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83)
을 위한 세계는 없다-383화(383/817)
***
답답한 샌드백 안에서 프레시외즈의 불길에 맞는 순간.
여명이 처음 느낀 감각은 뜨거움이 아니라 익숙함이었다.
그것도 어디선가 맞아 본 것 같은 익숙함.
뭐지? 샌드백을 뚫고 들어오는 불길이 피부를 익히고, 타오르는 피부 위로 물집이 잡히는 와중에도 여명은 익숙함의 정체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이윽고,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를 때릴 때쯤.
여명은 불현듯 두 개의 무술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프리블레이드 세디달의 열검과 두메아 가문의 가전 무술.
프레시외즈는 마치 두 무술을 뒤섞어 마법으로 펼치는 것 같았다. 세세한 구조는 달랐지만, 방향성은 거의 동일했다.
이건 두 무술에서 나온 마법이 틀림없다. 여명은 확신했다.
직접 두 무술과 싸워보고, 심지어 두메아 가전 무술의 진의를 알고 있는 여명이기에 할 수 있는 확신.
하지만 곧바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왜?
프랑스가 변경백 전쟁에서 마주한 두 무술을 카피한 걸까? 하지만 어떻게 무술을 마법으로 카피했단 말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온몸을 태우는 고통 때문에 결국 정신줄을 놔버려서? 아니, 흐릿한 정신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아니, 그 …속에서 기절 안… 버티시면… 해요?!]쇠미리. 여명은 반드시 마법을 배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텔레파시야?’
[아뇨 …을 통해서… 꿈으로 연락… 지금 잘… 들리죠?]‘잘 안 들려.’
[기절하… 잘… 들릴….]여명은 그녀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저편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세계수의 감각은 느낄 수 있었다.
이 불길 속에서 기절하라 이건가. 그는 결국 두 눈을 꾹 감고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다음 순간 여명은 어디론가 떨어지는 아찔한 추락감을 느꼈다. 귓가를 울리는 후두둑 소리와 격한 바람.
본능적으로 손을 흔들다 보니, 무언가 와락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러케 꽉 자브면 아파여.”
격한 바람 사이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여명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자신의 손에 쇠미리의 볼 따귀가 잡혀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쇠미리를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왜 처음부터 이럴 거라고 알려주지 않았어?”
“에이, 그러면 서프라이즈가 줄어들잖아요.”
“….”
성녀의 푼수 짓은 진짜로 전염되는 게 아닐까? 여명의 진심 어린 걱정이 이어지길 잠시. 두 사람의 추락이 끝났다.
!
골이 울리긴 했지만, 하늘 저 위에서 떨어진 거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착지였다.
발끝으로 가볍게 땅 위에 선 쇠미리와 달리, 등 전체로 땅과 충돌한 여명은 뒷골을 주무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건….”
코를 찌르는 화염의 악취. 총탄과 포탄이 만들어낸 지옥이 그들을 반겼다.
***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는 나치와의 전쟁에서 6주 만에 패배했다.
300만 육군을 가진, 영국과 나란히 세계를 지배한 강대국의 무능력한 패배는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프랑스인들이 느낀 감정은 놀라움 그 이상이었다.
자부심의 몰락.
1차 대전 승리를 기념한 모든 것이 조롱으로 돌아왔다. 파리와 에펠탑에는 나치의 깃발이 나부꼈으며, 누군가의 누이가, 가족이 나치에게 범해졌다.
오귀스트, 고작 수습 요리사에 불과했던 한 청년은 그 사실에 분노했다.
분노는 결심으로, 결심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법.
그는 위대한 조국을 되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 총을 잡았다. 그는 싸웠다. 아프리카에서, 노르망디에서, 파리에서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조국을 나치의 손아귀에서 구원했다. 나부끼던 나치의 깃발을 태우고, 나치에게 부역한 옛 요리사 선배 또한 태워 죽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부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귀스트는 생각했다. 이건 다 빌어먹을 히틀러가 차원문 너머로 도망갔기 때문이라고.
그래, 그래서 그는 연합국이 주도하는 나치 추적 임무에 자원했다. 결국, 모든 건 히틀러를 죽여야만 끝날 문제였다.
차원문으로 하는 행렬 맨 앞에 서서, 각국 정부 수반들의 격려와 함께 차원문을 넘었다.
그리고 보았다. 지구와 다른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세계를.
