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87)
을 위한 세계는 없다-387화(387/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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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미리는 여명에게 다가가며 고민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여명과 단둘이서 프레시외즈에 담긴 꿈을 훔쳐보려고 했을 뿐인데, 당사자의 사념과 만나서 싸우게 될 줄이야.
물론 그녀에게도 핑곗거리는 있었다.
오귀스트가 마법 속에 꿈 말고 사념까지 남겨놓으리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나?
그것도 두메아의 무술, 혹은 세디달의 무술을 계승한 사람에게 마법을 맞췄을 때만 등장하는 사념이라니.
마탑이 몰락한 오늘날에 저만한 마법을 심어놨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게 지구인 마법사의 마법이라면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이걸 예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튼, 그녀가 이런저런 핑계를 떠올리며 여명의 곁에 도달한 순간.
또다시 꿈의 풍경이 바뀌었다.
아직도 싸우려는 건가? 그녀의 의심과 달리, 시야를 채우는 건 새하얀 건물들이 늘어선 어느 도시였다.
아샤라기엔 자동차가 돌아다니고, 프랑스라기에는 유색인종이 거리의 절반을 차지한 도시.
꿈속 오귀스트는 그 도시 외곽을 걷고 있었다. 모자를 꾹 눌러 쓴 그의 걸음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건 또 무슨 광경이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여명의 곁에 있던 오귀스트의 사념이 먼저 말했다.
“저 도시의 외진 감옥에서 주와이외즈의 주인이 죽었다.”
“….”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조국의 반전운동가들, 그리고 정부가 쓰레기처럼 내다 버린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홀로, 쓸쓸하게.”
그제야 이 도시가 어딘지 깨달은 쇠미리는 입을 다물었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 오귀스트가 절반을 태워버린 바로 그 도시.
그사이, 꿈속의 오귀스트는 감옥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무어라고 위협하는 간수들을 무시한 채 철창을 넘어 안으로 침투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을, 어깨 위로는 프레시외즈의 불꽃을 피워 올린 채였다.
“그러나 주와이외즈는 사라지지 않았다. 조국이 그를 고문하면서까지 알아내고자 했던 그 무술… 그건 그가 내게 남긴 유언장 속에 남아있었다.”
여명은 감옥의 계단을 오르는 오귀스트를 보며 물었다.
“…그가 어르신께 복수를 요구했습니까?”
“아니, 유언장에는 증오는커녕 원망의 말조차 없었다. 무술과 함께 적힌 건… 조국을 등지지 말라는 부탁뿐이었어.”
“….”
놀라움, 그리고 침묵. 무거운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가, 사라졌다. 여명은 덤덤한 목소리로 평했다.
“…그분께서는 마지막까지 조국의 양심이었군요.”
“양심… 그래, 그는 조국의 양심이었다. 조국이 스스로 내다 버린 양심.”
그의 목소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감옥 옥상에 도착한 오귀스트가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높게.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과 도시 전체에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우왕좌왕하는 시민들, 확성기로 애원하는 군인들과 고함치는 정치인들.
꿈속 오귀스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길이 도시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와이외즈를 익힐 수 없었다. 초인이 아닌 마법사였으니까. 그렇다고 주와이외즈를 조국에 상납할 수도 없었지. 아샤에 돌려주려 했으나, 세디달의 후손은 사라졌고, 두메아 가문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프레시외즈를…?”
“그래, 주와이외즈를 해석해 똑같은 효과를 가진 마법으로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렸다. 조국의 대표 마법사란 재능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더군.”
역시나라고 할까, 상상 이상으로 우울한 탄생 배경이었다. 여명은 고개를 돌려 눈에 보일 정도로 느릿하게 감옥을 태우는 불길을 보며 물었다.
“그러면 오랑은 왜 불태우셨습니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알제리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태웠느냐고? 아니. 내가 태운 건 조국의 타락이었다.”
타락? 여명이 고개를 돌려 다시 꿈을 바라보자, 불길 아래 타오른 감옥의 지하가 드러났다.
