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89)
을 위한 세계는 없다-389화(389/817)
새벽을 기다리던 날벌레들은 등불에 속아 불타버렸다.
이에 현명한 벌레들은 새벽을 포기하고 스스로 날개를 뜯었으니.
우리는 구더기라 불릴지언정 어둠 속에서 번영하리라.
『??의 경전 중 발췌.』
***
주와이외즈를 펼칠 수 있게 됐지만, 여명은 바로 계단의 시련으로 향하지 않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숙련도. 이제 막 싹을 틔운 무술로 변경백에게 도전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일행에게 대련을 부탁했다. 세디달을 비롯한 데스나이트들은 기꺼이 허락했고, 코르부스 또한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대련? 내 집에서? 미쳤냐? 나가서 해라!]딱 한 마리, 둥지의 주인인 오르세 라날이 유일하게 반대했으나, 아쉽게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둥지 중앙에 쌓여있던 과자 박스와 비디오, 그리고 본인 몸뚱이마저 구석으로 밀려난 라날은 한참을 투덜거렸다.
물론, 콜라를 더 가져오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주둥이를 다물었다. 다루기 쉬운 용 같으니.
뭐, 아무튼.
어느 정도 공간을 확보한 여명은 곧바로 대련을 시작했다. 다른 모든 기술을 빼고 주와이외즈만을 사용하는 간단한 연습 대련.
하지만 첫 상대로 나선 데스나이트, 벨라디바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뭐어? 살살하라고? 왜? 여기도 성녀도 있고, 주가시빌리도 있잖아? 대가리만 안 날아가면 되는 거 아냐?
그녀는 살벌한 손도끼를 휘휘 저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말이지, 원래 모든 훈련은 실전처럼 하는 거야!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여명은 쓴웃음과 동시에 불의 검을 휘둘렀다.
주와이외즈는 카할 마그두의 불꽃과 달리 주인을 불태우지 않았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기껏해야 일반적인 검보다 조금 따스한 정도였는데…
불의 검과 손도끼가 충돌한 순간, 귀화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불꽃이 치솟았다.
!!!
손도끼를 통째로 태워버리다 못해, 여명의 얼굴 가죽이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
눈을 찡그린 여명을 향해 벨라디바가 휘파람을 불었다.
-두메아 영감님과 적기사의 무술을 섞은 것치고는 위력이 돌았는데? 단순히 뜨거운 불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재밌네. 계속하자.
벨라디바는 곧바로 다음 도끼를 집어 던졌다. 여명은 기꺼이 그녀의 장단에 맞춰 검을 휘둘렀다.
화르륵! 불길이 아가리를 벌리고, 둥지 바닥이 검게 그을렸다.
번쩍이는 손도끼의 섬광, 말라버린 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릇.
눈 아프게 이어지던 싸움은 금세 끝을 보였다. 거의 마흔 번째 도끼가 막힌 순간, 벨라디바가 손을 멈췄다.
-오늘 만들 수 있는 도끼는 이게 끝인데, 근접으로 더 할까?
손도끼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여명은 심호흡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뭐 뒤진 입장에서 무리랄 건 없고… 도움은 됐지?
여명은 대답 대신 주와이외즈의 불길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처음 쥐었던 불의 검보다 두 배는 커진 모습.
그걸 본 벨라디바는 히죽 웃으며 물러섰다. 그녀의 빈자리로 총을 든 성녀와 세티가 나섰다.
“너희도 하게?”
여명이 그렇게 묻자, 성녀는 리볼버에 총알을 장전하며 말했다.
“이 대 일이면 연습 상대로 충분할 거 같은데…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내 여자를 때리는 건 좀- 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성녀가 총구를 겨누며 말을 가로챘다.
“꿈속에서 귀쟁이랑 뭐 했어?”
“….”
“대답이 늦네에?”
말꼬리를 늘리는 성녀를 본 여명은 도와달라는 뜻을 담아 세티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얘를 누가 말려.”
“….”
그건 그렇네. 여명이 체념하는 순간, 성녀가 방아쇠를 당겼다.
***
그릇, 살로메는 멍하니 여명의 대련을 지켜봤다.
