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80)
을 위한 세계는 없다-380화(380/817)
***
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불가능해 보이는 용과 인간 혼혈.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여명의 반응은 담담하다 못해 담백했다.
‘그렇습니까?’
그 재미없는 반응을 본 마하간은 반투명한 손가락으로 여명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느냐?]여명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장모님이 비늘 덮인 파충류라는 걸 이미 예상했다고? 아, 그래서 라날을 살려둔 거였느냐?]‘….’
[농담이다. 이 시대는 어찌 된 게 유머는 사라지고 말도 안 되는 일만 벌어지는지.]쯧쯧. 마하간은 짧게 혀를 찼다. 곧이어 유령의 눈동자가 느릿느릿 걸어가는 시스 뒤통수를 훑었다.
[그나저나, 겉모습이 인간인 혼혈 용이라니… 알라이 그놈이 알면 난리가 나겠군.]‘알라이? 누굽니까 그게?’
그러자 마하간은 말실수했다는 듯 자기 주둥이를 때렸다.
또 뭔데 저러나 싶어 빤히 바라보자, 그가 어색하게 말했다.
[어, 그게… 알라이 로피라는 용을 아느냐? 지금도 살아 있는지 모르겠는데, 인간에게 성욕을 느끼는 정신 나간 이상성욕 용이 있거든.]‘….’
[내가 딱 보아하니, 저 처자야말로 알라이의 평생 이상형이 아닌가 싶….]여명은 그의 말을 끊었다.
‘남의 처제를 두고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겁니까?’
[…글쎄, 아마도 경고?]경고는 무슨. 음담패설이겠지. 여명이 한소리 쏘아주려는 찰나, 때마침 시스가 걸음을 멈췄다.
“저, 형부?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셔야 해요.”
시스는 진짜 안내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며 저편의 건물을 가리켰다. 레스토랑 본관 건물에서 떨어진 고즈넉한 기와집 건물.
여명은 슬쩍 건물을 확인한 뒤 물었다.
“처제는?”
“인질 겸 호위로 여기서 대기해야죠.”
“…이러고 있는 거, 세티도 알아?”
막내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말하진 않았지만, 언니도 대충은 예상은 하고 있지 않을까요?”
결국 말 안 하고 왔다는 소리였다. 협박에 끌려왔다는 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다음부터 한국 정부랑 엮일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한테 말하고 와. 알겠지?”
당장 시리가 아무 말 없이 속으로 꾹꾹 참다가 이용당하는 걸 보지 않았던가. 막내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 없었다.
여명은 경고의 의미로 막내의 귀를 살짝 꼬집었다. 아야야- 시스는 아픈척하며 말했다.
“그거, 언니를 위해서 하는 말인가요, 아니면 저를 위한 말인가요?”
“둘 다.”
“어우, 욕심도 많으셔라.”
욕심이라. 여명이 귀에서 손을 떼자, 막내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조심하세요. 욕심은 때로 독이 될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성녀와 언니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 혹은 언니와 복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
“…우리 막내, 의외로 아는 게 많구나?”
“그게 막내의 힘이죠.”
가벼운 말과 달리 그를 마주 보는 막내의 눈동자는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선명했다. 여명은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겨누며 대답했다.
“근데, 다 아는 건 아니네.”
“그런가요?”
가늘어지는 눈동자. 시스는 어디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이냐는 듯 자신만만하게 이마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곧이어 여명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진짜 욕심이 많은 사람은 선택 같은 거 안 하거든. 예를 들어, 성녀랑 세티 두 사람 모두 한 침대로 끌고 간다든가.”
“예? 그게 무슨….”
시스가 질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딱! 형부의 딱밤이 그녀의 이마를 때렸다. 그것도 고개가 휙 돌아갈 정도로 강렬한 딱밤을.
***
막내를 뒤로한 채 들어선 건물 내부는 겉보기보다 훨씬 화려했다.
고사성어가 적힌 고풍스러운 병풍들과 도자기, 그리고 분재 장식들이 한지로 만든 벽지 앞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
여러모로 동양풍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은 디자인이었지만, 정작 여명의 눈에 들어온 건 하나뿐이었다.
복도 끝, 문이 열린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방과 그 방 식탁에 앉아있는 노인.
‘…저 사람이 조웅찬 기획재정부 장관.’
