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88)
을 위한 세계는 없다-388화(388/817)
***
같은 시각 대한민국, 개성-평양 고속도로.
잘 포장된 도로를 내달리는 고급 승용차 안에서, 양복쟁이 운전기사가 입을 열었다.
“장관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면에 고정된 딱딱한 시선과 어울리지 않게,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주어를 확실히 하게.”
정작 뒷좌석에 앉은 조웅찬 장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의 인생에는 괜찮지 않은 것들이 이미 잔뜩 있었으니까.
운전사가 꺼낸 주제는 그나마 최근의 일이었다.
“천여명… 그, 초인 말입니다.”
“우리의 영웅 나으리? 그가 괜찮지 않을 건 또 뭔가.”
장관의 반론에 운전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과속 감지 CCTV를 지나갈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것이… 너무 적절한 순간에… 완벽한 패가 들어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줄로 요약해 예감 안 좋다는 말이었다. 수십 번은 속으로 곱씹고 꺼냈을 말치고는 별 볼 일 없어서, 장관은 미소 지었다.
“천여명의 인적 서류를 들춰봤나?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홍용완 그자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의 말꼬리가 길어지려는 찰나, 조웅찬 장관이 손사래를 쳤다.
“이미 저지른 일을 사과하지 말고, 제대로 된 의견을 말해보게.”
운전사가 대답했다.
“예, 거듭 말씀드리지만 천여명, 그자를 쓰시는 건 재고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이유는?”
“과거부터 등장까지 모든 게 의심의 여지 없이 딱딱 맞아떨어집니다.”
“너무 완벽해서 못 믿겠다?”
“예, 제 느낌일 뿐입니다만, 마치 정보 조직에서 만지작거린 것 같습니다.”
그러자 조웅찬 장관이 피식 웃었다.
“안기부 출신인 자네의 말이니 그냥 넘길 수는 없겠지만… 흠, 글쎄, 내가 직접 만나 본 감상은 역시 용병 놈이란 느낌이었네. 그것도 딱 그 나이 혈기를 못 이기는 용병. 가진 재능이 아깝더군.”
“…그것마저 연기일지도 모릅니다.”
“하! 그만한 연기라면 속아줘야지.”
장관은 끌끌 미소 짓다가, 기죽은 운전사의 얼굴을 보고 더 크게 웃었다.
“농담일세. 속아주기는… 어쨌건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어째서인지 아나?”
“…경청하겠습니다.”
“내 생각에 말일세, 정치인이 사람을 다루는 건 낚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네.”
장관은 두 손을 주먹 쥐고 위아래로 겹쳤다. 마치 낚싯대를 잡는 것처럼.
“어떤 낚싯대에는 붕어가 붙고, 또 어떤 낚싯대에는 송사리가 붙듯이… 때때로 낚싯대를 끌어당길 정도로 커다란 대물이 걸리기도 하는 법이지.”
“….”
“낚으면 좋겠지. 천여명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못 낚을 때는? 그냥 낚싯대를 놓으면 그만이라네.”
“그러면 미끼와 낚싯대는….”
“버려야지. 아쉽지만, 원래부터 그러기 위한 소모품 아닌가.”
홍용완과 검은 양 모두가 소모품이라는 장관의 선언. 그 배포에 놀란 운전사가 입을 다문 사이, 장관이 계속 말했다.
“자네는 참, 걱정이 많아. 각하께서 이미 평생 먹을 물고기를 잡았는데 낚싯대 하나에 전전긍긍하다니.”
“….”
“그분의 계획도 이제 끝을 향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낚시를 즐기게. 우리의 대어가 시드니에서 김관형을 어떻게 엿 먹이나 보자고.”
더이상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어조.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낚싯대에 걸린 놈이 낚시터를 다 뒤집을 정도로 크면 어떻게 합니까?’
운전사는 스스로 떠올리고도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천여명이 변경백이나 호세도 아니고, 괜한 걱정이었다.
각하께서 계시는 한, 조국은 굳건할 테니까.
***
지하 베이스캠프로 내려온 여명은 주와이외즈와 오귀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야기.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음에도 일행들의 반응은 크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릇이 이렇게 물어볼 정도였다.
“뭐야, 다들 반응이 왜 이래요?”
그러자 세티가 대답했다.
“아니 뭐… 뜬금없는 일에 얽히는 건 익숙하니까?”
“맞소. 제자가 갑자기 데스나이트들을 데리고 온 것부터가 뜬금없으니… 뭐, 그래도 우리 제자가 착한 일을 해서 이렇게 복을 받나보오.”
코르부스도 날개를 퍼덕이며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냉혈한들 같으니.
“안 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무도 안 슬퍼요? 현대사의 어둠을 짊어진 대마법사의 이야기잖아요! 눈물까지는 몰라도 안타까움은 느껴야죠!”