새하얀 연구실에 어울리지 않는 시체들과 죄수들, 그리고 불길을 보며 기겁하는 연구원들… 이미 비슷한 광경을 본 적 있는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인체실험….”
“이 오랑에만 저런 실험실이 네 곳이나 있었다. 소련의 기술 협약을 받은 곳이 두 곳, 일본에게 땅을 빌려준 곳이 한 곳, 자체적으로 만든 곳이 한 곳.”
“….”
거참 더럽게 열심히도 일했네요. 여명은 프랑스의 부지런함을 비꼬며 불길이 도심 곳곳으로 번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나이 지긋한 노인조차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릿했지만, 소방차가 아무리 물을 뿌려도 꺼지지 않는 불.
“…정부가 이 일을 용서했습니까?”
“용서? 아니, 그보다 더한 걸 줬지. 훈장! 나는 분리주의자들을 쓸어버리고 식민지를 지킨 영웅이 되었다. 정부는 인체 실험을 공개하고 최초의 마법사를 잃는 것보다 그게 낫다고 판단한 거다… 정부를 향한 내 마지막 기대마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라지만, 오늘은 빈도가 너무 심했다.
오귀스트가 말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부탁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대로 바다를 건너 파리를 불태웠을 거다.”
프랑스를 등지지 말라는 부탁. 불현듯, 여명은 오귀스트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심을 짐작했다.
그는 자신의 예상이 틀리길 바라며 물었다.
“파리를 불태우고 싶다는 그 마음… 여전하십니까?”
“물론, 지난 수십 년간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
무언의 긍정. 여명은 불타는 오랑과 오귀스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쇠미리의 얼굴을 연달아 바라봤다.
그러자 엘프가 조심스레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설명했다.
‘두메아와 세디달의 무술을 가진 자에게만 보여주는 사념….’
여명은 짐작을 정답으로 바꿨다.
“프레시외즈를 내어 주는 대가로, 제가 프랑스를 불태우길 바라신 거군요. 프랑스의 자랑으로 직접 프랑스를 불태우는 복수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렇죠?”
오귀스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너는 두메아 가문의 후예다. 그럴 권리가 있다.”
“굳이 이런 꿈을 보여주신 이유도, 프랑스에게 분노하길 원해서 그런 거였고요… 당신께서 직접 불태우는 건 그의 부탁을 어기는 일이니까.”
“….”
흐음, 여명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세티나 성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오귀스트와 자신의 닮은 점을 지적했을까? 아니면 차이점을 발견했을까.
어느 쪽이건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그녀들 또한 자신처럼 기사단장을 떠올렸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산초가 없는 기사단장.
가해자와 피해자인 두 늙은이가 놀랍도록 닮은 건 단순히 현대 사회의 우연일까. 아니면 전쟁이 낳은 필연일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평생동안 알 수 없으리라.
한숨 한 번, 멋쩍은 웃음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호흡 두 번.
“어르신. 제가 감히 말씀드리건대, 순서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순서?”
“예, 프레시외즈로 조국을 벌하시는 것도, 저를 설득하시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용서부터 구하시는 게 옳지 않을까요?”
“…용서? 누구에게? 이미 죽어버린 변경백령의 사람들에게? 아니면 몰락한 변경백 본인에게?”
오귀스트는 비꼬듯 여명을 올려다보다가, 아까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조금 전에 말했던 두메아 가문의 증손녀를 말하는 것이냐?”
“세디달의 딸과 손녀도 있습니다.”
여명이 덧붙이자, 오귀스트는 즉시 되물었다.
“그들을 어떻게…? 아니, 아니지. 자네는 지금 선조에게 저지른 죄를 후손에게 용서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합당은 몰라도, 가해자가 타인의 손을 이용해 조국을 불태우는 것보다는 낫겠죠.”
“….”
“스스로를 용서하라거나… 뭐 그런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 제가 종교인도 아니고.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드리겠습니다. 프레시외즈를 주시면, 두 혈통에 용서를 구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제 소관이 아니라 장담은 못 드리지만요.”
“…결국, 프레시외즈를 달라는 소리군.”
“저도 고생한 보람은 있어야죠.”