깔끔한 회색 양복에 테가 얇은 안경, 잘 정리된 수염과 머리카락… 전형적인 공무원 같은 차림이었으나, 여명이 느낀 첫 감상은 공무원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웠다.
돈을 만지는 자리에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저 느낌일 뿐인가.
그거야 대화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조용히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선 여명은 고개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인사를 끝낸 그가 맞은편에 앉은 뒤에야, 조웅찬 장관이 입을 열었다.
“안하무인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예의를 아는 친구였군. 예절 교육은 누구에게 받았나?”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르신들에게 배웠습니다.”
“그런가? 좋은 집안에서 자랐군.”
첫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조웅찬 장관은 뭔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날카롭게 여명을 훑었고, 여명 또한 지지 않고 그를 마주했다.
묘한 신경전, 혹은 탐색전은 종업원이 들어와 상을 차릴 때까지 이어졌다.
쪼르르- 산뜻한 차 향기가 잔을 채우는 가운데, 조웅찬 장관이 말했다.
“오늘 상차림은 내가 직접 데리고 온 한식 요리사가 차리는 걸세. 혹시, 평양 요리 좋아하나?”
“한식은 가리지 않고 좋아합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게 꼭 꾀꼬리 같군. 홍용완이 그러라고 하던가?”
무심한 듯 차를 홀짝이며 꺼낸 말.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장인어른께서 충고하지 않으셔도, 어른께 예의를 갖추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당연한 일을 못 하지.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
그렇게 말한 장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상을 다 차린 종업원들이 나갈 때까지, 계속.
그리고 종업원들이 방을 비운 순간, 그는 거짓말처럼 미소를 싹 지웠다.
“내가 겪어온 바에 의하면, 예의를 아는 사람은 둘 중 하나지. 예의를 이용할 줄 알거나, 정말로 도덕적인 사람이거나.”
“….”
“만주에서 있던 일과 아카데미 소문만 들어도 자네가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 수 있네. 그러니 가식은 여기까지만 하게.”
그걸 원하신다면야. 여명은 뻣뻣하던 허리에 힘을 빼고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거 보게, 솔직하니 좋지 않나.”
장관은 느긋하게 젓가락을 들어 가까운 요리를 집었다. 한반도 북쪽에서 많이 먹는 가자미 식해.
여명 또한 별말 없이 다른 그릇으로 젓가락을 옮겼다. 그가 먹은 건 야채와 버무려진 고기였는데, 맛이 특이한 걸 보니 아마 토끼고기인듯했다.
생각보다 먹을만하네- 여명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장관이 말했다.
“나는 말일세… 사람과 사귈 때 크게 두 부류로 나눠서 사귄다네.”
“두 부류? 어떤 부류 말입니까?”
“이용할 졸병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우군.”
“….”
장관은 차로 입을 씻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장인어른은 어떤 쪽일 것 같나?”
“졸병이겠지요.”
일말의 고민도 없는 대답. 장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그는 무능하지만, 지방에 조직과 돈을 가진 졸병이지.”
“….”
“근데 말일세, 그 졸병이 갑자기 대어를 낚아왔다지 뭔가. 그것도 실패작 딸년을 미끼로 삼아서. 내가 이걸 기회로 삼아야 할까, 아니면 의심해야 할까.”
“둘 다 하셔야죠.”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가자미 식해로 손을 뻗었다. 고춧가루와 엿기름으로 삭힌 생선 특유의 시큼한 향과 감칠맛이 입안을 채웠다.
장관은 가라앉은 눈으로 우물거리는 여명을 바라봤다.
“내 손녀가 올해로 열여덟일세. 연예인 소속사에서 명함을 줄 정도로 얼굴도 반반하지. 혹시 생각 있나?”
“첩으로 주시는 거라면.”
“농담 아닐세.”
“저도 농담 아닙니다.”
그러자 장관이 탁!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자네 같은 인물이 여자 때문에 홍용완, 그 병신과 붙어먹는 걸 정말로 믿으란 말인가?”
여명은 피식 웃었다.
“못 믿을 건 또 뭡니까? 그 여자 때문에 전윤성 팔도 자른 판인데. 까놓고 말해서, 세티를 빼면 한국이 프랑스나 미국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는 있습니까? 뭐, 애국심이라도 주시려고요?”
“….”
그쯤 되자, 장관도 그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는 고급스러운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우며 말했다.