그릇은 슬픔을 공유할 사람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일행 중 그녀처럼 슬퍼하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성녀.
눈물 젖은 안대 아래, 코를 훌쩍이는 성녀를 본 그릇은 생각했다. 가장 안 어울리는 인간이 왜…?
아니, 아니지. 조금 더 생각해보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평소 행실이 이상해서 그렇지, 저것도 본질은 다섯 신께 선택 받은 성녀 아닌가.
그래, 원래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릇은 성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성녀님, 성녀님도 슬프시죠? 저만 오귀스트가 안타까운 거 아니죠?”
성녀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 늙은이 안 불쌍한데? 아샤인들을 그렇게 괴롭혀 놓고, 나중에 자기도 괴로웠다니… 가증스러워.”
“에이, 그러지 마시고. 안대에 눈물 자국 남아 있거든요?”
“이건… 주와이외즈의 주인이 안타까워서 그런 거야.”
“어… 그래도 오귀스트에게도 참작의 여지가….”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쇠미리가 끼어들었다.
“같은 마법사라고 감정 이입하지 말자.”
“….”
“그렇게 슬프면 오귀스트를 만나서 공짜로 사과를 받아주던가. 우리는 몰라도 너는 그럴 자격 있잖아? 두메아 가문의 후손.”
그릇은 그제야 오귀스트가 찾아온다는 말을 떠올린 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렀다.
“아, 그랬죠… 제가… 마탑의 원로들보다도 강한 마법사에게… 사과를….”
잠시 웅얼거리며 상황을 이해하던 그녀는 갑자기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사과를 받아주는 대가로 프레시외즈를 달라고 하면, 줄까요?”
그러자 성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
“조금 전까지 불쌍하다며?”
“아니,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보상은 보상이죠.”
“….”
그릇의 뻔뻔함에 말문이 막힌 일행들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길 잠시.
코르부스가 딱-! 부리를 부딪혀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감정적인 이야기는 이만하면 되었소. 그래서, 제자는 주와이외즈를 익힌 것이오?”
“예, 꿈속에서 시간을 내서 익히긴 익혔는데….”
여명은 보란 듯 손에서 불길을 일으켰다. 외부의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과 달리 육체의 마나를 사용하는 불길.
코르부스는 어딘가 어색한 불길과 여명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완전히 깨닫지는 못 했구려. 진의와 사용법을 모두 보고도 그 정도라니. 수련 시간이 부족했소?”
“시간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단지?”
“쓰는 모습을 못 봐서요.”
“….”
상상도 못 한 대답에 코르부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잠시 고민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여명이 가진 일견즉해는 직접 본 무술을 보자마자 따라 할 수 있는 재능.
사용하는 광경을 거의 보지 못한 채, 진의와 사용법만 받은 주와이외즈를 따라 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귀스트는 나름 우대하는 의미에서 프레시외즈대신 주와이외즈를 건넨 것이겠지만…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구려.”
여명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쇠미리가 물었다.
“주와이외즈를 준 게 왜 우대에요? 여명이 마법보다 무술에 익숙해 보여서?”
코르부스는 고개를 저었다.
“본인의 추측은 이렇소. 우선, 오귀스트는 본체가 찾아오는 기간 내로 무술이건 마법이건 익힐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오. 아마 직접 만나서 가르쳐줄 생각이겠지.”
“만나서 가르쳐 준다… 그럼 주와이외즈는 왜 줬죠? 그것도 쉬운 무술은 아니잖아요?”
“그건 아마 프레시외즈와 주와이외즈란 이름에 담긴 뜻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원래 보증품은 더 중요한 물건을 주는 법 아니겠소?”
보증품? 쇠미리는 물론이고, 나머지 일행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릇이 말했다.
“주와이외즈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근데 원주인도 아니고 이름 때문이라니… 이름이 어때서요? 각각 프랑스어로 환희와 고귀함 아닌가요?”
“뜻 말고, 두 이름이 어디서 나오는 지를 생각해보시오.”
거기까지 말한 코르부스는 일행을 쑥 훑었다. 특히 지구에서 자란 여명과 세티를 빤히 바라봤는데, 마치 ‘너희는 알지?’ 라고 묻는 것 같았다.
세티가 고개를 내젓자, 코르부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대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종자들과 함께 프랑크 땅을 달려라-”
“…?”
“론세스바예스 언덕 위에서 뿔 나팔을 불어라- 잘 익은 과실처럼 이교도들의 목을 수확… 아니, 진짜 아무도 모르오?”
충격을 받은 코르부스가 날개를 파르르 떨 때쯤, 여명이 손을 들었다.
“…롤랑의 노래?”
“맞소! 역시 제자라면 알고 있을 줄 알았소!”
코르부스는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이 뭐라 묻기도 전에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롤랑의 노래. 11세기에 적힌 유럽의 고전 무훈시이자 노래라오. 샤를마뉴 대제와 그의 기사인 롤랑이 이교도들과 싸우는 이야기로… 아주아주 유명한 문학 작품이오.”