지켜보던 쇠미리가 피식 웃는 사이, 여명은 검을 회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뭐하면,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가주님은 용서해주실 겁니다. 대가를 좀 뜯어내긴 하시겠지만.”
“당사자? 그게 무슨…?”
오귀스트의 사념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여명은 뒤통수를 긁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
나는 왜 이렇게 말주변이 없을까. 여명이 언젠가 웅변 연습 좀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쇠미리가 끼어들었다.
“오귀스트. 그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세계수를 걸고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그녀는 마법으로 가려놨던 귀를 드러냈다. 엘프 특유의 기다란 귀. 그것을 본 오귀스트는 눈이 커졌다.
“엘프…? 엘프가 세계수를 걸고 맹세를?”
정말로 빨갱이가 아닌 거 맞나? 라는 듯한 눈빛이 여명을 찌르길 잠시.
오귀스트가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이 모든 게 거짓이 아니라면… 왜 내게 그런 기회를 주는 건가? 그냥 프레시외즈를 받고 입을 씻어도 됐을 텐데. 두메아 가문의 계승자에게 보복할 리 없다는 걸 이미 알잖는가.”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두메아 가주님이나 주와이외즈를 남기신 분이 이곳에 계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서요.”
“…그게 전부인가?”
“예, 그게 전부입니다.”
어이가 없군. 오귀스트의 사념은 그렇게 중얼거린 뒤 품에서 작은 편지 봉투를 꺼냈다.
“가지게. 자네가 원하는 건 여기 들었네.”
편지를 받은 여명은 슬쩍 봉투 속을 확인했다. 무술을 마법으로 바꾼 탓일까? 마법치고는 묘하게 몇 장 안 되는 종이가 들어있었다.
뭐, 어쨌든, 편지를 건넨 오귀스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오르는 꿈의 풍경을 등진 그의 얼굴 위로 새벽의 태양처럼 밝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편지를 줬으니, 내 본체가 자네를 찾아갈 걸세.”
본체? 여명이 미간을 구긴 순간, 오귀스트가 자신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마법 속에 남은 사념 말고, 진짜 현실의 오귀스트.”
“….”
“두메아 가문의 계승자, 천여명… 기다리고 있게. 10강이 직접 용서를 구걸하러 갈 테니.”
***
“…후회하는 건 아니죠?”
오귀스트의 사념이 사라진 직후, 쇠미리가 여명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후회는 아니고… 흠, 뭐라고 해야 하나. 오귀스트의 증손녀를 세티가 두들겨 팼잖아? 그게 걱정되서.”
“아.”
그런 일도 있었죠. 쇠미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저랑 단둘이 있을 때 다른 여자 이야기 꺼내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
“이렇게 꿈이 아니면 단둘이 있는 것도 쉽지 않은데….”
농담치고는 은근히 말꼬리를 흐리는 쇠미리.
여명은 그녀의 얼굴과 기다란 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대뜸 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은 꿈보다 현실이 낫지 않을까요? 공주 동무?”
기름칠한 것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 설마 역으로 장난을 걸어올 줄 몰랐던 쇠미리는 기겁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고, 공주 동무는 또 뭔가요! 그런 직책 없거든요!?”
“왜? 서기장 동지보다는 낫잖아.”
“앗….”
쇠미리의 꿈속에서 봤던 서기장 천여명을 지적하는 말.
얼굴이 새빨개진 쇠미리는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가, 갑자기 발차기를 날렸다. 마법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로우킥이었다.
초인인 여명에게는 별 의미 없는 공격이기도 했다. 가볍게 허리를 틀어 발차기를 피한 여명은 뒤로 물러나며 봉투 속 편지를 꺼냈다.
기왕이면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 프레시외즈를 익힐 생각이었는데…
첫 번째 편지지부터 뭔가 이상했다. 피와 잉크로 적힌 글씨는 복잡한 수식도, 이론도 아니었다.
[존경하는 오귀스트 대위님께, 뿔나팔을 부는 롤랑의 마음으로 이 유언장을 남깁니다.]프랑스의 마지막 양심이 남긴 유언장. 그곳에는 주와이외즈의 사용법과 진의가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