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75)
을 위한 세계는 없다-375화(375/817)
***
여명이 홍용완 의원을 두들겨 패던 시각, 아카데미 마법학부장실.
-똑똑.
‘활력의 반지’라고 이름 붙인 마도구를 만지작거리던 마법학부장 가단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돌아가라. 오늘은 누구도 만날 생각 없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가단은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학부장의 말을 무시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쉽게도, 침입자는 놈이 아니라 년이었다.
“…호아나. 이런 젠장, 여기가 병영이야? 맨날 연락도 없이 찾아오면, 다른 연구원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
전대 성기사단 부단장이자 레독스의 총, 호아나 툴레. 다섯 신 교단 특유의 어깨 망토를 두른 그녀는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단 앞에 앉았다.
“늙어서 주책인 마법학부장으로 보겠지.”
호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벼운 서류뭉치를 툭, 책상 위에 던졌다.
“이건 또 뭐야?”
호아나는 술에 쩔었던 저번과 달리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천여명이 가지고 있는 데스나이트에 대한 조사 보고서.”
“….”
“미국에 있는 교원들이 힘 좀 썼지.”
가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조사? 뭘 조사씩이나 했어? 그냥 바라나 단장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것을.”
호아나는 대답하는 대신 방에 전시된 술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뜸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가단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와인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선배를 내부고발자로 만들 수는 없잖아.”
“내부고발자는 무슨… 사건 취조라도 하냐?”
“취조는 몰라도, 성녀님 옆에 데스나이트가 돌아다니는데 호위가 돼서 까막눈으로 있을 수는 없었어.”
“아, 업무 중이시다? 어이구 잘나셨… 야, 그 술병 따지 마라. 비싼 술이야.”
가단이 경고했음에도, 뽕. 와인병에서 코르크가 뽑혀 나오는 소리가 울렸다. 호아나는 포도주를 잔에 따르며 말했다.
“여섯.”
“뭐?”
“네가 들고 있는 그 반지, 여섯 개를 요구했었지? 그게 딱 데스나이트 숫자였어. 천여명이 가지고 있는 데스나이트는 선배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야.”
“하!”
가단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포도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잔을 싹 비운 뒤에도 호아나는 웃지 않았다.
“…농담 아니야?”
“아니야.”
“아, 그래?”
가단은 다시 술잔을 채우며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한 모금 더 술을 걸친 뒤에야, 그는 상황을 이해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천여명 그 친구가… 뭐, 불사의 왕이 이 땅에 내린 가운데 손가락쯤 되나? 응?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네크로맨서가 학생으로 들어온 건가?”
호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다면 성녀님께서 함께 다닐 리 없잖아.”
“어… 그러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령술 혁명이라도 일어났나? 서른도 안 된 놈이 데스나이트를 여섯이나 조종한다고?”
“조종하지 않아.”
“…?”
가단은 스트레스와 술기운 때문에 헛소리를 들었나 고민했다. 하지만 허락도 없이 수백만 원짜리 와인을 오픈한 호아나는 현실이었다.
곧, 호아나가 보고서 중간에 있는 종이를 꺼내며 말했다.
“바라나 선배를 떠올려봐. 누가 조종하는 거 같던?”
“아니. 누가 봐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걸로 보였지.”
호아나는 쿵! 책상에 종이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바로 그거야. 천여명은 데스나이트를 조종하지 않아. 방법이나 이유는… 모르겠어. 내 가설이지만, 성녀님이 저주를 씻어낸 걸 수도 있고, 그냥 인간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겠네? 그딴 걸 가설이라고… 음, 하지만 부단장님을 생각하면 또 마냥 무시할 수도 없고.”
가단이 조심스레 술병을 기울이며 말하자, 호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의 기적이란 말로도 부족하지.”
가단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데스나이트에 대해서? 아니, 호아나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기밀 정보를 말하고 있느냐.
그의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호아나가 가리고 있던 종이에서 손을 뗐다. ‘인적 사항’이라고 적힌 종이.