불의 검을 휘두르며 데스나이트들과 싸우는 그는 마치 전설 속의 용사 같았다. 아니, 실제로 용사라고 했던가?
거기다 자신은 용사 파티의 마법사… 아무리 곱씹어봐도, 현실 같지 않았다.
옷이 그을린 성녀가 바로 옆에서 컵라면을 끓여 먹는 것도, 엘프 공주가 컵라면에 라임을 짜 넣었다가 성녀에게 미친년 소리를 듣는 것도, 전부.
하지만 무엇보다 현실감이 없는 건, 대련을 이어가는 천여명 그 자체였다.
벌써 불의 검을 능숙하게 다루다니.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다른 것도 아니고 10강의 간판 마법의 원본이 되는 무술이라고 했다.
그녀가 무술과는 아니지만, 그만한 무술이라면 기본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며칠은 족히 걸리는 게 상식 아닌가.
천재라 불린 그릇이라도… 아니, 그런 그녀라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단순히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침을 삼키고, 터져 나오는 불길에 시선을 빼앗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질투였다. 다음에 떠오른 건 체념이었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자괴감이었다.
‘난 꿈의 시련도 통과 못 하고 있는데.’
잠시 입술을 씹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라면을 우물거리고 있는 성녀와 엘프, 그리고 뭔가 열심히 적는 세티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릇이 물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못 느껴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건 의외로 세티였다.
“못 느끼냐고? 뭘?”
“저 재능을 봐요. 용사파티… 파티는 무슨, 솔직히 용사 혼자 저렇게 강하면 우리는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내가 아니라 우리를 운운하다니. 그릇은 자신의 비겁함에 치가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티는 가볍게 대답했다.
“…아니, 딱히?”
그릇은 바로 말꼬리를 잡았다.
“하지만 저런 속도로 강해지면, 함께하는 파티원들이 오히려 방해물이 되지 않을까요? 혹시 그가 계단의 시련을 통과 못 하는 것도….”
전부 여러분을 끌고 다녀서 그런 거 아닌가요- 라는 그릇의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선을 넘으려는 순간, 세티가 시기적절하게 말을 끊은 덕분이었다.
“배고파?”
“…예?”
세티는 곧바로 그녀에게 컵라면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따뜻한 라면을 받은 그릇은 이게 뭐냐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위장이 비면 뇌가 헛생각을 하는 법이거든. 배부터 채워.”
“….”
그릇은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담담한 세티의 시선을 받고 기가 죽었다. 투덜거리며 라면 뚜껑을 열자 매콤하다 못해 알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닭? 저 매운 건 못 먹….”
“먹어.”
“….”
기가 죽은 그릇은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어 라면을 깨작거렸다. 그래, 이게 라임을 넣은 엘프식 라면보다는 낫지.
그녀가 스스로를 위로하며 라면을 우물거리길 잠시. 세티가 펜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어.”
“….”
“물론, 우리가 발목 잡을 때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아니, 그런 것 때문이라도 나는 여명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
거기까지 말한 세티는 여태껏 적고 있던 종이를 세 사람에게 내밀었다. 종이 위에는 주와이외즈를 분석한 내용과 응용법에 대한 아이디어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이만큼이나? 그릇이 감탄하는 사이, 늙은 목소리가 그녀가 할 말을 가로챘다.
[대단하군.]전전대 마탑주의 귀신, 마하간. 대뜸 허공에서 나타난 그는 세티가 적은 종이를 싹 훑으며 말했다.
“제가 깨달은 건 아니에요. 그냥 해준 말을 정리했을 뿐이죠.”
세티는 쇠미리와 여명을 번갈아보며 대답했다. 마하간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정리해서 응용법까지 만든 건 놀라운 일이구나. 냉기 마법과 함께 압축해서 위력 조절이 가능한 폭발을 일으킨다… 컨트롤만 된다면 실전에서도 쓸만하겠군.]“과찬이세요. 종이에 적힌 것 중 정말로 실전에서 쓰는 건 절반에 절반도 안 될 걸요.”