“자네에게 조직에 대해 말한 게 누구지?”
“….”
이번에는 여명이 젓가락을 내려놓을 차례였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물을 줄 몰랐던 그는 태연한 척,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장인어른이 말해주셨다면 믿으실 겁니까?”
“아니, 그는 혼자서 자네를 독차지하려다가 배가 터졌으면 터졌지, 나눌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을 자일세.”
“제가 혼자서 알아낸 거라면요? 믿으시겠습니까?”
“….”
찻잔을 기울이던 장관의 눈이 여명에게 고정됐다. 낡은 안경 너머,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합리적인 증거가 있다면야. 못 믿을 것도 없지.”
합리적인 증거라. 여명은 여유를 가장하기 위해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문어와 두부가 함께 놓인 요리를 앞접시로 옮기며 천천히 말했다.
“동물 머리를 뒤집어쓴 괴인들. 혹시 아십니까?”
“….”
“만주에서 녀석들과 싸우는데, 웬 놈이 죽으면서 그럽디다. 대한민국 만세-!”
우물우물, 잠시 요리를 입에 가져간 여명은 긴장 속에서 적당한 거짓말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정답이 떠오른 순간, 그는 자연스레 음식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일이지요. 만주를 개판으로 만든 장본인들이 애국자 행세를 하다니. 거기다 비슷한 놈들을 아카데미에서도 만났는데,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정부의 이름을 팔더군요.”
“…그런데도 죽였나? 한국의 이름을 듣고도?”
“예. 세티에게 이상한 짓을 하길래, 전부 죽였습니다.”
“….”
대화를 주도하는 건 여명이었음에도, 정작 장관이 목이 타는 듯 연신 차를 들이켰다.
“그래서 감을 잡았죠. 아, 한국 정부에 뭔가 비밀조직이 있구나. 그래서 장인어른을 한 번 떠봤습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겠군. 들뜬 멍청이에게 정보를 캐내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으니.”
여명은 정답이라는 뜻을 담아 미소 지었다. 장관 또한 작게 웃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재밌는 친구였군.”
“예, 뭐, 제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아 부끄럽긴 합니다만, 저만한 대어도 없죠.”
“어르신에게 농담을 할 정도로 담도 크고.”
“담이야 뭐, 이 음식을 먹을 때부터 확인된 거 아니겠습니까. 세티 자매를 중독시킨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금제가 뭔지 모르는 척하기 위해 던진 말. 그 연기가 먹힌 걸까? 장관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탁탁- 식탁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나는 고향 음식으로 장난질하지 않으니.”
“그러면 장관님에게는 언제나 평양 음식을 대접받아야겠군요.”
“젊은 친구가 눈치까지 좋군.”
거기까지 말한 장관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명이 벌써가시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식당 벽을 두들겼다.
툭, 툭, 툭.
뭐지? 여명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금 전 탁자를 두들긴 것과 합쳐 어떤 신호였던 건지, 곧바로 종업원 하나가 검은 서류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여명은 그제야 저 종업원이 한국이 심어놓은 스파이라는 걸 깨닫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방을 받아 든 장관은 종업원에게 손짓하며 명령했다.
“이제 가봐라. 박 숙수에게는 후식을 준비하라 이르고.”
종업원이 말없이 방을 나선 직후, 장관은 다시 식탁 앞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서류나, 무슨 명령서 같은 게 아니었다.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 살아서 꿈틀거리는 무언가.
그것은 진흙과 뒤섞인 것 같기도, 혹은 살덩이에서 튀어나온 기생충 덩어리 같기도 했다.
“…입맛 떨어지는 물건이군요.”
가자미 식해를 우물거리던 여명이 한마디 하자, 장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자네가 꼭 가지고 싶어 하는 물건이기도 하지.”
“…?”
“세티… 자네가 좋아하는 그 아이 머릿속에 있는 건 독이 아닐세.”
“독이 아니라고요? 그러면 뭡니까?”
“금제.”
“….”
여명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이건 그 금제를 조종할 수 있는 물건일세. 어떤가. 매력적이지?”
“….”
여명은 꿈틀거리는 살덩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가 자신에게 넘어온 게 만족스러운지, 장관은 살덩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들어오고 싶어 하는 조직. 이름이 뭔지 아는가?”
“…모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애국자들일세.”