농노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상한 초능력을 다루는 극소수가 그들을 지배하는 발전도 희망도 없는 땅.
누군가는 그 땅의 가능성을 보았고, 또 누군가는 혁명을 부르짖었지만, 오귀스트는 달랐다.
그가 아샤라 불리는 땅을 보며 느낀 감정은 딱 하나였다.
히틀러가 숨기에 딱 맞는 천박한 세계로군.
그는 식민지를 원하는 상층부도, 혁명을 전파하려는 빨갱이들도 외면한 채 묵묵히 히틀러를 쫓았다.
그 과정에서 마법사의 재능을 개화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히틀러를 쫓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온갖 식민지 독립 요구에 시달리던 그들은 오귀스트를 선전 도구로 쓰고 싶어 했다.
자유 프랑스의 영웅, 파리 개선식의 기수, 프랑스인 최초로 차원문을 넘었으며, 유럽인 최초로 마법사가 된 자!
최고의 선전 도구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때 만들어지는 법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오귀스트는 완벽한 선전 도구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에, 오귀스트는 귀환을 거부했어요.”
쇠미리는 전쟁터를 사뿐사뿐 거닐며 말했다.
콰앙! 바로 코앞에 포탄이 떨어지며 파편과 흙먼지가 튀었으나, 파편은 꿈속의 그것처럼 가볍게 그녀의 배를 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군인이었고, 결국 조국의 부름에 따라야 했죠. 그리고 그가 차원문을 넘어서 가장 먼저 간 곳은… 인도 차이나반도, 베트남이었죠.”
쇠미리는 보란 듯 포탄 아래 타오르는 수풀을 가리켰다.
총소리가 어지럽게 귀를 찌르는 가운데,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사납게 생긴 청년이 총을 쏘는 모습이 보였다.
“독립하려는 베트남과 식민지를 지키려는 프랑스의 전쟁. 이 전쟁은 프랑스 내부에서도 비판이 많았어요.”
“독립 협상을 파기하고, 6,000명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을 죽여서?”
여명이 인도차이나 독립 전쟁의 서막을 알린 하이퐁 항구 사건을 언급했으나, 쇠미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인권을 따지는 시대가 아니었어요. 반대의 이유는 조금 더 직설적이었죠. 전후 복구에 쓸 프랑스 젊은이들을 다시 전쟁터에 보내지 말라.”
여러모로 징그러운 시대였네. 짧은 감상을 삼킨 여명은 적을 압도하는 청년을 바라봤다.
아주 기초적인 보호막 마법과 신체 강화 마법을 사용해 수풀 사이를 누비는 게, 현대의 초인 용병을 방불케 하는 모습.
다른 시대도 아니고 고작 1940년도에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니.
이 꿈이 사실이라면 오귀스트는 천재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자였다.
아무튼. 쇠미리는 그런 오귀스트를 보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오귀스트의 참전과 그의 영웅적인 활약 덕분에….”
그때, 탕! 사격 소리와 함께 수풀 저편 건물에서 비명과 고함이 들려 왔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게 틀림없는 소리.
말이 끊긴 쇠미리는 흠흠, 헛기침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호치민의 배에 총알을 박아 넣은 덕분에 프랑스는 한동안 반대 여론을 억누르고 인도차이나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어요. 중국 국공 내전과 한국 전쟁으로 다 허사가 되긴 하지만요.”
“….”
“뭐, 프랑스가 미래를 알 수도 없는 법이고… 여기서 중요한 건, 베트남을 비롯한 식민지들을 억누르며 자신감을 되찾은 프랑스가 아예 새로운 식민지 전쟁을 준비했다는 사실이죠….”
말끝을 흐리는 쇠미리의 걸음을 따라, 꿈의 모습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파스스-
흩날리는 꿈결 사이로 정글과 수풀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총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곳.
철근 콘크리트 대신 벽돌로 만든 낡은 집들과 성이 있고, 타일을 깔아 만든 도로 위로 마차가 돌아다니는 곳.
쇠미리가 딱히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여명은 이곳이 아샤의 변경백령 어딘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건물을 짓밟으며 전진하는 전차를 향해 검을 뽑는 기사.
세상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전장은 이곳이 유일했으므로.
***
현대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아름답거나 조화로운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아무 이유 없이 개처럼 죽을 것이다…
누가 했던 말이더라? 헤밍웨이였던가, 조지오웰이었던가?
하지만 누가 말했건 간에,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여명의 코앞, 이름 모를 성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야말로 그 증거였으니까.