첫 만남 때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맞춘 것도 그렇고, 코르부스는 의외로 지구 문학에 대한 소양이 깊은 걸지도.
뭐, 아무튼. 세티가 물었다.
“어… 그래서요?”
“주와이외즈와 프레시외즈, 두 검 모두 그 작품에서 나오는 검의 이름이오.”
“….”
“주와이외즈는 샤를마뉴 대제가 쓰던 검의 이름이고, 프레시외즈는 대제의 검을 질투한 사라센의 왕, 발리강이 자신의 검에 붙인 이름이라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즉, 주와이외즈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검이라면, 프레시외즈는 그 대적자의 검이란 소리였다.
프랑스 10강의 대표 마법 이름치고는 참 노골적이었다. 한국인으로 치면 이순신 장군과 싸우던 왜군 장수의 검의 이름을 붙인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결국, 주와이외즈가 더 중요해서 줬다?”
“바로 그렇소!”
그럼 롤랑의 노래에 대한 설명은 굳이 안 하셨어도 되지 않을까요?
여명은 굳이 뒷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착한 제자였다. 지구 문학에 대한 지식을 뽐내는 스승을 존중할 수 있을 정도로 착한 제자.
그리고 코르부스 또한 좋은 스승이었다. 지식을 뽐내서 스승의 위엄을 살린 다음, 해답을 알려주는 좋은 스승.
“또, 주와이외즈를 익히는 건 걱정하지 마시오. 그 무술의 뿌리는 세디달과 두메아 가문의 무술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원주인들을 불러 시범을 보이게 하면, 금세 익힐 수 있을 것이오!”
자신이 내놓은 해답이 어떠냐는 듯 날개를 허리에 올린 채 가슴을 내미는 코르부스.
성녀가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치는 가운데, 여명은 위엄을 잃어가는 스승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라날에게 마법을 가르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구나….’
***
코르부스의 조언대로 세디달을 불러 주와이외즈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의 표정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아까 전 그릇이 원했던 반응이 이런 거였을까?
눈물을 흘릴 수 없는 데스나이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서는 서글픔이 가득 흘러내렸다.
-아샤로 귀화하라는 부탁을 끝끝내 거절하더니… 그는 결국 그렇게 죽었군요.
여명은 어쭙잖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그녀가 스스로 슬픔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려줬다.
다행히, 그녀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데스나이트로 시간을 낭비한 제가 그를 동정해서는 안 되겠죠. 그는 원하는 대로, 조국의 품에서 죽었으니.
“….”
그걸 품에서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기사의 마음가짐을 모르는 여명을 애써 말을 아꼈다.
세디달은 그 배려 섞인 침묵이 고마운 듯 미소 지으며 검을 뽑았다.
-주와이외즈의 시범… 저부터 찾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이 무술을 만들 때, 저도 조금 거들었거든요.
우연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필연이 이런 것일까. LA에서 데스나이트들을 구한 게 여기까지 이어질 줄이야. 여명은 주와이외즈가 적힌 편지를 읽는 세디달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잠시 후, 세디달이 말했다.
-제가 이 무술의 공동 제작자라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두메아 가주님처럼 마음 씀씀이가 넓지 않아서, 제 무술을 계승해주는 대신 새 무술을 만드는 데 조금 도움만 줬습니다.
여명은 그것만으로도 일반적인 초인들보다 수십 배 씀씀이가 넓은 편이라고 대답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십니다.
죽은 자 답지 않은 옅은 미소. 여명은 자세를 잡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오귀스트와 싸웠던 그 순간의 열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것으로 제가 당신께 입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 세디달의 검이 곧바로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자랑하는 열검.
불을 일으키는 주와이외즈와는 전혀 다른 무술처럼 보였지만, 속은 달랐다. 조금 전 편지를 읽은 그녀는 주와이외즈와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마나를 사용했다.
화아악- 붉게 물든 검을 따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주변을 뜨겁게 달궜다.
여명은 조용히 그녀의 검술을 눈에 담았다. 눈물조차 말려 버릴 열기가 계속 눈을 찔렀지만,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모든 시범이 끝났을 때. 사방이 고요해지며 증발했던 수증기가 두 사람 위로 내려앉았다.
몹쓸 수증기 중 일부가 고여 세디달의 이마를 타고 아래로 떨어진다. 눈가와 볼을 넘어, 턱에 맺힐 때까지, 계속.
세디달은 얼굴을 가로지른 물방울을 닦지 않고 물었다.
-시범은 잘 보셨습니까? 어떠십니까? 그의 유산을… 제가 잘 전했나요?
여명은 대답 대신 왼손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손에서 일렁이는 불의 검이 피어났다.
아직 모자라지만, 그녀가 본 적 있는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