었다.
“그러니까, 장인어른도 확신은 못 한다는 이야기군요.”
“어? 어?”
“제가 확신할 수 있도록, 도움 부탁드립니다.”
여명은 꾸욱- 주사기를 주입했다. 홍용완이 발작했지만, 초인의 힘을 이겨내는 건 불가능했다.
악! 악!! 그는 주사기가 주입되는 내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이윽고 여명이 주사기의 절반 정도를 비웠을 때, 홍용완은 그에게 빌기 시작했다.
“사위! 살려주게! 야, 양치기. 양치기를 불러줘!”
“양치기?”
“아, 아카데미에 있는 우리의 비밀 요원일세! 내 딸에게 전화해서 지금 당장 양치기를 불러줘!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그러자 여명은 휴대폰을 꺼내긴커녕, 차갑게 되물었다.
“제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군요.”
“미, 미안하네 하지만 지금은 시, 시간이 없어! 제발, 제발 양치기를 불러줘!”
“아뇨, 먼저 아는 걸 말하세요.”
“이런 씨발! 내가 죽는다니까! 제발, 우선은 양치기부터….”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차가운 침묵을 마주한 홍용완은 거의 우는 것처럼 말했다.
“마, 마폭고는 뒤틀린 마나로 주인을 인식시키지 않으면 머리에 자리 잡자마자 폭발한다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내, 내 머리가 폭발하면 자네라고 무사할 거 같은가?! 처제를 강간하고, 장인을 살해하다니! 아무리 자네라도 무사할 수 없는 스캔들이야!”
그가 악을 쓰든 말든, 여명은 맛없는 담배를 퉤- 뱉고는 느긋하게 말했다.
“살려달라는 사람 태도가 그게 뭡니까?”
“뭐, 뭣?”
“이번에는 기회를 드리지만, 다음부터는… 조금 더 정중하게 부탁해야 할 겁니다.”
홍용완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에, 여명은 위장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장인어른.”
직후, 용의 심장에 잠들어 있던 뒤틀린 마나가 풀려나며 홍용완의 몸을 휘감았다.
***
푸욱-! 기절한 호위들의 몸에서 주사기가 뽑히는 소리.
그 살벌한 소리에 홍용완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사위를 바라봤다. 분명 교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그에게서 앳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호위들에게 마폭고를 박아 넣는 여명을 보며 그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두려움.
그를 내려다보는 애국자 노괴들과 어린 시절 각하를 보며 느꼈던 바로 그 감정.
고개를 돌린 여명과 눈을 마주한 순간, 홍용완은 숨을 죽였다. 여명이 말했다.
“이 기생충, 더 없습니까? 처제한테 쓸 양이 부족한데.”
“….”
그의 말마따나, 주사기에는 붉은 양에게 쓸 기생충이 남아있지 않았다. 홍용완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 그게 마지막일세….”
“음. 그래요? 그럼 우리 처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여명은 붉은 양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죽여야 하나?”
붉은 양도 홍용완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그녀는 여명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혀, 형부… 뭐, 뭐든지 다 할게요. 사, 살려만 주세요.”
“아니, 내가 무슨 쾌락 살인마도 아니고, 나라고 처제를 죽이고 싶겠어?”
“….”
“근데, 믿을 방법이 없잖아. 우리 장인어른처럼 기생충을 박아 넣은 것도 아니고… 응? 안 그래? 처제가 언니한테 달려가서 오늘 일을 고발하면, 세티가 나를 어떻게 보겠어?”
홍용완은 그의 말속에서 기생충이 없었다면 자신 또한 그냥 죽였을 거라는 뜻을 읽어냈다. 단순히 협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말.
붉은 양이 몸을 떨며 말했다.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마, 말 안 할게요. 맹세할 수 있어요….”
여명은 아무 말 없이 쪼그려 앉아 붉은 양과 얼굴을 마주했다.
반대편에 있는 홍용완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붉은 양이 입술을 꽉 깨무는 걸 보니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녀를 협박하는 게 분명했다.
‘남자 하나 꼬시지 못한 빌어먹을 년.’
홍용완이 그녀의 고통을 보며 위로를 느낄 때쯤, 여명이 그를 불렀다.
“장인어른.”
“으, 응? 왜 부르는가. 사위?”
“우리 처제, 뭐 약점 같은 거 없습니까? 그냥 죽이자니 세티가 슬퍼할 거 같기도 하고, 예쁜 몸이 아깝기도 하고… 좀 그래서요.”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명의 목소리에서는 노골적인 살기가 뚝뚝 묻어나왔다.
홍용완은 모른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어진 여명의 말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으므로.
“아, 이건 부탁 아니고 명령입니다. 첫 명령부터 절 실망시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씨발 새끼. 홍용완은 애써 욕을 삼키며 대답했다.
“붉은 양에게는… 부모가 있네. 병실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약한 부모가.”
부모의 이야기가 나오자 붉은 양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으나 여명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별로 도움 되는 정보는 아니군요.”
“아니, 아니. 들어보게. 그 부모의 머릿속에는 마폭고가 심겨 있어. 내가 장담하는데, 그 부모만 있다면 붉은 양은 자네에게 복종할 걸세.”
“장인어른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아니!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정말로 모르는….”
