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76)
을 위한 세계는 없다-376화(376/817)
***
희망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전쟁에서 살아온, 그리고 독가스 아래에서 죽었던 세디달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불을 미뤄가면서까지 딸을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큰 희망은 품지 않았다.
행복한 딸의 모습? 언감생심 기대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딸의 무덤이나 찾게 된다 해도, 그녀는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시리를 본 순간, 그녀는 모든 각오가 체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손녀.
내 딸의 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딸아이가 가정을 꾸려도 이상하지 않을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랬다.
-나의 손녀….
차갑게 굳은 혓바닥을 몇 번이나 굴려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였다. 내 입에서 나온 단어가 아닌 느낌.
저 가녀린 소녀가 정말 그녀의 핏줄이란 말인가?
다행히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딸과 닮은 저 얼굴, 그리고 그녀와 똑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답을 알려줬으니까.
한걸음.
그녀는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손녀에게 다가갔다. 손녀 또한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걸음 더.
자신을 보는 손녀의 모습에서 딸과 헤어지던 순간이 겹쳐 보였다. 이별이 아니라 만남의 순간이었음에도 그랬다.
한걸음 더.
그녀는 웃었다. 죽은 자에게는 눈물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웃었다. 딸아이와 헤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걸음.
붉은 머리를 가진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두 쌍의 눈동자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가운데, 시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 이름은 시리, 오시리. 자랑스러운 세팔리의 딸입니다.”
-세디달. 사랑하는 세팔리의 어머니입니다.
그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만남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가족 상봉의 감동 때문에?
고아인 여명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조용히 두 사람의 침묵을 지켜봤다.
그리고 잠시 후, 시리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세디달의 손을 잡았다.
“저, 할머니에 대해서 잘 알아요. 가문 없는 기사, 설산의 영웅, 적색의 프리블레이드 세디달.”
-…그러니?
“엄마가 자주 이야기해주셨거든요… 할머니는 멋지고 강한 분이셨다고.”
-….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엄마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할머니.”
그 북받친 목소리를 끝으로, 시리는 할머니를 끌어안았다.
***
잠시 후, 해저 터널 내부.
“더 안 봐도 되겠어??”
성녀가 여명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눈뽕에도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뭐 구경거리라고. 그냥 둘이 오붓하게 대화하게 두는 편이 낫지.”
그러자 성녀는 흐으응-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만든 가족 상봉이잖아. 흐뭇하게 볼 자격은 있다고 보는데.”
그때, 세티가 끼어들었다.
“흐뭇한 일은 거의 없을걸. 화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응? 그게 무슨… 아.”
성녀는 그제야 한국 정부와 희생양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머리를 긁었다.
“한국의 죄가 깊다. 깊어.”
맨 뒤에서 따라오던 쇠미리 또한 한마디 거들었다.
“…어쩌면, 세디달이 복수에 끼워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오, 그러면 전력이 하나 더 생기는 건가?”
성녀가 긍정적으로 말하는 찰나, 여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생각해보자.”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올 줄 몰랐던 성녀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왜? 전력이 늘어나면 좋은 거 아냐?”
“늘어나면 좋기야 하지. 근데… 난 세 모녀가 싸움보다는 가족 간의 시간을 보냈으면 해서.”
“….”
“그동안 아껴온 사랑이 얼만데, 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거 아니야.”
여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행의 표정이 묘해졌다. 침묵은 덤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여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여태껏 숨어있던 마하간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암, 그래야지. 용사는 오글거리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을 수 있는 로맨티스트여야지.]“….”
방금 그 말이 오글거렸어? 고개를 돌리던 여명은 세티와 쇠미리가 동시에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고 나서야 크흠, 헛기침했다.
“…아무튼, 세디달의 거취에 대한 건 마폭고 제거법을 찾은 뒤에 이야기하자.”
시리의 어머니를 구하는 것도 좋지만, 한국 정부의 계획을 망가트리는 게 우선이었다.
정부가 마폭고를 이용해 조종하는 인간들에게 해제법을 알려주면서 접근하면 꽤 그럴싸한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붉은 별로 변신해서 혁명을 선동하거나, 아예 소련과의 관계를 망가트리면…
여명이 나름 미래 작전을 구상하던 그때, 성녀가 그의 상념을 끊었다.