[하나만 쓸 수 있어도 이득이다. 천재들이란 그 하나로도 충분하니 말이다.]마하간은 슬쩍 여명을 확인했다. 그가 휘두르는 불의 검이 코르부스의 얼음 기둥과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치이익 -! 터져 나오는 수증기에 시야가 가려질 때쯤.
마하간은 다시 그릇을 보며 말했다.
[마탑의 아해야. 너보다 재능있는 자는 처음 본 것이냐?]정확히 그녀의 속내를 찌르는 말. 그릇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마하간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네 위에 더 큰 나무가 있다는 건 절망이 아니라 기쁨이란다. 특히 상대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나무라면 더욱 그렇지.]“조언… 이요?”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인류의 기본이다. 천재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고는 하지. 보거라, 저 대단한 용사도 제 스승에게 온갖 질문을 하고 있지 않느냐?]그의 말마따나, 여명과 코르부스는 검은 깃털을 흩날리며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너무 검 모양에 집착하고 있다’ 거나, ‘장작은 불의 모양을 정하지 않는다’ 는 등 그릇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
하지만 저 대단한 용사라도 기꺼이 가르침을 구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마탑 원로들의 요구에 의해서 마법을 배워온 자신과는 다르게.
[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언을 구해보려무나.]생전 처음 받아보는 어른의 진심 어린 조언. 매운 라면 때문인가, 눈물이 찔끔 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릇은 자괴감과 매운 라면을 동시에 후루룩 삼켜버린 뒤, 쓰라린 위장을 억누르며 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를 향해서.
“저, 저기… 성녀님? 대체 어떻게 꿈의 시련을 극복하셨어요? 방법 좀 알려주세요.”
“…왜 하필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그거야….”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쇠미리가 뒷말을 받았다.
“성녀님이 우리 중에 가장 탐욕스럽잖아요.”
“…뭐라는 거야? 나보다 늦게 깨어난 게.”
성녀가 잠시 쇠미리과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그릇은 간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간절함이 닿은 걸까, 성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흠, 정말로 비법을 알고 싶어?”
“네, 꼭 알고 싶어요!”
“그렇게까지 부탁하면 어쩔 수 없지… 이건 비밀인데, 꿈의 시련을 극복하는 비법은 말이야….”
잠시 뜸을 들인 성녀는, 텅 빈 라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랑이야.”
“…?”
“사랑이야말로 시련의 해답이라고.”
왜 여기서 진짜 성녀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그릇은 혹시나 하면서도 그녀의 조언을 고이 간직했다.
그리고 그릇이 또다시 꿈의 시련에 실패한 그날, 여명은 주와이외즈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시간을 빠르게 돌려, 다음날.
여명의 일상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수업에 참여했다가, 사절단을 만나고, 계단의 시련에 도전할 준비를 했다.
오늘이야말로 용사의 무술을 볼 각오를 다지며 주와이외즈와 급속 냉각을 연습하길 잠시.
예상외의 손님이 그의 시간을 빼앗았다.
“와, 완성했어! 예정일보다 더 빨리 완성했다고!”
구더기 공주. 거듭된 야근으로 피부가 망가지고, 다크서클이 진해진 그녀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베이스캠프로 찾아왔다.
“완성했다고요? 마폭고 치료제를 벌써 완성했어요?”
여명이 묻자, 구더기 공주는 보란 듯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마폭고가 담겨있던 주사기만큼이나 커다란 금속 주사기 세 개가 들어있었다.
주사기 속에는 설익은 딸기처럼 묘한 핑크빛 액체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척 봐도 딸기향이 날 것 같았다.
“짜잔! 라쉬크 특제 구충제! 마폭고를 비롯한 32종의 기생충에게 효과 있음!”
“….”
왜 굳이 핑크를 고집하는 걸까. 여명은 그녀의 취향에 대한 미묘한 감상을 삼키며 주사기를 집었다.
“…이것만 주사하면 마폭고를 치료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 주사를 왜 해? 경구 투약용인데.”
경구 투약. 입으로 먹는 약이란 소리였다. 여명은 어이가 없어져서 되물었다.
“입으로 먹는 건데, 왜 주사기에 넣었어요?”
“…그러게? 아마 대학원생 그년이 나 엿 먹으라고 그랬나 봐.”
