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393)
을 위한 세계는 없다-393화(393/817)
***
여명이 단순히 익숙함 때문에 청소부로 변장한 건 아니었다.
병원처럼 공개된 장소에 잠입할 때, 청소부만 한 직업이 없는 까닭이었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이런 대형 건물의 청소부란 쓰레기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디에 있어도 이상할 거 없고 관심 가질 필요도 없는 그런 쓰레기통.
그러나 라쉬크는 영 믿음이 안 가는 눈치였다.
“…이거 정말 간호사나 환자로 변신하는 것보다 나은 거 맞아?”
그녀는 병원에 들어설 때는 물론이고, 간호사들 사이를 뚫고 청소실의 문을 열 때까지 온몸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긴장 좀 풀어요.”
보다 못한 여명이 한마디 하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내가 긴장 안 하게 생겼어? 이만한 병원이면 직원 관리도 할 거고, 또 VIP룸 가는 동안 보안 검색도 할 텐데, 준비된 게 청소부 복이랑 걸레 자루 하나 뿐이잖….”
그녀가 뭐라고 말하건, 여명은 능숙하게 청소 도구함을 찾아 꺼내고 장갑까지 꼈다.
라쉬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여유롭냐?”
“역으로 라쉬크가 걱정이 너무 많은 거죠. 보안 검색? 여기가 무슨 군사기지도 아니고.”
“….”
여명은 구더기 공주에게 장갑과 걸레를 내밀며 대답했다.
“병원은 새벽이랑 식사 전후가 가장 바쁘게 청소할 시간이에요. 이 시간에 청소부가 돌아다니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요. 장담하는데, 라쉬크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 안 생깁니다.”
구더기 공주는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위생장갑을 꼈다. 청소부가 뭐 하는지, 여명의 말이 사실인지 그녀가 어찌 알겠나?
그냥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청소차를 끄는 여명의 뒤를 따라가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복도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여명의 말이 맞았다는 게 증명됐다.
두 사람이 대놓고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VIP룸이 있는 층으로 향하는데도 누구 하나 눈길을 주긴커녕, 인사조차 안 했으니까.
딱 한 번, 바빠 보이는 간호사가 말을 걸기도 했는데, 6층 3번 방 환자 둘이 모두 퇴실하니 소독 전에 청소 좀 해달라는 게 전부였다.
여명은 일 끝나면 바로 가겠다는 한마디로 그 부탁을 넘겨버린 뒤,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덜컹-! 묵직한 청소차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라쉬크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경비원….’
VIP용 1인 병실이 있는 층이라서 그런가? 무장한 경비원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복도에 대기하고 있었다.
정체를 눈치채면 어쩌지? 질문하면 뭐라고 해? 보안 검색은?
그녀가 조마조마하게 침을 삼키는 사이, 여명이 대뜸 입을 열었다.
“거, 다 왔으니 준비합시다.”
준비해? 뭘?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여명이 걸레 자루로 그녀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준비하라니까. 소독제랑 알콜 티슈 안 꺼내고 뭐 하쇼?”
“으, 응?”
“이 양반이 귀가 처먹었나… 어제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쓰읍, 됐으니까 차나 똑바로 끌어.”
그렇게 투덜거린 여명은 청소차에서 작은 청소용 알콜 통과 커다란 원형 플라스틱 티슈 통을 꺼냈다.
자연스러운 행동, 익숙한 청소 도구.
두 사람이 복도로 들어서는데도, 경비원들은 잠깐 힐끗거리는 것 외에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경비원들이 보이지 않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라쉬크가 말했다.
“야, 너 진짜 연기 연습 많이 했구나? 모르고 보면 진짜 청소부 출신인 줄 알겠다.”
“….”
“혹시 여친들한테 차여서 길거리에 나앉으면 연락해. 실험실 청소부로 취직시켜 줄 테니까.”
“…농담은 일 끝난 뒤에 하시죠.”
“농담 아닌데?”
딱! 여명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소독 통으로 그녀의 이마를 내려쳤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이마가 빨개진 라쉬크가 이런 씨-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길 잠시.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팻말이 달린 1인용 중환자실 앞.
“…여기야?”
라쉬크는 병실 문을 확인하며 물었다. 여명은 마나를 슬쩍 퍼트리며 대답했다.
“예, 여기 맞아요. 안에 있는 사람은 한 명… 마법 경보는 없네요.”
“최신식 잠금 장치는 있지.”
라쉬크의 말마따나, 병실 문에는 디지털 도어락이 걸려있었다. 경보기가 내장된 최신 제품이었다.
“이게 오히려 마법 경보보다 풀기 어려워 보이는데… 번호 알아?”
“정보 길드도 그것까지는 못 알아냈어요. 뭐, 그래도 걱정 마세요. 다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곧바로 양손을 들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왼손에는 급속 냉각 주문을, 오른손 손가락 끝에는 주와이외즈의 불길을.
상반되는 두 기술을 펼친 여명은 경비원들이 눈치채기 전에 디지털 도어락으로 손을 뻗었다.