소설이나 전설 속의 그것처럼 아름답거나 장엄하기는커녕, 어떠한 존엄조차 느낄 수 없는 전쟁.
포탄을 보고 방패를 들었으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박살 난 기사에게 어떤 존엄이 있는가?
눈먼 총알에 쓰러지는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는 군인들과 핏물 고인 바닥 위에서 허우적대는 지구인들은?
그 어디에도 존엄은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성난 개새끼처럼 싸웠고, 불쌍한 개처럼 죽었…
아니, 단 한 명 예외가 있었다.
시뻘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건물과 강철을 통째로 베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여자.
프리블레이드 세디달.
총알을 피해 건물 사이로 날아다니는 그녀에게는 존엄이라 부를만한 것이 있었다. 그녀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엉엉 우는 아이들.
그녀는 프랑스군의 전진을 막으면서도 성의 아이들을 구하고 있던 것이다.
“….”
하지만 여명은 그 모습을 보며 어떠한 감동도 느낄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녀의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었으니까.
이 성이 점령당하는 건 시간 문제고, 프랑스군의 눈을 피해 아이들을 대피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세디달 또한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때, 쇠미리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끊었다.
“이 꿈의 주인공이 와요.”
그녀의 목소리가 향한 방향, 총을 든 사내가 세디달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베트남 시절보다 십 년 정도는 나이 들어 보이는 오귀스트. 사나운 눈매와 눈썹을 가진 그는 세디달을 발견하자마자 방아쇠를 당겼다.
탕!
다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리고 있던 세디달의 옆구리에서 불씨가 튀었다. 다행히 마탄이 발명되기 이전의 소총탄은 유난히 두꺼운 그녀의 흉갑을 뚫지 못했다.
-무식한 걸 입고 다니는군.
그녀가 추락한 걸 확인한 오귀스트가 총을 겨누며 말했다. 세디달은 검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닥쳐라, 침략자.
-아니, 이건 침략이 아니라 응보다. 아샤인. 너희가 숨긴 나치만 내어준다면 이 전쟁은 당장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다.
-나치? 웃기고 있네. 정말로 그 말을 믿나? 그딴 게 정말 변경백령에 있다고?
-북쪽에서 사라진 흔적이 변경백령으로 이어졌다는 증거가 있다… 거짓이 없다면 우리의 감사를 거부할 이유가 없지.
-전쟁을 막기 위해 침략자에게 군사 기지를 공개하라?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지 않나?
둘의 대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오귀스트가 세디달을 조준하고, 동시에 그녀의 검은 붉게 타올랐다.
!!!
연발로 바뀐 오귀스트의 총구가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세디달이 좁은 골목으로 몸을 굴렀다.
그녀는 거의 날아오르는 속도로 벽과 벽 사이를 뛰어오르며 총구의 사선으로 이동했다. 오귀스트가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돌며 사격 자세를 잡으려던 순간.
그녀의 열검이 그의 머리를 덮쳤다. 치이익! 아슬아슬하게 총을 들어 검을 막아낸 오귀스트의 총에서 철이 달궈지는 소리가 울렸다.
오귀스트는 미련 없이 총을 내던지고 권총을 뽑아 발포했다.
검과 권총이 엇갈리며 연기가 피어오르고, 두 사람의 공격이 날카롭게 서로를 노리길 잠시.
오귀스트의 손아귀에서 갑자기 막대한 마나가 뿜어져 나오며 세디달의 몸을 내던져버렸다.
마법이라기엔 너무나 단순하고 무식한 방출.
하지만 문제는 그 방출에 담긴 마나 그 자체였다.
“…세계수의 마나?”
여명이 날아가는 세디달을 보며 입을 열자, 쇠미리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이때는 아직 엘프들이 지구인들의 탐욕을 모르던 시절이었거든요. 세계수는 멀쩡했고, 엘프들은 지구인들에게 화친의 증거로 결정을 나눠주었죠. 설마 그걸 자기들 마법사에게 홀랑 다 처먹일 줄은 몰랐으니까.”
“….”
“당시의 오귀스트는 거의 여명만큼이나 많은 결정을 먹었을 거예요. 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그가 남긴 꿈에 접속할 수 있었고요.”
“오귀스트가 남긴 꿈?”
여명이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찡그리자, 쇠미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맞다. 이건 지금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건데… 일단은 볼까요?”
“….”