시카고에서 실력을 보지 않았다면 당장 쫓아냈을 텐데. 여명은 헛웃음과 함께 가방을 챙겼다.
“아, 맞다. 이거… 실험은 해보셨어요?”
“마폭고를 먹일 사람이 없어서 인체실험은 못 했어. 근데 이론상 효과가 있는 건 확실해.”
그러면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여명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다행히, 그에겐 인체실험을 위한 인질들이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라쉬크. 갑작스러운 부탁이라 힘들었을 텐데. 잘 쓸게요.”
“우리 사이에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럼 나 이제 시카고로 돌아가도 되지?”
“아뇨? 그건 아니죠.”
“….”
“드워프들이 보낸 영약 재료도 많은데, 온 김에 영약 좀 만들어주세요.”
그러자 라쉬크는 아카데미가 아닌 시카고에서도 영약을 만들 수 있으며, 굳이 자신 같은 암시장 출신 연금술사를 곁에 둘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명은 친절한 목소리로 그녀의 모든 애원을 분쇄해버렸다.
“그렇게 스스로 비하하실 필요 없어요. 저한테는 최고의 연금술사니까. 다룰마에게 연락할 테니, 시카고 쪽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협상에 실패하자 구더기 공주는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쪽으로 위협했으나, 여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몸값이요? 얼만데요? 현물로 드려요? 아니면 다룰마에게 부탁해서 주식으로 드릴까요?”
“….”
여명이 돈과 인맥으로 찍어누르자, 구더기 공주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 가난한 연금술사의 슬픔이여!
뭐, 어쨌든.
그녀에게 치료제를 받은 여명은 곧바로 용의 둥지를 나가 세티에게 연락했다.
[마폭고 치료제가 왔어. 예상대로 실험부터 해야 할 거 같으니까. 호텔에서 보자.]성녀와 쇠미리는 의도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번 일은 오직 그녀와 자신만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알았어. 주차장 뒷문에서 만나.]세티의 답장을 받은 그는 잡담은 물론이고, 발소리조차 없이 목적지로 향했다. 누구도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환상을 뒤집어쓰고, 인파 사이에 파묻혀 걷기를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커다란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한국 사절단이 묵고 있는 호텔이었다.
화려한 호텔을 올려다보던 여명은 불현듯 미간을 팍 찌푸린 뒤, 주차장 담벼락을 향해 말했다.
“왜 따라왔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명은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한 번 더 말했다.
“장난칠 기분 아닙니다. 나와요.”
그제야 모자를 눌러쓴 구더기 공주가 꼼지락꼼지락 담장을 넘어왔다.
“아니 뭐, 치료제를 챙겨가길래, 궁금해서….”
다분히 연금술사다운 이유였다. 여명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돌아가세요. 엮여서 좋을 일 아니니까.”
“에이, 그러지 말고.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할 게. 문제 생기면 약 만든 사람이 옆에 있는 편이 낫잖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체실험 과정을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여명은 그냥 힘으로 쫓아낼까 하다가, 멀리서 다가오는 세티를 확인하고 말했다.
“…알았어요. 대신, 후회하지 마세요.”
이미 시카고에서 온갖 일을 겪은 라쉬크는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으나, 세티의 차가운 시선을 받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뭐야, 이 사람은 왜 왔어?”
“치료제에 문제가 있나 확인하려고. 혹시라도 잘못되면 직접 보는 게 낫잖아.”
“….”
세티는 잠시 뜸을 들인 뒤, 구더기 공주가 아닌 여명을 향해 물었다.
“…흐음, 여명, 너는 괜찮아? 라쉬크가 이 일에 엮여도 되겠어?”
“난 상관없어.”
“그래…? 그러면 데리고 가자.”
구더기 공주는 뒷골이 싸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뭔가 잘못 엮인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마폭고 같은 걸 만들었을지, 그리고 자신의 치료제가 잘 먹힐지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 더 컸다.
‘시발 뭐, 죽기야 하겠어?’
꿀꺽, 침을 삼킨 그녀는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들어갔다.
