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79)
을 위한 세계는 없다-379화(379/817)
***
제미니 선생님을 비롯한 아카데미 선생님들은 전부 좋은 분이셨다.
일주일 만에 정학에서 돌아온 학생에게 꼽을 주는 대신, 있는 듯 없는 듯, 출석만 부르는 배려심을 가지고 계셨으니까.
덕분에 오랜만에 교실로 돌아온 여명은 딱 평소 수준의 눈칫밥만 먹… 지는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를 보는 동급생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 까닭이었다. 어쩌다 눈을 마주치는 일이 있으면 수군거리는 것도 잊고 시선을 피할 정도.
뭐야 또.
정작 손을 잘린 전윤성은 친구가 생겼다는 듯 세티가 없을 때마다 말을 걸어오는 판이거늘.
의아해진 여명이 오랜만에 작가, 바오닉 레락을 불러 이유를 묻자 바오닉이 그에 대한 소문을 읊었다.
“정학 동안 보충 수업 째고, 성녀랑 쇠미리한테 찝쩍거리고, 심지어 동아리실 건물에서 선배들 두들겨 팼다며.”
“….”
“양아치도 이런 쌩양아치가 없….”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한 여명은 그건 전부 오해며, 특히 선배들은 팬 게 아니라 우르르 넘어트린 게 전부라고 설명했다.
바오닉은 그것도 충분히 양아치 같은 일이라며 반박했다. 그리고 여명은 양아치다운 방식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주먹질 두 번. 발차기 한 번.
역시 이게 정답이었는지, 바오닉은 다시 잠잠해졌다. 허리를 붙잡고 신음하는 그에게 기연 탐사 중 얻은 물약 한 병을 건네준 여명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바오닉, 혹시 이거 보여?”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가리키며 건넨 질문.
바오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명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니? 뭔가 있긴 한 거 같은데… 흐릿해서 잘 안 보여. 무슨 환상 마법 같은 거야?”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명은 바오닉에게 분홍색 가루약을 건넨 후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잠시 멀어지는 바오닉의 등을 바라보던 그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저 녀석도 운명의 주인입니까?”
[그래, 맞다. 맞는데… 원래부터 좀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주인의 자격을 잃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주 약해졌구나. 흥미로운 일이야.]운명의 주인만이 볼 수 있는 귀신, 마탑주 마하간의 대답.
“그러면 여기서 더 약해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운명의 주인이 가진 상징… 예를 들면 구슬 같은 것도 사라질까요?”
만약 그런 거라면, 구슬을 잃기 전에 죽여서 빼앗아야 하리라. 여명은 무장 혈청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마하간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닐 게다. 운명의 주인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니.]“…그러면 어떤 식으로 작동합니까?”
여명이 의미심장하게 되묻자, 마하간은 태연한 척 말을 돌렸다.
[운명에 순응하는 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뭐, 그런 거 아니겠느냐? 네가 녀석에게 준 분홍색 약, 잠복성 독 같던데. 아마 그게 문제일 게다.]“….”
뭔가 더 알고 있는 말투였다. 하지만 여명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바오닉이 아직 그의 손아귀에 있어서? 아니, 시련이 끝나면 마하간이 진실을 말해 줄 거라는 직감에 가까운 예감 때문에.
여명의 눈초리를 받은 마하간이 크흠, 헛기침하는 가운데, 그의 휴대폰이 울었다.
[한국 사절단이 예정보다 하루 먼저 도착했습니다.천여명 학생은 2시 30분까지 아카데미 공항으로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양아치가 한 번 더 학생들의 눈길을 끄게 되는 사건, 한국 사절단의 도착을 알리는 문자였다.
***
“그동안 잘도 피해 다녔더구나.”
공항 준비실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히메노 교장이 그렇게 말했다.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절 찾으셨어요? 죄송해요. 몰랐어요. 공식적으로 부르셨으면 바로 달려갔을 텐데.”
그러자 교장은 웃는 건지, 아니면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공식적으로? 뭐? 교내 안내 방송 같은 거 말이니? 폭발 사고 이후에 널 부르면 음모론자들이 참 좋아했겠구나.”
“그건… 음.”
여명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려는 데, 교장이 먼저 손사래를 쳤다.
“감사받으려고 한 일 아니니 인사는 됐다. 그 대신, 이걸로 만박불통과 성녀님 사건의 은혜는 갚은 걸로 하자꾸나.”
쌤쌤이라니. 여명은 교장의 배려를 느끼며 웃었다. 이 학교 선생님들은 좋은 사람들뿐이라니까.
그는 교복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래서, 절 찾으신 이유가 뭔가요?”
“사람 한 명 찾아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하, 우선은 시간 약속 같은 건 지키지 않은 사절단에 집중할까?”
“….”
한국 사절단이 하루 일찍 온 게 어지간히도 스트레스인지, 그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우선, 사진 찍을 때는 무조건 웃으렴. 괜히 이상한 표정 찍혀서 평생 인터넷에 박제되지 말고. 그리고 또, 기자가 이상한 질문 해도 정해진 질문 외에는 대답하지 마. 절대로.”