효과는 극적이었다.
도어락 내부 회로를 얼려 경보음을 막고, 불길의 칼로 잠금장치를 절단하자 도어락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잠금을 해제했다.
“10강 급 무술에 급속 냉각까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게 뚫린 도어락이네.”
라쉬크의 감탄 아닌 감탄을 마지막으로, 여명은 문을 열었다.
***
“….”
세팔리는 사진 속의 그것보다도 더 가녀린 여인이었다.
힘없이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 그리고 병원복 사이로 드러난 삐쩍 마른 몸…
그러나 눈만큼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만큼은 기사의 그것처럼 선명하고 날카로웠다.
“절 죽이러 온 저승사자들이군요. 어쩐지 외국으로 보내더라니… 기어코 한국이 절 처분하는 건가요? 내 딸이 있는 아카데미 코앞에서?”
시리의 어머니, 그리고 세디달의 딸이 말했다. 놀라울 정도로 처연한 목소리.
여명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세팔리, 시리가 보내서 왔습니다. 저승사자는 나중에 보시죠.”
“…네?”
“지금부터 이곳에서 탈출하실 겁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최대한 협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갑자기 탈출이란 말을 들은 세팔리도, 무언가 감동적인 순간을 기대했던 구더기 공주도 입을 다물었다.
오직 여명만이 냉정하게 움직였다. 어느새 투명 망토를 꺼낸 그는 세팔리에게 다가갔다.
“청소차 쓰레기통에 실려서 나가실 겁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여명이 허락 따윈 필요 없다는 듯 거침없이 그녀를 안아 올리자, 세팔리가 뒤늦게 되물었다.
“자, 잠깐만요. 제 딸이 보냈다고요? 시리가요?”
“혹시 다른 따님도 있으십니까?”
“살아있다면 몇 명 더… 아니, 당신 대체 누구야?”
여명은 곧바로 얼굴을 덮고 있던 환상을 해제했다. 그의 금색 눈동자를 마주한 세팔리의 눈이 커졌다.
“시리의 형부 되는 사람입니다. 작은 어머니, 죄송하지만 인사는 나중에 하시죠.”
“작은 어머니…? 그게… 어… 예, 알겠어요.”
이미 시리에게 여명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걸까, 세팔리는 당황하는 와중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꺼내드릴 때까지 절대 소리 내거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예,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요.”
여명은 그녀를 청소차 쓰레기통에 실은 뒤, 투명 망토를 덮었다. 널찍한 2인용 투명 망토는 그녀를 가리다 못해 통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티슈 통에서 알콜 티슈를 가득 뽑아 망토 위에 뿌렸다.
그 위로 빗자루를 털고 쓰레기 몇 개를 추가하자 쓰레기통이 가득 차 보였다. 자세히 보면 조금 어색한 티가 났지만, 누가 쓰레기통을 자세히 보겠는가?
아, 한 명 있었다. 구더기 공주.
“저, 저 투명 망토가 얼마짜리인데…!”
“일 끝나고 빨면 돼요.”
“그래, 빨면 되지만…! 내 10년 연봉보다 비싼 물건이 저렇게 쓰레기통에 파묻히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자꾸 돈 돈 거리면 진짜 돈복 나가요. 일할 때는 성실하게 일해야 돈이 들어오죠.”
“그건 또 뭔 빨갱이 같은 소리야?”
라쉬크가 뭐라고 지껄이건, 준비를 끝낸 여명은 곧바로 청소차를 돌렸다. 강제로 문을 열고 고작 2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너무 빨리 나와서 경비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냐고 라쉬크가 또 걱정했지만, 여명은 그럴 일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여명의 말이 맞았다.
경비원들은 미국 대선이 어쩌고, 초인 올림피아가 저쩌고 잡담을 나눌 뿐 두 사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탄 직후, 라쉬크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 투명 인간 취급이네.”
“청소부라는 직업이 원래 그래요. 있을 때는 없는 취급하고, 진짜로 없어지고 나서야 찾게 되는 그런 직업.”
“너 무슨… 노동운동가처럼 말한다?”
“….”
여명은 라쉬크를 한 대 더 때리려다가 참았다. 이런 주접이 그녀 나름대로 긴장을 푸는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뭐, 그건 그거고.
“이제 앞으로 뭐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보며 라쉬크가 질문했다. 여명은 쓰레기통에 숨은 세팔리가 함께 들을 수 있게 적당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1층에서 내리면 청소차에서 쓰레기통만 챙겨서 바로 나갈 겁니다. 그리고 아까 옷을 갈아입었던 골목에서 환상을 교체하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거죠. 간단하죠?”
“그래, 참 간단하네. 너무 술술 풀려서 걱정될 정도로 잘 풀….”
그때, 띵동-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라쉬크는 자기 입을 막으며 말했다.
“이런 씹, 설마 말이 씨가 되는 건….”
“알면 닥쳐요.”
“….”