“근데, 마폭고 제거법은 어떻게 찾으려고?”
“아, 우선 구더기 공주에게 맡겨볼 생각이야. 연금술사에, 생물학에도 나름대로 조예가 있으니까… 거기에 연구 보조로 그릇을 붙여주면 괜찮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그릇? 걔가 그런 걸 할까?”
“해야지. 기연 받아먹은 게 얼만데.”
“거, 알뜰하게도 뽑아 먹으시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성녀는 여명이 묘하게 세티를 닮아간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여명은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며 구더기 공주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구더기 공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재중 통화가 다섯 통 이상 쌓일 정도로 오랫동안.
“…미리 눈치까고 전화 안 받는 거 아냐?”
세티가 의심했지만,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구더기 공주는 투덜거릴지언정 시키면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통화를 안 받을 리 없는데.
“뭔가 문제가 생겼나.”
설마 용의 비늘로 장난치다가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실없는 걱정을 하는 여명의 시야로, 히죽 웃고 있는 쇠미리가 들어왔다.
“…?”
왜 웃어? 라는 의미의 눈빛을 보내자, 쇠미리가 대답했다. 여명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대답이었다.
“그릇에게 전화해서 구더기 공주를 찾아보라고 하면 어때요?”
“…난 그릇 전화번호 모르는데.”
아도 선배에게 전화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세티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릇 번호는 내가 알아.”
세티가 꾹꾹 번호를 누른 사이, 쇠미리는 입가를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여명이 진짜 뭐지 의아해하던 바로 다음 순간.
-따라란, 딴딴, 딴딴, 딴-
해저 동굴이 있는 방향에서 낯선 벨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여명이 쇠미리에게 물었다.
“…그릇이랑 구더기 공주. 설마 둘 다 해저 동굴에 와 있는 거야?”
쇠미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사람 다 기연을 내버려 두고 그냥 지나갈 성격은 아니잖아요.”
“…미리 좀 말해주지.”
“에이, 그러면 재미없잖아요. 아, 그리고 구더기 공주한테 기연을 알려준 건 제가 아니라 라날이랍니다.”
성녀가 ‘저, 저 고자질 하는 것 좀 봐’ 라고 중얼거리건 말건, 일행은 벨소리가 들려오는 해저 동굴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두 사람을 발견한 여명은 할 말을 잃었다. 구더기 공주와 그릇 모두 종유석 사이에서 처참한 몰골로 뻗어 있었으니까.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기연을 설치한 게 아니거늘.]마하간이 쯧쯧 혀를 차는 사이, 여명은 두 사람을 깨우지 않고 그냥 계단으로 향했다.
저걸 왜 내버려 두고 가냐는 성녀의 질문에, 여명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공짜 기연은 없어.”
성녀는 기연을 핑계로 부려 먹힐 두 사람을 생각하며 고소를 머금었으나, 쇠미리는 한마디로 그녀의 웃음을 지워버렸다.
“저거, 우리한테도 해당되는 말인 거 아시죠?”
“어? 우리도? 왜?”
쇠미리는 대답 대신 때마침 도착한 계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녀는 그제야 저번에 겪었던 고통을 떠올렸다.
“…이 기연 싫어.”
[그럼 빨리 뚫거라.]“닥쳐요. 생리통이 뭔지도 모르면서 생리통 운운하는 변태 영감이.”
[변태?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성녀가 살벌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마하간은 재빨리 계단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명은 피식 웃으며 성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조금만 더 힘내자. 이 시련이 끝나면 저 어르신도 성불할 테니까. 그땐 셋이서… 알지?”
알기는 뭘 알아. 성녀는 여명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이런 조건이 있다고는 말 안 했잖아! 이거 사기 거래야!”
여명은 찌르기를 못 이기는 척, 옆으로 물러나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다보며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어쩌겠어. 세상에 공짜 기연은 없는데.”
***
그렇게 두 시간하고도 삼십 분이 지난 뒤.
반쯤 너덜너덜해진 여명이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그것도 기절한 여자들을 다섯 명이나 주렁주렁 염동력으로 띄운 채로.