가단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류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히라리아의 명가 두메아 가문의 가주] [황제에게 인정받은 일인용병, 자유인, 벨라디바 돈 레] [전전대 성기사단 부단장 바라나 카시] [두칸 용병단 제1부단장 창귀신 두하칸] [프리블레이드 적색의 세디달]이름을 전부 훑은 가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혀 있는 이름들이 하나 같이 예사롭지 않았으므로.
“단장을 포함해서… 모두 변경백령 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군. 우리랑 함께 싸운 사람도 셋이나 되고.”
“그리고 모두 그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지.”
“….”
직접 그 전쟁에 참여했었던 두 사람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오랫동안 묻혀있었던 전쟁의 기억이 마치 바늘처럼 가슴을 찔렀으므로.
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채우기 전에, 가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호아나, 기억해? 야반 협곡에서 두메아 가주가 탱크 위로 점프했던 거.”
“당연히 기억하지. 뚜껑 열던 모습이 아직도 선해. 아, 탱크 이름도 기억나네. M36B2E9.”
“그러면 레스 강 전투는?”
“외인부대랑 싸웠던 그때? 기억하지. 그 유명한 붉은 머리의 세디달이 열검을 휘두르면서 다리를 사수하던 그 모습이….”
호아나는 그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프리블레이드 세디달은 레스 강 전투에서 죽었으니까.
“….”
입맛이 씁쓸해진 호아나는 술잔을 비운 뒤, 왜 그런 걸 물어봤냐는 듯 가단을 흘겼다.
가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또 왜?”
“왜는 무슨 왜야. 세디달이 바로 그 전투에서 죽었는데.”
“아, 그랬… 었지….”
아무리 대단한 초인이라도 독가스에 질식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의 산증인.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 기억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독가스로 오염된 강물을 마시고 죽은 민간인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으니까.
가단은 그제야 그때를 떠올린 듯, 고통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성기사단을 대신해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유언을 들어주긴커녕, 기억조차 못 하다니….”
모르고 꺼낸 거였어? 이번에는 호아나가 역으로 그를 위로했다.
“늙는 게 다 그런 거지. 그리고 레스 강 전투는… 어쩔 수 없었어. 마법으로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방독면은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잠시 침묵하던 가단은 벌써 바닥을 드러낸 와인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았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토록 증오하던 프랑스에서 만든 포도주를 마시며, 지구의 아카데미에 있군.”
“…평화가 찾아왔다는 증거지,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니야.”
“세디달도 그렇게 생각할까?”
“….”
가단은 포도주잔을 들었다. 물보다 진하지만, 피보다 묽은 액체가 그의 눈앞에서 찰랑거렸다.
“그녀가 지금 우리를 보면 뭐라고 할까?”
“딸이 어떻게 됐냐고 묻겠지.”
호아나의 대답을 들은 가단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유언을 기억하고 있었나?”
“늙으면 생각이 많아지거든.”
“찾았나? 아니, 찾은 거지? 그래서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거지?”
기대 어린 목소리는 보답받지 못했다. 호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말고 다른 선배들이 그녀의 딸을 찾았지만… 누구도 찾지 못했어. 승만 시티, 거기 이후로 모든 흔적이 끊겼거든.”
“….”
“아마 차원문을 넘은 거 같은데, 소련과 미국이 동시에 관리하던 개성 차원문을 조사할만한 역량이 우리에게는 없었고… 소련과 미국이 떠난 뒤에는 세월이 너무 흘렀다. 뭐, 그런 거지.”
이번에는 가단이 눈을 흘길 차례였다. 그는 거칠게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염병, 옛날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여기 찾아온 이유나 말해.”
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 놓고 승질은. 호아나는 쯧쯧 혀를 차다가, 뭔가를 고민하듯 하늘을 바라봤다. 가단이 이상함을 느낄 정도로 오랫동안.
이번에는 대체 뭔 이야기를 하려고? 그가 꿀꺽 침을 삼키는 순간- 그녀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 보고서, 네가 가져라.”
“…뭐?”