그사이 의사와 환자들이 우르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런 대형 병원에서는 평범한 풍경이었으나, 유독 동양인 의사 한 명이 여명과 라쉬크를 빤히 쳐다봤다.
뭐지? 여명은 슬쩍 미간을 구겼다. 그의 눈빛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풍기는 미세한 피 냄새 때문에.
의사의 몸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건 꼭…
‘도축장 냄새 같은데.’
굳은 피와 살, 그리고 골수의 냄새. 의사가 아니라 장례 지도사인가? 여명은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 했다.
그리고 1층에서 다른 환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찰나.
동양인 의사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이, 거기 청소부 둘.”
무례하면서도 고압적인 어투.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의사가 손을 까딱거렸다.
“위층 청소는 끝났나?”
“예, 이제 청소 마무리하러 갑니다만….”
“마무리는 됐고, 나랑 지하 영안실 좀 같이 가지. 지금 일손이 부족하다고 난리야.”
영안실? 피 냄새가 난 이유가 그거였나. 여명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저… 죄송하지만, 영안실 청소는 저희 일이 아닌데요.”
“계약직에 남 일이 어딨어? 다들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자네 이름이 뭐지? 지금 내 부탁을 거절하는 건가?”
“….”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라쉬크의 눈빛이 묘해졌다. 여명은 청소차를 밀며 대답했다.
“어… 그러면 청소차를 다시 가져다 놓고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럴 시간 없어. 엘리베이터 그만 잡고, 바로 가지.”
“….”
묘한 불길함이 손을 타고 흘렀다. 라쉬크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여명은 마지막까지 말로 해결하기 위해 애를 썼다.
“저, 그러면 쓰레기통만이라도 두고 오면 안 될까요? 이게 중증 환자 병실을 닦은 거라서요.”
“뭐? 그러면 더 신경 쓸 거 없어. 위층 환자 중에 감염병 환자는 없었으니까. 일손도 부족한데 빠질 생각하지 말고, 빨리 내려가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
여명은 그냥 도망칠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
1층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들 앞에서 세팔리를 챙기고 도망치는 순간, 애써 잠입한 보람이 전부 사라질 테니까.
결국, 의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게 되자 라쉬크가 조심스레 그의 등에 글자를 썼다.
‘어떡하려고.’
여명 또한 그녀의 손바닥에 글을 써서 대답했다. 라쉬크가 전혀 기대하지 않던 대답이었다.
‘제가 신호하면, 세팔리와 투명 망토 같이 쓰고 도망쳐요. 병원에서 최대한 멀리.’
‘뭐? 왜?’
‘느낌이 안 좋아요. 기우면 좋겠는데.’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멈추기 무섭게 두 사람은 청소차를 끌고 동양인 의사를 따라갔다.
의외로 이상한 일은 없었다. 영안실이라고 해도 결국 병원은 병원이었…
그런 생각과 함께 영안실 깊숙한 곳을 밟는 순간, 여명은 익숙한 마나를 느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마나.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건 타락석의 마나였다.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선명했다.
‘역시 도축장 냄새가 맞았군.’
여명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라쉬크에게 속삭였다.
“지금.”
“응? 뭐?”
“가요. 당장.”
라쉬크는 무어라 대답하려다가, 여명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대로 영안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녀라면 쓰레기통에 숨은 세팔리를 데리고 잘 도망칠 수 있으리라.
여명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의사와 얼굴을 마주했다.
“저 친구는 어디 가는 거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네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의사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라쉬크가 사라진 방향을 빤히 바라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거 원… 세상일이라는 게 참, 웃기단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그쪽이 쓰레기통에 숨겨둔 사람 말이야. 뭔지 알아보려고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하필이면 자네가 타락석의 마나를 감지할 줄이야. 어디 성기사라도 되나?”
“….”
다음 순간, 여명은 그동안의 연기를 때려치우고 정색했다.
“그러게 그냥 보내줬어야지.”
“나도 후회하는 중이야… 음, 이건 어때, 그냥 지금 여기서 서로 모른 척 헤어지는 건?”
“….”
의사는 큰 제안이라도 하는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여명은 라쉬크가 충분히 도망칠 수 있게 잠시 뜸을 들인 뒤, 덤덤하게 대답했다.
“솔깃한 제안이긴 한데… 하나만 묻지. 이거, 한국이랑 관계된 일이냐?”
“….”
다음 순간, 의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대답.
시드니에서 ‘큰일’이 날 거라더니, 장관의 말이 이걸 뜻하는 거였나. 여명은 무장 혈청을 꺼내며 말했다.
“그럼 그냥 지나갈 수 없지.”
“…쯧, 오지랖 넓은 놈에게 역으로 오지랖을 부렸군.”
의사는 짧게 혀를 찼다. 타락석의 마나와 도축장의 냄새가 서서히 뒤섞이는 가운데, 여명이 얼굴에 또 다른 환상을 씌웠다.
직후, 환상으로 뒤바뀐 얼굴을 알아본 의사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붉은 별? 잠깐, 네가 왜 여기있-”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여명의 몸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터져 나왔다.