[거봐라. 여자 많아 봤자 좋을 거 없다니까.]그 모습을 본 용이 입을 놀리다가 여명이 날린 마법에 주둥이를 맞아 끙끙거리길 잠시.
일행들을 임시 베이스캠프에 눕힌 여명은 한숨과 함께 물가로 가서 몸을 닦았다.
계단의 시련에서 입은 상처가 얼마나 많았는지, 몸을 닦을 때마다 피딱지가 떨어지며 물줄기가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저번보다 250계단이나 더 내려갔구나. 장하다.]그 꼴을 본 마하간이 위로했으나, 여명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장하다고요? 용사의 무술은 구경도 못 했습니다.”
[그거야 뭐… 누가 꺼내기도 전에 죽으라더냐?]그랬다. 이번에도 여명 일행은 저번과 달리 차근차근 계단을 내려갔으나, 변경백에게 전멸당했다.
가짜 변경백이 휘두른 여덟 번의 칼질을 막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여명에게 네 번, 세티에게 두 번, 나머지 둘에게 각각 한 번씩.
그의 가장 큰 무기인 주가시빌리도 변경백을 상대로는 큰 힘을 내지 못했다. 재생이고 뭐고, 칼질 네 번에 머리가 날아갔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네 합이나 버텼잖느냐. 일행과 합치면 무려 여덟 번이나 막은 것이다.]“…그래봤자 용사의 무술을 쓰지 않은 변경백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용사의 무술을 썼다면 너도 두 합이면 충분했을 테니.]“….”
참 솔직하시네. 여명은 마하간을 제령 시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용사의 무술을 보여주시면 안 됩니까? 제가 보고 배우는 게 특기라서요.”
[아… 그건 좀 어렵다.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내가 천재라지만, 저장된 무술을 일일이 입력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계단의 환영들은 다 자동 조종 인형 같은 거다.]“….”
가짜 변경백의 눈으로 보기에 여명 일행은 용사의 무술을 쓸 가치도 없었다는 건가?
용사의 무술을 보고 배우려면 최소한 변경백에게 비벼볼 수라도 있어야 한다… 여명은 데메론드를 보며 느꼈던 벽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뭔가 조언해주실 건 없습니까?”
[조언? 조언이라….]여명이 묻자, 마하간이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 그의 몸을 적신 물기가 다 말라갈 때쯤이 돼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마법을 더 배워보는 것은 어떠냐.]“…마법? 제가요?”
[그래, 싸울 때 보니 마법에 꽤 재능이 있어 보이더구나. 얼음송곳, 염동력, 벼락… 쓰는 마법이 전부 기초마법이라서 그렇지.]그의 말대로 여명이 사용하는 마법 대부분은 기초 마법으로 분류되는 것들뿐이었다.
그보다 대단한 마법을 펼치지 못한다기 보다, 애초에 무술을 사용하면서 따로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마법이 많지 않은 까닭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시체폭발이나 저주광선같은 뒤틀린 마법 정도일까.
“기초마법으로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만….”
여명이 애써 둘러대자, 마하간이 단번에 반박했다.
[그거야 네 스승이 기초를 단단히 잡아줘서 그런 거겠지. 마법 실력은 건축과 같아서, 기초가 탄탄하다고 끝난 게 아니다.]“….”
[단단한 기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야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법. 누가 알겠느냐, 무술과 마법 둘 다 탄탄히 하면 새로운 길이 열릴지?]거기까지 들은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사 파티 마법사이자 전전대 마탑주의 조언 아닌가.
딱하나 문제가 있다면, 그가 마법을 배우는 방식이었다.
공격으로 맞은 마법을 그대로 익힐 수 있는 것.
어째서인지 전용섭의 마법은 아야톨라의 그것처럼 익힐 수 없었지만, 그가 익히고 있는 마법 대부분 적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한동안 몸 성할 날이 없겠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코르부스가 오는 대로 가르침을 청할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시리와 이야기를 끝낸 세디달이 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성녀의 연인이여.
“아, 손녀와 이야기는 끝나셨어요?”
-예, 많은 걸 들었습니다. 제 딸과 손녀,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이야기도, 전부.
아까 전 해저 터널에서 성녀와 했던 말을 떠올린 여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디달이 말했다.