그때, 여명이 그의 말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예, 예. 그렇다고 칩시다. 장인어른하고는 이제 한배를 탄 사이인데, 괜히 의심할 필요 없죠. 안 그렇습니까?”
“….”
“그러니 핑계는 거기까지만 하시고, 주십쇼.”
“뭐, 뭘?”
“붉은 양의 부모인가 뭔가 하는 년의 정보랑 마폭고의 주파수 말입니다.”
홍용완은 그제야 말을 알아듣고 부랴부랴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팔뼈가 부러진 탓일까, 수첩을 꺼내고 페이지를 찢는 내내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물론, 여명은 개의치 않고 찢어진 페이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페이지에 적힌 내용을 읽은 직후, 여명의 얼굴이 굳었다. 처음 그를 폭행할 때보다도 더욱 살벌하게.
“뭐,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홍용완은 그의 눈치를 보는 동시에 페이지에 적혀 있던 정보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붉은 양의 애미가 갇혀 있는 병실 정보와 마폭고의 마나 주파수, 그리고 간단한 이름 정도가 적혀있을 뿐인데… 왜?
그의 의문이 해소되기 전에, 여명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질문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안 주머니에 넣고는, 곧바로 작은 물약을 꺼내며 말했다.
“며칠 전 드워프에게서 받은 고급 회복 물약입니다. 완치는 힘들겠지만, 얼굴에 멍든 것 정도는 다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
“어디 가서 맞은 티 내지 말란 말입니다. 아시죠?”
홍용완은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물약을 받았다. 재빨리 병을 따자 기괴할 정도로 선명한 딸기 향기가 났다. 뭐야 이거?
아무튼, 상처에 물약을 뿌린 그는 그제야 조금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나 말고, 다른 호위들은…?
“알아서 정리하세요. 머리통에 마폭고가 박혔는데 제깟 놈들이 뭘 하겠습니까? 아, 그리고 죽은 놈은… 뭐, 시체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어째서일까, 홍용완은 그의 말이 협박으로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뒷정리는 혼자 하실 수 있을 거라 믿겠습니다. 앞으로 대통령이 되셔야 할 분인데. 이 정도는 해주셔야죠.”
“…대통령?”
움찔, 홍용완의 몸이 떨렸다. 여명은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사위와 장인 사이 아닙니까. 그 정도는 하셔야죠. 대통령 장인과… 한국을 주무르는 사위.”
“….”
“그러니 저번에 세티가 했던 부탁, 잊지 마십쇼.”
세티가 했던 부탁… 그 부탁이 ‘애국자들’에 여명을 추천하는 것이라는 걸 떠올린 홍용완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걸 떠올린 게 세티가 아니라….”
쉿. 여명은 손가락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알면서 뭘 입 밖으로 꺼내냐는 듯한 제스처.
도대체 어디서부터 알고 있던 거지?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는 홍용완을 향해, 여명이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장인어른.”
***
“…연기 맞아요?”
숙소에서 나온 직후, 시리가 처음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여명은 피식 웃었다.
“그럼 진심이겠어?”
“예, 진심처럼 보였어요.”
“아이고, 맹세라도 할까요?”
여명은 CCTV를 속이기 위해 피눈물의 환상을 사용하며 대답했다.
사기치는 무술과 함께하는 맹세라. 시리는 묘한 역설을 느끼며 흐응- 콧김을 내뱉었다.
“됐어요. 전 형부 믿어요.”
“처음부터 믿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건….”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여명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농담이야. 심각해지지 마.”
“하지만 사실인걸요. 제가 형부와 언니를 믿었으면…”
“나한테 속옷을 보여 주는 일은 없었겠지.”
여명이 그렇게 말을 끊자, 시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그래, 시리. 너는 기죽어 있는 것보다 그렇게 노려보는 쪽이 더 어울려.”
실없는 농담과 작은 미소.
온종일 땀 흘린 노동자의 그것처럼, 그의 미소는 조금 전까지 고생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제야, 시리는 언니의 취향이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언니의 자매라는 사실도.
누가 그랬더라? 자매의 취향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누가 말한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네티같은 년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된 거겠지.
…이게 대체, 뭔 소리람.
얼굴이 후끈거린 시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제를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참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형부.”
“응?”
“아까, 홍용완 그 쓰레기한테 저희 엄마 정보가 담긴 종이를 받았을 때… 왜 정색하신 거예요?”
“….”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걸까, 여명은 잠시 침묵했다. 기대감과 불길함이 반반 섞인 침묵.
다행히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야경을 가로질러 하수도로 내려갈 때쯤, 여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리, 어머니 성함이… 세팔리가 맞니?”
“예? 예, 맞아요.”
“연세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많아요. 이승만을 직접 본 적 있다고 했으니까요.”
“….”
그러자 여명은 우뚝, 발을 멈췄다. 그는 환상을 풀고 본래 얼굴로 말했다.
“음… 시리, 부모님을 구하러 가기 전에, 우선 마폭고를 해제하는 법부터 찾을 거야. 주파수를 아는 사람이 있는 이상 어디에 있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니까.”
“…예.”
“그리고… 음….”
뭐가 그리 고민인 걸까? 그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고 나서야 본론을 꺼냈다.
시리가 상상도 못했던 본론을.
“혹시, 할머니 만날 생각 있어? 할머니라고 부르는 어머니 말고, 진짜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