“교단에서는 아직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봤어. 사제단도, 다른 성기사들도.”
“….”
가단은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성녀에게 연인이 있는데, 그가 옛 전쟁의 데스나이트를 끌고 다닌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가단은 다른 걸 물었다.
“방금, 하늘을 보면서 뭘 한 거냐?”
“다섯 신께 이래도 되냐고 여쭤봤지.”
“…뭐라고 하시던?”
“아무 말 안 하시더라고. 언제나 그랬듯이.”
신성모독적인 발언이었음에도, 가단은 웃었다. 호아나 또한 웃었다.
“일 끝났으니 난 간다. 아, 그리고 포도주 잘 마셨다.”
“…그래, 잘 돌아가고. 다음에 올 때는 제발 연락 좀 하고.”
호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가운데, 가단은 그녀가 남긴 보고서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 보고서를 넘겼는지 이해했다.
보고서가 가리키는 가설은 호아나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시무시했으니까.
[전쟁 중 누군가가 가매장된 영웅들의 시체를 네크로맨서가 도굴할 수 있도록 옮겼다.]***
“…할머니요?”
시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부터가 이미 할머니라 부를만한 나이인데, 진짜 할머니라니?
아무리 초인의 수명이라도 힘든 일이었다.
아니면 무슨 비유인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여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꼭 이럴 때 말문이 막힌다니까. 그가 말끝을 흐리자, 시리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어려운 이야기면 굳이 안 하셔도 돼요.”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야. 내가 말재간이 없는 게 문제인 거지.”
여명은 그녀와 걸음을 나란히했다. 하수도의 축축한 어둠 아래, 두 사람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조금 긴 이야기인데, 괜찮지?”
“…물론 괜찮죠. 전 요약보다 긴 이야기가 좋아요.”
뒤에서 지켜보던 마탑주 유령이 크흠, 헛기침하는 것을 신호 삼아- 여명은 그녀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LA에서 네크로맨서를 공격한 이야기부터, 어떻게 데스나이트들을 데리고 다녔는지.
그리고 그 중 프리블레이드 세디달이 찾는 ‘딸’이 시리의 ‘엄마’ 와 동일 인물 같다는 말까지, 전부.
최대한 요약하지 않고 상세히 말한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시리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먼저 입을 연 건 마하간이었다.
[죽음과 시대를 초월한 만남이라… 네크로맨서들이 주장하는 천국에서나 이뤄질 법한 일을 실제로 저지르는군.]고의는 아니었지만, 그의 말 때문에 시리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여명이 마하간을 향해 눈치를 주자, 그는 투덜투덜 투명한 상태로 돌아갔다.
뭐, 아무튼.
하수도로 다시 침묵이 찾아온 직후, 시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께서 절 좋아할까요?”
“…당연히 좋아하시겠지. 왜 그런 생각을 해?”
“그야… 전 그분의 딸을 납치, 감금한 나라에서 딸의 몸을 유린해서 만든 괴물이고… 또 그분의 딸은 지금도 저 때문에 고통받고 계시니까요?”
“….”
암울한 전망이었지만, 여명은 바로 부정할 수 없었다. 세디달이 찾는 건 어디까지나 딸이었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손녀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명은 확신했다.
“…그럴 일 없을 거야.”
“에이, 어떻게 확신해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형부도 그분을 다 아시는 건 아니잖아요.”
시니컬한 말투와 힘을 잃은 입꼬리. 여명은 그 속에서 커다란 자기혐오를 찾을 수 있었다.
핏줄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자기혐오.
역시 자매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세티가 가지고 있던 자기혐오와 같은 결을 가진 감정이었다.
그래서 여명은 세티에게 그러했듯,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말했다.
“그럴 일 없을 거야. 시리, 네 말대로 내가 세디달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지만, 그녀가 딸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어.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놀란 걸까, 휙 고개를 돌린 시리를 향해 여명이 말을 이었다.
“믿어줘. 자기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고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을 어느 부모가 미워하겠어?”
“….”