여명은 순순히 그녀를 따라 세디달이 날아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나 멀리 날아갔는지, 오귀스트가 탄창을 갈고도 한참이나 뛰어가야 할 정도였다.
세디달이 추락한 곳은 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교회였다. 입구에 걸린 다섯 신의 상징이 낡아 있는 게, 아주 오래전에 지어진 교회인 듯했다.
-나와라, 아샤인.
오귀스트는 천천히 교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붕을 뚫고 추락한 세디달이 힘겹게 일어나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은 그녀의 등 뒤로 햇빛이 길게 늘어지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항복해라. 기사의 경우, 제네바 협약에 따라 포로로 대우해줄 수 있다.
-좆까라.
세디달이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오귀스트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회피기동을 의식한 듯 흩뿌리는 듯한 사격이었으나, 세디달은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면에서 총알을 이겨내며 달려들었다.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갑옷이 뚫리며 곳곳에서 피가 튀었으니까.
하지만 두터운 흉갑은 그녀에게 두어 번 칼을 휘두를 수 있을 만한 여력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그 두어 번이 승패를 갈랐다. 오귀스트는 또다시 무식한 마나 방출로 그녀를 날려버리려 했으나, 그녀의 검이 갑자기 주변 공기를 일그러트릴 만큼 무시무시한 열기를 뿜어냈다.
여명이 본 적 없는 수준의 열검.
이글거리는 열기를 본 오귀스트가 반사적으로 마나 방출을 펼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런 1:1 대결은 세디달이 오귀스트보다 노련했다.
-하아압!
첫 번째 검이 방출된 마나를 가르고, 두 번째 검이 오귀스트의 팔을 잘랐다.
목을 노린 공격이었지만, 오귀스트가 필사적으로 몸을 피한 결과.
딱 한 번만 더 휘두를 수 있었다면 그대로 목을 벨 수 있었겠지만, 총알이 박힌 세디달의 몸은 그 이상 검술을 사용하지 못했다.
털석- 팔이 잘린 오귀스트와 세디달이 동시에 쓰러졌다. 오귀스트는 잘린 팔을 지혈하며 이를 악물었다.
-너희 기사들이란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 이렇게까지 싸울 이유가 있단 말인가?
세디달은 대답하지 못했다. 총알에 맞은 상처를 재생하는 것만으로도 여력이 없는 것이리라.
자신도 마법사가 아니라 초인이었다면 이런 싸움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오귀스트는 짜증을 삼키는 얼굴로 왼손으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한 세디달을 쏘려는 찰나.
-안 돼!
-막아!
비명과 함께 교회 구석진 방의 문이 열리며 어린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족히 수십 명은 되는 숫자.
오귀스트는 아이들의 파도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이들이라고?
-기사님을 죽이지 마!
-나쁜 놈! 악마!
눈물과 때로 범벅이 된 아이들은 그의 몸을 덮쳐 당기고, 깨물고, 흔들어댔다. 별 의미는 없었다.
당장 기절한 세디달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들이었으니까.
문제는…
-왜 아이들이 여기 있지? 말해!
오귀스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디달에게 물었다. 쿨럭, 피를 토한 세디달은 피범벅이 된 상체를 질질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게… 내… 의무… 니까.
많은 게 함축된 말이었다. 오귀스트는 멍하니 그녀가 검을 들어 올리는 것을 바라봤다. 의무라고? 이 전장에서?
하지만 그것이 그의 유언이 되지는 않았다. 세디달은 검을 내려찍는 대신 지팡이 삼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의 품을 뒤졌으니까.
그녀는 그를 증명할 수 있는 계급장과 지갑, 그 외에 잡다한 것들을 꺼내 아이들에게 건넨 뒤 무전기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뭐 하는 짓이지? 오귀스트가 물었다.
-대체 죽이지 않고 뭐 하는 거냐? 나를 모욕할 셈이냐?
세디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널… 죽이면, 침략자들이 화를 내겠지… 아이들의… 안전도… 보장 못… 할, 거고….
-….
-그러니… 살고 싶으면… 무전기인가… 뭔가… 하는, 이상한… 통신 마도구에… 말해… 쿨럭, 아이들을… 성 밖으로… 나가도록… 내버려… 두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오귀스트는 멍하니 세디달을 바라보다가, 떠듬떠듬 권총을 내려놓고 무전기를 잡았다.
총소리와 고함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오귀스트는 피를 삼키며 무전기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