-복수에 저의 힘이 필요하십니까?
“어… 그게,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예도, 아니오도 아닌 애매한 대답.
설마 이런 대답을 들을 줄 몰랐던 세디달의 표정이 묘해졌다.
-비록 당신만큼 강하진 않지만, 저 또한 살아서 이름을 날렸던 초인입니다. 당신의 발목을 잡을 일은….
“아뇨, 아뇨. 그런 거 때문에 한 말이 아닙니다.”
여명은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말을 끊은 후 시리가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그냥, 복수는 따님을 구한 뒤에 생각하셔도 늦지 않으니까 드리는 말입니다. 수십 년을 뛰어넘어 가족을 만나는 일 아닙니까. 지금 당장 뭔가를 맹세하실 필요 없습니다.”
-….
세디달이 입을 다물자, 여명은 괜히 마하간을 바라봤다. 이번에도 오글거리는 말이었습니까?
[아니. 이번에는 좀 부족했다.]마하간의 대답이 들려온 직후, 세디달이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제 손녀를 구하고, 이번에는 제 딸을 구해주시겠다고요… 왜죠?
“처제는 제 가족이고, 또 무엇보다… 제 복수에 도움이 되니까요.”
직후, 세디달이 검을 뽑아 손잡이를 이마에 가져다 댔다. 차원문 너머 기사의 예법.
고개를 숙여 예법에 대답한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반지를 꺼냈다.
이제 앞으로 둥지에 머물면서 틈틈이 시리와 만나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세디달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의 손을 멈췄다.
-무례라는 것을 알지만 묻겠습니다. 혹여… 제 손녀를 사랑하시는 겁니까?
“….”
-아샤에서야 첩을 두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만, 자매를 동시에 품는 건 조금….
왜 다들 나를 난봉꾼으로 보는 거지?
여명은 이쪽을 보며 피식거리는 네티와 용에게 각각 경고의 손가락질한 뒤, 다시 세디달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
아쉬운 표정은 왜 지으시는 겁니까. 여명은 주변 인물들이 모두 성녀처럼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움에 떨며 반지를 건넸다.
***
“오, 형부가 너희 할머니한테 반지 준다.”
네티가 세디달과 여명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바로 옆에 있던 시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반지 형태의 마도구야. 이상한 의미부여 하지 마.”
“이상한 의미? 무슨 이상한 의미? 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뒈?”
네티는 노골적으로 말꼬리를 놀렸다. 시리는 그녀의 발을 꾸욱- 밟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지.”
“…그럼 어떻게 부정해도 긍정이잖아. 이 멍청아.”
시리가 한마디를 안 지고 쏘아붙였으나, 이어진 언니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꼬우면 형부를 보면서 얼굴을 붉히지 말았어야지.”
“….”
“쯧쯧, 그냥 떠본 건데 바로 걸리는 것 좀 봐. 이래서 자매들이란.”
“…닥쳐.”
시리의 패배 선언에 네티는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제멋대로 양소유의 운명이니 뭐니 꿍얼거리다가, 둥지 저편에 있는 여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형부는 때마침 들어오는 코르부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야, 시리.”
“…또 헛소리할 거면 가서 세티 언니 간병이나 해.”
“헛소리가 아니니까 들어봐. 해저 동굴에 있는 기연 알지? 강제로 꿈꾸게 하는 그거.”
그건 시리도 익히 알고 있는 기연이었다. 그녀 또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해 곤욕을 치렀으니까.
“그게 뭐?”
“다음에 해저 동굴 들어갔을 때, 형부가 이상하게 잘해준다 싶으면 바로 죽여버려.”
“…뭐???”
“알았지? 진짜 형부라면 언니 허락 없이 우리를 만질 리 없으니까… 형부가 스킨십할 때 바로 머리를 쏴버려.”
“언니 설마….”
…본인 경험을 말하는 건 아니지?
시리가 뒷말을 꺼내려던 차에, 둥지 저편에서 마나가 모이는 게 느껴졌다.
또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지팡이를 꺼낸 코르부스가 형부를 향해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시련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뭔가를 벌이는 모습.
“형부도 참, 다가갈 시간도 안 주시네.”
네티의 한탄을 마지막으로, 코르부스가 지팡이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