시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불이 새빨개진 걸 보니,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
여명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준 뒤, 용의 둥지로 그녀를 이끌었다.
기왕 손녀와 할머니의 만남이라면, 하수도보다는 용의 둥지가 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리는 여명의 손을 꽉 잡은 채 그를 따랐다.
용의 둥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윽고 둥지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일행들이 두 사람을 반겨줬다.
평범하게 인사하는 세티와 연락도 안 하고 늦으면 어쩌냐고 성을 내는 성녀, 그리고 조용히 손을 흔드는 쇠미리와 네티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스나이트들과 영화를 보던 오르세 라날.
[에이, 이번에는 새 여자가 아니네.]환대 아닌 환대를 받은 여명은 쓴웃음과 함께 세티에게 다가가 앞선 일을 설명했다.
미리 연락한 덕일까, 세티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홍용완 의원을 두들겨 패고 머리에 마폭고를 심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긴 했지만, 그보다 먼저 시리부터 챙겼다.
“언니, 미안… 미안해.”
“괜찮아, 다 괜찮아.”
포옹하는 두 자매를 보며 작은 성취감을 느끼길 잠시. 여명은 데스나이트들에게 다가가 시리와 세디달의 관계를 설명했다.
두칸 용병단의 용병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벨라디바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와 씨발! 두메아 늙은이가 후손 만나는 걸 놓쳐서 아쉬웠는데, 이런 기회가 오네. 존나 재밌겠다. 당장 꺼내.
여명은 흥분한 그녀를 진정시킨 뒤, 한 가지 부탁을 꺼냈다.
만에 하나 세디달이 시리를 공격하려거나 딸의 이야기를 듣고 폭주하면 막아달라는 부탁.
그 부탁을 들은 벨라디바의 반응은 하나였다.
-너 자식 없지?
“예?”
-자식이 없으니까 그런 부탁할 수 있는 거야. 걱정하지 말고 꺼내.
여명은 그럼 벨라디바는 자식있어요? 라고 묻는 대신 순순히 세디달을 꺼냈다.
-불렀나요?
사뿐히 땅에 내려앉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아름답지만 창백한 외모와 대비되는 두꺼운 흉갑과 검, 그리고 시리의 그것만큼이나 새빨간 머리카락까지.
이렇게 보니, 그녀는 아샤 동화 속에서 나오는 여성 기사의 전형이라고 할 만했다. 아니, 나이를 생각하면 그녀의 이야기가 동화가 된 걸지도.
아무튼 간에, 여명은 세디달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디달.”
-예, 저도 오랜만이네요. 다른 분들은 자주 나가시던데, 저는 영 부르지 않아서 아쉬웠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용의 둥지를 싹 훑었다.
-전투가 필요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절 왜 부르셨나요? 혹시…
말끝을 흐리던 세디달의 시선이 문뜩, 세티의 품에 안겨서 울던 시리에게 고정됐다.
묘한 침묵.
한눈에 알아본 걸까? 여명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윽고 시리도 그녀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세디달이 칼집을 꽉 쥐며 여명에게 물었다.
-혹시, 제 딸도 언데드로 살리신 건가요?
“…예?”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 딸이 살아 있으면 저보다 두 배는 살았을 나이인데… 저 아이는… 닮아도 너무… 닮았어요.
“….”
떨리다 못해 물기가 섞인 목소리. 그건 죽은 자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반응이었다.
-말해줘요… 성녀의 연인이여. 이게 무슨 일이죠? 제가 기적을 보는 건가요?
“아뇨, 현실입니다. 세디달. 저 아이는 시리. 당신의 손녀입니다.”
-손녀…?
창백한 눈동자는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떨렸다. 세디달은 여명에게 무어라 더 물으려 했지만, 그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직접 들으셔야죠.”
-아.
세디달은 그제야 손녀와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눈동자가 서로를 비추는 가운데, 둘은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그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단 한 명. 성녀만은 은근슬쩍 여명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여명.”
“응? 왜?”
“혹시… 시리랑 했어?”
“….”
꽁! 여명은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다행히 그 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