“이상한 질문이라면?”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뒤, 한숨과 함께 말했다.
“…성녀님과의 관계를 물어보는 질문 같은 거. 무조건 무시해. 알겠지?”
교장의 진지한 눈동자를 본 여명은 교장께서 대기실까지 찾아와서 하려는 이야기가 이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예, 충고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교장은 그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여명의 어깨를 두들겼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해. 정치적인 일들은 겉만 번지르르하지, 본질은 그냥 귀찮은 일일 뿐이니까.”
“성녀의 기자회견도 정치적인 일 아니었…?”
여명이 태클을 걸려 했으나, 교장은 재빨리 그의 말을 끊었다.
“말이 씨가 되니까, 재수 없는 말은 하지 말고.”
마지막 조언을 남긴 그대로 교장은 대기실을 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와 함께 홀로 남은 여명이 거울을 보며 외모를 정리하길 잠시.
이번에는 누군가가 대기실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다급한 남성의 발소리. 누군지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여명은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빨리도 오셨네요. 장인어른.”
그의 말마따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홍용완 의원이었다. 그는 약에 절어있던 때와 달리 깔끔하고 보기 좋은 차림에 향수까지 뿌린 상태였다.
꼴에 정치인이라고 겉모습은 봐줄 만하단 말이지.
“…늦어서 미안하네. 사위, 미리 조정할 것들이 좀 있었거든.”
“아, 예.”
시큰둥하게 대답한 여명은 마지막으로 교복 넥타이를 꽉- 맨 뒤 그를 돌아봤다.
차가운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한 홍용완이 몸을 움찔, 떨건 말건, 여명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세티는요?”
“그게… 딸아이는….”
“말꼬리 늘리지 마시고. 저 그런 거 싫어합니다.”
“…의원들이 딸아이가 오는 걸 원치 않았네. 사위와 함께 사진을 찍는 데 방해가 될 거 같다고….”
“아, 의원님들 눈치를 보셨다.”
여명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덧붙였다.
“근데 왜 제 눈치는 안 보셨습니까?”
“….”
홍용완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넙죽 엎드리는 듯 보였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날 뭐 어떻게 더 혼내겠냐는 얄팍한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아마 상대가 정치인이라면 쓸만한 처세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명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염동력을 일으켜 홍용완 의원의 목을 붙잡았다.
“커, 커헉!”
발이 떠오른 채 목을 잡고 발버둥 치는 홍용완. 여명은 조금 더 목을 조이다가, 염동력을 일시에 풀어버리며 말했다.
“잘 보일 대상을 착각하지 마세요. 장인어른. 거슬리니까.”
홍용완은 대답하지 못했다. 간신히 호흡을 되찾은 그는 목을 붙잡은 채로 컥컥, 침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자, 이제 그만 출발하시죠. 의원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
한국 정치인… 아니, 세상 모든 정치인들의 행사란 언제나 비슷비슷했다.
의례적인 인사와 지루한 연설, 그리고 사진 찍기.
아카데미 공항에 모인 한국 사절단의 행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작은 국회의원 뱃지를 단 늙은이들의 인사 세례였다. 의원들은 아주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온갖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해왔다.
대충대충 악수를 받으며 인사를 나누길 한참.
인사를 끝낸 일행들이 자리에 착석하자 홍용완과 교장이 각각 대표로 나서서 한국이 어쩌고, 아카데미와의 발전이 어쩌고 하는 가식적인 연설했다.
한국과 로드 하우가 얼마나 더럽고 치졸한 정치적 싸움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 본다면, 절로 쓴웃음이 나올 광경이었다.
아무튼, 연설이 끝난 뒤에는 기자회견과 포토 타임이 이어졌다.
-천여명 학생! 성녀님과 불온한 소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하실 말 없으십니까?!
-선배를 폭행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용병 출신이 아카데미 질을 낮춘다고 주장하는 학부모들에게 하실 말씀은…!
교장의 걱정처럼 눈치 없는 질문을 건네는 기자도 있었으나, 대부분 무시당하거나 경비들에게 제지되었다.
홍용완을 비롯한 한국 의원들이 불편한 얼굴로 여명의 눈치를 본 건 덤이고.
아무튼, 기자회견을 끝낸 사절단은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듯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서 여명은 좀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늙은 의원들은 물론이고 보좌관과 개인 비서들, 심지어 항공사의 스튜어디스들까지 그와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든 까닭이었다.
유명한 영화배우나 스포츠 스타가 이럴까? 공항에 있는 한국인이란 한국인은 전부 그에게 몰려드는 듯했다.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샀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여명은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사진을 찍어줬다.
그동안 갈고 닦은 연기 실력 덕분인지, 큰 어색함 없이 사진 촬영을 끝냈는데…
마지막으로 함께 사진을 찍은 남자가 그에게 대뜸 쪽지를 건넸다.