의외로, 호텔 내부는 생기가 넘쳤다. 뒷문으로 들어갔음에도 직원들이 오가는 발소리가 가득했고, 한국 사절단을 만나려는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곳 어디서 인체실험을 벌일 수 있다는 거야?
그녀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텔에서 가장 비싼 방들이 늘어선 곳, 소위 VIP룸 중 하나에 들어서자마자 밖에서는 상상도 못 할 광경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뭐야 이거?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사지가 포박된 채 기절한 양복쟁이들이었다.
하나 같이 초인에다가 몸이 단련되어있는 게, 누군가의 보디가드인 듯한… 아니, 그들은 보디가드가 맞았다.
구더기 공주는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홍용완인가 뭔가 하는 의원이 데리고 온 보디가드들이 딱 저렇게 생겼으니까.
“저기… 설마 이 사람들이 마폭고에 중독된 사람들이야? 아니지?”
“맞아요.”
“전부?”
“전부.”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치료제를 꺼내며 대답했다. 라쉬크는 그제야 싸한 느낌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마폭고와 치료제… 이런 시발, 나 설마 국가 기관과 관련된 일에 엮인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라쉬크는 치료제의 용량을 지적하며 덧붙였다.
“너희는 어느 쪽이야? 정부랑 싸우는 쪽? 돕는 쪽?”
“둘 다요.”
“둘 다?”
“마폭고를 제거하는 건 제 개인적인 이유고, 이 사람들을 가둬 놓은 건 어떤 장관의 요구였거든요.”
이야, 여기서 요원도 아니고 장관이 나오네. 라쉬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물었다.
“나,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안 될까?”
타들어 가는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명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엮이지 마시라니까. 어차피 고발할 생각 없으니까, 온 김에 치료제가 잘 먹히는지만 보고 가세요.”
“….”
라쉬크는 대답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세티와 여명은 기절한 보디가드의 입을 벌려 치료제를 먹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그녀가 만든 약이 먹힐까? 라쉬크가 두려움을 억누르며 결과를 기다리길 잠시.
“우웩!”
기절한 보디가드 중 한 명이 입에서 마폭고를 토해냈다. 분홍색 액체 속에서 꿈틀거리는 기생충은 여러모로 혐오스러웠으나, 라쉬크는 기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성공할 줄 알았어!”
“…저거, 꼭 토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였어요?”
“내부에서 처리하는 방법은 너무 위험해서 어쩔 수 없었어. 우선, 마폭고가 좋아하는 성분을 이용해서 위장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토하게 만드는 게 최선….”
그녀의 설명이 길어지려는 순간, 나머지 보디가드들이 일제히 마폭고를 토하기 시작했다.
웨에엑- 분홍 액체와 꿈틀거리는 마폭고의 향연.
세티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에 비해 라쉬크는 성공을 자축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만한 치료제를 일주일도 안 돼서 만들다니. 크, 내 실력이 이 정도라니까?”
“거기에 자화자찬 실력도 포함되죠?”
“에이, 이 정도면 자화자찬이 아닌… 잠깐, 칼은 왜 꺼내?”
장난스레 말을 이어가려던 라쉬크는 여명이 무장 혈청을 꺼내는 걸 보고 정색했다.
“서, 설마 죽이려고? 마폭고를 꺼냈는데?”
여명은 한걸음, 꿈틀거리는 마폭고를 짓밟으며 보디가드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붉은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까 장관 이야기의 연장이죠. 장관이 원하는 게 이 사람들 목숨이라서요.”
“….”
“…아니, 아니지. 장관은 핑계에요. 이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제 의지로… 제가 죽이는 겁니다.”
라쉬크는 그게 정말이냐고 묻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곁에 다가온 세티의 침착한 눈동자가, 여명의 검에 실린 마나가 모든 게 사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숨을 삼킨 뒤, 조심스레 말했다.
“그… 저기, 그러면 하나만 물어볼게. 나는 죽을 사람을 위해 치료제를 만든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
“평생 정부에게 고통받은 누군가의 딸과 어머니를 위한 약입니다.”
“그래? 그건 나쁘지 않네. 오길 잘했어.”
라쉬크가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는 순간, 여명이 검을 휘둘렀다. 일격.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른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