“….”
“하지만 자네는 아무리 봐도 애국자라기보단 로맨티스트로 보이는군. 그렇지 않나?”
주도권을 가져온 뒤 원하는 이야기를 꺼낸다. 뻔하다면 뻔한 수작이었지만, 뻔하다는 건 그만큼 잘 먹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명은 그 뻔한 수작에 걸려주는 척했다.
“…애국심은 겉모습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전윤성의 팔을 잘랐습니다. 온 국민이 싫어하는 배신자 아들의 팔을.”
“그거야 물론 잘한 일이지. 하지만, 애국에 충분함이란 있을 수 없고… 전윤성의 팔 따위, 내게 이득이 되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엿 같은 정치인 말투. 여명은 나중에 써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물었다.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죠.”
그러자 조웅찬 장관은 탁- 살덩이를 찻잔에 던져 넣고 말했다.
“그리 날 세우지 말게. 어려운 걸 요구하려는 생각은 아니니까.”
“….”
저런 말을 하는 놈들은 언제나 어려운 걸 요구하던데.
여명이 속으로 이죽거리는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장관은 시작부터 어려운 요구를 꺼냈다.
“어디 보자… 우선은, 이제 곧 다가올 초인 올림피아 예선에서 내 이름을 언급하게. 장관님의 지원으로 본선에 올라갈 수 있었다- 정도면 충분하겠군.”
“정치적이군요.”
“이 세상 모든 게 그렇지.”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여명이 살덩이가 담긴 찻잔으로 손을 뻗자, 크흠, 장관이 찻잔을 뒤로 뺐다.
“…더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하나… 아니, 두 개 더 있지.”
여명은 진심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조웅찬 장관이 어떤 인간인지 깨달은 까닭이었다.
우위를 잡는 순간 상대를 바닥까지 빨아먹는 기생충.
손을 잡는 관계에서도 이 정도인데, 졸병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말씀하시죠.”
“두 번째는 자네에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이미 반쯤 진행한 일이니까.”
“…?”
“홍용완 의원을 따라온 호위들을 전부 죽이게.”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녀석들, 전부 국방부에서 보낸 끄나풀이거든. 이참에 죽여놓는 게 좋겠지.”
여명은 찻잔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저보고 국방부와 적이 되라는 말로 들립니다만.”
“뭐, 국방부와 자네는 이미 충분히 사이가 나쁘지 않나. 너무 어렵게 듣지 말게.”
“….”
한 번 더 가까워지는 찻잔. 여명은 바로 아까 전에 막내가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국방부 장관 김강혁과 기획재정부 장관 조웅찬은 사이가 나쁘다는 말.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애국자들 사이에 파고들어 살생부를 만들 기회일지도 몰랐다.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은 뭡니까?”
의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를 죽일 때 저렇게 웃어줘야겠다고 여명이 생각한 직후.
“대략 열흘 뒤, 시드니에 난리가 날 걸세.”
“…시드니요?”
“그래, 무슨 일인지는 알려줄 수 없지만, 모든 난리가 끝난 뒤… 내가 준 주소로 가서 물건을 하나 챙겨오게.”
장관은 서류 가방에서 작은 지도를 꺼내 내밀었다. 시드니의 어떤 빌딩 지하로 이어지는 경로가 빨갛게 그어진 지도.
“용병 출신이니, 이런 것도 잘할 수 있겠지?”
“…용병은 이렇게 정체 모를 임무는 받지 않습니다.”
“다른 장관을 엿 먹이는 계획… 이라고 하면 충분하겠나?”
“….”
여명이 입을 다물자, 장관은 찻잔을 그를 향해 밀었다. 반쯤 비워진 찻물 속에서 살덩어리가 역겹게 꿈틀거렸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여명이 살덩이를 들어 손에 쥔 다음 순간.
장관이 노골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선금일세. 세티와 그녀의 자매를 마음껏 즐기게. 물론, 임신시켜도 상관없네. 전부 우리 쪽에서 처리해주지. 왜, 남자는 바지 아래로 짐승이라고 하지 않던가.”
“….”
넌 반드시 죽인다. 여명의 마지막 다짐을 끝으로, 장관 또한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리고 모든 임무를 끝내면, 자네를 애국자들의 회의에 초대하겠네. 자네의 멍청한 장인어른보다 더 높은 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