[조웅찬 장관님께서 단둘이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 가시지요. 공항 앞에 차량을 대기 시켜놨습니다.]읽자마자 쪽지를 구겨 넣은 여명은 쪽지를 넘긴 남자와 단상에서 행사 마무리를 하고 있는 교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교장 선생님, 누굴 찾는지는 나중에 듣겠습니다.’
교장님을 향해 심심한 사과를 보낸 여명은 남자에게 눈짓했다. 남자는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인파를 헤치며 여명을 공항 뒤편으로 안내했다.
그 과정에서 의원 중 몇몇이 여명을 붙잡으려 했으나, 남자를 보자마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를 보내줬다.
다 같은 파벌이라 이거지.
홍용완이 생각보다 훨씬 거물을 불러낸 것을 확신한 여명은 남자를 따라 순순히 공항을 벗어났다.
그리고 남자의 말마따나, 공항 주차장에는 눈에 띄는 고급스러운 검은 세단 한 대가 여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깍- 남자는 여명에게 뒷문을 열어준 뒤, 여명이 타는 걸 보고 나서야 조수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켰다.
황송하다 못해 과한 대접.
새삼스레 한국 정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실감한 여명은 조용히 세단 의자에 등을 묻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마나를 풀어 남자와 운전자를 훑는 걸 잊지 않았다.
‘운전사는… 말머리급 양치기. 남자는 그럭저럭 실력 있는 초인인가.’
경호원도 아니고 운전사와 비서가 이 정도라니. 기획재정부 장관 정도면 이만한 놈들을 끌고 다니는 건가.
그렇다면 경비의 수준도 가볍지 않을 터. 여명은 서서히 마나를 풀며 전투를 준비했다.
만에 하나 ‘실력 좀 보자’며 덤벼오면 그걸 기회 삼아 싸그리 죽여버릴 마음으로.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차가 도착한 곳에는 실력 좀 보자는 멍청이는 물론이고, 경비조차 없었다.
그 대신, 여명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한 사람이 웃으며 그를 맞이해주었다.
“안녕하세요, 형부.”
녹색 머리카락 아래로 반짝이는 살짝 처진 눈동자. 희생양 자매의 막내, 이시스였다.
***
장관이 여명을 부른 곳은 아카데미 VIP들이 종종 찾는 동아시아 느낌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굳이 동아시아 느낌이라고 부른 이유는, 레스토랑 건물 디자인이 뒤죽박죽인 까닭이었다.
일본풍인지 중국풍인지 알 수 없는 장식과 돌길, 그리고 연못이 늘어선 정원에 한국식 기와 지붕과 일본식 다다미 바닥이 깔린 건물.
동양풍에 환장한 서양 건축가가 지은 것 같은 건물을 훑어보던 여명은 고개를 돌려 앞서나가는 막내를 향해 물었다.
“처제, 왜 여기 있는지 물어도 될까?”
그러자 정원 돌길을 사뿐사뿐 걷던 막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장관은 엉큼하고 신중한 인간이라서요.”
“….”
“은밀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어중간한 초인 경비원 열 명을 불러오느니, 사랑하는 여자의 동생을 호위로 세우는 게 낫다. 뭐 그런 의도죠.”
그럴싸한 말이었다. 여명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시스가 히죽 웃었다.
“형부, 이걸 바로 믿으시면 안 되죠. 제가 장관 측에 붙어서 하는 거짓말이면 어쩌려고요?”
“그러면… 장관은 죽이고, 처제는 볼기짝을 때려주지.”
여명이 어깨를 으쓱이자, 시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 자신감? 믿음? 아니면 벌써 우리 자매에게 뒤통수 맞아 본 적 있으신 건가.”
“….”
“아, 마지막이었군요? 어쩐지, 시리 언니가 밤마다 먼 곳을 본다 싶다더니.”
막내는 키득거리며 다시 돌길을 걷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정원 크기가 얼마나 큰지, 정원 저편에도 고급스러운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 저곳에서 장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여명이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막내를 따라가길 잠시.
막내가 걷는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형부, 그래도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인데, 오늘 장관을 죽이기보단, 손을 잡으세요.”
“…뭐?”
“기획재정부 장관 조웅찬은 국방부 장관 김강혁과 각을 세우는 인물이거든요. 국방부는 형부를 싫어하니, 같은 편이 되면 앞으로 한국 정부 중추로 파고들기 편하실 거예요”
“….”
국방부 장관과 기획재정부 장관이 각을 세우고 있다고? 갑작스러운 정보에 여명은 잠시 머리를 정리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처제, 그런 건 어떻게 알고 있었어? 세티도 모르는 정보인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질문의 대답은 시스가 아니라, 그의 머리 위에서 돌아왔다.
[용은 엘프보다도 귀가 좋지.]“….”
마탑주 귀신, 마하간. 그는 시스의 위아래를 훑으며 덧붙였다.
[자네, 내가 저번에 했던 말 기억나나? 용사가 원래 혼혈이 만들어질 수 없는 종족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말.]‘예.’
여명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자네 처제라는 저 소녀 말일세… 저 소녀가 딱 그렇군. 용과 인간의 혼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